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강정규 목사

2021-04-04 · 누가복음 22-2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누가복음은 잃어버린 자들, 소외된 자들에 관심이 많은 복음서라고 우리는 그 성격을 나눈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당시의 로마와 유대인 사회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주목받던 사람들조차 대부분 예수님의 고난의 여정에서는 배신하고 떠나갑니다. 반면, 죽음과 부활의 여정에서는 그들과 정반대에 위치한 주목받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빛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죽음으로 향하게

했던 이야기부터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여기서 세 그룹을 생각해야 하는데요. 바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 그리고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입니다. 신구약 중간사를 배웠던 우리의 지식이 필요한 순간인데요. 유대 땅은 로마의 식민지배 상황이었습니다.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었고, 워낙 방대한 지역을 식민지배 하고 있었으므로 로마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에는 총독을 파견했고, 일부지역에는 ‘분봉왕’이라는 형태로 속주의

지도자를 세워서 다스렸던 것이죠. 바로 유대 땅을 다스렸던 이 지역의 왕이 헤롯이었습니다. 헤롯 왕가를 세운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위험요소를 제거하고자 당시 아기들을 학살했던 왕이 바로 헤롯 대왕이죠. 헤롯 대왕의 사후 자신이 다스리던 지역을 3명의 아들에게 분할하여 상속하는데,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 갈릴리 북동쪽 가이사랴 빌립보를

포함한 영토를 다스린 것이 헤롯 빌립입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지역의 통치자가 헤롯 아켈라오인데, 그 지역에서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며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이제 유대 땅은 로마가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는 지역이 된 것이죠. 그러므로 계속 총독이 파견이 됩니다. 로마의 5번째 유대 총독으로서 약 26~37년까지 11년간 재직한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나마 빌라도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빌라도를 비교적 좋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재직하는 동안, 그는 유대인들의 성전 기금을 빼돌려서 수로 건설 사업에 사용하였다가, 유대인들의 심한 반발을 받게 됩니다. 빌라도는 이를 잔인하게 유혈 진압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을 예루살렘에 세우려고 했다가,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그것을 가이사랴로 옮겨 세우기도 합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 지도자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유대교의 종교는 인정해준

것이죠. 바로 그 지위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구약에서부터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이 되면 지성소에 들어가서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인간을 대표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또한 유대에는 이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유대인 대표역할을 하는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대부분의 유대인

사회의 일들을 처리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잡아간 것이 대제사장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번째 심문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눅 22: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눅 22: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심문의 목적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정치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질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를 정치적 구원자로 몰아세워서 로마에 반역한 사람으로 몰아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 주님은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답을 주십니다. (눅 22: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눅 22: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사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사역을 하며,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그 때는 2가지인데,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러한 공개적 선언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기에 아직 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속된 말로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예수님은 죽음으로 가는 발언들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예수님이 떠밀려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도로 선택하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이들은 이 발언을 근거로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에 대해 판결해 달라고 보냅니다. (눅 23: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눅 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런데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님에 대해서 총독에게 고발한 내용에는 여러 다른 내용이 첨가됩니다. 즉 그들의 고소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거짓된 말로 예수님을 고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어디에서도 백성을 미혹케 하거나 그런 이유로 반대에 부딪힌 일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입으로 그리스도이며 왕이라고 말한 일이 없죠. 사탄의 거짓의

아비입니다. 언제나 그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러한 고발을 들은 빌라도는 그 중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왕’에 관한 질문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판결을 내립니다. (눅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메시아로서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죽음이었을 뿐, 죄가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무죄 선언에 무리는 예수님이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까지 백성을 소동한다고 다시 고소합니다. 빌라도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 이야기 속에서 ‘갈릴리’라는 단어를 통해 자기가 살 길을 찾습니다. 갈릴리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지역이니, 이 일에 대한 판결을 헤롯에게 미룬 것입니다. (눅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그런데 헤롯은 이 심각한 상황에서 ‘기적 쇼’나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헤롯 안티파스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눅 8:3)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헤롯의 집사인 ‘구사’, 그의 아내 ‘요안나’ 등이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있었죠. 또한 안티파스의 유모의 아들인 ‘마나엔’은 나중에 안디옥 교회와 선지자 교사들 중의 하나로 언급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헤롯은 예수님에 대해 항상 궁금해 했던 것이죠. 예수님이 만약 헤롯의 요청대로 기적을 행하셨더라면 환호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고, 헤롯이 갈릴리로 모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거부하십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표적은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니까, 헤롯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눅 23: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이 예수님에게 입힌 빛난 옷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산에서 찬란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셨고, 그 옆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상징이죠. 구약을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라고 표현하는데, 율법의 상징이 모세이고, 선지자의 상징이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예수님 옆에 서신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모든 구약이 바라보고 기다리던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

분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 길 뒤에 영광으로 나타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은 그 길을 걷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여러분, 악은 연대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원수같이 지내던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원수였으나,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함께 찾아옵니다. 악은 연대합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로마의 총독과 분봉왕. 모두가 연합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아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자꾸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시고 바꾸고자 하니까 그래요. 악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셔도 악은 연대하여 대항하고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죄는 죄와 만나 친구가 되고 그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더욱 강한 어두움으로 대적합니다. 주님은 그 세력들에 의해 십자가에 오르십니다. 여러분.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유혹이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가 찾아와서 기웃될 때 내가 관심을 갖고 맞아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해주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는 더욱 깊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여정에서 많은 이들이 돌아섭니다. 배신을 당합니다. 1명의 제자는 지난주 봤던 말씀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9명의 제자들은 일찌감치 도망쳐버립니다. 그리고 1명의 제자는 심문받으시는 곳까지 따라오죠. 그러나 우리는 그의 부끄러운 민낯을

잘 압니다. (눅 22: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눅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당신, 예수라는 사람과 함께 있었잖아요. 당신 예수님의 친구잖아요?” 여종의 물음에 베드로는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말하고 맙니다. 세 번을 부인하던 그 때,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칩니다. (눅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3년을 함께 했던 제자.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했던 제자. 그러나 그는 작은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런데요. 오히려 조용히 묵묵히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눅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누가복음은

이들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들, 그 명성 높은 사람들은 다 사라져버렸고, 그러나 그곳에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예수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들이라고 예수님과 한패로 몰릴만한 위험이 없었을까요? 누가복음은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눅 23: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눅 23: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누가복음의 여행단락을 우리는 알죠. 갈릴리에서의 2년이 넘는 사역을 하신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긴 여행길을 가시며 따르는 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 여행길을 함께하며, 끝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장례식에서도 그 여인들은 따라가서 그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바라봅니다. 말로만 호언장담하며 높은 자리만 탐내던 제자들은 온데간데없지만,

주목받지 않던 여인들은 끝가지 주님 곁을 지킵니다. 말없이 주를 따르며, 주목받지 못해도 변함없이 주를 섬기는 사람. 그가 바로 참된 제자요, 참된 주님의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주셨던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눅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다가가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다가와 교제를 나누자고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님은 주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를 친구라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친구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가장 큰 사랑을 행하십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사랑이 빛나는 곳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친구가 되어드릴 차례입니다. 앞서 언급한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그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행합니다. 그녀들은 장례를 치룬 후에도 그 예수님을 향한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합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들이 주일 아침,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눅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부활의 첫 번째 증인. 바로 그것은 끝까지

주님 곁을 지켰던 여인들입니다. 저는 제 삶이 늘 주님 곁에 있을까? 말씀을 보면서 돌이켜봤습니다. 제 몸은 언제나 교회 근처, 예배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제 마음은 때로는 주님과 멀리,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마음과 친구할 때가 있습니다. 죄악은 언제나 우리의 연약함을 파고 듭니다. 베드로도 그 길을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죄악이 파고 드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두 마음을 품을 수 없고,

우리의 발이 하나님의 나라와 죄악의 나라를 동시에 디딜 수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죄악을 손에 잡고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의 친구가 될 것인지 우리는 정해야 합니다. 친구였던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친구가 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잃어버린 친구들’을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신 장면을 기록합니다. 두 제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셔서 그들의 식어버린 신앙, 가리어진 눈을 밝히시고 다시금 말씀의 진리 위에 서게 하십니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친구들에게 찾아가십니다. 그들에게 가셔서 다시금 진리 위에 예수님과 나누었던 약속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 즉 제자들의 무리가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비록 그 가운데는 고난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일에 실패했던 자들도 있으나,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시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알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금 말씀으로 그들의 영을 회복시키시고, 이제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그들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행하셨던 일입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잃어버린 친구들의 회복’을 보여줍니다.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루살렘’은 많은 제자들에게 고난과 죽음, 그리고 주님을 배신했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회복시켜서 그곳에서 이제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어지는 책이죠. 바로 그들은 이 예루살렘에서 약속한 성령을 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이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주님의 친구로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죠. 이들의 부족함은 성령님께서 이들과 함께하심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입니다. 모두 한계에 부딪혀요.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에게 오셔서 친구가 되어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할 때, 주께서 하시던 그 사명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예수님이라는 우리의 친구를 또 다른 세상의 누군가에게 소개하여 친구로 만드는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의 연대. 죄악끼리 친구가 되어 우리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우리 홀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악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들이 됩시다.

친구 연대가 되어 흔들리는 사람들을 붙잡고, 서로의 연약함을 감싸고, 함께 주님을 노래하는 선한 친구의 연대가 됩시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 이제 그분은 친구를 위하여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며 임마누엘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으로 동행할 줄 믿습니다. 다음세대 영상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