오늘은 교회의 절기에 따르면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약 2000년 전 주일에 입성을 하신 것이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시어, 주일 아침에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일주일, 그 모든 일들이 시작되는 날이 종려주일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여행단락이 끝나고 나면, 19:29부터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눅 19: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눅 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눅 19: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지금껏
여행을 도보로 걸어오셨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앞에 두고 제자들을 시켜서 새끼 나귀를 가져오도록 합니다. 그 나귀 위에 겉옷을 걸친 후 예수님이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열광을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다른 곳에서는 “호산나” 외치는 것이죠. 이 장면은 사실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역설입니다. 세상의 왕은 큰 군마를 타고 그것으로 힘을 내세웁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의 제국이었던 로마는 전차부대를 앞세워 세계를 정복하고
힘으로 모든 것을 눌러서 평화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그것은 힘으로 만든 평화이죠. 그러나 스가랴가 예언하는 메시아는 새끼 나귀를 타신 모습이었습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다르다는 것이죠. (슥 9:9b)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은 겸손의 왕입니다. 나귀는 그것을 상징합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나라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평화. 샬롬의 나라. 누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처럼 나타나니까 그를 향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합니다. “호산나” 외칩니다. 구원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찬송합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입으로 하고 있는 모든 말은 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외침 가운데 담겨 있는 그들의 기대는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오히려 다윗 시대와 같이 강성한 제국을 이뤄줄 그런 메시아, 그런 구원자, 그런 강력한 왕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니 그분을 향한 그런 기대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로마와 같은 힘으로 통치하는 나라라면 그것은 세상의 구조와 가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피라미드 구조로 눌러서 만드는 평화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겸손으로, 사랑으로 완성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로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십자가는 가장 낮고 치욕적인 죽음입니다. 그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오해, 사람들의 무지함, 사람들의
헛된 기대를 받으며...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옆에 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과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지금 바라보고 계신 성이 심판 받을 날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는 시간의 주관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전지전능하다고 말합니다. 금요일 설교를 통해서 제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우주보다 더
크시고 이 세계를 초월하여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고장 난 이 세계를 고치고 병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우리의 세계에 들어와 모든 인류를 대표한 희생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초월자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셔야 비로소 우리에게 구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만든 세계 안으로 찾아오셨을 뿐더러,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안에 영으로서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뤄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는 잘려나간 가지와 같이 우리의 존재가 가진 온갖 한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를 해결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 그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어주셨습니다. 그 생명력 있는 나무에 부러진 가지였던 우리를 접붙임 하여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시고, 새로운 존재로서 변화시키시고 ‘영원한 삶’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우리의 지적 한계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벗어난 개념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해주는 것까지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고 거짓은 아닙니다. 바다 속 물고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루살이가 내일이 존재하고 한해가 지나감을 어찌 알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가진 우리 존재의 한계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죽음 그 이상의 영원한 삶,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신을 찾는 자신의 여정을 노래로 표현했을 때 그 중 한 가사가 기억이 납니다.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가 않아.”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지적인 추구함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자랑이며 종교의 중심이 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슬퍼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성전의 무너짐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함락됩니다. 전쟁으로 함락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전이 무너지게 되는 것은 유대교가 진리가 아니라,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그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역사 안에서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건물 성전이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이 그리스도가 거하는 집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시는데,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곧바로 성전으로 향하여 그것을 행하십니다. (눅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눅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이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건물 성전의 시대가 끝이 나는지를 보여주는 확정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성전은 오랜 기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구심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부터 성전은 진정한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없는 ‘예배쇼(show)’가 진행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만 만족하는 곳이었죠. 종교개혁을
통해서 몇 차례 다시 중심을 잡고자 했지만,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장소로 변질되고 맙니다. 당시의 성전은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을 헤롯이 개축하고 증축한 형태로서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속은 썩어가고 있었지만 겉은 더 화려해진 것이죠. (눅 21: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눅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 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심판이 선언된 것입니다. 이미 무너지기로 결정 되었습니다. 그 때만 남은 시한부인 것입니다. 성전. 성전의 심판을 보고 있노라면,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와서도 그 힘든 가운데서도 힘을 합쳐 20년 동안 지었던 것이 성전이며, 헤롯은 무려 이 성전을 46년 동안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하나님을 제외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이 거하시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성령님 안에서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새로운 성전으로, 모든 신자들을 교회로 부르셨어요. 연약하고 죄 가운데 버려진 우리조차도 주님이 일으키시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고, 내가 주님을 높이고 그분을 내 삶의 주로 고백하는 삶을 살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 삼으신다니까요.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도 끝내 실패했지만, 오히려 열방 가운데 이방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족장의 시대에서 교회의 시대로 넘어갔어요. 성전도 실패하고 선민도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방법과 도구가 바뀔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자가 실패한다고 하나님의 사명이 실패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디에 속하여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건물 교회는
필요합니다. 저희는 특별히 건물이 없는 교회 시절을 보내보지 않았습니까? 구심점으로서 교회는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여서 예배하라고 가르치셨고,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주님의 나라를 위한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 없는 예배쇼가 진행되고 있다면, 목사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곳이 되어 있거나, 사람들의 필요만을 채워주는 곳이 되었다면 주님은 더 이상 이곳을 주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회라고 이름 붙어 있으나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의 성전이 되어 주님을 예배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에는 끝이 있어도 예배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교의 정의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나아갑시다. 우리를 통하여 예배가 없는 곳마다 예배가 세워지는 아름다운 일을 꿈꿉시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상징적이며 공적인 예배 장소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살펴봤다면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입니다. 가룟은 그의 출신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름은 ‘유다’입니다. 유다는 ‘하나님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big4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빌립과 마태 정도가 성경에 좀 언급이 되는데요. 유다 또한 재정을 맡을 만큼 제자 공동체 안에서나 예수님께 신뢰를 얻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인물인지
엿볼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향유사건 때의 일입니다. (요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 장면은 마리아와 유다의 중심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립니다. 당시에 향유를 붓는 것은 공경과 사랑의 의미였습니다. 그 값어치가
300데나리온. 즉 300일의 품삯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장면을 보면서 어이가 없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에게는. 왜냐하면 유다는 합리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그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아요. 그것을 아깝게 예수님께 드리기보다, 차라리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죠. 우리가 계속 보았듯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옳은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쓴 12사도 중 하나인 요한은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는 진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를 맡고 거기서 자신의 이익을 훔쳐갔던 자라는 것이죠. 성전이 부패했던 것처럼 유다는 부패했고, 그의 계산적인 마음은 정말 선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과 가장 멀리 있던 유다. 언제나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 한걸음 다가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며, 그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씨앗을 활용합니다.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속삭입니다. (눅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눅 22: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눅 22: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에는 정치적 욕망이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어떤 바가 있어서 예수를 따랐으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보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자, 예수를 배신하고 돈을 받고 팔아넘기게 되었다는 것이죠. 정치적 욕망의 부분은 성경에 드러나 있지는 않기에 확증할 수는 없으나,
유다 안에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던 대제사장 무리들은 유다의 배신에 크게 기뻐합니다. 사탄의 연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유다에 대해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리는 제자들과의 식사자리를 갖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성찬예식의 모델이 되는 그 자리입니다. 떡과 잔을 나누시며 말씀하시죠. 이어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눅 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눅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예수님은 유다를 지목하지는 않지만,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경고를 하십니다. 22절에 대해서는 해석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늘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과도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에 대한 부분이죠. 여러분, 만약 유다가 이 경고를 듣고 마음을 돌이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다는 배신을 해야 하는 숙명이 있기에 어떻게든 배신을 하게 될까요? 저는 유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2절에 나타나듯,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 섭리에 따른 사건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유다라는 특정 인물이 배신하도록 예정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깨달을 수 있을
때 깨달아야 합니다. 더 가면 안 되는 ‘멈춤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신앙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무너짐이 있고, 회개하거나, 회복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주님이 마음 주시는 그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유다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은 늘 기도하시던 곳으로 가십니다. 십자가의 길이 가까웠음을 아시고 마지막까지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실 잔을 옮겨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더욱 기도하셨죠.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일까요? 십자가형이 고통스러운 것은 ‘수치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유대인 사회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저주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발가벗은 모습으로 죽게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로마는 힘으로 누르기 위해서 십자가 사형을
시행했어요. 다만, 로마인에게는 십자가형이 아닌 참수형을 합니다. 후에는 십자가형 자체가 폐지되기도 하죠. 그만큼 잔인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6시간 만에 돌아가셨는데 그 정도면 굉장히 빨리 죽은 것입니다. (막 15: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며 잔을 옮겨주시길 기도하셨던 것은 육신의 고통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죄 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관계의 단절을 창세부터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순간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서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인류의 모든 형벌을 내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유기하셨다'라고 말해요. 예수님은 관계적 단절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 잔을 피하고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것을 구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멀리서 유다와 무리들이 다가옵니다. (눅 22: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눅 22: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결국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대제사장 무리에게 잡혀가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시게 됩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사탄의 속삭임을 따른 후 남는 것은 ‘후회’ 뿐입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합니다. 죄를 짓게 할 때까지는 그것이 맞는 것처럼, 그것이 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부터는 다릅니다. 이제 내가 그 안에서 깨닫고 다시 주께 나아가고자 할 때는, 그 죄를 가지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유다도 사탄의 유혹에 속아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뒤늦은 후회가 찾아옵니다. (마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자실이 배반한 예수께서 ‘십자가 형’을 받게 된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대가로 받은 은 삼십. 그것을
가지고 다시 대제사장을 찾아가 돌려줍니다. “내가 죄를 지었소.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했소.” 그러나 죄를 짓는 일에는 함께 기뻐하던 대제사장 무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것은 너의 문제다.” 죄를 짓는 일에 동조했던 대제사장. 그는 대제사장이지만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유다는 괴로움 가운데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됩니다. 유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합니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행했어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내 바깥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이 새로워졌는가 입니다. 그는 주님과 동행했지만 흔들리고 넘어졌습니다. 때로는 제자로서 능력도 행했지만, 결국 그 안에 주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다는 넘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화려하다고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있었어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도 있었고, 제물도
있었습니다. 예배쇼가 풍성하게 있었어요.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었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성전은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삶을 공유했던 그 시대의 제자도 아니고, 12명의 사도도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이라는 그 하나님의 도성에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며 기쁨이 되는 일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딱 하나가 필요할 뿐입니다. 나는 십자가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가? 그 보혈의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심이 내게 있는가? 지금도 흐르고 있는가? 나의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고 집이며, 쇼가 아닌 나의 진정한 예배가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기쁨이 될 수 있음을 믿는가? 내가 주님을 전심으로 찾고 붙들고 믿으며 나아간다면, 그것이 주님의 진정한 제자임을 믿는가? 만약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간다면, 성전은
무너졌고, 유다는 넘어졌지만, 여러분은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 마음을 갖고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여러분이 이 시간 주님을 향해서 마음을 정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주께서 여러분을 붙잡으시고 사랑한다 말씀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어노인팅 전은주 간사님의 곡이죠. <내가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저주 받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고백하지요. 우리는 교회 밖 사람들과 달리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죄와 벗하여 살면서, 주님 뜻으로부터 멀어져서, 내가 필요할 때는 주님을 외면하고 주님을 못 박으며,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부족한 모습일지라도 우리가 다시 한 번, 돌이켜 회개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다시 바라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 함께 그러한 고백으로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