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출애굽기 7:8-13 / 세상의 탄닌 / 강정규 목사

2021-04-23 · 출애굽기 7:8-13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군대에 있을 때 그곳에서 세상 처음 보는 물건들을 자주 접했습니다. 음료가 보급이 나왔는데, ‘갈은 배’라고 쓰여 있습니다. 누가 봐도 ‘갈아 만든 배’와 비슷한 디자인인데 글씨가 달랐어요. 며칠 후에는 이온음료인데 많이 보던 파란색과 하얀색 조합의 음료였습니다. 그런데 받아들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스포헬씨’ 포카리 스웨트에서 ‘스,포’를 따오더니 ‘헬씨’를 가져다 붙인 것이죠. 여름에는 오랜만에 콘 아이스크림이 나왔습니다. 역시

많이 보던 것인데, 이름은 ‘골드콘’이었습니다. 손가락을 좀 다쳐서 의무실에 갔더니 발라주는 연고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후시단’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같지만 조금 다른,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비교할 수 없는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있죠. 제가 오늘 이러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출애굽기를 읽으며,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한 가지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를 찾아갔지만, 바로는 오히려 화를

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가중한 노역을 시키는 일이 있었죠. 그 일로 모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몰라요. 백성들이 자신을 원망하니까 말입니다. 저도 외부의 적은 무섭지 않습니다. 바로는 외부의 적이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참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러므로 더욱 의기소침한 모세를 하나님은 다시 세워서 바로에게 보냅니다. 모세와 아론이 다시 바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 장면이 7:8 이하입니다. (출 7: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7: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출 7: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모세의 지팡이에 대해서 우리가 다뤘죠. 원래 아무런 볼품이 없는 지팡이였으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꾸시자 지팡이의 소유격도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불렸어요. 여기서도 바로 그 지팡이가 사용된 것입니다. 뱀과 지팡이 사건은 처음이 아니죠. 처음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도 비슷한 기적을 보여주었죠. 그때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그 지팡이는 애굽의 바로 앞에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즉, 여기에서 사용된 지팡이는 모세가 들고 있으면 모세의 지팡이, 아론이 들고 있으면 아론의 지팡이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다시금

이 지팡이는 바로 앞에서 뱀이 됩니다. 뭐 이거는 이미 경험했던 이야기이니 그렇게 놀라지 않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 부분에서 놀라기보다 오히려 다음 부분에서 놀라는데요. (출 7:11)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당혹스러운 것은 모세와 아론이 행한 하나님의 기적을 애굽의 술사들도 비슷하게 행했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현인과 마술사. 현인(하카밈)은 국정을 돕는 왕의 참모들을

의미합니다. 마술사(메카쉐프)는 비술을 부리는 무당으로서 왕의 참모들과 더불어 점술과 신통력으로 왕을 보좌했던 그런 집단입니다. 요술사 또한 마술사와 같은 의미입니다만, 이것이 단순히 마술, 요술과 관련된 직책이 아니라, 서기관 혹은 제사장으로 추론하기도 합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천문학자나 점성술사가 그리 구분되지 않았고, 현인과 요술사도 그리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였죠. 이들이 진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을까? 당연히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마치 기적이 하나님께만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애굽의 술사들은 마술이 아니라 트릭을 썼다고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즉, 원래 뱀인데 지팡이처럼 보이도록 뱀에게 일종의 ‘강직증’과 같이 뻣뻣하게 하는 최면을 걸어서 놓았다는 견해 등 다양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저는 선호하지 않는데요. 그런 시선으로 보면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도 우리가 모두 이해하는 수준에서 해석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시도들이 본문이 말하는 메시지를 약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다른 영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인간 세계의 법칙을 무시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본문은 적어도 애굽의 술사들도 기적과 같은 일을 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 일들에 마음 뺏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초점은 기적이 일어난 것에 있지 않아요. 12절이 오히려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출 7: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핵심은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모두 삼켰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방법은 성경이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추론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갖고 있는 의미를 폭넓게 해주는 몇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원어연구가 갖는 힘이죠. 이 본문을 히브리어로 분석할 때 주목할 특징이 있어요. 앞선 4장에서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보이셨어요. 그 기록에서 지팡이가 뱀이 되었고,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았다고 할 때에는 히브리어 ‘나하쉬’를 씁니다. 나하쉬는 말 그대로 뱀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7장에서 바로 앞에서 지팡이가 변한 것은 ‘나하쉬’가 아니라 ‘탄닌’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단어의 구분으로 봐야해요. 그럼 탄닌은 무엇이냐? ‘탄닌’은 동물 뱀이 아니라 히브리 원어의 표현을 그대로 해석하면 ‘바다 용(sea dragon)’ 혹은 ‘바다 괴물(sea monster)’입니다. (창

1: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21에서 ‘큰 바다 짐승’으로 번역된 것이 ‘탄닌’입니다. 즉 창세기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죠. (겔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에스겔 29:3에서는 애굽의 바로를 일컬어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탄닌’입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그 강은 주님이 만드신 주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악어를 ‘악어신 세베크’로 숭배했고, 이 악어신은 바로의 힘과 권세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니까 ‘탄닌’은 이집트가 믿는 악어의 신을 의미하거나, 혹은 성경에서 애굽의 바로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어요. 큰 바다 짐승에 해당하는 탄닌. 사실 ‘바다’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바다는 무질서와 혼란을 상징하였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역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다’는 의미있는 기록으로 사용되는데요. 여러분, 갈릴리 바다가 맞아요, 호수가 맞아요? 엄밀히 따지면 호수입니다. 누가복음은 호수라고 써요. 누가는 정확한 역사가입니다. 그는 언제나 갈릴리 호수라고 쓰는데, 그는 지중해를 본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몰라요. 그런데 마가복음은 갈릴리 바다라고 씁니다. 여기에는 의도가 있어 보여요. 바다가 갖고 있는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가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귀신들이 쫓겨난 후 돼지 떼에 들어가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 돼지 떼는 바다에 빠져 멸절하죠. 바다는 완전한 파멸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중에 바다는 사라집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예수께서 바다를 꾸짖음으로 잠잠케 한 사실은 바다가 혼돈의 세력과 동일시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혼돈의 세력으로서의 바다는 예수의 꾸짖음으로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기록이 됩니다. 다시 출애굽기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봅시다. 아론의 지팡이가 ‘탄닌’으로 변했다고 출애굽기는 기록합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애굽과 관련이 깊은 것이 ‘탄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애굽의 술사들도 더 많은 ‘탄닌’을 만들어요.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술사들이니까 더 많은 ‘탄닌’을 만들었겠죠. 이 장면을 언뜻 보기에는 그들에게도 이것을 따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는 술사들이 ‘탄닌’을 만든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고작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냐? 이건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탄닌’은 하나님의 ‘탄닌’에 의해서 모두 삼키움을 당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바로의 술사들이 행하시는 일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술을 통해 만든 혼란의 생명체는 모세의 권위 앞에서, 아니 그들 뒤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 아래 순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탄닌’마저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다스리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출애굽기는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평범한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특별하게 만드십니다. 연약한 사람을 거룩한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

가장 강력해 보이는 애굽의 제국과 파라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범해집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뱀’이 아닙니까? 이집트의 유적지 중 신전과 파라오의 동물 무덤 벽화에는 무수히 많은 뱀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뱀, 특히 코브라는 파라오의 왕관에 장식될 정도로 이집트에서는 수호신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탄닌을 고대의 괴물이 아니라 단순한 ‘코브라’로 해석해도 주어지는 메시지는 똑같습니다. 애굽이 좋아하고 애굽이 자랑하던

것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흉내를 낼 수 있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로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식하게도 계속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출 수 없습니다. 출애굽 한 이후에도 앞에는 홍해, 무질서와 죽음을 상징하는 바다가 그 백성을 가로 막아서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여전히 쫓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은 구원하며,

애굽의 세력은 바다 가운데 멸절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무엇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하나님과 무관한 세력에 무언가 기적과 같은 일들, 좋아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영적인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그러면 거기를 가서 믿음을 보이시겠어요? 아닙니다. 바로의 술사들이 등장해서

보인 행동들, 우리가 주일에 다룰 열재앙 사건을 보아도 바로의 편에서 그 기적들을 유사하게 흉내 내는 일들이 제법 있습니다. 성경이 왜 그런 일들을 그냥 기록하겠어요. 기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압도적인 힘이 있어 보일 때가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위협할 만큼 더 믿음직스럽고, 기대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미테이션,

짝퉁에도 이제 명품이 있다고 하던데요. 너무너무 비슷하게 만들어서 짝퉁 중에 명품이래요. 그래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가짜 중에서 좋은 등급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가 될 수는 없어요. ‘나이키(nike)’가 있고 ‘나이스(nice)’가 있습니다. 나이스 신고 자랑할 사람은 없겠죠. 특히 그것은 진짜 나이키가 등장하면 그 앞에서 부끄러워질 뿐이죠.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입니까? I am who I am.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시작했고, 다시 우리가 그분께 돌아가 그분 안에 살아갈 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절입니다. (출 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아론의 지팡이가 다 삼켰습니다. 그럼에도 바로의 마음은 완악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믿음 또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지금 그분께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그분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지적 깨달음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셨고, 우리의 마음에 그분을 향한 은혜를 부어주시고,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그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께 나아갈 수 없어요.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도 그분께 나아와 그분을 예배합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유혹할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든 여러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미혹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하나님만큼 좋은 것들은 있다고 속삭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넘어지지 마십시오. (신 13:1) 당신들 가운데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이 나타나서, 당신들에게 표징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신 13:2) 실제로 그 표징과 기적을 그가 말한 대로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따라가, 그를 섬기자' 하더라도, (신 13:3) 당신들은 그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정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고자 하셔서, 당신들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신 13:4)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을 따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충성을 다하십시오. 세상은

이 시대에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더 힘이 있고 길이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자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것을 따라가려면 그것은 여러분의 결정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을 붙잡으면 하나님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방주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방주가 만들어지기까지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노아 가족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들이라 여겼고, 헛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면 방주에는 오를 수 없습니다. 방주에 오르려면 세상이 말하는 것들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화 하나를 하면서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1859년 찰스 블론딘이라는 곡예사가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섰습니다. 세계 1,2위를 다툴 만큼 서커스계에서 알아주는 실력자 였습니다. 보기에도 엄청 아슬아슬 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잘 걸어다녔습니다.

안대를 하고 건너기, 자전거를 타고 건너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자유자재로 오갔습니다. 모든 곡예가 끝날 때 블론딘은 관중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럼요! 믿습니다.” 그 곡예사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제 등에 업혀서 나와 같이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환호성은 그치고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모두 블론딘의

시선을 외면하고 피했습니다. 그때 블론딘은 한 사람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난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블론딘은 그 남자를 등에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넜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해리 콜코드, 블론딘의 매니저였습니다. 블론딘을 잘 알고 있는 그가 블론딘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내 삶의 주인임을, 날 이끄시는 위대하신 주인이심을 믿는다.” 이 말에 우리의 삶을 정말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 곡예사에게 업히는 것처럼, 주님의 등에 업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이 계신 그곳이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싫어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꽃길을 걸어가지 않는 삶입니다. 꽃길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의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을 걸어가는 것인데, 그 길은 황무지와 같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동행하므로 그 안에 생명이 되살아나며 꽃이 피어나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세상의 모든 ‘탄닌’들을 이기실 크고 놀라우신 주님의 편에 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 믿음의 길, 끝까지 함께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