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 바이블 클래스에서 출애굽기에 대한 개관을 다뤘습니다.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앞부분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어왔으며 많이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만큼 쉽게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에, 오늘 설교도 여러분에게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설교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연결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이해하려면 창세기부터의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드라마를 1편을 안 보고 2편을 보면 맥락의
이해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1편에 해당하는 창세기를 간추려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듭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며 인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죄를 쫓는 삶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 죄악된 세상에서도 소수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은 때로는 세상이 심판을 당해도 구원받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노아일 것입니다. 당대의 타락이 극심했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노아의 후손을 통해 인류는 다시 시작 됩니다. 한번 더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여전히 죄의 유혹을 끊지 못하고 노아 이전의 삶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다시 죄악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교만함의 탑, 바벨탑입니다. 사실 이것은 무언가를 기념하는 탑이 아니라 ‘도시’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새번역)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이들의 목표는 무언가를 기념하는 ‘탑’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도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도시의 중심에 탑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시날 땅에 집결한 인류는 거대한 성을 쌓고 강력한 제국을 구축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고, 흩어짐을 면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하나님은 언어의
흩으심으로 심판하십니다. 언어의 혼잡은 그들의 죄악 된 마음을 흩어놓으셨던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집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원역사가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고대역사 이야기이죠.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하나님은 이제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자신의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부르는 일로부터 시작하시죠.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꺼내든 하나님의 히든카드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고자 하셨고, 그 민족을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제사장 나라’로 삼아서 구원의 통로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죠.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는 계속된 그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꾸 자기의 힘으로
일하려고 합니다. 75세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그 약속은 그를 통해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집의 고민은 정작 아이 하나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없는 집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이니 참으로 역설적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늘 그런 분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성경에서 자주 만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 선민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약하고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강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늘 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연약하세요? 내가 자꾸 연약해서 고민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가장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세요. 아브라함이 계속 헛발질을 하다가, 그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조금씩 자라갑니다. 결국에는 100세에
얻은 아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내어드릴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이게 중요해요. 약한 사람을 들어쓰시지만, 약하다고 다 쓰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데 고집만 있으면 진짜 쓰기 어려워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그를 쓰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메커니즘이에요. 우리가 오늘 이 메커니즘을 잘 기억해야 해요. 왜냐하면 출애굽기에도 동일하거든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그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이삭에게 이어집니다. 이삭에게 주셨던 그 약속은 야곱에게 이어져요. 그러데 또 이 야곱이 보통 사람이 아니죠. 하나님이 쓰시기에 아주 힘든 분이었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힘을 빼야죠. 녹여야 합니다. 사람을 속여서 등쳐먹던 야곱을 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서 제대로 훈련을 시키십니다. 무려 20년 동안 야곱을 단련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사람’은 굉장히 중요해요. 하나님은 사람 없이도 일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고집스럽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도구는 순종의 사람이고, 순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따르기 싫어하는 원죄의 영향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해요. 다들 고집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결국 야곱을 훈련하신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좀 더 구체화 시킵니다. 창세기는 딱 거기서 끝납니다. 야곱이 자신의 12아들과 함께 애굽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애굽이 하나님의 훈련지였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그들을 애굽으로 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애굽에 도착하여 잘 정착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로 창세기가 끝났는데, 출애굽기를 넘어오니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펴서 시간이 흐른 뒤 야곱의 후손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면서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 보내서
뭘하려고 하셨는지 말입니다. 바로 가족을 민족으로 만드는 기간이 흐른 것입니다. 400년의 기간 동안 70명의 가족은 60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대충 계산을 해봤습니다. 30년 단위로 인구증가율이 2배만 되더라도 그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애굽에 야곱의 가족을 왜 보내신 것이죠? 민족을 이룰만한 사람의 숫자를 만들기 위해 애굽으로 그 길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해가 매우 중요해요. 사실
야곱의 가족 안에 일어난 엄청난 잘못(형제를 팔아버린 일)으로 인해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게 되었죠. 죄악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상황도 어떻게 역전시키십니까? 결국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기에 야곱의 가족이 흉년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의 상황을 생명으로 역전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일으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형제를 파는 일이 없었더라면 다른 방식으로 지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서로 미워하여 팔고, 배신하고, 원망하고...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사건에서 길을 내어 형제들을 변화시키고, 요셉을 성장시키고, 그로 인해 야곱의 가족이 살아남게 하십니다. 또한 더 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일을 생각해보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서, 요셉을 통해 애굽을 강대국으로 만듭니다. 강대국이라고 하면 가장 안전하고 가장 풍요로운 제국을 만드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나라로 누구를 부르시냐면 야곱의 가족을 인도하세요. 그런데 애굽에 와서
애굽사람이 되면 안 되잖아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고센’이라는 목축지에서 야곱의 가족은 계속 살아갑니다. 풍요로운 그 땅에서 목축업을 하며 400년간 자손이 계속 번성하는 것이죠. 그래서 학자들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서 머무는 시간을 하나님의 인큐베이터에서 자라간 시간이라고 묘사합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 하나님을 믿어봄직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창세기-출애굽기와 같은 역사서를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인간은 끝없이 실패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항상 방법이 있습니다. 길이 있어요. 그렇게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넘어왔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마주한 위기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애굽을 위협할 정도로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이 세상 나라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바로 찍어 누르는 것입니다. 애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짓밟습니다. 그래서 강제노역을 하는 노예계층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 아기들을 죽여서 반란의 씨앗까지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방법은 뭐였어요. 사람이죠.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라는 여인들이 애굽의 바로의 명령을 듣고도 그 명령대로 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대단한 것 아닙니까? 산파들의 경외함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합니다. 자칫 남자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세상 한번 보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위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통해서 극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역시 사람입니다. 순종의 사람.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의식하는 사람. 그러자 바로는 이제 애굽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태어난 아기 중 남자가 있으면 강에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쓰실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나오지 못하도록 애굽의
바로는 미치광이처럼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바로의 명령이 낯이 익지 않으세요? 그렇죠. 예수님 탄생 당시에도 ‘헤롯’이 벌였던 일이 아기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시킬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바로가 막아서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오지 못하도록 헤롯이 막아섭니다. 그러나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세상의 위협 앞에 서있더라도 당당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우리의 삶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버거운 일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그분이 하시는 일은 세상이 막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2장은 바로 이러한 대학살의 비극 가운데 시작됩니다. 레위 지파의 한 가족이 있었죠. 남편의 이름은 아므람, 아내의 이름은 요게벳입니다. 이들 가정에도 아기가 태어났는데 남자 아기인 것입니다. (출 2: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여기서 잘생겼다는 표현은 조금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라아 키 토브 후’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바라보니 좋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표현하셨던 것이죠. 이 표현이 등장하며,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출애굽기 안에서도 시작됨을 보여주는 표현이죠. 이들 부부는 사랑하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서 3개월 동안 숨겨서 키웁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때가 왔어요. (출 2:3)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 또한 의미심장한데, 모세를 담은 ‘상자’는 히브리어 ‘테바’입니다. 노아의 방주 또한 ‘테바’로 부릅니다. 방수를 위해 방주에도 역청을 발랐어요. 마찬가지로 이 작은 상자에도 역청을 발랐습니다.
방주에 탄 노아 가족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사용된 것처럼, 갈대상자에 담긴 모세 역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는 것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의 시간의 간격도 매우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역사의 순간순간 늘 일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삶에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대상자의 모세를 떠올리며, 성경의 말씀을 다시 자세히 보면 유감을 하나 표하게 되는데요.
가끔 우리는 영화나 만화를 통해 선입견을 갖고 성경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세를 태운 갈대상자가 강을 떠내려 오다가 바로의 딸에게 갔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그런 무비를 너무 많이 봤죠. 그러나 3절은 애초에 강가의 갈대 사이에 상자를 놓아둔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가 그 강으로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출 2: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그러니까 거센 물살을 타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목욕을 즐길 만큼 물의 흐름이 없는 강변의 갈대 숲 사이에 그 상자를 놓은 것이죠. 일부러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띄워놓은 것이고, 모세의 누이는 그 상자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의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고 그 아기를 바라보며 연민을 느낍니다. 결국 그녀는 이 아기를 입양합니다. 그렇게 모세는 애굽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누이가 아기를 발견한 공주에게
다가가서 유모를 구해오겠다고 말하였으며, 모세의 친모를 데려왔고, 결국 그녀가 모세를 왕궁에서 유모로서 키우게 되었음을 기록합니다. 마치 야곱의 가족이 애굽의 강대국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으며 번성했던 것처럼,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으며 장성하게 됩니다. 자신의 친모를 통해서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교육받으며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앞서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낸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왜 모세를 애굽의 왕궁으로
보내었을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40년이라는 왕궁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의도하고 계셨을까요? 통상적으로 이집트의 왕실 교육은 12년 정도의 기간이 걸립니다. 40세의 모세는 최강대국인 애굽에서 지도자 수업을 충분히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일하심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명 애굽에서 자행된 남자 아기 학살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바로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사용하셔서 모세를 훈련시키는 과정을 만드십니다. 만약
모세가 정상적으로 히브리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면, 어쩌면 그는 애굽의 노예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 쓰시기 위해 왕궁에서 충분한 훈련을 하신 것이죠. 그리고 40세가 되었을 때, 모세에게는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모세는
아마도 자신이 히브리 민족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도 히브리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분노가 폭발해서 저지른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는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당연히 그 일에 끼어들어 말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히브리 사람의 입에서 모세가 전날 저지른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죠. 모세는 자신은 애굽의 왕자이지만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갔지만,
정작 히브리인들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애굽 왕실에서 모세는 히브리 출신의 양자로서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상황에 있었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모세가 후에 바로의 후계자 선정에 라이벌이 되지 않도록 죽일 수도 있는 근거임을 모세는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도망합니다. 미디안 광야로 말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가 십보라가 다른 목자들에게 새치기 당하는 것을 도와주게 된 일이죠.
그 일을 십보라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알립니다. (출 2: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십보라는 모세를 일컬어 ‘한 애굽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말투, 모세의 복장. 영락없는 이집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40년간 이집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이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제 그를 다시 한 번 바꾸시는 것입니다. 왕궁에서 40세까지, 그리고 광야에서 목자로
80세까지, 꼬박 40년을 하나님은 이제 그를 비워내시는데 사용합니다. 40세의 모세는 능력이 있었고 지위가 있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의 모세는 하나님께 마음을 내어드릴 공간이 없었습니다. 너무 자신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는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80세의 모세는 40세의 모세와는 완전히 달라져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어요. 뭐든지 못하겠다는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던 모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무력감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공간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의 삶과 평행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도 느껴집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던 그들은 삶에 만족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 2: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이스라엘의 무기력함. 하나님을 향해 두 손 들고 도우심을 요청하는 그들의 모습. 이제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애굽에서 평안한 삶을 살았더라면,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했을 때 반응을 했겠습니까? 왜 굳이요? 세상의 평안함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막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는데, 역설적으로 세상의 평안은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 가운데 머물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80세의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산으로 양을 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 가운데 떨기나무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창세기의 그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 듯 계시다가 때가 되어 자신을 드러내시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셨고’, ‘들으셨고’, ‘아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숨어계시지 않고 드러내어 일하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방법은 모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함께 묵상해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정리해봅시다. 1.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셨던 일을 하나님은 창세기를 넘어 출애굽기 모세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여정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협하는 사탄의 방해, 인간의 연약함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삶에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순종의 훈련, 바라봄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인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순종의 사람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칼을 불 가운데서 담금질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훈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그 안에서 순종의 훈련, 바라봄의 훈련에 성공하십시오. 3. 하나님이 임하시는 마음,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장면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그곳은 모세가 양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평범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시니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주가 임하시면 우리는 연약하나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출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고 이제 모세와 함께 하기 위해서 그에게 ‘신을 벗으라’ 명하십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종’은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도 성막에서 봉사를 할 때는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세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며 일하실 것입니다. 40세의 모세가 아니라, 80세의 모세와 말입니다. 우리도 이 시간 한번 상징적이지만 신을 벗어보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행동을 통해 고백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종이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종은 무력해도 됩니다.
종은 한 가지를 잘하면 됩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의 평안이 종의 평안이 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 앞에서 내 인생의 주도권이 담긴 신을 벗습니다. 이제 내게 오셔서 주님의 거룩함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주님이 사용하시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주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오셔서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