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설교를 들을 때, 성도님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로 들으면, 예레미야가 참 쉬운데, 혼자 읽으면 참 어려운 책이 예레미야라고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이번 예레미야 시리즈를 통해서 구약 후반부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이고, 아마도 다른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다가 두 나라로 분열합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쪽이 남쪽이고,
쿠데타 세력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북쪽입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이라고 칭호를 사용합니다. BC 931년경에 분열된 두 나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형태로 생존합니다. 아마도 매일성경 9-10월 본문이 ‘열왕기하 시리즈’이므로 우리도 그때 자세하게 분열왕국의 역사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에 소위 ‘제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강력한 첫 번째 제국은 ‘아시리아 제국(앗수르)’입니다. 이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합니다. BC
722년입니다. 북이스라엘은 209년 정도 유지되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짧다고도 볼 수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209년 전이 조선의 영조-정조 다음 순조가 왕을 할 때니까, 그리 짧다고도 볼 수 없는 기간입니다. 원래 이 시기에 앗수르의 침공으로 남유다도 사실상 멸망할 뻔했는데,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나아갔기에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켜주십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모습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남유다는 중간중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모습으로 나라를 이끈 왕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오랜 기간 왕조를 유지했습니다. 사실상 이렇게 이해하셔야 해요.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나 자체적인 힘으로는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주변의 강대국에 비해서 그들이 내세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하고 계신 것이 그들의 가장 큰 경쟁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버렸거든요. 하나님이 떠나니 그들 자신의 힘으로 살다가 망한 것입니다. 유다도 그런 위기가 있었으나,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을 주인 삼기 위해 애쓴 왕들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힘이 되어주셨어요. 그러니까 왕국의 이야기이지만, 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신앙의 모습에 그대로 적용되는 역사입니다. 저도 우리의 삶이 개인의 어떤 능력이나 경쟁력으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세운 것은 다 온전하지 못하고 한계가 있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참된 힘을 얻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남유다
왕조는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16대 왕이 ‘요시야’입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남유다의 왕 가운데 가장 성경이 주목하고 있는 왕인데, 히스기야 때 앗수르의 침공에서 구해주셨고,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남유다의 무너진 신앙이 회복되는 중요한 시간을 보냅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서’는 히스기야 시기 전후에 관한 많은 예언을 하고 있고, 52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는 요시야 이후의 시기에 관한 예언을 다루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48장으로 구성된 ‘에스겔서’가 포로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 후반부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예레미야의 활동 시기는 이제 앗수르는 망해가고, 바벨론과 애굽이 유다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을 주십니다. (렘 1:9)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렘 1: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레미야가 열심히 그 시대에서도 자기 백성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왕과 백성들이 끊임없이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통치는 남유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뭇 민족과 나라들’입니다. 이것이 구약이 증거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열강 위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또한
남유다가 돌이키지 않자, 바벨론을 하나님의 회초리로 사용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에게 회초리를 들게 되셨을까요? 잘못된 모습에서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계속 엇나갔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전반에 걸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하게 다루는 죄입니다. 우상숭배는 3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죄입니다. 첫째,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하여 관계를 깨고, 하나님께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어떤 존재를 같은 급으로 대해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인데, 심지어 실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외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모독입니다. 둘째, 우상숭배는 자기중심성의 결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내게 유익 되는 기준에 따라 의지할 대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이 강대국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그 외 어떤 존재든 될 수 있습니다. 그저 내게 더
이익이 되는 것이 ‘최고’라는 판단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압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유익에 따라 하나님은 밀려납니다. 성경은 모르고 짓는 죄보다, 알면서 짓는 죄에 대해서 더 엄히 다룹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잘못된 신학 혹은 사상에 대한 고집과 핑계입니다. 이유 없는 우상숭배는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섬기는 것에는 늘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모습으로 해석하고, 그것으로 자기들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핑계 삼았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타난 우상숭배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다른 것을 같은 급에 놓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민하는 정도를 넘어서 실제로 다른 것을 더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모독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만을 주인 삼겠다고 다짐하고 고백한 후에도 그런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더 심각한 배신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성경은 우상숭배를 ‘영적인 간음’에 비유합니다. 바람피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갈등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를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의 평안과 안정, 커리어를 위한 어떤 모습들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우선 될 수도 있습니다. 풍삶기 과정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 쾌락, 재미, 성공, 가족, 건강, 세상의 정의 등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습니다.’ 실제로 그렇죠. 그런데 교회를 좀 다니다 보면, ‘돈, 쾌락, 재미, 성공’ 등에 대해서 추구하는 것은 좀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면 나름의 분별과 기준이 생기는 것이죠. 그런데 ‘가족, 건강, 세상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과하게 추구하면 사실 그것도 우상숭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 아래서 올바르게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돈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다룰 것인가?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랑할 것인가? 건강에 대해서도 그렇죠. 어떤 사람은 육신의 건강은 엄청나게 신경을 씁니다. 건강에 좋다면 무엇이든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는 대충 합니다. 영적인 건강함이 뒤로 밀려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정의에 완전히 꽂혀서 그것에 온 마음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의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에는 목소리를 내고 온 마음을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뒤로 밀려나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중심적으로 이익을 기준 삼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봤던 말씀을 보면, ‘하늘 여왕 숭배’를 그들이 애굽에서 다시 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말해요. “그때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우상숭배 할 때 더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나니 먹고살기 더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 여왕 숭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판단 기준이 이것입니다. 내가 잘 먹고 잘살면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 여왕이라도 숭배하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제가 교회를 열심히 다녀보고 나름 정성을 다했는데, 제 삶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제 발전에 시간을 못 써서 제가 뒤처진 것 같아요.” “제가 교회 다니지 않을 때 더 하는 일이 잘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일 여러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의 기준이 그런 요소들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그 기준과 조건들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신앙의 초기에 이런 갈등을 겪을 수 있다고 봐요. 아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주는 참된 복, 우리의 삶에 하나님만이 주시는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내 기준이 복음 앞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평생을 신앙 생활해도 하나님을 믿는 것에 깊은 후회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잘못된 신학을 붙들고 살았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야.’,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면서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해.’ 스스로 잘못된 모습으로 하나님을 규정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다윗 왕조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남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도 무시합니다. 저는 현대 교회에서도 이런 측면에 대해서 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경고’는 성경에 모두 존재합니다. 이것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위해 둘 다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늘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서 구원에 대한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약속에 대해서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 속에서 행함 없는 믿음과 하나님의 주인 됨 없는 맹목적인 신앙생활 속에 머물러서 교회 안에 있으나 구원에 속하지 못할 위기, 혹은 벗어날 위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경고’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경고들이 훨씬 많죠.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 정작 경고는 다 무시하고, ‘확신’에 대한 자기가 좋은 말씀만 찾아서 붙들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야.’ 어떤 경우에는 맞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각한 오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았다는 맹목적인 신앙 속에서, 자기 모습을 점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여러 부분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성경의 힘이 무엇입니까? 분명 이 말씀은 어떤 시대에 주어진 말씀이고, 그 시대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결국 지금 내 삶에도 적용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Not to us, But for us.’ Not
to us. 성경의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죠. 유다 멸망 이후, 애굽으로 도망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But for us.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를 위해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 역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레미야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해석하고 내 삶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부분을 돌이켜 나아갈 때,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나타난 ‘남유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지난주의 44장까지로 모두 다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보는 부분은 예레미야의 핵심 이야기 뒤에 붙어 있는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남유다가 예언의 첫 번째 청중이고, 열방이 두 번째 청중이라면,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가 첫 번째 사역자이고, 그를 도왔던 바룩이 두 번째 사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44장까지 예레미야와
남유다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45장은 부록과 같이 바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렘 45: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렘 45: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의 고통이 나오지만, 어디 예레미야만 그랬겠습니까? 바룩도 똑같이 사역하면서 겪는 고통이 있었겠죠. 바룩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여호와께
돌리고 있었습니다. 말씀에 보면 그는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느라 피곤하였다고 합니다. 평안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안에 해당하는 ‘메누하’는 ‘쉼, 안정’을 의미하는데, 그가 쉼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쉼 없이 피곤한 몸으로 사역하다가 지친 것이 ‘바룩’의 모습이었던 것이죠. 이는 눈물의 예언자로 불리는 예레미야가 고백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성도의 삶은 ‘울며 씨를 뿌리는 자’와 같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는 자’와 같을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을 수 있습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우리는 이 역설을 설명하기 어려우면서도 또 이해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근심하나 기뻐하고, 가난하나 부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예레미야와
바룩도 그렇게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렘 45:4) 주님께서는 나더러, 그대 바룩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 온 세상을 내가 이렇게 다스리거늘, (렘 45:5)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 이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터인데 너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남유다도 심판을 당하고, 곧이어서 모든 열방들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을 받게 될 터인데, 그 안에서 하나님의 편에 섰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46~51장은 열방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신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당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신관과 다른 것입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민족마다 지역마다 특정 분야마다
담당 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고를 가졌기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도 축소해서 봤을 것입니다. 그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신 내지는 광야에서 힘을 발휘했던 신으로 말입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고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세계 만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온 땅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방의 사람들을 보고
계시고, 그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이렇게 예언서 가운데 일부분으로 말씀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요나, 나훔, 오바댜 등은 아예 이방 민족에 대해서 하나님이 파송하셨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요나 때와 같이 들을 귀가 있어서 듣고 깨닫고 돌이키면 사는 것이고, 나훔의 때와 같이 말씀을 무시하면 그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46장부터 열방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6장은 애굽에 대한 예언입니다. 유다의 남쪽에 있는 나라죠. 47~48장은
블레셋과 모압에 대한 예언입니다. 각각 유다의 서쪽과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입니다. 이들을 향한 심판은 사실 이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통해서 서로를 징벌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들에 대한 심판 예언과 함께 회복 예언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시작과 끝도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49장에는 먼저 암몬에 대한 심판이 주어집니다. 모압 위쪽에 위치한 나라이죠. 그리고 에돔에 대한 예언이 주어집니다. 유다의 사해 남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이들은 에서의 후예들로서 이스라엘과 형제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 나라들도 모두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언은 유다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이어서 ‘게달’과 ‘하솔’이 나오는데 이 나라는 아라비아 사막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마지막으로 ‘엘람’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동편에 위치한 유다에서 굉장히 먼 나라입니다. 가나안 인근의 나라만이 아니라, 근동의 모든 지역이 예언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예레미야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모든 열강들, 제국들, 나라들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같은 사건을 겪어도 해석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다 우연이고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른 시각 때문에 누군가는 삶의 여러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배워가고, 누군가는 어느 것도 배우지 못하곤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세계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이해해야
지금 내 일상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법입니다. 끝으로 50장은 당대 세계관의 끝판왕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앞선 다른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바벨론’을 줄곧 사용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바벨론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않을 때, 하나님은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은 626년에 나보폴라사르에 의해서 재건된 후, 앗수르를 무너뜨리며 최강국으로 부상합니다. 유다를
비롯한 주변국들을 모두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최강국의 자리에 선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로 그 바벨론의 예언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렘 50:18) 그러므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앗시리아 왕에게 벌을 내렸듯이, 바빌로니아 왕과 그의 나라에도 벌을 내리겠다. (렘 50:23) 세상을 쳐부수던 쇠망치가 어쩌다가 이렇게 깨지고 부서지게 되었는가? 바빌로니아가 어쩌다가
이렇게 세계 만민이 놀라도록 비참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심판은 바벨론이 의지했던 그들의 ‘벨과 마르둑’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렘 50:2) 너희는 세계 만민에게 이 소식을 선포하고 이 소식을 전하여라. 봉화불을 올려서 이 소식을 전하여라. 숨기지 말고 전하여라. '바빌론이 함락되었다. 벨 신이 수치를 당하였다. 마르둑 신이 공포에 떤다. 바빌론의 신상들이 수치를 당하고, 우상들이 공포에 떤다.' 이로써 하나님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벨론은 단순한 제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약 요한계시록은 로마 시대에 쓰인 성경입니다. 로마의 황제숭배와 당대의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싶지만, 그것을 은유적으로 하기 위해 로마를 ‘바벨론’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즉, 바벨론은 단순히 구약의 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벗어난 거센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죠. 시대마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어떤 힘이자 조류입니다. ‘이 시대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모두 그 앞에 굴복시키는 어떤 힘이
바벨론입니다. 우리 시대에 바벨론은 무엇일까요?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을 다 이길 것 같이 득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의보다도 앞서고, 사랑보다도 앞서고, 올바른 가치보다도 앞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 이 시대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모든 것 위에 있는 듯합니다.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손해 보며 자신의 이익도 못 챙기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비웃습니다. 그래도 어느 시대에나 그것을 뛰어넘는 ‘낭만’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이제는 그것이 ‘돈이 되느냐?’고 비웃으며,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면 다 필요 없다고 비웃습니다. 정치는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사람들의 이익 추구의 마음을 부추깁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표를 주기 때문에, 다수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일종의 이익을 위한 거래를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있어도 은근히 했다면, 이제는 대놓고 그런 정치를 하고, 또 그런 정치인을 지지하며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 최우선 가치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다 그렇다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회심이라고 말하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성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대하 31:20)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남유다의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싶으셔도,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상태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세상이 어떻든, 남들이 어떻든 중심을 지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기쁨을 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다가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의 기쁨과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시고, 내가 그분의 종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호
12:6)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방향을 바꾸고 싶어 하십니다. 잘못된 길에서 떠나서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정의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따르던 그 자리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참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하는 일과 하나님
때문에 하지 않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관념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내 삶에 실제적인 변화와 내가 살아가는 방향의 유턴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양다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는 싶고, 그러나 세상의 것도 함께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시는 기다려주실지 모르겠으나, 분명하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물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물질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을 내어놓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해서 마치 우상처럼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많은 재산이 아니라, 100세에 얻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잔인할 정도로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기회도 주시고 기다려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결국 그 시험을 통과하며, 그에게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이 소중한 분임을
확인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초청하시고,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으로 복된 삶을 드러내셨습니다. 신약의 바벨론으로 지칭하는 로마 시대에는 로마에 의해 사형된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이 곧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향한 엄청난 박해 속에서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목숨을 건 위협 앞에서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그 고백은 그만큼 절실하고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진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은 강했습니다. 순교의 위협도, 온갖 박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도 로마도 없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시험하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영적인 민감성을 갖고 보셔야 합니다. 혹시 내 삶에는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없는가? 혹시 나의 자녀, 나의 성공, 소유, 관계 등이 내게는 더 귀한 것은 아닐까. (렘
51:13) 큰 물 가에 사는, 보물을 많이 가진 자야, 너의 종말이 다가왔다. 너의 목숨이 끊어질 때가 되었다.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것은 바벨론이 무너진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해 보였지만, 바벨론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안만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 여러분의 물질, 여러분의 관계. 정말 여러분이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의지할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뿐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북방의 나라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그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것은 바벨론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마지막 장. 갑자기 생뚱맞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이야기로 시간 점프를 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이 심판 당한 유다 모든 백성들의 모습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했고 그는 심판을 당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차가운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남유다의 자존심이던 왕궁과 예루살렘 성전도 불타 사라졌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했던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52장은 그 모든 잘못된 길을 가다가 망해버린 것들을 하나씩 서술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모든 예언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바로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 왕이 된 지 3개월
만에 끌려갔던 ‘여호야긴 왕’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사면을 받습니다. 죄수의 옷을 벗고 바벨론에서도 왕의 식탁에서 식사하는 등 회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예레미야서의 가장 마지막에 이 장면을 서술하는 것은, 바로 여호야긴이 포로로 끌려가 있는 유다 백성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멸망을 대표하는 교만한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지만, 회복될 유다를 대표하는 여호야긴은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는 자기 백성
유다를 정결케 하시고 결국 포로의 땅에서 다시 회복시켜 데려오실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와 긴 예레미야 여행을 함께 해준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일까요? 어쩌면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결국 우리의 삶에는 늘 같은 일, 같은 싸움이 반복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와 남유다. 그들과 우리는 시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문화도 다릅니다. 삶의 자리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시종일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결국 우리는 늘 무너지는 그것에서 또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도 해답이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해답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시대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경험한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을 발견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충분히 놓고 싶을 만큼 세상의 악함과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우리에게 오지만, 내가 붙든
것이 생명줄이라고 믿기 때문에 붙들고 견디는 것입니다. 저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며 예레미야를 다시 봤습니다. 그는 나약한 듯 흔들리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말하지만 끝내 가장 힘든 일을 감당합니다. 그는 자신들의 동족 백성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기 속에 주어진 진리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며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다 사용합니다. 저는 그 어둠의 시대에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께는 예레미야가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참 시대가 어둡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보시고 기쁨과 소망과 위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그런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