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유다의 마지막 5명의 왕들 시대 동안 사역했던 예언자입니다. 요시야 13년에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이 시기는 남유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회복된 신앙의 모습을 보였던 시간입니다. 그러나 13년 뒤에 있었던 전쟁에서 요시야가 죽게 됩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 최강자였던 앗수르가 몰락해가고 바벨론이 신흥 강호로 떠오르던 시기였습니다. 유다와 가장 밀접한 국가였던 애굽(이집트)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만년 2인자 위치였습니다. 앗수르가 쇠퇴하는 이 시기가 애굽이 드디어 최강자로 등극할 기회였던 것이죠. 즉, 앗수르가 무너지면 바벨론과 애굽이 이제 최강자 타이틀을 놓고 대결하는 구도가 된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미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있었고, 수도도 빼앗기고 ‘하란’이라는 도시에서 마지막 힘을 모아서 바벨론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애굽의 계산은 무엇이었냐면, 일단 앗수르와 손을 잡고 바벨론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바벨론만
제압하면, 이미 지고 있는 앗수르는 애굽의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최강자로 올라설 기회였던 것이죠. 남유다의 왕인 요시야는 계산이 달랐습니다. 앗수르에게 오랫동안 시달리기도 하여 앗수르에 대한 반대 정서가 강했고, 바벨론이 앗수르를 무너뜨리는 것을 도와서 바벨론의 동맹국으로 가나안 지역의 강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과 앗수르의 큰 대결에 애굽과 남유다가 껴서 싸우는 형국이 펼쳐집니다. 바벨론과 앗수르의 마지막 격돌에 참여하려고 북진하는 애굽을
남유다가 막아섭니다. 그렇게 므깃도에서 애굽과 유다의 전투가 벌어지고, 여기에서 애굽이 승리하고 요시야 왕이 죽게 됩니다. 주전 609년의 일입니다. 요시야 왕은 유다 역사에 빛나는 왕이었기에 유다는 큰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뒤이어 남유다의 왕이 됩니다. 여호아하스(요시야 아들) : 3개월 통치 이 왕은 왜 3개월만 통치했는가? 요시야를 죽게 만들고 애굽은 북진하여 바벨론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게 됩니다. 이미 남유다와의
전투에서 많은 병력 손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은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화풀이하는 것이죠. 결국 요시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애굽의 포로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이라는 왕을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세웁니다. 그렇게 남유다는 애굽의 봉신 국가가 됩니다. 여호야김(요시야 아들) : 11년 통치 애굽은 다시 바벨론과 제대로 한판을 붙기 위해 전쟁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주전 605년에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벨론 제국의 창업
군주인 나보폴라살이 죽게 된 것이죠. 바벨론의 1대 군주가 사망했으니, 리더십의 공백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애굽이 바벨론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킵니다. 나보폴라살의 아들이 느브갓네살이었고,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과 애굽이 갈그미스에서 세기의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바벨론이 승리합니다. 바벨론은 여세를 몰아서 남유다까지 침공하였죠. 남유다는 친애굽 왕조가 되어 있었죠? 바벨론이 쳐들어가서 누구의 봉신이 될 것이냐고 묻습니다. 여호야김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당연히 바벨론의 봉신이 되겠다고 서약을 하죠. 이 서약을 기념으로 바벨론이 남유다에서 총명한 젊은이들을 1차 포로로 끌고 갑니다. 여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4년 뒤에는 다시 바벨론과 애굽이 붙어서 이번에는 애굽이 이깁니다. 그래서 애굽은 다시 남유다에게 자신들의 봉신국이 되라고 합니다. 그렇게 바벨론에 대한 봉신 조약을 파기하고 조공을 보내지 않자, 바벨론이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 시기에 여호야김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남유다의 왕이 됩니다. 여호야긴(여호야김 아들) : 3개월 통치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할 때는 여호야긴이 왕이었던 것이죠. 바벨론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끌고 갑니다. 왕을 잡아가며 유력한 이들도 다 자신들의 땅으로 끌고 갑니다. 2차 포로입니다. 이때 함께 끌려간 사람 중에 에스겔이 있었던 것이죠. 그의 나이 25세였고, 후에 에스겔은 포로지에서 예언자가 되어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예레미야의 바통을 에스겔이 이어받은 것이죠. 그리고 바벨론은
다시 요시야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데, 그가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요시야 아들) : 11년 통치 바벨론의 봉신이 되어 섬기는 유다를 또 가까이 있는 애굽이 흔듭니다. 자신들의 편에 서라는 것이죠. 바벨론이 쳐들어오면 도와주겠다고 말입니다. 바벨론이 남유다에게 받고 있는 조공은 어마어마한 양이었기에 시드기야는 조공을 끊습니다. 그에 대한 심판으로 바벨론이 남유다를 쳐들어옵니다. 도와주겠다던 애굽은 모르는 체합니다. 그렇게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이 역사적 배경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은 주전 592년부터 포로지에서 예언을 하고 있었기에 에스겔은 그곳에서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럼, 왕조의 목록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것만 잘 기억해도 여러분은 구약의 후반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역 시대] · 요시야(최고의 왕) : 31년 통치 · 여호아하스(요시야아들) : 3개월 통치 · 여호야김(요시야아들) : 11년 통치 ·
여호야긴(여호야김아들) : 3개월 통치 · 시드기야(요시야아들) : 11년 통치 우리가 지난주 설교에서 나눴던 레갑 족속 이야기는 ‘여호야김’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노예 해방 명령은 ‘시드기야’ 때의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 모음집이기에 시간 순서로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예레미야의 각 예언을 시대별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36장] 예레미야서 각 장은 이 예언의 시기가 나옵니다. (렘 36:1)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유다 왕이 된 지 사 년째 되는 해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호야김은 애굽이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가며 세운 친애굽 성향의 왕입니다. 하나님은 이때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문서로 남기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렘 36:2) 너는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내가 너에게 말한 날로부터 곧 요시야의 시대부터 이 날까지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와 세계 만민을 두고 너에게 말한 모든 말을, 그 두루마리에 기록하여라.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예레미야의 소명 시기로부터 약 20년이 넘는 시간입니다. 이 예언을 기록하는 것을 돕는 자로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은 ‘네리야의 아들 바룩’입니다. 예언자와 예언서의 저자는 다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이고 바룩이 기록자입니다. (렘 36:6) 그대가 금식일에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내가 불러 준 대로 기록한 두루마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려주시오. 유다의 여러 성읍에서 온 모든 사람에게 그 말씀을 낭독하여 들려주시오. (렘 36:7)
그러면, 그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리면서, 저마다 악한 길에서 돌아올는지도 모르오. 주님께서 이 백성에게 쏟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진노와 노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이오. (렘 36:8)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부탁한 대로, 주님의 성전으로 가서 두루마리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읽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입장에서는 친애굽 정책에 반하는 매국노와 같다고 말했죠. 그러므로 그는 여러 감시를 받아서 행동의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룩을 통해 예언을 선포하도록 합니다. 예레미야는 소심하고 우울한 성향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늘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명 앞에서 늘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사명 앞에 마음이 불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유명하고 도전되는 말씀이죠.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저는
이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강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내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사명 앞에 살아가는 자가 예레미야입니다. 36장 후반부에 보면 시간이 조금 흐른 뒤의 사건인데, 바룩은 여전히 예레미야의 예언을 두루마리에 받아 적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그 예언의 두루마리 소식을 듣게 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 두루마리의 예언을 왕 앞에서 읽습니다. (렘 36:23) 그런데 여후디가 그
두루마리에서 서너 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읽은 부분을 서기관의 칼로 잘라 내어서, 난로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왕은 온 두루마리를 다 난로 불에 태웠다. (렘 36:24) 그런데 왕과 그의 신하들 모두가, 이 말씀을 다 듣고 나서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면서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왕과 신하들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왕은 듣기 싫은 소리가 나오자 칼로 예언의 두루마리를 도려내고 불에 던져 없애버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죠. 예언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메신저를 공격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므로 왕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숨기시고, 다시 왕이 없앤 두루마리의 예언을 예레미야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적게 하십니다. 말씀을 없앤다고 말씀이 없어집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힘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그 말씀이 증거되고 있지 않습니까? [37장] (렘 37:1)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를 대신하여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유다 땅의 왕으로 앉혔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여호야긴을 잡아가고 앉힌 왕이죠. 이때의 일입니다. 주전 597년입니다. 시드기야 시대는 바벨론의 통치 앞에 있었다면, 영적으로는 어떠했을까요? (렘 37:2) 그런데 왕이나 그의 신하들이나 그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전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혼란은 국제 정세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여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껴 있는 것이 유다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자기의 마음에 맞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예레미야를 시종일관 미워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도 지지 않고 시종일관 시드기야가 듣기 싫은 그 말을 끝까지 전합니다. 시드기야는 국가의 상황, 왕으로서 자기의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압니다. 그는 언제나 답을 주변의 강대국 ‘애굽’에서 찾습니다. 어쩌면 시드기야의 가장 큰 잘못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시드기야도 예레미야에게 ‘기도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 요청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위기모면을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자 보험일 뿐이었습니다. 언제나
그의 시선은 애굽에게 있었고, 실제로 애굽이 군대를 일으키자, 예루살렘을 침공하던 바벨론 군대가 한발 물러섭니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방법이 아니었으나, 시드기야는 문제에만 시선이 꽂혀 있습니다. 이 바벨론의 물러남 때문에 지난주 설교에서 봤듯이, 시드기야가 노예 해방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다시 노예를 삼는 사건으로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37장 후반부에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에서 잠시 물러난 그때 예레미야에게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아나돗 지역 출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나돗의 밭을 구매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마 그와 관련된 여러 일로 그가 아나돗으로 가려고 하는데, 베냐민 성문에 이르렀을 때, 그곳 수문장인 아리야가 예레미야를 모함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친바벨론 성향의 거짓 예언자로 바라봤죠. 그래서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투항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고 모함하며, 그를 체포합니다. 그리고 서기관 요나단 집의 사설 감옥에 예레미야를 가둡니다.
물웅덩이를 개조한 감옥이었죠. 거기에 갇히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의 행방을 수소문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를 감옥으로 데려옵니다. 시드기야의 목적은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의 말씀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볼 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예레미야를 통해 오는 예언이 신경이 쓰이긴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늘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에게서 구원에 관한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렘 37:17) 하루는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그에게 은밀히 물어 보았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없습니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바빌로니아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참, 예레미야도 한결같죠. 예레미야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이제 왕궁으로
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왕에게 구조를 요청하기 전에 심판 예언을 먼저 전합니다. 자신의 상황도 절박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왕이시여. 당신에게 바벨론 왕이 이 땅을 치러 오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설교하던 왕의 예언자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왕이시여, 부디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그러면서 자신을 다시 요나단의 집 지하 감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에 시드기야는 그를 왕궁 경비대 뜰에 머물게 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듣기 싫지만, 모든 정황이 예레미야의 말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기에 일단 예레미야를 살려두기 위해 자신의 보호 아래 두는 것입니다. 당시 사설 감옥이 운영되고 있고, 마음대로 사람을 가둔다는 것이 시드기야의 왕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만큼 나라는 혼란하고 위기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38장] 38장은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힌 또 다른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은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참소하여, 감옥에 가둘 것을 요청한 상황입니다. 시드기야는 앞서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도 하지만, 고관들의 요청에 예레미야를 그들에게 내어줍니다. 시드기야는 사람들 눈치를 보는 왕의 모습입니다. 애굽 눈치 보고, 신하 눈치 보고, 백성 눈치 보고. 하나님 눈치만 안 보고 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물은 없고 진흙뿐인 웅덩이에 갇힙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에게 닥친 위기에서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방 출신의 ‘에벳멜렉’입니다. 그는 에티오피아 출신인데, 시드기야 통치 시기에 궁중 요직을 맡은 인물입니다. (렘 38:8) 에벳멜렉은 왕궁에서 바깥으로 나와 왕에게 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렘 38:9) "높으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한 일들은 모두 악한 것뿐입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물웅덩이 속에 집어 넣었으니, 그가 그 속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성 안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앞서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언자를 죽이려 합니다. 반면, 에벳멜렉은 언약 관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비유대인이고, 예배에 참석할 자격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인정했고 예레미야를 살립니다. 에벳멜렉이 용기 있게 나서자, 그제야 시드기야는 그의 요청을 방패 삼아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고 명령합니다. 38장 뒷부분에는
시드기야와 예레미야 사이의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시드기야는 비밀스럽게 예레미야를 불러서 만납니다. 그리고 예언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렘 38:14)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주님의 성전 셋째 문 어귀로 데려왔다. 그리고 왕은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한 가지를 묻겠으니, 아무것도 나에게 숨기지 마시오." (렘 38:15) 그러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대답하였다. "제가 만일 숨김없이 말씀드린다면, 임금님께서는 저를 죽이실
것입니다. 또 제가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도, 임금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진짜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고자 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타협하지 않는 예레미야가 참 대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치실 것을 말해주며, 바벨론에 투항하는 것이 더 비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원래 우리가 불순종하려면 핑계를 수없이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만드는 핑계는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내가 주님을 따르는 자인가는 내가 원하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에 대한 나의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시드기야는 그런 측면에서 불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39장] 39장은
바벨론이 유다를 함락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렘 39:1)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는데, (렘 39:2) 시드기야 제 십일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 시드기야에게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의한 유다 심판을 행하시지만, 유다를 고통 중에 두시지 않으려고 여러번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기대했던 애굽의 원조는 없었고,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합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도 죽고, 유다의 귀족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고대 세계의 전쟁은 투항하지 않으면 몰살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전쟁사도 보면, 먼저 항복 권고 편지를 보고 항복하면 성을 차지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대항하다가 안 될 것 같아서 중간에 항복하면
성주를 죽이고 백성의 항복을 받아줍니다. 만약 끝까지 싸우면 성안의 모든 사람을 다 죽입니다. 이 법칙이 임진왜란 때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보다 수천 년 앞선 시대의 전쟁은 더 참혹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멸망을 목격하고,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함락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루살렘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내 함락되고 만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는 왕궁과 성전과
백성들의 집까지 모두 불을 질러서 허물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벽도 다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도록 도시로의 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남유다도 왕정 사회이니 피라미드 구조인데, 왕과 고관들, 기술자,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포로로 끌려갑니다. 남유다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여겼던 사람들만 가나안 땅에 남겨집니다. (렘 39:10) 그리고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일부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진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했듯이 희년도 자신들에게 불리하니 지키지 않고, 마지막 노예 해방도 거부했던 것이 그들의 교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이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제자가 되었다고 한번에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세상적 가치관이 물들어 있어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를 계속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것과 다름을 가르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관심, 높아지려는 관심, 1등이 되려는 관심으로부터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성경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유다의 멸망에서의
모습은 그러한 결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는 아무것도 없이 살았던 사람만 남아서 땅을 받습니다. 유다의 멸망 때까지 왕궁 경비대 뜰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몰락을 모두 보게 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알고 있었고, 그를 데려다가 선대 하라고 명령합니다. 예레미야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이방 왕에 의해서 석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맞이합니다. 이때 심판 받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 중에는 앞서 언급한 ‘에벳멜렉’도
있습니다. 에벳멜렉의 모습은 심판당한 시드기야나 유대의 고관들과 대조됩니다. 어쩌면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마지막 모습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가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죠. 예루살렘은 심판당하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또 다른 공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40장]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시드기야 왕조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윗 왕조에서는 갇혀 지내다가 이제 자유의 몸이 됩니다. 바벨론의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렘 40:4) “그러나 이제 보시오. 내가 지금 그대의 두 팔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 주겠소. 그대가 만일 나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면, 함께 가십시다. 내가 그대를 보살펴 주겠소. 그러나 나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소. 이 땅 어디든지, 그대가 보기에 적당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 곳으로 가시오.” (렘 40:5) 예레미야가 아직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대가 이 곳에 머물기를 원하면,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동족과 더불어 사시오. 그는 바빌로니아 왕께서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람이오. 그것도 싫으면, 어디든지, 그대가 보기에 적당한 곳으로 찾아가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근위대장은 예레미야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과 선물을 주어서 보냈다. 바벨론은 하나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고, 예레미야에게는 자유를 선포하고, 양식과
선물을 제공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바벨론 제국도 매우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여,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자들을 다스리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다랴에게로 가서 남겨진 유다 백성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합니다. 이 이후의 예레미야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다음 설교를 통해서 유다 멸망 이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 흐르는 메시지를 ‘엉덩이의 무게’에
빗대어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고시생들 사이에서 ‘엉뚱해질 때까지 공부해야 합격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엉덩이가 뚱뚱해질만큼 묵직해야 한다는 것이죠. 신앙에 있어서 이 말은 어떤 때는 정답이고 어떤 때는 오답입니다. 시드기야는 ‘애굽’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러면서 자신에게 늘 기회 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계속 무시했습니다. 그가 애굽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조금만 돌이켜서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가 예레미야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물었던 사람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는 엉덩이가 좀 가벼워야 하는데 잘못된 길에서 변하지 못할 정도로 묵직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그를 망하게 했습니다. 제가 가요를 그렇게 많이 듣지 않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때가 ‘군대’에 있던 시절인 것 같아요. 늘 주변에 가요가 흐르죠. 어느 날은 야외 작업을 하는데 어떤 노래의 한 부분이 너무 반복이 심해서 제 귀에 꽂혔습니다. 아주 단순한
표현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었어요.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우리는 모두 하늘이 나의 편이길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이 나의 편이길,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주시길 기대합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예배도 하고 봉사도 하죠. 그런데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이뤄지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될 수는 없죠. 모두의 기대가 다 다른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면, 하나님이 이곳에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 모두의 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요? 사실 정답이 하나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 하나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두 사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편 들어주길 찾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고,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편이 되기 위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편으로 살아가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깨닫고 움직일
수 있는 엉덩이의 가벼움과 옳은 길에서 버텨낼 수 있는 엉덩이의 무거움이 필요합니다. 오늘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와 비교됩니다. 예레미야는 외롭지만 끝까지 하나님 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다른 힘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의리,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 살아냈습니다. 그는 엉덩이가 무거웠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렸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의 자리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편이었고, 그도 예측 못 했겠지만, 이방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돌보고 지켜 가십니다. 이것이 너무 당연하지만,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이죠. 우리는 내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이 오기만을 바라니까요. 내가 있는 곳에 오지 않는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 무관심하다, 계시지 않는다고 말해버리니까요. 내가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언제나 하나님의 편이 되기. 그때 하나님이 언제나 내 편인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내가 움직여서,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 아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