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인카네이션(Incarnation)

2026-05-10 · 예레미야 31장 31~34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신앙 기초 9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올해 신앙의 기초를 정리해 나가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심과 구원, 죄와 심판 등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이 부분은 조직신학적으로 각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해드리는 설교를 했습니다. 회심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죄와 심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하나씩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면 죄에 빠진 우리, 그 결과 심판에 직면한 인간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가 최근의 설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프로젝트를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구약을 관통하고 신약과 연결하며 다뤘습니다. ‘그림자의 시간’, ‘플레로마’라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그림자의 시간이라고 명명했던 구약의 시간을 통해 우리의 링반데룽을 깨닫게 하셨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플레로마, 때가 찼다. 이제 하나님의 그 때가 이르렀고, 그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십니다. 오늘 설교는 이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잘 형성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연결성을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저는 구약에서 예고하고 기다렸던 ‘새로운 시대’가 무엇고, 그것을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셨는지를 나눌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를 성경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말씀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함께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함께 만나고자 합니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다루고 있으니, 용어

이해를 돕자면, ‘구약’은 ‘Old Testament’, 즉 풀어쓰면 ‘옛 언약’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라고 하면, 옛 언약의 약속에 근거하여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는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는 옛 언약의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기준과 약속에 근거하여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은 준비의 과정이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플랜 A를 가동하다가, 안 되니까 플랜 B를 가동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죄가 시작된 이후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메시아가 이 일의 해결책이 될 것을 예고했죠.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취의 과정이 옛 언약의 시대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도표) 이것이 우리교회가 자주 접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표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의 시대’가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 후의 시대’가 있습니다. 임하기 전까지가 옛 언약에

기초하여 살아갔던 ‘옛 언약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시대가 ‘새로운 언약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옛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새 언약의 시대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약속과 성취의 개념이죠.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렘 31: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 31: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렘 31: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31: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약백성답게 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언약 깹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했고, 남유다도 멸망직전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가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더 큰 계획을 위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더 큰 계획은 바로 ‘새 언약’입니다. 32절을 보면, 먼저 옛 언약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때.” 이것이 언제입니까? 출애굽입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것을 말합니다. 이 언약이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안에 계속 갱신되며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 결과 현재적 심판을 당합니다. 나라의 멸망, 리셋. 이것이 현재적 심판의 결과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심판을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이 지난 뒤에”라는 표현이죠. 주님께서 ‘다시 언약을 세울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다시 세우는 언약, ‘새 언약’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하여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아니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옛 언약의 방식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돌판에 새겨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뜻을 가슴 속에 넣어 주며, 마음 판에 새겨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옛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끝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뜻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닙니다. 다만 그것의 임재 방식이 바뀝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백성이 누리는

경험과 새 언약의 백성이 누리는 경험의 차이입니다. 구약, 옛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언약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약 4000년을

끌고 온 신앙의 기준이었습니다. 새 언약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만 이 하나님의 뜻은 전보다 더 가까이 우리 내면에 머뭅니다. ‘가슴 속, 마음 판’이라는 표현이 그것을 잘 표현합니다. 언약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언약적 관계 안에 사는 것이죠. 34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배웠잖아요. 성경이 말하는 죄의 초점은 ‘도덕적 행위’보다는 ‘관계적 배신’입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했던 깨어진 관계가 온전한 관계로 회복될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포로 백성 가운데 세워졌던 선지자입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말씀하시며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겔 36: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겔 36: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겔 36: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26절은 보면 새로운 마음을 주겠다.

새로운 영을 주어 너희를 고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7절에 보면,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영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나 에스겔 모두 하나님의 뜻(율법)과 하나님의 영(임재)이 새로운 시대에는 우리 안에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언약의 갱신이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언약적 갱신’이 일어날 것임을 구약부터 예고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새 언약의 주관자인 ‘메시아’가 오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다뤘듯,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의 완성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 우리말로 구원자인 예수께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 말씀이 성취된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전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저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는지 잘 몰랐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에게 새 언약의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서 오시는 구원자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알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힌트를 주셨죠. 그것이 뭐였죠?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는 몰라도, 누구는 아냐면 ‘엘리야’는 압니다. 한국 사람에게 와닿는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이순신’이 나타날 것이다.” 이러면, 우리에게 엄청난 힌트가 되는 것이죠. 엘리야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유명했습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몸을 입었을 때, 그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납니다. 신약시대에 구약 성경을 지칭하는 표현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입니다. ‘율법’의 대표가 모세이고, ‘선지자’의 대표가 엘리야입니다. 즉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옆에 나타난 것은, 구약이

소망했던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님라는 것을 구약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준비하는 힌트가 되는 엘리야를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의 말씀을 봐야 합니다. (왕하 1:8)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다" 하고 외쳤다. 구약시대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이 부상을 당했는데, 엘리야가 그의 신하들에게 왕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그 예언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왕이 예언자의 용모를 물은 것입니다. 그때 신하들이 말해준 정보가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은 단번에 그가 ‘엘리야’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마치 우리가 장검을 들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턱수염을 기른 장군을 보면 ‘이순신’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로 신약에서 등장합니다. (마 3: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마 3: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마 3: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마 3: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요한이 예수님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고, 먼저 세상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외적

모습이 나오는데, 어떻죠?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원래 엘리야는 털이 많았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몸에 털이 적었나봐요. 그래서 대신 ‘낙타 털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선포는 무엇입니까?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동일시합니다. 그럼 이 세례 요한은 진짜 엘리야의 역할로 온 것이 맞을까요? 이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 17:10)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 17:13) 그제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라다녔던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알아갑니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 대단한 사람, 놀라운 사람, 그리고 메시아로 점차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고백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공부하고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얼마나 유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이렇게 배워가며 그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들보다 훨씬 더 객관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성경의 구분을 통해서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기준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등장하더라도 예수님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까지는 어떤 언약의 시대입니까? 옛 언약의 시대입니다. 요한까지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준비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제가 앞서 신약시대에 ‘구약 성경’을 표현하는 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과 선지자’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시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까지입니까? 요한까지입니다. 요한 후부터, 즉 메시아 예수의 때부터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로 사람이 들어갑니다. 마침 우리가 지난주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다뤘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풍성한 이해가 없다면, 이런 말씀들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 되심,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깨어진 세상에 임했다,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통치안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가 있었으나 조금 더 관념적이고 상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통치는 이제 실존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물질적인 것이지만, 너희 가운데 이미 임했다고 말할 정도로 실존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시대는 하나님의 신적 임재에 대한 제사였다면, 이제 신약의 시대는 눈에 보이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매우 실제적으로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약속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우리는 회심으로 새 언약을 맺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를 나누다 보면, 거기에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깨진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풍삶초에서는 이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크게 2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축약하여 설명합니다. 그중 첫 번째 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쉽게 구원하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입니다. 앞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갱신을 보면, 그것은 더 인격적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진리이며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으로 오신 이유는, 새 언약은 ‘문자’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옛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가르침이고 법이었습니다. 객관적인

기록이었습니다. 개개인에게는 조금 멀리 있는 기준이었습니다. 새 언약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서 성취된 말씀의 실체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삶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살아내는지 보여주는 ‘인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모습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은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정죄당해 죽어갈 위기에 있는 여인 곁에 서서 그를 품으셨습니다. “약자를 돌보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병든 자의 환부에 손을 대시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으로 내려와 우리와 똑같은 먼지를 마시고, 똑같은 배고픔을 느끼며, 우리와 같은 언어로 진리를 나누셨습니다. 이렇게 신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 1: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뜻이지 진리 그 자체였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고백처럼 모든 것은 태초에 계셨던 그 말씀으로 인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잃어서, 단절의 신음을 겪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을 진리인 것처럼

내세워보기도 하지만, 끝내 채워지지 않는 허기 속에 방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 말씀을 그 생명을 잃어버린 곳에 다시 보내어 생명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창조하여 생명을 시작한 그 말씀이, 다시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그렇게 우리 가운데 온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의 표현을 직역하면,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고 머무셨다’는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실존으로 우리 가운데 친밀하게 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태양과 해바라기의 비유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해바라기에 태양의 에너지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것이 하나님과의 연결과 단절에 대한 은유적 비유입니다. 그것을 최근에 유행했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작품에 빗대어 보면 이렇게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지구에 우주적 재난이 오게 되는 것이 설정입니다. 태양의 빛을 먹고 살아가는 우주의 미생물들이 태양을 감싸면서 태양에서 지구로 오는 에너지가 감소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지구에는 엄청난 재난이 생기게 된 것이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생존을 건 도전이 ‘프로젝트 헤일메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태양의 에너지를 잃어버린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태양의 그 에너지가 지구로

찾아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와 달리,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가서 자력으로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 존재적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결단하십니다. 그것이 인카네이션, 하나님의 성육신입니다. 구약에서 이미 주셨던 새 언약의 예언은, 인간으로 온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놀라운

비전까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예수님이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입니다. 우리는 당분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같이 따라가며 그분이 왜 복음인지 함께 마주할 것입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선명하게 보고, 누리고, 경험하고 고백하는 은혜가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구약의 백성들이 실패와 좌절 속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멈추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까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라는 머나먼 곳에 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을 소망하시며, 그들을 회복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과 가장 먼 죄 많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이죠. 그런데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이 불안한 이유는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비진리가 진리인 듯 거짓 행세를 하며,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답이 될 수 없는 길로 서로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짜 우리의 생명인지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는 소망은,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 답을 찾아 올라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삶이 가진 불완전함은 우리의 삶의 완전을 아시는 분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든 계획의 마침표로서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 안으로 오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깨어진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는 완전한 것이 없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소망,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혹시 상한 감정,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삶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감정입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선명한

진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