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존재가 복음인 교회” / 강정규 목사

2024-08-02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금요기도회) "존재가 복음인 교회" _ 우리가 꿈꾸는 교회.3 (2024.08.02) _ 강정규 목사 _ 양주 옥정 사귐의교회 한국교회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을 했고, 모든 교파별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다 한국에 있다고 말할 정도의 중흥기를 경험했습니다. 80~90년대에는 교회를 개척하면 대부분의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나라에서 한국교회를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200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가장

빠르게 쇠퇴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자료를 보여드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우리는 몸소 체감하고 있지요. 저도 교회를 개척하고 한동안 일하고 목회하는 것에만 매진하는 삶을 살아서, 시야가 매우 좁은 상태로 몇 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교회 밖에 볼 수 없었죠. 우리는 개척 후 더디더라도 계속 성장을 했기에, 비교적 쉽게 교회 개척에 대해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자립하면서부터 저도 일하는 목회자의 삶을 정리하고 목회만 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더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며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보다 더 심각한 현재 한국교회의 여러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교회에 대해서, 특별히 교회 개척에 대해서 말할 때면, 조금은 조심하게 된 측면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개척해야 하는 목회자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인데, 제가 자칫 너무 헛된 기대를 불어넣어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코로나를 지나면서 한국교회 안에는 말 그대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개교회의 가르침과

분위기에 익숙했던 성도들이 교회 울타리 밖의 것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 것이죠. 예전에는 다른 교회 설교를 들을 일도 많지 않았고, 그래서 설교와 예배에 대한 객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관적으로 그저 자기가 속한 곳에서만 설교를 듣고, 거기서 드리는 예배에 익숙하게 살아갈 뿐이었죠. 이제 울타리를 넘어 서로 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많은 상황이 변화되었고,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나쁜 점은 우선 많은 사람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설교’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도 있고, 온라인에서 설교 듣는 것이 예배를 드린 것으로 대체되어 버린 경우도 생겼죠. 신앙에 있어서는 한 발 더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코로나 이전에 비해 현장에서 예배하는 예배자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죠. 그것은 교회의 생존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교회의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이왕이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곳으로 선택이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코로나의 공백으로 인해 다시 교회로 돌아갈 때,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크고 유명한 교회는 대부분 다 성장했습니다. 애매한 교회들이 어려워진 것이죠. 개척교회는 이러나저러나 어렵고요. 그러나 좋은 측면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의 길도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좋은 건물을 가진 교회와 상가교회는 그냥 급이 다른 교회로 취급받았습니다. 하드웨어가 눈에 보이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상가교회에 들어가서 말씀을 들으려면 대단한

결심도 필요했죠. 그런데 적어도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더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드웨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도 좀 그렇고, 공동체도 좀 그런데, 그래도 하드웨어가 주는 여러 이점이 있으니까, 그것으로 교회를 결정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죠. 일단 예배당이 커야 마음에 부담이 적어지는 분들도 있고요. 하지만 하드웨어는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있으면 좋겠으나, 결코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라는 것은 자본력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습니다. 부교역자도 스카우트할 수 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도 쉽게 접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다 구색을 잘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이 세상에서 돈이 많은 것을 주기도 하지만, 돈이 주지 못하는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본질적인 것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제가 가끔 쓰는 예화가 있어요. 돈이 ‘대저택’을 줄 수는 있지만,

행복한 가정을 주지는 못하죠. 돈이 ‘좋은 침대’를 줄 수도 있지만, 평안한 잠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표를 잘 보면 역설적인 결과가 많습니다. 도시화가 잘 진행된 소위 ‘부촌’일수록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우울증 등 정서적인 질병은 올라갑니다. 더 잘사는 동네일수록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피라미드 기준이 더 강하게 적용되는 곳에 있으니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교회에 못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습니다. 일단 참된 복음을 돈으로

갖출 수 없습니다. 좋은 영상자료도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송출하는 좋은 미디어 기기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복음과 진리라는 본질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공동체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나요?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 돈으로 되나요? 구색은 갖출 수는 있지만, 그 원동력이 다른 것에 있으면 그것 때문에 결국 무너집니다. 세상 친구도 돈으로 사귄 친구면 돈 없으면 다 떠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짜 교회는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규모가 커진다고 되나요? 혹은 작다고 또 다 되나요? 이것은 규모의 어떠함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가짜가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지도 않습니다. 진짜 교회를 원하면, 진짜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짜 교회를 꿈꾸고 배우고 갈망하며 성령님을 의지하여 함께 이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대를 읽어야 합니다. 80년대 이전에는 교회에 와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악기나 노래도 배우려면 교회를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교회에

가야 세상에 없는 더 재미있는 문화와 놀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노래방’이 보편화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실제로 제 친구들도 ‘교회 다니는 사람 =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노래를 부르는 일이나, 악기를 다루는 일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았으니까요. 제 조금 윗세대에서 음악을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교회를 겉으로라도 다니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런 여러 사회적 요인 때문으로라도,

경험을 위해서라도, 교회에 오던 시절이 있었죠. 교회가 세상의 문화를 선도하는 시절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껏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의 교회를 지탱하는 여러 가지가 이제 다 힘을 잃었어요. 물론 여기에는 애초에 거품 같은 것도 많고, 신앙을 왜곡시키는 비본질적인 요소들도 많았기에, 그런 것이 교회에 없으므로 함께 빠져나간 신자들이라면, 그 감소를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쉽게 말해서, 80~90년대 한국 사회의 탑 오피니언들,

심지어 대통령들도 그렇죠. 혹은 여러 부자들이나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간증하던 것처럼, 나를 성공시키는 비결로 교회를 언급하는 것 때문에 기대심으로 교회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부흥인가? 애초에 그것이 부흥이 아니었던 것이죠. 물론 그 시대에 저도 목회를 했다면, 그런 흐름과 물결 속에서 목회했겠고, 어쩌면 더 달콤한 열매들도 맛봤겠지만, 그것이 사실 저를 더 병들게 했을 확률은 대단히 높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독교의 쇠퇴기를 맞이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 교회의 본질을 고민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는 이제 사양산업인가? 재미있게도 신학교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2001년은 한국교회 중흥기의 끝자락이었기에 신학을 하려는 사람이 엄청났고, 경쟁률이나 학과의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신학교 재수 삼수도 꽤 많았고, 각 교단별로 가장 좋은 신대원에 가기 위한 경쟁은 너무

거세서 입시 학원이 별도로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사실상 경쟁률 1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장학금을 주면서 학교를 오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럼, 교회는 어떤가요? 교인이 줄기 때문에 교회의 수적 감소는 당연합니다. 앞으로 더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폭락은 교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때 우리나라에 2만 개가 넘었던 피시방이 지금 7,000개가 됐습니다. 20년 만에 1/3로 줄었어요. 그거에 비하면 교회는 아직 덜 줄었고 완만하게 줄어든

편입니다. 한때의 지나친 성장세에서 거품이 많이 빠졌지만, 모든 것이 거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회의 전체적인 규모의 축소가 ‘신앙의 축소’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회가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러기에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폐기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다른 것이 더 소중해서 교회에 왔던 비율은 다 빠져나가겠지만, 정말로 삶에 대한 갈망함과 신앙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해나갈 공동체를 찾고 있는 것이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간절하게 말입니다. 세상은 너무 깨어져서, 우리를 점점 더 힘들게 하고, 우리를 허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삶과 세상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한계를 보고, 이 세상에 진정한 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찾고 찾다가 복음의 진리로 귀결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탄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깊이

삶을 생각해 볼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뭔가를 계속 던져줘서 우리가 이리로 우르르, 저리로 우르르 따라가게 합니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진정한 필요인 것처럼 속이지만, 지나고 보면 다 한때의 유행인 것들도 많습니다. 세상은 교회 때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파리 올림픽이 진행 중인데, 개막식에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했죠. 트랜스젠더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마음이 아픈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깨어진 세상의 특징입니다. 깨어진 세상은 본질상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래서 우리도 두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참된 소속을 정하고,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나그네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종종 세상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적 선택에 대해서 너무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낍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종종 너무 쉽게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서 폄하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무지함 속에 판단력 없이 교회에 있는 것처럼 여기죠. 저는 기독교 학자들을 많이 만나는 편인데, 대부분은 오히려 정말 진지하게 의미와 가치를 찾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 어떤 것 하나도 쉽게 믿지 않고 신중한 사람들입니다. 몰라서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알면 알수록 저는 새로운 답과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질문과 갈증이 해결되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는 존재상 세상의 위협이 될 수 있어 핍박받을지는 모르겠으나, 무가치해서 사라지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자체가 너무 강력하고, 매력이 있으며, 여기서 사람들은 참된 길과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겁먹은 강아지가 먼저 짖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방어하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가 세상의 여러 공격, 우리의 규모적 축소, 혹은 우리 안에서 걸러내야 할 것들이 드러나는 일 등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냥 교회다우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외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진짜 교회다운가에 있어요. 교회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외부적인 요소들도 무익합니다. 규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얼마나 커지는가에 있지 않아요. 영혼의 구원이 일어나고 있는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죠. 작다고 무조건 안전한 것도 아니죠. 저도 크고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을 만납니다만, 규모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아요. 작다고 교회를 더 사랑하고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더 헌신하는가? 장담할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변할 위험성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우리를 점검해야 해요. 종교개혁 이후 세워진 개신교의 중요한 신조 중의 하나는,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면 됐지’가 없어요.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늘 변화되고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늘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제가 주중에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하나 적었어요. 제목은 ‘사귐의교회는….’입니다. 내가 만나본 교회 가운데 제일 좋은 교회이다. 나는 종종 말한다. 내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성도이더라도 나는 이 교회를 선택해서 다녔을 것이라고. 최근에도 누군가와 식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마도 목사 중에 가장 좋은 성도들을 만나서 목회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것이 객관적인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우리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은 이렇다. 주일이 되면 매번 뭔가를

독려하고 더 나은 신앙을 외치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가 특별히 부족함이 많은 교회라서가 아니라, 정말 성경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자라가는 성도, 정말 성경이 꿈꾸는 교회를 세워가고자 하는 절실함이다. 아무리 9명이 잘하고 있더라도, 이 안에서 1명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신앙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이런 교회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그러나 사람의 열심으로 이루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주인 되어 역사하시는 교회라면, 정말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주님의 뜻에 충성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나는 시대에 썩 괜찮은 교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그런 교회의 일원이고 싶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라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교회. 현재의 삶에 적당한 만족을 주는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경험하는 교회. 수적 성장에 매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 전심을 다하는

교회. 나는 사귐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도록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부분에서 내 삶을 사용할 것이다. 저는 우리교회가 자랑스럽고,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감사해요. 우리는 이 시대에 제법 괜찮은 교회라고 보여지기에,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고, 또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복되기도 해요. 그러나 우리의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예배 때마다 <사명 선언문>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를 매주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사귐의교회는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날마다 추구한다.’ with God, with Neighbor라는 우리교회 로고의 부제처럼, 우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교회의 절반 공간을 ‘위드엔’이라고 부릅니다. ‘위드 네이버’를 의미하죠. 저 공간에서 우리는 함께 사귐을 누리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예배당이라고 부르지만, ‘위드지’, ‘위드갓’,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경험하고 드러낸다.’ 우리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교회를 꿈꾸고 그것이 우리교회의 최종 권위를 갖습니다. 아는 만큼 누릴 수 있으므로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며 성실히 배워가고, 머리를 키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법이 실행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입니다. 바로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는 곳이 되면, 이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교회로써 존재하며, 이곳에 있는 오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곳에서 작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 이 교회가 작은 하나님 나라로 존재하며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 모든 성도의 삶에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회심을 돕는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시작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성도를 양육한다. 회심했어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평생토록 닮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생명이 자라가는 교회란 제목으로 지난 교회론 설교에서 회심과 성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뤘습니다. •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들이 되어, 세상 모두가 원하지만, 세상에는 없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다. 교회가 교회다우면 된다고 했을 때, 적어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장 필요한 교회다움은 바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본질상 가장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어요.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는 모두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경험하는 것처럼, 깨어진 세상에서는 먼저 사랑하면 그만큼 배신당하고 상처 입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사랑하지 않도록, 상대방과 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모두 먼저 사랑하려다 더 상처 입은 경험이 있기에 사랑하고 싶지만 상처받지 않으려고 거리를 둡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켜내지만 동시에 외롭고, 두렵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내 마음을 주면, 그러나 그만큼 돌려받지 못하면 공허해질까 봐 우리는 선뜻 마음 다해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가능하게끔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만, 우리는 사랑할 용기를 낼 수 있죠. 이것이 세상이 못하는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자 이유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용기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근본인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사랑으로 채울 때, 우리는 그분을 믿고 상처를 각오하고 내 마음을 먼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세상 사람들에게는 물음표를 던지고 이곳에 속한 사람들에는 느낌표를 안기는 시대를 품고 세상을 감당하는 진짜 교회로 살아간다. - 교회가 교회답게 살아갈 때, 세상에 없는 사랑의 공동체로 서로를 채워갈 때, 주님이 명하신 모습으로 하나 되어갈

때, 그런 우리를 본 세상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온갖 물음표입니다. ‘진짜 그것이 우리 인생의 답이라고? 진짜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다고?’ 어쩌면 이런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회심하여 변화 되어가는 여러분의 삶을 바라볼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관심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궁금함으로, 궁금함 가운데 복음을 만나면 그 사람도 변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한 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가 주님을 알아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사랑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없는 모습으로 사랑하면 세상이 그냥 좋아할까요? 의심합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 조건 없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분명히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이유가 있죠. 우리가 사랑할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삶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안에 늘 거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죠.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그 주님의 뜻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입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깨어지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바꾸시어 회심하게 하시고, 우리가 성장해 갈수록 점점 나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세워지죠. 그럼,

그들의 모습은 세상에 놀라움을 줍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으니까요.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서로를 사랑하니까요.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어떤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가 시작된 것도,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도 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누구에게나 가장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어디에도 줄 수

없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우리가 이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삶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진짜 교회는 주님의 꿈과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교회가 예수님을 진짜로 닮아간다면 저는 여러분이 이 어두움의 시대에 빛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은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어두움 가운데 빛을 밝혀줍니다. 저는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과 모습으로는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로 닮아갈 때, 그분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와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변화된, 변화되어 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 흩어져 있을 때, 여러분의 삶이 복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세상을 향한 기쁨의 소식, 깨어진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보고 듣고 돌아올 기쁨의 소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여서 한 몸으로 세워지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큰

외침일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복음인 교회로서 말입니다. 교회가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진짜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면 그것이 가장 큰 힘입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5%의 염분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닷물 전체가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교회의 모습이란 그런 것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 가운데 자기 백성들을 두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맛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설교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한번 같이 고백해 봅시다. “우리는 이 땅에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서, 세상 가운데 물음표를 던지고, 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느낌표를 안겨주는 주님의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