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 창세기에서 죄가 시작된 이후 곧바로 선포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그 마침표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시간은 결국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핵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을 알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설교 3탄이기도 하죠. 우리는 먼저 <탈환>이라는 설교를 통해 ‘십자가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다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은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자신의 나라로 올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죄가 더 이상 나에게 주장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지난주에 다뤘던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가 핵심이죠. 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가?”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설교는 철저히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그 사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세상의 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해져서,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도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시선을 바꿀 수 있도록 돕는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유를 사랑받는 대상에게서 찾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은 세상 어디에서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게서만 우리는 무조건적이고, 선행적이고, 끝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모두에게 충분한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탈환은 완성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하고자 하셨고,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의 죄를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해방과 속죄는 이미 완결되었지만, 그 무한한 사랑이 내 삶을 자유롭게 하는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과 나 사이의 살아있는 관계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햇빛은 모두를 비춥니다. 그러나 동굴에 있으면 그 빛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전 인류가 누릴 수 있는 ‘빛’을 어둠 가운데 다시 비춰주셨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빛을 향해 서지 않으면, 내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취는 객관적이지만, 이것이 작동하는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의 값을 다 지불하셔서 죄와의 관계를 끊으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여전히 인정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자유를 주셨는데도
두려움에 끌려다니고, 용서하셨는데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조금 부족하게 일하셨나요? 죄를 절반만 해결하셨나요? 사랑도 절반만 하셨나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사실은 “거의 다 이루었다”는 뜻이었나요?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충분합니다. 1.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세상의 방식은 무엇을 해서 무엇인가를 얻는 것입니다. 행위를 통해 어떤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다르지요. 우리가 무엇을
해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변화, 새 피조물이 되었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통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까요? 죄로 인해 깨어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으로 얻으면 우리는 다시 자기 공로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회복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이 세상의 무엇을 다 주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진 세상에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곳에 오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은 이제부터 나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는 또다시 내가 그 가치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서 증명해야 하는 고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무한한 책임감 속에 빠집니다. 그러면 다시 죄책감에 휩싸이겠죠.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지는 또 다른 링반데룽입니다. 현실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솔직하게, 나는 여전히 사람의 평가에 좌지우지된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시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찾아오는 분이 계시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분이 계시죠? 어떤 상처 하나가 나를 계속 붙들고 있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죄책감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두 번째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아시죠? 거기에 보면 사탄의 전략이 소개됩니다. 크게 두 단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꾸 다른 것을 던져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합니다. 우상숭배이죠. 다른 것에
더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고 찾고,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요, 인생의 해답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가 사탄을 이긴 것입니다. 1:0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포기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가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다음 공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간 이후에, 복음의 진리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죄’, ‘거짓말’, ‘시선 왜곡’,
‘옛 습관’ 등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연약한 나의 어떤 모습을 마주합니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 같은 사람이 무슨 그리스도인이냐?”라고 계속 말을 겁니다. 예수님을 보는 대신, 자기 실패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은 거짓을 믿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라면, 사탄은 거짓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실망하셨다.” “너는 변하지 않는다.” “너는 실패자다.”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와서 이런 거짓말을 계속 들려줍니다. 우리에게 넘어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해서 잘못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성도들의 시선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사탄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 자기 상태, 자기 실패만 계속 묵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우리의 습관을 이용합니다. 노예 해방이 되었으나 여전히 종처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는 연결성이 있습니다. 이미 형성된 습관대로 살아가려는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부추깁니다. 큰 반역이나 큰 죄를 짓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예전 방식대로 살게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보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을 더욱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십자가를
없애지 못합니다. 이미 끝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을 제압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승리, 우리의 자유는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권능은 충분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십자가와 싸우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우리의 믿음과 싸웁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십자가를 못 믿게 하는 것입니다. 고작 그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여러분에게 이러한 사탄의 거짓말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십자가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십자가, 새로운 삶의 근거 잠시 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제가 신학교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여러 곳에서 과분한 인정을 받으며 꽤 괜찮은 크리스천 리더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먼저 그 인정이 제 정체성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제 주변에서 영적으로 혼란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누가 봐도 리더로서 제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건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그 이후로 제 안에 이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리더라며?” “너 아무것도 못 하잖아.” “사람들이 너를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너는 가짜야.” 사탄은 늘 그렇게 합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것보다 먼저, 우리의 정체성을 공격합니다. “너는 실패한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 거짓말이 제 마음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우연한 계기로 만난 말씀이 바로 로마서 8장이었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 말씀을 읽는데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강한 사람’이어서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제 우리가 정죄함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2절이죠. 여기서 ‘법’은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죄와 사망의 통치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망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존재로 바뀌었으니까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일이니까요. 나는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는데,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옛적 모습처럼 사탄의 거짓말과 정죄에 스스로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보다도 저에게 찾아온 사탄의 거짓말을 더 믿고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게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없었을까요? 저 제법 괜찮아 보이는 신학생이었어요. 제가 실제로 무엇을 더 믿고 있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시험에 빠져 있으면 “말씀 봐야 해”라는 이야기를 듣죠. 그러면 막 반발심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말씀 봐야 해요. 왜냐하면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탄의 통치안에 있으면, 가장 싫어지는 것이 예배하는 것,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험에 들어 있을 때, 우리가 그 사람을 만나서 위로하고 다독여 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위로와 다독임도 결국 예배와 말씀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저는 너무 오랫동안 짓눌려 있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다 말씀을
보며 갑자기 확 깨달았어요. “내가 속고 있었구나.” 제가 약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제가 사탄이 지적하는 저의 연약함을 더 믿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었던 회복은, 제가 강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는 저를 깊이 붙들고 있었던 그 정죄감, 패배 의식,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3. 우리는 이미 새로워졌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중요한
‘패러다임 시프트’를 다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죠. 오늘 또 하나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 회복, 새 창조도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듯, 내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힘도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내가
믿음이 부족한가 보다.” “내가 아직도 거룩하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나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로 향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나는 죽었습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지던 그 삶이 십자가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새로워진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시작되었기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이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하신 일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저를 괴롭히던 사탄의 거짓말에서 말씀으로 벗어난 이후, 이런 예화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종이처럼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제 믿음의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이 종이 한 장처럼 약합니다. 이 종이는 손가락으로도 뚫을 수 있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게 철판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리스도라는 벽에 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이는 그대로입니다. 붙어 있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사탄(손가락)은 저를 뚫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강한 것이 아니라, 제가 예수께 붙어 있는 존재가 된 순간, 사탄은 더
이상 저를 마음대로 정죄하고 지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사탄과 나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때는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니, 이제는 사탄이 저를 두려워 도망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하지 않지만, 이제 저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 제게 바뀐 것은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을 쫓는 힘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기도가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제 싸움의 방식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죄를
이기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그분이 이루신 승리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힘으로는 죄를 못 이깁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 강정규는 못 이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강정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이유는 내가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너를 해방하였다”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할렐루야! “너를 해방하였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믿으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나의 약함, 나의 옛 모습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십자가 이전의 나입니다. 이제 나는 십자가를 통과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약합니다. 맞습니다.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정체성이 아닙니다. 믿음을 잃은 나의 '패배 의식'일 뿐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승리, 그 충분한 십자가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여전히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길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거짓말을 더 익숙하게 듣기 때문은 아닐까요? 죄가 나에게 여전히 말을 걸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나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그냥 계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이루신 일은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함께 할 때, 예수님 안에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그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니
한 번 믿음으로 걸어가 봅시다!” 지레짐작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바라보며 늘 넘어지지 말고, 주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다르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나를 다스리고 있음을 믿으며 나아가 보십시오. 새로운 삶의 근원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충분합니다.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를 탈환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믿으십니까? 우리의 문제는 십자가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꾸 넘어지게 되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을 내가 진리보다 더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해방시키셨는데, 내가 다시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 말합니다. “너는 안 돼.” “너는 변하지 않아.” “너는 여전히 죄의 종이야.” “너는 또 실패할 거야.” 그러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다 이루었다.” “너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도 거짓말보다 십자가를 믿으십시오. 나의 연약함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믿으십시오. 나의 실패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믿으십시오. 연약하면 어때요. 연약함을 고백하세요. “주님, 나는 종이 한 장과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 제가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꼭 붙어 있고, 주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진짜로 믿고 행하면, 죄는 여러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여러분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정죄감은 여러분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은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사탄의 거짓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