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Anywhere" / 강정규 목사

2024-08-18 · 예레미야 41~4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흩어지는 예배 후, 다시 전하는 예레미야 설교입니다. 지난 설교의 마지막을 기억하시나요? 예레미야 39장에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함락 때까지 감옥에 갇혀있던 예레미야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나라가 망한 후, 예루살렘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만이 남아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족과 귀족이나 일반 백성 대부분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의 식민지가 된 유대 땅에는 ‘그다랴’가

총독이 되어 통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도 그곳으로 가서 함께 살기로 합니다. 전쟁 후 새롭게 세워져 가는 공동체에, 전쟁을 피해 근처 나라로 피신해있던 무리들도 조금씩 모여들게 됩니다. 미스바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재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전쟁으로 황폐했던 도시가 새롭게 재건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안정적인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 공동체에 갈등이 찾아옵니다. 이곳에 함께한 사람 가운데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의 종친’으로서 다윗 가문 출신의 사람입니다. 원래 남유다는 다윗의 후손들만 왕이 되는 하나의 왕조였죠. 나라가 망했고 새롭게 총독이 세워졌지만, 사람들 가운데 다윗 가문이 아닌 총독 그다랴를 인정하지 않고, 왕족인 이스마엘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상 기류를 눈치챈 그다랴의 부하 요하난은 이스마엘을 따르는 사람들의 쿠데타 움직임에 대해서 보고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먼저 이스마엘 일파를 제거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다랴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제 막 회복되어 가는 재건 공동체에 위험한 기운이 돌기 시작합니다. [41장] (렘 41:1) 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렘 41:2)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우려했던

사건이 곧바로 터집니다. 앞서 언급한 다윗 왕조에 속한 이스마엘이 자신의 부하 10명을 데리고 그다랴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식사 중에 그를 죽입니다. 식사 중에 죽였다는 것은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속이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그다랴만 살해한 것이 아니라, 그다랴를 따르는 유대인도 죽입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이 유대 지역의 치안을 위해 주둔한 병사들도 다 죽입니다. 그다랴는 바벨론이 세운 총독이죠. 바벨론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 기회에

없애버리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세운 총독과 주둔한 병사들을 죽였으니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죠. 이스마엘 무리는 바벨론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미스바에 있는 백성들을 사로잡아 옆 나라 암몬으로 도망하려고 합니다. 그다랴의 부하인 요하난은 전열을 가다듬고 암몬으로 향하는 이스마엘을 공격하여 그가 사로잡아 가던 사람들을 구출해 옵니다. 그렇게 이제 유대인 공동체의 새로운 리더로 요하난이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도 이 상황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애굽으로 피난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이 유다 멸망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42장] 이런 상황에서 요하난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렘 42:2)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렘 42: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이들은 두 번이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라는 표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렘 42:4)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예레미야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 말을 받아서 대답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요하난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주님과 더 가깝다고 느껴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하나님은 아닌 듯한 말투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주인 됨이 그들 가운데 온전히 고백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기도요청을

하면서 “목사님의 하나님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다면, “아닙니다. 성도님의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있어야 성도님을 통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 숨어있는 디테일은 백성들이 ‘우리를 위하여’ 답을 달라고 요청한 것에 반하여,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겠다’고 답합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지만, 예레미야는 굉장히 정확하고 돌직구를 날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이 예언자로서 가장 정직하고

올바른 태도임을 아는 것입니다. 예언은 들은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해야 하는 것이죠. 그는 자신이 전한 예언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예상되더라도 그것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자로서 예레미야는 사명에 충실한 모습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구할 때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마음은 ‘내려놓음’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정당성을 얻으려 합니다. 이미 원하는 것을 정해놓고,

하나님이 그에 맞는 대답을 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의 태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하는 것이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훈련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컨펌’ 받는 용도로 사용하죠. 때로는 내 뜻을 꺾기보다, 내 뜻대로 응답 될 때까지 조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기도할 때 먼저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내 힘을 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명상과 묵상의 차이로 이것을 설명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이 복잡하면 ‘명상’을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명상이나 묵상이나 비슷합니다. 그러나 비우는 용도가 다릅니다. 우리의 비움은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공간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저에게 여전히 훈련인데요. 20대 때부터 저는 제힘으로 뭔가를 하려는 마음과 싸우는 법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몇 번의 처절한 실패를 맛보며 제힘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하고 힘이 없는 것인지 깨달았지만, 어느새 성공의 경험들과 노하우가 쌓이면 또 제가 앞설 수 있기에 평생을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찾아온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을 약속합니다. (렘 42:5) 그들도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였다. "진실하고 신실한 증인이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맹세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예언자님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예언자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시는 말씀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렘 42:6) 우리가 예언자님을 주 우리의 하나님께 보내는 것은, 그분의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10일 후에 예레미야에게 나타납니다. 아마도 애굽으로 이미 피난하려고 마음먹은 그들에게 10일의 기다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렘

42:10) 너희가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 내가 너희를 허물지 않고 세울 것이며, 내가 너희를 뽑지 않고 심겠다.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렸으나, 이제 내가 뜻을 돌이켰다. (렘 42:11) 너희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구원하여 주고,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려고 하니,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런 것입니다. ‘도망치지 마라.’ 요하난과

백성들은 자신들이 상황을 판단하고 벌써 계획을 세워놨습니다. 하나님께 결재받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벌써 일을 다 진행해 가면서 마지막에 결재로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던 것이었어요. 그래 놓고 말은 ‘우리는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좋든 나쁘든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자신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쩌면 이 순간이 이들의 신앙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 되겠죠. (렘 42:19) 유다에 살아 남은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아시는 대로 나도 오늘 여러분에게 같은 경고를 하였습니다. (렘 42:22)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가서 정착하기를 바라는 그 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예레미야도 이들이 혹시 잘못된 판단을 할까 봐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제 이들은 결정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바벨론의 침공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는 것을 고수할 것인가? 만약

이 선택을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불편하고 기분이 나쁘지만, 자신들의 뜻을 포기할 것인가? 이 땅에 남는 것이 자신들이 보기에 더 위험해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니 그 약속을 믿고 이 땅에 남을 것인가? 여러분.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고민이지 않습니까? A를 선택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일은 아닙니다. B를 선택하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더 안 좋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서 뜻을 바꿔주실 때까지 버티며 A를 추진하는 경우도 많죠. ‘예레미야가 잘못 들었을 거야’ 이러면서 할 수도 있겠죠. 반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였다면 ‘역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야’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 많은 경우,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따르고자 마음먹고, 기도하고, 분별하여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신앙적 양심 안에서 최선의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설령 그렇게 했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잘 판단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그릇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 뜻이 아닌 정말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진실하게 고민하면서 나아간다면, 설령 잠시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주님의 계속되는 인도하심으로 결국

돌고 돌아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도록 주님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돕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묻고 듣고자 하며 나아가는 그 삶의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귀가 얇아야 합니다. 초보자의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에 집중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기도는 기도하며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설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기도자는 주변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러 들어갔다가도 결국에는 자신이 바뀌어 나오는 법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에 남겨진 이 공동체는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했을까요? [43장] (렘 43:1) 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예레미야가 온 백성에게 다 일러주었을 때에, (렘 43: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고집이

센 모든 사람이,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렘 43:3)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 것이오." 메시지가 싫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어쩌면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패턴이 나라의 멸망 후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교인 중 한 분에게, 그분이 듣기에 조금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어요. 충분히 기분이 나빴을 수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목사님이 사랑하시니까 그런 얘기도 해주시는 거죠’라고 말하는데,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감정에 지배당하는 신앙이 되면, 모든 것이 시험 거리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메신저가 싫어도 메시지는 새겨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부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들은 고집이 셌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태도가 메시지가 오기 전과 후에 너무 다르니, 그것에서 참 허탈감을 줍니다. 그들은 갑자기 예레미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룩이 꾄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것이 정말 조금 전까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사람이 맞나 싶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렘 43:5) 마침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지휘관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다가 유다 땅에서 살려고 돌아온 유다의 살아 남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렘 43:6)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들과 공주들과,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에게 맡겨 놓은 모든 사람과, 예언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까지 데리고서, (렘 43:7a) 이집트 땅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이들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사로잡아서 결국 자기들이 원래 가려고 했던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다짐하고 순종하겠다던 사람들이 이렇게 돌변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스스로에게 가져야 하는 태도는 ‘의심’과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가장 큰 실패의 요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으로 내 힘이 빠지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잘 따르는 것이 강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강한 상태가 가장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못하게 하는 상태가 되곤 합니다. 신자의 온전케 됨이란, 우리가 성인군자가 돼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더 잘 내어드리는 법을 배우고, 더 잘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성화의 거룩함은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 점점 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늘 잘 살피며, 우리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늘 점검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나는 이런 죄는 절대 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무슨 죄에든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렘 43:7b) 그들이 다바네스에 이르렀을 때에, (렘

43:8)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렘 43:9) "너는 너의 손으로 큰 돌들을 날라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 대문 앞 포장된 광장을 파고, 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돌들을 묻어라.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가끔 명하시는 것이 ‘상징적 행동’입니다. 어떤 퍼포먼스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큰 돌들을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입구 진흙 바닥에 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파묻으라’는 상징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이 파묻은 돌 위에

새로운 왕좌가 세워질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대로 바벨론은 유다를 침공하고, 이어서 애굽을 침공하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다바네스는 바벨론의 수중에 넘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도구로 유다 백성들이 의지하는 애굽을 치심으로 열방 위에 일하시는 지존자의 위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44장] (렘 44:1)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사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애굽에 간 그들에게 찾아가 말씀하십니다. 이들에게 우선 ‘남유다가 왜 망했는가?’라는 것을 질문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심판 사건은 다시 기회를 주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라의 멸망을 돌아보며 자신들이 왜 실패했는가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제가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에 내린 끔찍한 재앙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곳이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 잿더미뿐인 폐허, 유령마을이 되었다. 이는 그들이 악한 길을 따르고 유행하는 신들을 좇으며, 그것들에 제물을 바치고 예배하여 나를 진노케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날마다 너희 곁을 떠나지 않고, 내 종 예언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어 간청했다. ‘제발, 그만두어라. 내가 너무나 혐오하는 짓, 역겨운 우상숭배를

그만두어라.’ 그러나 어떠했느냐, 누구 하나 귀 기울여 듣거나 악에서 돌이켜 우상숭배를 그친 자가 있더냐?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 나의 불같은 진노를 쏟아부어, 잿더미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그곳은 잿더미뿐인 폐허 그대로다.”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삶에서 바꿔야 할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애굽을, 또한 애굽에

와서도 우상숭배를 통하여 삶의 길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며 그를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며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애굽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이런 예레미야의 말에,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들은 도리어 이렇게 주장합니다. “유다가 언제부터 어려움에 빠졌는지 아는가? 원래 우리 조상들이 ‘하늘의 여왕’을

섬기며 살 때는 풍족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하늘 여왕 숭배가 중지) 예전에 좋았던 시절에 우리 조상과 왕과 고관들이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그 전통을 지킬 것이다. 그 시절에 우리는 유복했고, 먹을 것이 많았고, 살림살이도 넉넉했고, 불운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여왕’을 섬기는 일을 그만둔 뒤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다의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신들의 잘못에서 이유를 찾은 것이 아니라,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그때는 나라가 괜찮았는데 종교개혁을 한다고 하며, 우리가 전통적으로 섬기던 행위들을 다 막은 뒤부터 나라가 망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다시 말합니다. “아닙니다. 유다에 재앙이 닥친 것은 여러분들의 악한 행실과 역겨운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늘 보고 계셨는데, 더는 참아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그 땅이 황무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했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고, 언약의 조건들을

무시하며 살았기 때문에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하늘의 여왕’을 예배하고 그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들의 말 가운데 누구 말대로 되었는가 알게 하겠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시 심판에 대한 경고를 주시는 장면이 44장의 메시지입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폐허가 되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도 도시를 재건하는 듯하다가, 또 분열되었고, 이제는 애굽으로 도망하여 왔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이미 결정한 내용을 꺾지 않고 실행합니다. 예레미야는 마치 포로처럼 애굽으로 강제로 데려왔습니다. 애굽에 와서는 다시 예전의 우상숭배를 되풀이합니다. 이제는 요시야의 종교개혁 이전의 죄악으로까지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남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백성들이 보게 되었을 때, 이제는 유다의 멸망이 현실이 된 것을 보았으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기대하면서 예레미야서를 읽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에서 길을 찾고자 하면서도, 사실상 말씀에서 길을 찾고자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뜻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할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믿고 가는 것입니다. 내 뜻과 맞지 않지만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존재를 믿기에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 그분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남유다의

멸망은 구약 역사에서 굉장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다윗 왕조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그들을 쫓아내면서까지 충격을 주어서라도 깨닫게 하시려는 구약 전체에서 가장 큰 울림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는 유다의 멸망과 포로 사건을 통해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돌이킵니다. 다시 하나님을 붙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이 해오던 악행을 반복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에게서는 답을

찾지 않겠다는 듯 외면합니다. 사실 저는 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대가로 내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는 내가 주권을 갖고 +a로 종교의 어떤 것을 받아들이거나 수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존재와 주권을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자기중심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장 하기 싫은 일이 ‘회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그저 도움만 주면서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는, 혹은 약간의 정성과 제물을 드리면 그 대가로 내가 필요한 어떤 것을 주는 그런 부류의 신을 찾아서 거래하듯 예배합니다. 적어도 신과 내가 같은 선상에서 뭔가를 논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상숭배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숭배가 아닙니다. 내가 더 우위에 있고, 신은 ‘램프의 요정’과 같이 군말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능력만 발휘해주면 되는 그런

존재이길 기대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러므로 우상과 자신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못 견뎌 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장 가르치고 싶었던 첫 번째 계명인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유일한 내가 따라갈 대상으로 인정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성경에서 그런 별명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 가운데 ‘다윗’이 있었죠. 다윗도 잘못을

저지르죠. 그리고 성경은 그 다윗의 잘못을 폭로해버립니다. 그래서 그를 환상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번뇌하고 고민하는 인물로 끌어내립니다. 그런데 그러하기에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기 위해 나아갔는지도 보게 되고, 우리도 같은 고민과 어려움 속에서 다윗을 바라보며 따라가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시 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유다에 있든지,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가 있든지, 아니면 애굽에 있든지 그곳에도 계시며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서의 예언들도 언뜻 보면 ‘또 경고하시는구나’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사실 우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에게 주는 권면과 때로는 경고를 나를 향한 인도하심과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 늘 동행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