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하나님 마음 헤아리기" / 강정규 목사

2024-07-28 · 예레미야 34~3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성경 66권은 모두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책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언약’ 혹은 ‘옛 언약’의 완전한 실패에 해당하는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을 담고 있기도 하며, ‘새 언약’의 소망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예레미야서가 감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 속한 백성들의 실패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약의 시대에서도

동일한 실패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구약을 잊은 백성에게 신약에 합당한 삶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는 이제 막 기독교 신앙을 배워가는 영적으로 혹은 성경 지식적으로 초보부터 나름 이제 제법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분들까지 함께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의 설교를 통해 ‘옛 언약의 실패’와 ‘새 언약의 소망’까지 다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역사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인격적인 사귐의 대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이 없는 상태에서 진정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을 때, 창조주가 원래 주고 싶은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왜곡되지 않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고,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대해서도 주인 된 마음으로 바라보고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최초의 언약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그에게 주시고, 그곳을 다스리는 사명도 주시고, 아담의 삶을 통해 예배받으시며 살아갔습니다. 약속된 관계 안에서 약속에 성실하고 약속의 대상자에게 헌신한 관계로 살아가면 그것이 서로에 대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결혼이 가진 서로 안의 약속에 대해 성실하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헌신 속에 살아가면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인간의 예배란, 단순히 예배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창조의 관계와 그 질서 안에서, 우리의 자리와 위치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저에게 이 반지가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그냥 귀금속입니다. 그러나 언약이 담겨있을 때, 이것은 언약의 상징물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손가락에서 빼서 집어 던지면, 이것은 이 언약의 대상자에게 상처를 주고, 언약의 대상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 있어서, 그 언약의 징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거하는 것이 예배하는 것이고, 그에게 맡겨진 세상을 돌보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담의 예배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최초의 언약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과 하와의 배신으로 깨집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 결정권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선택도 가능하게 합니다. 언약에 대한 첫 번째 실패도 그것이었고, 이후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저지른 죄도 모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 중심된 삶을 거부한 ‘자기중심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거부 내지 반항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죄’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우리를

향한 뜻과 마음을 저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포기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을 어겼지만, 구원의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가 시작된 것이죠. 아담의 후손은 이제 이 세상에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복된 삶을 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언약이 깨어질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지로 유지된 것입니다. 복이

뭘까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도대체 뭐가 복이란 말입니까. 사람들이 이 복을 자꾸 자기중심적 신앙 안에서 변질시켜서, 내가 주인 된 삶 안에 하나님이 뭔가를 도와주셔서 내가 원하는 것이 성취되면 그것이 마치 ‘복’인 것처럼 탈바꿈시킨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잘되면 복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복이 아닙니다. 저는 자기 뜻대로 사는 인생이 잘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저주가 되기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 계속 만족을 얻으면 그것은 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랜 세월 사람들과 관계하시다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시작한 세상에 하나님의 ‘모델 백성, 모델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를 실행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사명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이어집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죠. 야곱의 가족들이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 족속이 창세기 마지막에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그들을 이스라엘 후손들 혹은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애굽 안에서 이제는 민족을 이룰 수 있는 숫자로 번성하게 된 이스라엘은, 애굽 내부의 쿠데타를 통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핍박받는 노예 계층이 됩니다. 깨어진 세상의 어두움은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고, 애굽은 히브리 사람들을 잠재적인 위협 군으로 분류하고 찍어 누르기 시작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하시며, ‘모세’를 통해 이제 이 백성을 세상의 피라미드에서 구원하셔서 새로운 여정으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렇게 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고, 하나님은 그들을 이끌어서 ‘시내산’으로 부르십니다. 이들의 리더인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이자,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니까요, 실제로 성경은 모세를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지킬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도 정확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면(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가라는 곳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함께하신다(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은 이것을 맹세하는 언약식을 당시 아브라함의 시대와 문화적 상황 안에 있는 방식으로 행하시며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당시 부족끼리 동맹을 맺고 하나가 될 때, 짐승을 쪼개고 그사이를 함께 걸어갑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환경을 조성하시고 언약하세요.

아브라함은 그것을 보면서 이 언약이 어떤 의미의 것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이 짐승의 쪼개짐처럼 죽음을 각오하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도 그만큼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지킬게.’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믿음을 다른 말로 바꾸면, 충성이고, 신실함입니다. 마음에 중심 하나가 있으면 그것은 ‘충성 충(忠)’이

됩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유일한 주인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중심이 2개가 되면 어떤 글자가 됩니까? ‘근심 환(患)’이 됩니다. 제가 참된 믿음으로 가기 전에 우리 안에 근심이 생긴다고 말하는 이유는, 온전히 나에게만 충성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주도권 싸움’을 합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근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온전하게 내려놓으면 비로소 하나님이 내 삶의

유일한 주인 된 상태, 그 상태가 주는 진짜 평안함, 샬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를 깨닫고 기꺼이 내 삶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과 이러한 충성과 믿음을 약속하는 언약을 시내산에서 맺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언약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의 시대와 문화의 요소를 활용하셔서 이들과 언약하십니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 장면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봉신 조약’ 형식과

유사합니다. 구약학자 샌드라 리히터(Sandra L. Richter)는 고대 근동에서 시행되던 ‘유사 혈연관계’ 사상을 이해해야 이 언약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사 혈연관계는 ‘결혼’이나 ‘입양’과 같이 혈족이 아닌 두 당사자가 ‘맹세’를 통하여 가족처럼 행동하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당시 국가나 부족 사이에서 이런 조약이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종주권 조약의 양식과 출애굽기의 시내산 언약의 양식은 동일합니다. 고대 근동의 봉신

조약은 종주와 봉신 사이의 언약인데, 하나님이 ‘종주’로서 봉신을 지켜주고, 이스라엘이 ‘봉신’으로서 하나님께 충성을 약속하는 방식입니다. 언약에 신실하다는 것은 봉신이 충성이라는 조약을 지키면 그에 합당한 ‘복’을 내려야 하고, 만약 봉신이 언약을 위반하면 ‘저주’를 내려야 합니다. 심판이나 형벌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하는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만 충성(주되심)해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받으실 권리입니다. 그들의 충성된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말로 ‘예배’입니다. 창조질서라는 창조주의 뜻에 맞는 삶이 예배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아닌 평일에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겠다는 약속에 어긋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합니다. 왜 합니까? 구약에서 가르친 명령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 본뜻은 돈을 주인 삼지 않겠고, 하나님 밑에 두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군가는 십일조를 세금 내듯이 합니다. 1/10을 냈으니까 내 의무를 다한 것이고 9/10에 대해서는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세금이죠. 십일조 정신은 10/10이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임을 고백하며, 1/10은 그 고백의 대표성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9/10를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십일조의 완성은 사실 9/10를 사용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에 있습니다. 주일성수의 완성도 6일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는 것에 있는 법입니다. 감사하게도 회심한 후 삶의 태도를 바꾸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의 방식대로 행했던 사업의 어떤 부분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하려고 하니 손해가 있습니다. 내가 불성실하고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받는 손해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기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안에 힘듦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다가 사업이 어려워졌는데요’, ‘저는 그렇게

살다가 회사에서 승진이 안 되는데요.’ 우리가 그때 해야 할 것은 서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서로 힘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켜내도록. 저도 그런 여러분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런 여러분의 믿음의 걸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우리는 스스로 물어보셔야 합니다. 만약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다 잘 되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더 의지했을까? 물론 저는 꼭 어려워야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어려울 때 더 많이 하나님의 의지하는 것은 사실이기에, 내가 나의 일에 너무 분주해지고, 나의 성취에 주목하는 상황은 신앙에서는 위기일 수 있어요. 혹시 여러분 중에서 지금의 시간이 그런 ‘어려움의 시간’이라면,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은 무엇일지를 한번 고민해보며, 우리가 그분을 조금 더 신뢰하며 걸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적어도 우리의 위기는 기회가 될 것이고, 우리의 현재적 어려움은 내 삶 전체를 볼 때, 하나님과

더욱 동행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힌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다른 모든 것을 누리고 있어도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해드린 이런 이야기가 구약의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된 그런 이야기였어요. 이스라엘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고 나서,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내내 그 싸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해야 ‘율법과 성막’이 왜 등장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과 ‘성막’은 모두 언약의 산물입니다. ‘결혼반지’와 같다고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시내산 언약에서 서로가 해야 할 약속이 있었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럼, 그 약속이 삶에 이어지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해주셔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신이고 초월적인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신 것이 ‘성막’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반지가 중요합니까? 결혼반지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상징물이지, 이것을 끼고 있다고 제가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마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킬 때도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지, 율법을 자신들의 뜻대로, 자신들의 편의대로 지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 했잖아요’ 말하지만, ‘내가 언제 그것을 원했니?’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또한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도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조차 의무로, 혹은 마음 없는 종교적 행위로 대체해버립니다. 사실 하나님은 성막이나 성전이라는 인간의 어떤

요소에 거하실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이시며 우리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그분이 함께하시며 예배 받으시는 것 자체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약속하셨기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고 싶은 삶이 있으셨어요. 복된 삶을 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깨어진 세상에서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아프고 깨어지고 마음이 공허하고 갈라진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생명이고, 생수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분께로 가면 우리가 채워지고 더 나아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되지만, 사탄은 깨어진 세상의 달콤하지만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들로 우리를 유혹하며, ‘그래도 여긴 네가 주인이잖아’ 하면서 붙잡아 둡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보면서

더 괴로운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본 분이라면 다 아는 감정이에요. 자녀가 자기를 상하게 하는 삶을 계속 살고 있어요. 그래서 바로 잡아주려면 간섭하지 말래요. 그러면서 괴롭게 살아가요. 부모도 마음이 아프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도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옵션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3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우선 기다려주세요. 이것은 자정능력을 믿어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니까요.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기다림입니다. 왜냐하면 가끔 어떤 계기 속에서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답을 찾는 노력과 성찰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시야 왕의 이야기가 이것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성전을 보수공사 하다가 신명기 말씀의 두루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말씀을 보니, 자신과 남유다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런 돌이킴을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히죠.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예레미야도 있고, 그의 동역자로서 예언을 받아 적은 서기관 바룩이 있었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은 어디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다 망가져도 하나님의 뜻을 쫓는 사람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들의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둘째, 깨우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셔서, 또한 이런저런 방법으로, 지금 우리로 따지면 예배를 통해서 깨닫게 하세요. 예레미야가 사역했던 시대에도 오늘 본문으로 삼은 35장에 보면, 요시야 다음 왕인 여호야김 때부터 이미 나라는 다시 망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레갑 족속’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신앙을 테스트합니다. 레갑 사람들을 따로 불러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권한 것입니다. 그런데 레갑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요. (렘 35:6)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렘 35:7)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그들의 조상 중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그 자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고, 포도원 소유도 하지 말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손들이 실제로 여러 불편함이 있고 손해가 있지만 조상의 명령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포도주를 권해서 정말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지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의 자손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세요.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35: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이렇게 엄수되고 있다. 그 자손은 조상이 내린 명령에 순종해서, 이 날까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직접 말하고, 또 거듭하여 말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렘 35:15) 나는 내 종 예언자들을 모두 너희에게 보내고, 또 거듭하여 보내면서 권고하였다.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행실을 고치고,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였고, 그래야만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너무 속상하신 것이죠. 사람과의 약속도 지키며 살아가는데,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해서 무시하고,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는데도 듣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을 때면 지금도 말씀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청산’입니다. 이 청산은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한 마음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그냥 약속을 깬 사람들을 포기하셔도 됩니다. 이 언약적 관계가 깨어지고 망가진 일의 귀책 사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고 싶으십니다. 그래서 잘못을 ‘청산’하도록 방법을 마련해 주십니다. 예레미야서는 예언 모음집이라서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34장의

이야기는 남유다의 마지막 때인데요. 하나님께서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에게 예레미야를 보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드기야야, 이제 끝났다. 곧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실제로 지금 바벨론이 유다의 도시를 하나씩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해 오는 순간입니다. 시드기야가 처할 운명을 하나님이 알려주시며 준비시킵니다. 항복해야 시드기야도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알려주세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시드기야에게 한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명하세요. (렘 34:13)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이렇게 명하였다. (렘 34:14)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렘 34:15)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너희가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것을 왜 명령하셨냐면, 원래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면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이 있었어요. 7년마다 ‘안식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노예를 풀어주는 법입니다. 또 50년이 되면 ‘희년’을

선포해서 모든 저당 잡힌 땅도 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서 ‘리셋’하는 것을 명령하셨어요. 이것이 이스라엘이 삶의 전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어쩌면 가장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도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어요. 왜요? 아깝거든요. 내 노예 내보내려니 막상 아깝고, 내가 지금껏 모은 땅 다 포기하려니 아까워요. 땅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은 분명 왕과 고관들일텐데, 다시 처음 배분한 것으로만 살아가야 하니, 결정권자들이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모두를 땅이 없는 상태로 원위치시킨 사건이 ‘바벨론 포로’입니다. 리셋이죠. 그래도 그 전에 노예를 해방하는 명령을 다시 주시며 이 부분의 죄를 청산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레미야를 보내어 시드기야의 미래를 알려주시며 충분히 위로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지금이라도 지키면, 포로로 끌려가도 평안하게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 국가가 곧 멸망하니,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명령을 순종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34장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시드기야가 정말로 노예 해방을 합니다. 고관들도 다 불러 모아서 하나님 앞에서 언약하며 모든 노예의 자유를 선포합니다. 드디어 사람이 마지막 때가 되니까 정신을 차린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당시에는 노예는 군인이 될 수 없고, 시민들만 군대에 편입됩니다. 그러니까 전쟁 상황에서 노예를 해방해서 군인으로 징집하려는 다른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노예 해방은 하나님 뜻에 순종한 것이니 잘한 일이라고

봐야겠죠. 드디어 하나님의 뜻에 마지막 기회에서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군대가 북진하는 애굽의 군대를 막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한 포위 공격을 잠시 멈추게 됩니다. 포위가 풀리자 왕과 고관들은 이전에 해방했던 노예를 붙잡아 종으로 삼아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노예 해방을 서약하고도, 상황이 바뀌자 자신들의 유익에 맞는 것을 택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또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벨론의 최후 공격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결말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결국 구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바벨론 포로 사건’은 구약 전체에 만연한 ‘유다의 죄를 청산하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청산은 다시 기회를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행동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처음에 가볍게 볼 때는 신약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여도,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이 보고 자세히 보면, 구약의 하나님은 구질구질하실

정도로 우리와의 관계에 목을 매시는 분입니다. 자존심도 없으세요. 하나님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그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가고, 어떻게든 여지를 남기려고 별의별 일을 다 하십니다. 왜 그러겠어요. 더 사랑하는 책임뿐입니다. 더 사랑한 죄이죠.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이 시기는 기다림도 이제 끝났고, 가르침도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시대였어요. 예레미야의 마지막 외침도 듣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이제 포기하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지난 설교에서 얘기했죠. 신실함은 고상한 표현이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미련 가득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냥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마음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다고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신실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지켜가며 다시 한번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오게 하시려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할 때, 때로는 ‘제한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더 마음을 가볍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서, 스포츠팀에서 누가 어떤 잘못을 하고 팀에 손해를 끼쳤어요. 그를 팀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때, 용서도 하지만, 대신 네가 ‘한 달간 운동 후 뒷정리해’라고 말하는 것은 징벌이기도 하지만, 온전히 용서하고 뒤끝 없이 죄책감 없이 다시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런 마음으로 이를 악무시고 회초리를

대십니다. 바벨론의 회초리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바벨론이 가진 폭력성은 그들의 죄성이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가르침의 일부분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죠. 사실 여러분이 살면서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주시는 것은 거의 없어요. 그러나 깨어진 세상의 죄성은 서로를 아프게 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세상의 깨어짐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때때로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기도 합니다. 보호하시기도 하지만, 깨닫게 하는 돌이킴의 사건으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 아픔의 순간, 여러분을 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은 함께, 아니 어쩌면 더 아픔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아픔을 통해 성장하고, 그 아픔 가운데 깨닫고, 그 아픔 가운데 주님을 찾아가도록 곁에서 늘 돕는 분이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지만, 그것의 절반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어려움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절반은 그렇게밖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기에 함께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2주 전에는 그런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막는 거짓 선지자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는가?’ 네. 성경에 보면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고, 두 번째로 ‘주어진 예언의 성취’를 통해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예언을 듣고 백성들이 ‘분별’할 수 있었는가? 네.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기준이 되는 말씀’이 있었어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있었지요. 예레미야의 사역은 요시야 왕부터입니다. 요시야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보았을 때, 그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자신과 국가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질문이 생기죠. 왜 요시야가 죽자마자 사람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을까요? 말씀대로 사는 삶이 귀찮고 어렵고, 자기가 중심되어 살아가던 삶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가 왕으로 끌고 나가며 행하니까 따라갔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리더가 사라지자 다시 편한 삶으로 순식간에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요시야

시대에 되찾은 말씀이 그 후 다시 분실되지 않았습니다. 즉, 예레미야 사역 시기에 사람들이 말씀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거짓 예언자를 따랐을까요? 그 이유는 사실 우리는 이미 ‘원하는 것’이 다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말씀을 못 봐서 말씀대로 분별하지 않고 살지 않을까요? 아니요. 이미 각자가 원하는 것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원하는 말씀이 아니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우리는 말씀을 마주하며 내 삶을 바꿔야 하는 도전과 부담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만약 옆에 거짓 선지자처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된다고 지지해주는 종교인이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좋아하고 따를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지지해주는 답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위험한 신앙적 싸움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삶은 너무 안타깝고 방황하고 있는 삶입니다. 생명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삶입니다.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탄은 늘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덮고 진리를 보지 못하게, 진리를 향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보내줘도 하나냐를 따라갑니다. 이렇게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 자신들이 믿었던 것이 거짓 예언임을 깨달았을까요? ‘예언의 성취’를 볼 때 비로소 정확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냐의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고, 우리가 무시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이 진짜였구나! 성전이 파괴되고, 다윗의

후손인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왕은 두 눈을 뽑혀서 끌려가고, 예루살렘이 불타던 그때.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에 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슴 아프지만, 이 일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도 ‘말씀’을 기준 삼아서 깨닫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말씀의 성취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소 내가 믿었던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거짓된 가르침 편에 서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이 더 유리한가,

지금 우리가 더 분별에 유리한가? 저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과거도 볼 수 있고, 성경도 누구나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환경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제가 전하는 말씀의 이야기를 듣고, 의심이 생기는 분이 있다면, 그 의심을 진짜로 풀어보기 위한 마음으로라도 성경을 펴서 보시길 바래요. 내 삶의 답이 여기에 있는데 왜 이건 옆으로 미뤄놓고 내 생각과 판단을 기준 삼아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말씀에서

답을 찾고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가야 합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게 된 그 시점부터, 포로가 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뒤늦게 기억해 내고자, 공유하고자 애썼을 것입니다. 그들이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이야기가, 사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외쳤던 목소리였다는 것을, 예레미야는 온갖 고초 속에서 그것을 신실하게 전하기 위해 힘썼던 사람임을 그들은 포로기에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남아 있는 소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새

언약.’ 그렇습니다. (렘 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때 그들에게 예레미야에 있는 새 언약은 세상 어디서도 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을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처녀라고 부릅니다. 새롭게 시작하시려는 마음이죠. “내가 너희를 여전히 사랑한다. 내가 너희에게 회초리를 들었지만, 내가 너희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며,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온 너희와 다시 언약을 갱신하고, 실패를 극복하고 살고 싶단다.”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여전히 거짓 예언의 영향 아래서, 이 사건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무능력해서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도 무너졌으니 하나님의 패배라고, 하나님은 이제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메시지를 다시 되새겨보니, 하나님께서 이제는 율법과 성전의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거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는 일들이며, 바벨론 포로 사건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약속한 ‘회복’ 또한 성취될 진짜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붙잡고 사느냐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만약 오늘 제가 전해드린 구약의 메시지를 듣고,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분들이 있다면, 저는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다가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회심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율법과 성막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동행하심을 누리는 것이 ‘새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때로는 기다려주시고, 때로는 가르치시고, 때로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바벨론을 사용하셨듯,

깨어진 세상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돌이키고 계십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사건을 겪은 모두가 깨달았는가? 모두 돌아왔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 가운데 ‘누군가는’ 겸손해져서, 돌같이 굳은 마음 가운데 ‘누군가는’ 마음이 열려서 돌아왔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완고함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 내 삶의 결정권자, 내 삶의 기준이 되어있는 사람은 못 돌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내 모습을 지금이라도 발견했다면, 깨닫는 것이 기회이고,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의 기다림 앞에, 주님의 깨우침 앞에, 청산하고 싶지 않아서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오늘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로 나아가 동행하며 참된 삶으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