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요한복음 18-20장 /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을 따라서 / 강정규 목사

2021-04-02 · 요한복음 18-2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2000년대에 미국에서 만들어져 고난주간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비판도 많습니다. 비판의 큰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에 대해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적 연약함만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죽음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애적 연민에 대해서 다루는 것에만 초점을 두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오히려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잔혹한 십자가. 그 한부분만 머리에 새겨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정말로 처참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런 고통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감내하신 그분의 사랑이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주간에 흘리는 눈물이 그리스도의 인간적 고통에 대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민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면 그 눈물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감사에 대한 감격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과 승리’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로 모든 인류를 패배시키려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승리의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 바로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순절 기간부터 매일 1장씩 묵상해온 요한복음은 십자가의 승리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편의 복음서는 네 편의 초상화와 같다고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동일한 인물을 보고 그려도 그 강조점이 모두 다르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복음서의 기록도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의 십자가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독특하며 중요한 부분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선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안에는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적들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갈 때도 그렇습니다. 그가 심문을 당하시고 죽고 장사되는 과정까지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1) 요한복음에서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를 체포할 때, 예수는 “자기 앞에 전개될 일을 다 아시고”(18:4) 이 사건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예수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릅니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힘으로 지켜지는 분이 아닙니다. 지키고자 한다면 스스로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요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2)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서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도,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교훈에 대하여 질문할 뿐 죄목을 대지도 못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심문 받는 자가 아니라 심문하는 자처럼 행동하십니다. (요 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요 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요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심문을 당하는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상황을 다 장악하고 있는 심판관의 태도입니다. 대제사장은 이러한 예수의 위엄 있는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3) 요한복음에서는 총독 빌라도의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그의 질문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요 18:37)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그 중에 눈여겨 볼 것은 십자가 명패에

대한 빌라도의 고집과 그가 사용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입니다. (요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 19: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요 19: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 칭호가 히브리어, 로마어(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즉 모든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언어로 예수님이 왕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묘사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치면서

숨을 거둡니다(막 15:34).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이 되신 그 낮아지심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에 반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도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외침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18:33-19:30).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5)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장례를 위해 니고데모가 등장하죠.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믿음의 진보 속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담당합니다.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여기서 100리트라는 약 34kg이나 됩니다. 그가 장례를 위해 가져온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의 양은 보통 사람의 장례에는 쓰는 양보다 엄청나게 많은 왕의 장례에나 어울릴 것이었죠. 이것은 곧 예수님의 장례가 왕의 장례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십자가 이야기는 비극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보다 후대에 쓰인 요한복음에서 십자가가 가진 신학적 의미를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가 ‘슬픈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통’에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론, 십자가의 고난에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반쪽의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바라보셨던 것처럼, 우리도 함께 보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처음부터 소개 됩니다. 삼위 하나님의 깊은 관계를 통해서 아들로서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것이고, 그는 그 길을 걸어가죠. 그리고 아무도 그 길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영광이라는 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 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기 싫어했거든요. 부담스러워하고 그들은 세상에서 영광 받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죽음이 영광이라는, 패배가 승리라는, 죽어야 다시 산다는 이 놀라운 기독교의 역설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은 매우 중요해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하죠. 우리 모두는 각자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고난과 수고로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과 수고로움을 당하는 게 목적이 아니지요. 고난과 수고로움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는 승리가 목적인데, 그 승리를 향한 길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그 길을 가는 이유는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그 과정을 통해, 그럼 나는 내 삶의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감당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나? 그의 모습은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요한은 예수의 수난사를 고난의 길로 그리지 않습니다. 영광의 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대제사장의 무리가 체포할 때 그들에게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말을 건네는 분이시죠. “내가 바로 그다”(에고 에이미)라는 문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신적

본질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4:26; 8:28; 13:19; 15:5).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 수가성 여인에게 (요 13: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제자들에게 군사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 예수는 누구를 찾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내가 그니라”(evgw,

eivmi) 하고 대답합니다. (요 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러한 신적 왕으로서의 위엄 있는 태도에 예수를 체포하러 왔던 군사들이 오히려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순히 체포당하십니다. 그는 권능을 통해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모든 힘을 포기하십니다. 오직 사랑의 힘만 갖고 가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심문 장면 가운데에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8:15-18, 25-27).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수난의 길에 동반자가 되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R.E 브라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안나스 앞에서의 예수의 항변과 베드로의 부인을 동시적으로 배열시킴으로써, 예수가 그 질문자들 앞에서 담대히 맞서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그 질문자들 앞에서 겁을 먹고 모든 것을 부인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왕권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난 후, 계속해서 예수를 왕이라고 부르지요(18:38b-19:16a; 18:40; 19:14).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왕으로서 묘사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왕이라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헹엘(M. Hengel)은 이 구절을 “요한복음 수난사화의 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죄패에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씀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에게 닥칠 일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19:28), 자신의 죽음이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된 것임을 아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 후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주관자로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 중 도마가 의심하였다가 주님을 만나고 고백을 하죠.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요한복음 전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1세기 말 도미티안 황제는 로마 제국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우리의 주(主)와 신(神)’으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가 요한복음이 쓰여졌던 시기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는 독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리는 도마의 고백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진정한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과 고난주간까지 요한복음을 함께 읽어왔습니다. 내일은 별책부록에 해당하는 21장이지요. 실제적인 마무리는 20장이라고 봅니다. 요한복음의 시작과 끝.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부터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셨고, 그는 곧 하나님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는 빛입니다.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빛이 비춰지지만, 어둠은 깨닫지 못합니다. 참 빛 되신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됩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왕이 자기 땅에 오듯, 그가 자기 땅인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인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에는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의 영광을 봅니다. 그곳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바로 그분이 자신을 영접하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메시아로서 구원 사역을 성취하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완성하는 순간, 사탄은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승리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삼으시고 왕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왕의 즉위식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높이 들리는 것이라고 표현하죠. 영광을 받는 과정으로 묘사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에 의해 성취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모든 것을 하신 왕의 사명이 빛나는 곳입니다. 요한은 20:30-31에서 이 책의 기록 목적을 밝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표적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을 담아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가족인 여러분. 우리 안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염려들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알면서도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내 존재의 힘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나는 세상에 휩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나가기에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왜일까요? 이미 주님이 세상이 주는 모든 시험과 모든 어려움을 다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승리 안으로 초청하셨어요.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는 못 하지. 괜찮아. 내가 할게.” “대신 내가 너의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좀 믿어볼래? 내가 이긴 세상, 그 세상에 너희가 지는 것이 싫다.” 내 안에 언제나 나를 좌절케 하는 사탄의 속삭임과, 나를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여 내 삶에 주어진 나의 십자가를 지며 나아갈 때 환난을 당하나 평안하며, 담대함으로 나아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고난을 넘어 영광으로 나아갑시다. 세상이 미련하다는 그 길에 승리가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우리의 이 믿음의 선택이 우리가 주님을 따라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영생으로... 이 땅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로 향한 믿음의 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