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네 가지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씨를 뿌리는 자로서, 또 씨를 받고 열매를 맺는 땅으로서 기억해야 할 마음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최근에 제가 금요일에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그것을 대항하는 사탄의 움직임에 대해서 메시지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이해함이 필요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것이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공격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야 할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죠. 우리가 최근에 요한복음을 봤는데, 사실상 요한복음의 결론은 20장 끝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이 책을 기록한 목적까지 다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뒤에 한 장이 더 있어요. 그 21장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다시 회복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런데 이러한 회복의 아름다운 메시지 끝에는 다소 의아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분위기 좋게 끝날 수 있었는데 다소 그 좋은 회복의 분위기를 깨는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배신을 했다가 다시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예수님께서 맡기신 양을 치라는 사명의 회복. 그것이 19절까지라면, 20절부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그 회복의 감격으로 감사하며 순종하면서도... 마지막 그의 시선이 머물며 그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은 ‘요한’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내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오늘 거기까지 설명할 수 없으니 제가 설교 후에 블로그에 함께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가장 돋보이는 두 명이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조금씩 요한을 더 부각합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요한이 자기 자랑을 위해 썼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렇듯 서로를 의식하는 두 제자의 모습에 대하여, 주님이 주시는 명령이 요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와 요한의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기록하며 요한복음 가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나요. (요 21: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많은 일 가운데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부분을 추려서 성경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성경에 이 이야기를 넣었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정확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베드로와 요한이 라이벌 같은 관계였어. 이것이 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부러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마치 그가 부인했던 장면과 같이 ‘숯불’을 피워놓습니다. 이 숯불은 그가 부인하던 그 밤에 대제사장의 집에 피어있던 것이죠. (요 18: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요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그리고 예수님은 3번을 물으시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의 물음은 3번 부인한 베드로의 그 실패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세 번째 질문을 하시고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후에 주님은 “내 앙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죽음은 그러했습니다. 그는 부인할 때와 전혀 다르게 순교의 길을 갑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용서를 받고 다시 제자의 신분이 회복되는데... 그때 베드로의 눈에 그 자리에 있는 요한이 들어왔습니다. 베드로는 갑자기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은 모든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죠. 왜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이러한 에피소드, 이러한 베드로의 물음이 담겨있는가?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동일한 마음이 우리 안에 들 때, 주님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우리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지 않도록 신앙의 공동체를 주시죠. 예수님도 12명의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셨고, 오늘날 교회도 그러한 공동체로 주어졌습니다. 저는 이
공동체가 너무 좋습니다. 저는 정말 혼자 신앙생활 했으면 지금처럼 못했을 것 같아요.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기에 저도 제가 혼자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더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왜곡시키고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위태롭게 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참 베드로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으나 자꾸 다른 사람을 봐요. 나를 향한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그 순간에도 “그럼 이 사람은요?”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치고 들어옵니다.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요 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에요.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여러분, 이 찬양 아시죠.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으면 그것만 바라보면
돼요. 다시 뒤돌아서 다른 것을 바라보면 주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2절.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3절.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여러분. 신앙의 길을 실패하지 않고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 날 몰라줘도. 사람 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넘어집니다. 그래서 세상 등지고 십자가만 바라봐야 합니다. 내 시선이 세상을 향하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그럼 나는 이렇게 되는데 요한은 혹시 나보다 더 큰 사명을 받는가? 혹은 나보다 평안한 삶을 사는가?” 끝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찌합니까. 여러분.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니에요.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자꾸 내가 다른 사람 바라보며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내 영혼에 선포하셔야 해요. “내 영혼아, 주님만 바라보자.”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주신 요소들 속에서도 그렇게 역사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동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경쟁을 시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축복인데... 사탄은 이 안에서 오히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해요. 넘어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는 교묘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조그만 틈도 공략하려 합니다. 내가 조금 더 헌신했는데도 다른 사람을 알아주면 그것에 심통이 나서 시험에 들기도 하죠. 자꾸 사람을 보며 신앙생활을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내 신앙의 핑계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것을 바라보다가 주님 따르는 일에 실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이것에 집중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입니다. 혹시 내 시선이 다른 것에 머물고 있다면 시선을 거두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100전 100패입니다. 바울이 공동체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곳은 로마서 2장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믿음에 맞는 생각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필요한 생각과 불필요한 생각을 분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저도 이런저런 성격유형테스트를
해봤는데요. 그 중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오지랖’이 넓은 사람입니다. 이건 저도 알고 있고 항상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잘 쓰면 좋은데, 항상 양면이 있잖아요. 이 성향이 때론 저를 많이 괴롭힙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 공감이 되었어요. “사회생활에서 빚어지는 스트레스는 협력과 조화를 중요시 여기는 성격의 사람들에게 잠을 설치게 하는 근심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혹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할 경우, 이들
역시 발을 밟힌 사람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감성적이면서도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여러분 저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저는 사람들의 평판, 말 한마디에 지쳐 쓰러지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사탄은 공격하거든요. 우리의 약점을... 그래서 기도해요. 제가 주님의 자녀인데, “내가 원래 이러니까 당연하지” 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약점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으로 이겨내야 하잖아요. “하나님 제 오지랖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편으로 사용해주시고, 그러나
그 안에서도 더욱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귀 기울이며 주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기도제목이에요. 제가 약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안에 각자의 약함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개척을 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 교회 공동체에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어요. 그 말이 너무 슬펐어요.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소망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함께 소망하는
공동체가 저의 비전입니다. 절망이 아니라 소망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죠. 많은 경우 교회 안에서 베드로와 같은 잘못된 마음으로 인해 걸려 넘어집니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이 설교 가운데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단어에 오해하지 마시고 의미만 들어주십시오. 교회에 성가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임이면 당연히 있어야죠. 그러나 자신이 겪은 성가대는 모든 교회의 소문의 근원지가 된 적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가대를 정말 사랑하시면서도 늘 경고하십니다. 성가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면 그 모임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가대뿐입니까? 저는 모든 교회의 모임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주님을 더욱 바라보고 갈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모임을 하면서 오히려 내 영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저도 부교역자를 경험하며 여러 아픔과 분열이 있는 교회를 경험했는데요. 결국 그 모든
시작은 ‘비방’과 ‘뒷담화’와 ‘수군거림’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특별히 ‘비방’을 하는 것만큼 죄악된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 없지요. 우리의 본성은 원래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해요.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에요. 그는 교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 안에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다스리는 능력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험담이 시작되면 “그런 이야기 하지 맙시다” 말합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할 관계적 상황이 아니라면, 그 이야기를 피해 기도하러 갑니다.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늘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뭔가 어떤 이슈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우리의 쾌락을 자극합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의 영에 안전하지 않습니다. 교회 내의 각각의 모임은 그 존재하는 이유에 집중하면 그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이 자라가지만, 그 안에서 성장해가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 이상에 대해서 하고 있다면 우리의 영이 죽습니다. 제가 중고등부, 청년부를 담당할 때 가끔씩 교회에 대한 불만,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있는 아이들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아이 앞에서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이야기 중에 유독 좋지 않은 이야기를 오래 기억합니다. 그 이야기들이 그 아이들에게 편견이 되는 것입니다. 분열이 있는 교회에 가면 부임하자마자 이편저편에서 저에게 와서 흉을 봅니다.
서로 자기 입장에 공감해달라며 말하는데, 보통 힘이 드니까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그 마음이야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선입견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인분들이 모여서 이야기할 때에도 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마음에 있는 속내를 털어놔야 하니,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겠죠. 특별히 아내는 남편 이야기, 남편은 아내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것이라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을 받으며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겠지만, 사탄은 그것을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기회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는 내 옆에 예수님이 있어도 만족 못해요. 예수님 곁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의 그 본성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도 마음에 안 들어요. 어떻게 마음에 들겠어요.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좋아한다는 둥, 왜 이렇게 하냐는 둥, 왜 이렇게 서운하게
말씀을 하냐는 둥...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이유를 찾자면 너무 많지요. 결국 그렇게 마음을 빼앗긴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치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억울한 일을 경험할 때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우리가 수없이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세요.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시고, 주님이 주를 위하여 참고 품는 내 마음을 아시며, 심판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다는 믿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 범죄까지 덮어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밝힐 것은 밝혀야죠. 빛 가운데 드러내야 하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룰 수 없는 문제들. 때론 큰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자꾸 나를 괴롭히고, 옆 사람 때문에 힘들고, 내 신앙에 방해를 받고
있다면... 그때는 거기서 벗어나서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보이셔야 합니다. 사탄은 방해할 것입니다. 억울함에 집중하게 하고,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게 하고, 온갖 방법으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지 마십시오. 품고 해결이 되지 않거든... 하나님께 털어놓으세요.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끄떡없습니다. 나의 슬픔, 나의 원통함, 나의 무고함은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저주시’가 있습니다. 마음의 울분을 쏟아내는 시들이 있어요. 왜 그러겠어요. 하나님 앞에서 모든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괜찮아요. 그런데 사람 앞에서는 반드시 사탄이 그것을 활용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다 쏟고, 내 삶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의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말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있는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어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고,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김 집사님에게는 김 집사님의 길이 있고, 이 집사님에게는 이 집사님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뭐가 더 나은가? 누가 더 인정받고 있는가? 이것에 집중하는 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자꾸 그런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나의 시선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유튜브를 통해 사역을 합니다. 영상에 대해서 ‘좋아요’, ‘싫어요’ 평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무섭더라고요.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나는 신경을 안쓰고 싶은데, 싫어요를 받으면 그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평가’라는 것이 너무 마음을 빼앗아요. 물론 그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그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신뢰도를 줄 수 있는 장치인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저에게 주는 영향이 바람직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좋아요, 싫어요’가 표시되는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의
마음을 잘 지키셔야 해요. 우리가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언제나 내 마음의 어떤 부분들을 공격하고 있음은 기억해야 해요.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 있으십시오. 모든 부분에 깨어 있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분별하십시오. 우리의 초점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사람에 대한 평가, 사람들의 시선에 있다면 그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지를 고민하십시오.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상대방이 사랑받을만한 존재여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 상대방이 용서받을만한 행동을 해서가 아닐지도 몰라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적용해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내가 사랑받을만한 모습이어서만 그런가요? 아니잖아요. 나와 같은 자도 하나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셨는데... 내가 이 입술로, 이 삶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만 하기에도 내 삶은 짧고 부족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내 안의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말씀에 비추어 발견되었다면, 그것을 다스리십시오.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무언가 필요 이상의 생각을 갖고 있다면 끊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각자를 지켜야 합니다. 이번 주에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마다, 번번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넘어졌는데... 이제는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관계, 세상의 재미,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향한 삶을 더 살아보고 싶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사탄을 가장 절망케 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아마도 사탄은 늘 그렇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내 마음을 그리로 가지 못하도록 공격하고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마십시오.
눈을 들어 잠잠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바라보면, 그분은 나에게 힘을 주시고, 나는 능히 주변의 어떠함을 이기어 낼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너는 할 수 없어” 이것은 사탄이 주는 절망의 속삭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이곳에서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을 따르겠다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여러분의 그 고백을 기뻐하시며... 우리를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 바라봅시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우리는 세상 등지고
십자가를 보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