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은 4편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입니다. 가장 분량도 작습니다. 그래서 심플하게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배우고 싶다면 마가복음이 가장 다루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주로 예수님의 행위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 적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행동의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은 단 2곳, 4장과 13장에서만 가르침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 4장은 ‘비유’로 가르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살펴볼 것은 마가복음서에 나타난 비유입니다. (막 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막 4: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 가르치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나타납니다. 배가 그분의 설교단이 되어주는 것이죠. 혹시 왜 예수님이 배에 올라서 가르치셨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금 예수님은 물 위에 있고, 청중은 뭍에 있습니다. 낮에 햇볕이 내리쬐면 어디가 먼저 뜨거워집니까? 땅이 더 빨리 뜨거워집니다. 땅 쪽의 뜨거운 공기는 위로 향하게 됩니다. 저희교회만 하더라도 이것을 아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강단만 올라와도 훨씬 덮습니다. 제가 목양실에서 설교를 준비하는데 2층은 겨울엔 따뜻해요. 여름에는 아주 덥습니다. 뜨거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에요. 청중이 있는 땅에서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 그
공기의 빈 공간을 채우고자 공기가 이동하는데 그것이 바람입니다. 바다에서 땅으로 찬 쪽에서 뜨거운 쪽으로 바람이 부는 것이죠. 우리가 바닷가에 가면 계속 바람이 부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이 원리입니다. 즉, 예수님의 등 뒤에서 청중을 향해서 바람이 불게 되고 예수님이 설교를 하면 그 말씀이 바람을 타고 더 잘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산위에서 산 아래로 말씀을 전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바람을 타고 말씀을 전해야 마이크가 없어도 야외에서
소리를 전달하기에 용이합니다. 예수님은 매우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가르치신 첫 번째 비유는 이것입니다. (막 4: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막 4: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막 4: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막 4: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막 4: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막 4: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 4: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들으라”, “들으라”로 묶여있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비유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 가지 드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의 제목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2) 네 가지 땅의 비유 이것이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입니다.
단순히 제목의 논쟁만이 아니라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비유 자체만 보자면 ‘밭의 상태’에 좀 더 초점이 있어 보입니다. 마가복음 4장의 비유는 연결성이 있는데, 이 비유 뒤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 비유’ 등 ‘씨’에 초점을 둔 비유들이 함께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씨를 뿌리는 자’가 핵심이고, 이렇게 보면 ‘씨를 받는 땅’이 핵심입니다. 이 2가지 초점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비유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아니고, ‘네 가지 밭의 비유’도 아니라 이렇게 잡은 것입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입니다. 1. 땅의 초점에서 바라보기 이 비유의 해석에 앞서 이 표현을 주목해주십시오. (막 4: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막 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 4: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주실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은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외인’(바깥사람)은 그 비유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비유가 가르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외인’에게는 ‘수수께끼’이고 ‘비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비밀스럽게 가르쳐서 비밀인 것이 아니에요. 비유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배 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공개된 비밀이니 비밀이 아니죠. 그러나 누구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가르침이고, 누구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저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듣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듣지 못합니까?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과한 지식은 인간의 통찰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지혜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매 예배마다 말씀을 전합니다. 누군가는 그 말씀을 들으며 깨닫고 변화되어 갑니다. 그 변화의 기쁜 소식을 보고 들을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때로는 너무나 슬픕니다. 혹시 “내가 요즘 그런데...” 하시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마음에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 저에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러분의 그 마음을 주님은 기뻐하시기에 능히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 안에서 행하실 줄 믿습니다. 비유의 내용은 사실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도 너무 많이 들어봤을 말씀입니다. 모든 땅에 뿌려지는 씨는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14절에 보면 정확히 나와 있어요. 우선 ‘길가’와 같은 마음은 말씀의 씨를 받고 어떻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막 4: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가’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거부’의 상태입니다. 내가 왜 말씀을 거부하는가? 잘 생각해보셔야 해요. 먼저 내 마음을 빼앗겨서, 말씀을 빼앗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결실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좋은 말씀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먼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꾸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못하면 말씀의
씨는 그 사람 안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배에는 항상 의지가 필요해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꾸 거기서부터 사탄에게 지고 들어가면 여러분이 이곳에 앉아 있을 수도 있고, 화면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사탄이 쳐놓은 덫에 걸려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셔야 합니다. 이기고자 스스로 결단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그렇게 드려지면 내 감정과 환경도 뛰어넘어서 은혜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설령 환경이 허락되지 않아서 작은 휴대폰을 통해서 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면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막 4: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막 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서 실패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는 잘 듣습니다. 눈이 번쩍여요. 막 적으며 듣습니다. 그런데 작은 환난과 박해를 마주하면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환난과 박해가 왔을 때, 바로 그 때가 내가 들은 말씀을 써먹어야 하는데, 이 말씀이 그때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외부의 흔들림에 너무 약한 상태입니다. 이런 분들은 예배 때 말씀을 듣고 더 열심히 기도하셔야 해요. 내가 예배당 안에서만 번뜩이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무장하셔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의 상황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한 채 나아가시고, 삶에서 더욱 묵상하고 기도하셔야 해요. 말씀으로 환난과 박해를 극복해보는 경험이 쌓여야 더욱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막 4: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막 4: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세 번째 땅은 ‘가시떨기’입니다.
사실 지금 조금씩 더 나은 상태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길가보다는 돌밭이 된 것이 그나마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돌밭보다는 가시떨기가 조금 더 성장한 것입니다. 길가는 아예 말씀을 거부하는 상태이고 이건 진짜 위험해요. 이러다가 신앙에서 이탈합니다. 돌밭은 예배 안에서까지는 할렐루야, 그러다가 예배당 밖에서 작은 상황에서 무너진 것이에요. 그래서 맨날 신앙이 거기서 거기. 가시떨기는 그보다 좀 더 자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는 것 같고,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부의 요인으로 인해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돌밭이 외부적 요인이라면, 가시떨기는 내부적 요인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자라야 하는데 자꾸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염려들, 재물의 유혹들, 다른 욕심들. 이것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씀이 더 이상 열매 맺을 만큼 자랄 수가 없는 것이죠. 역설적으로 좋은 신앙은 무엇을 이기는 것이냐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들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채 하나님 나라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막 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마지막, 우리의 희망 좋은 땅. 좋은 땅에 대한 설명이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받고,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은 앞에 실패한 3가지 땅의 그 싸움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길가는 ‘듣지도 않고’ 거부합니다. 돌밭은 말씀을 ‘받고 간직하지 못해서’ 실패합니다. 가시떨기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실패합니다. 좋은
땅은 듣고, 받고, 결실합니다.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외부의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내부의 우선순위의 문제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이게 다입니다. 이거 해내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거짓된 영에 사로잡혀 휘둘리지 않고, 외부의 어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으로 나를 보고, 이것으로 다른 사람을 보면 보여요. 자꾸 이러한 문제에 넘어지지 않으면 신앙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여기에 또 다른 교훈이 하나 숨어 있는데, ‘길가, 돌밭, 가시떨기’의 상태를 설명할 때는 ‘듣다’라는 단어가 모두 과거형입니다. (아쿠소신, 아쿠산테스 : 과거형) 그러나 좋은 땅을 설명할 때 ‘듣다’는 현재형 동사를 유일하게 사용합니다. (아쿠우신 : 현재형) 앞에 세 땅은 듣고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계속 울려 퍼지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작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옥토는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듣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설교는 한번 일 수 있어요. 그러나 좋은 땅은 그 말씀을 계속 되새기며 듣습니다. 그것이 여러 어려움을 이기고 결실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머리가 좋아야 계속 말씀을 되새길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필요하면 말씀을 다시 듣고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말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계속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는데, 말씀을 자주 듣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듣고 멈추지
않아요. 말씀을 떠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느껴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변화하더라고요. 예배 시간에 와서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들을 저는 앞에서 보면 보입니다. 때로는 피곤하여 졸고 있는 분들도 있지요. 이해가 되요. 한편으로는 저렇게 피곤한데 그래도 집에서 쉬지 않고 예배당에 와서 졸더라도 예배하는 그것도 저는 열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그 모습이 때론 좋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깨어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세상에서 이겨낼 텐데... 하는 마음이
있죠. 그러나 예배의 시간은 소중합니다. 저도 청중으로 있을 때 졸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옷핀을 성경책 밑에 달아놓고 찔러가며 예배드렸어요. 졸리면 등을 떼고, 때로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최선을 다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누구나 피로하죠. 그러나 그렇게라도 말씀을 듣고자 받고자 힘쓰는 그 사람을 보며 주님은 얼마나 기쁘게 바라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씀의 시간을 소중하게 대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2.
씨 뿌리는 자의 초점에서 바라보기 이 비유에는 한 가지 관점이 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저와 같은 목회자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아직 믿음이 없거나 적은 가족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모든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4장은 씨의 비유들이 연결되고 있어요.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씨’의 비유로 보여주고 있어요. (막 4: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막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먼저 ‘알지 못하게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농부조차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시고 그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곡식이 순차적으로 싹-이삭-곡식으로 자라나는 것처럼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것을 가르칩니다. (막 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막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이어지는
이야기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한 철이 지나면 3미터까지 크게 자라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미약하게 시작하는 듯 보이나, 그러나 광대하게 나타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어지는 2가지 비유는 모두 ‘씨’가 뿌려지고 그 안에서 나타날 변화를 기억하며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 보았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도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씨를 열심히 뿌리는데 그 중에 3곳의
땅에서는 허탕입니다. 열매가 맺히는 곳은 한 곳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한 곳에서 열매가 맺히면 그 씨는 놀랍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씨 뿌리는 자여, 낙망하지 말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든 네 가지 땅은 점진적 성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길가와 같고, 돌짝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아서 되는 듯하다가 무너지고 열매 맺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주님 말씀 안에서 변화되는 옥토가 되는 순간, 그로 인하여 내가 뿌린 씨의 수고보다 더 큰 열매가 그로 인하여 나타날 수 있음을 소망해야 합니다. 아마 목사는 이러한 주님이 주시는 소망이 없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여러분 중 누군가를 품고 기도하는 분은 이러한 소망이 없으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스스로의 마음이 이런 저런 풍파와 어려움 가운데 흔들리지 말고 좋은 땅이 되기를 힘쓰고...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내가 씨를
뿌리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알지 못하게 자라고, 겨자씨와 같지만 풍성하게 열매 맺게 되며, 하나님이 일하시면 옥토와 같이 결실하는 그 모습을 기대하며 낙망하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