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그의 나이 80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그 중에는 이런 핑계가 있었어요.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말할 능력이 부족함을 핑계 삼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핑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애굽을 떠나서
미디안 광야에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 사이의 중재자가 필요하고, 40년 동안이나 모국어와 이집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은 어쨌든 모세를 위해 이미 예비해 놓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출 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은 마치 그런 모세의 태도를 알았다는 듯, 그의 형 아론을 도구로 쓰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형은 모세에게 원래부터 주어져 있던 것입니다. 아론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니죠. 모세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모세의 동역자로 미리 계획해 두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내 삶에 신앙의 동역자를 만났다면 그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저는 목회를 해나가면서 가족의
힘을 참 많이 느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이 함께 기꺼이 이 길을 동행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성도님들이 동역자입니다.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귐의교회에 필요한 분들을 보내어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4년 정도 목회를 했습니다만, 점점 더 느끼는 것은 도움이 참 많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동역자가 필요하고, 또한 성도 여러분에게도 말씀을 전해주는 저와 같은 목회자, 그리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동역자로서 필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있음을,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론과 모세 형제. 하나님은 특별한 것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특별해집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살펴봤듯이, 하나님이 모세를 만난 호렙산의 뜻은 ‘폐허’입니다. 폐허와 같은 땅, 그곳에서 모세는 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이 임하시니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폐허와 같은 모세의 자포자기한 인생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거룩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 다른 한가지 지배만큼은 철저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 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해석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
혹은 신앙이 무너져있을 때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정의했던지 간에... 이제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는다면 내 인생은 거룩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새로운 해석으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요소들에 대해서 분명한 재해석을 해보십시오. 내게 있는 상처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사용될지 모릅니다. 내게 있는 아픔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사용될지 모릅니다. 내게 있던 고난의 시간들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나를 성숙하고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남이 나에게 주입하면 신앙적 강요가 되지만, 내가 스스로 고백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저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이 말씀 안에서 이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고백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은 아론과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받고 나아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출 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출 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아론은 이제 모세를 대신하여 말하는 ‘입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가 아론에게 전달하면 아론이 그것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말하십니다. 이것은 아론이 모세를 하나님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에서 이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때로는 모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이 순간 하나님이 저를 붙드시고 사용하신다는 신뢰함 속에서 말씀을 받으셔야 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서 있는 이 시간 외에는 여러분과 같고, 어떤 부분에서는 더 부족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시간만큼은 제가 아니라 저를 통해 말씀을 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우리의 영이 반응합니다.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모세의 입, 아론의 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아론 또한 백성들에게 전하는 말씀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에게서 여러분에게, 또 여러분에게서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것.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우리가 누구로 설명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보통 삶에서 누구로 설명됩니까?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그러나 적어도 신앙적으로는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소속과 내가 갖고 있는 인맥이 좋아보일수록 은연중에 자랑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정말 가장 귀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이 있겠죠. 그러할 때 우리가 세상 유혹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교만과 겸손을 설명 드린 적이 있죠. 교만은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것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틀렸어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보다 내가 보는 게 맞아요.” 이것이 교만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나를 ‘이렇다’라고 말하는데, 내가 그보다 높게 보거나 낮게 봐도 교만입니다. 모세가
지금 교만하죠. 하나님이 쓰시겠다, 내가 너에게 힘을 주겠다, 말하는데 “저는 못해요.” 이것이 교만이죠. 겸손은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도 같은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이잖아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듯 나도 나를 바라봐야 해요. 그 이해가 우리 안에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기준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가 자만 떨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영적 자존감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하나님이 없냐.”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돈보다 귀한 것이 내게 있고, 우리는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드디어 애굽으로 가서 바로를 마주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놓아주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키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바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한 ‘알다’는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친밀한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격적인
경험 지식과 삶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관계적이고 체험적인 앎입니다. 여러분, 제가 경찰서에 가서 ‘신분조회’를 당하면 제 모든 이력이 쭉 나올 것입니다. 그럼 그 경찰이 저를 잘 아는 것입니까? 지식적으로는 알죠. 그러나 그 경찰관과 제가 사귐이 없으면 그 앎은 참된 앎이 아닌 것이죠. 종교학을 연구하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하나님을 아는 상태’는 아닐 것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제국 안에 거하는 히브리 민족이 믿는 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는 여호와를 모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바로(파라오)는 하늘에서 땅을 지배하는 신들의 후손으로 여겨졌고, 신과 같은 자격으로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이집트를 보호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여겨졌습니다. 파라오는 ‘태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태양신 ‘라(Ra)’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출 5: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이 말하는 ‘히브리인의 하나님’, 더군다나 그 하나님은 ‘광야’에 나가서나 볼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히브리 민족보다 뛰어나고, 광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번영과 풍요를 이루고 있는 애굽의 통치자라고 생각하는 바로에게, 하나님은 그리 알 필요도 없는 그러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세의 경고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리고 힘으로 더욱 억누르려고 합니다. (출 5: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그리고는 더욱 폭력적인 정책을 즉시 시행합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로는 강제노동 감독관과 작업반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짚을 더 이상 저 백성에게 공급해 주지 마라. 저들 스스로 짚을 마련하게 하여라. 전과 똑같은 수의 벽돌을 생산하게 하고,
저들의 하루 작업량을 조금도 줄여 주어서는 안 된다! 저들이 게을러져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심시오’ 하며 떠들고 다니는 것이다. 저들을 엄히 다스려라. 그래야 저들의 불평이 사라지고, 신을 예배하겠다는 망상도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께 모세와 아론은 순종했는데, 그로 인한 결과는 대실망입니다. 오히려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히브리 민족은 더욱 억압을 당합니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예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가장 큰 권리와 의무가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사탄은 예배하려는 의지를 철저히 짓밟습니다.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 일단 몸을 더욱 고되게 하는 것입니다. 노동의 강도가 더욱 세졌습니다. 과중한 업무와 삶의 고단함이 겹치니 그들의 예배하는 마음이 방해를 받습니다. 여러분, 저는 삶의 고단함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선택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주일이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나가기는 귀찮으니까 온라인으로 예배할까?” 이 시대에 우리에게 있는 유혹일 수 있습니다. 물론 온라인 예배가 최선인 경우도 있죠.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드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죠. 제가 어른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잘 드리지는 않습니다. 어른이니까요. 그런데 가르침이 필요한 세대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가르칩니다. 최선의 예배를 위해서는 토요일에 일찍 잠을 자서 좋은 컨디션으로 예배를 드리고자 준비하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최선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정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체가 피곤하면 영향을 받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고단함을 피할 길이 없고 그 가운데서도 예배하러 나오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충분히 방법이 있는데, 내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예배에 오셔서, 그 피곤함으로 인해서 예배에 방해를 받고 있다면... 저는 예배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아침에도 가급적 우리는 가족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니까 잘 알죠. 주일 아침에 감정이 상하면 너무 예배하기 힘들어요. 이 또한 여러분이 감정이 상하고 싶지 않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공격하는 일들이 많겠지요. 그래도 가급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제가 말씀을 준비하다가 참고한 도서의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지킬 때, 예배가 우리를 지켜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로 나아가려고 할 때, 바로는 매우 간교하게 그것을 막아섭니다.
여러분의 예배도 그렇게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예배를 지키십시오.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배로 나아갈 때, 예배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탄의 전략이었어요.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는데 전문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가지 않아야 한다고 설득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신앙이 있으면 예배는 드려야 함을 알잖아요.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예배에 몸은 가지만 마음이 가지 못하도록, 감정을 상하게 해서 집중하지 못하도록, 분주하고 피곤하게 만들어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최선은 다를 수 있어요. 우리가 코로나가 더 심해지면 다시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주변 환경은 내 능력으로 바꾸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예배의 진심, 예배의 최선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도 우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중한 작업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바로를 찾아가 호소합니다. (출 5: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바로는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출 5: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백성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불호령뿐이죠. 출애굽기에서 그들의 비탄과 한숨과 아픔을 들으시는 분은 여호와뿐입니다. 바로는 너희가 예배하려고 하니 돌아오는 결과다 말할 뿐,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바로를 만나기 전, 4장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보내셨음을
알렸습니다. 그때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아세요? (출 4: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출 4: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달받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경배합니다. 믿고 경배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바로가 그들을
더욱 착취하니까 어떻게 변합니까? (출 5:20) 그들은 바로 앞에서 나오다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과 마주쳤다. (출 5:21)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이들은 자신들에게 고난이 찾아오니까 즉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바로의 수법이 통한 것입니다. 앞에서
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믿음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것 자체가 비정상입니다. 애굽이 자신들을 노예 삼고 부려먹는 것이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래 갖고 있던 자유를 그들에게 다시 주시려고 합니다. 그것은 출애굽하여 노예를 자유민으로 해방시키는 일이죠. 그런데 바로는 이들을 더욱 착취하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착취하는 바로가 아니라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들이 바로에게 길들여진 것입니다. 잘못된 사회구조 안에 길들여 버린 것입니다. 이와 매우 비슷한 예화가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저는 가슴이 아픈 일인데, 미국 사회는 처음부터 잘못 세워졌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했죠. 링컨 대통령이 평등에 대한 법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삶 속에는 평등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백인들만 들어가는 학교, 백인들만 들어가는 식당, 백인들만 사는 마을이 편만했습니다.
실제적으로 흑인의 인권은 백인들의 노예 수준이었습니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마틴 루터 킹도 흑인 이었는데, 그가 흑인들이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곳을 다니며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의 꿈이 무엇입니까?” 들에 나가서, 탄광에 가서 일하는 백인의 종 된 흑인들의 입에서 나온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꿈은 들이나 탄광이 아니라, 백인들의 집 안 조금 더 시원한 곳에서 에어컨 쐬며 일하는 것, 조금 더 깨끗한 옷을 입고 일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그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는 백인들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동등하게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인과 흑인을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등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 흑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정신이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흑인 대통령이 나오는 나라가
되어서 발전했다 여겼어요. 그런데 여전히 또 다른 계층의 갈등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활동했을 당시의 흑인들은 그 삶에 길들여져 있었죠. 그래서 진정으로 꿈꿔야 할 것을 소망하지도 못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구조에 완전히 길들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지만, 출애굽 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진 본성이 계속 튀어나옵니다. 불평거리만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 광야에서 조금만 어려움을 겪으면 노예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의 구조와 가치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다보면, 때로는 그로 인해 고난도 당합니다. 가족들이 힘들게 할 때가 있고, 세상 친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며, 주일에 예배하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손해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공격입니다. 바로의 공격이었어요. 사탄의 간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에 혹하여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가 버리면 안 됩니다. 내 믿음과 내 예배를 지키셔야 해요.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요청하니, 그로 인해서 화가 미쳤어요.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더욱 힘든 삶을 마주한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자신들의 본분과 정체성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편에서 바로에게 안식과 해방을 요구하지 않고, 옛 질서로의 복귀를 요구한다. 모세가 믿는 여호와보다 눈앞에 있는 신 바로를 더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모세의 싸움 대상은 ‘바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재된 질긴 ‘노예근성’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때론 말씀의 요구가 여러분에게 느껴져서 내가 변해야지 결단하죠. 그런데 그 방향으로 결단한 순간 내 삶이 불편해지고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어요. 성경은
늘 그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좌절합니다. “하나님 믿으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냥 살던 대로 살아야겠다.” 죄의 노예근성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기쁨보다, 죄 아래 거하는 삶이 익숙하고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끝까지 믿는 사람은 방향을 틀지 않습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할 가나안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어려움에 넘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내 삶을 말씀으로 조명 해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내게 다가오는 위협,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할 때 더욱 절망으로 우리를 몰아넣는 그 상황들을 바르게 분별하고 깨닫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제가 설명하면 때로는 신앙적 설득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여러분이 스스로 그 또한 하나님의 이끄심이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80세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모세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마주했을 때, 그가 갖고 다니던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별로 볼품없는 지팡이였죠. 목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으로 양을 쳤고, 산을 오를 때면 지팡이를 의지하였습니다. 어쩌면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일지도 몰라요. (출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출 4: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모세의 평범한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런데요, 이 지팡이가 모세에게 속해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순간 기적의 도구가 됩니다. 지팡이는 물건이니까 그냥 쓰시면 되요. 인격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쓰여야 하죠. 모세는 설득하십니다. 모세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설득을 하시고 모세의 순종을 기다리십니다. 그래야만 사용이 가능해요. 아주 짧은 기록이지만, 이것이 저는 의미
있다고 여기는데요.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시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출 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모세가 꼬리를 잡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바로를 향하여 하나님의 도구와 방법이 되어 출발하는 장면에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출 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의 지팡이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뀌었습니다. 이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지팡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바뀌었냐면 지팡이의 소유가 바뀌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것이 되니, 모세의 지팡이도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그리고, 이 지팡이는 애굽에서 열 재앙을 행하고, 홍해를 가르게 됩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에서 미디안 목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나니,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 민족은 바로 앞에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했지만, 이제 그들의 고백이 우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바뀌는 순간 그들은 노예근성을 벗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신의 정체성은 누구로 설명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평범하고 나는 연약하지만 나에게 주님이 임하시면 나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나의 소유격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나는 그보다 더욱 귀한 주님을 품고 그것을 전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이 고백이 언제나 살아있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자랑하며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