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그림자가 없는 이" / 강정규 목사

2024-09-01 · 시편 105편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랜만에 시편 설교입니다. 매일성경에서 시편은 책과 책 사이에 종종 배치됩니다. 그래서 매일성경으로 설교한 첫해부터 기회가 될 때 시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시편에 관한 10번째 설교입니다.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것은 말보다 글의 무게와 책임감이 더 크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말은 내뱉고 사라질 때도 있지만, 글은 어딘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에 무게가 생기고, 책임감이 생깁니다. 물론 지금은 이 예배조차도 다 영상으로 기록되어

이제는 말도 결코 가볍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글이 가진 무게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제 블로그를 가끔 보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종종 기도 또한 글로 적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기도를 썼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때로는 더 진실하게 하나님께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성장한 후에는 종종 글로 기도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기도 노트가 있어서 거기에 적곤 했는데, 이제는 태블릿에도 필기를 할

수 있으니 주로 태블릿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작성한 기도 중에, 너무 사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종종 블로그에 올려두기도 합니다. 본래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객관화 작업이죠. 나의 다짐과 결단을 내 밖으로 꺼내고 나도 봄으로써 객관화가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 글을 적을 때가 있습니다. 시편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바로 누군가가 기록한 이런 기도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는 개인의 기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따라서 고백하는 기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종종 하나님과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묻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돼’라고 조언하지만, 때로는 그조차 막막할 때가 있죠. 그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시편에 나오는 고백들입니다. 시편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기도의 모델입니다. 이것이 어떤 대단한 문학적 수준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글이어서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은

기도이고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학적으로 ‘시와 노래’의 형태이죠. 기도에 곡조가 붙으면 찬양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시편은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기도이고 찬양입니다.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시편 안에도 장르가 있습니다. 탄식시, 감사시, 찬양시, 구원시, 역사시 등 다양한 장르의 시가 시편에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탄식시’입니다. 학자마다 분류가 다르지만 1/3에서 최대 1/2을 탄식시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까? 아니면 원망하고 따지고 싶을 때가 많습니까? 사실 ‘감사’는 생각하고 찾아서 고백하는 것이고, ‘불평’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편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에 탄식시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시편이 개인의 고백을 담아내고 있지만, 또 타인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한 내용도 많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적인 내용과 형식의

시편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런 다양성이 있죠. 개인적이기도 하고 공동체적이기도 하고 중보기도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배울 기도가 많습니다. 우리가 8월 마지막 주간에 매일성경 묵상을 통해 만난 시편 105, 106편은 ‘역사시’로 분류되는 시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을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만 더 시편에 대해서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편은 150편으로

구성된 모음집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편의 저자는 여러 명입니다. 다윗이 가장 대표 저자입니다. 73편이 다윗의 시로 분류됩니다. 그 외에 고라, 아삽, 솔로몬, 모세의 시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음집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시편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볼 때, 150개의 시를 모음집 안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메시지가 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여 설교하면, 인용된 그 내용의 메시지도 전달되는 것이고,

그것을 인용하여 제 설교에서 총체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모음집에서의 메시지도 이렇게 2개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메시지가 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지난주에 마친 예레미야를 떠올려봅시다. 예레미야 44장까지 남유다와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리고 바룩과 주변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뒤에 별책부록처럼 다뤄서, 예레미야와 유다 백성의 삶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룩과 모든 나라 위에 계신 하나님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52장은 마치 에필로그처럼 끝이 나죠. 바벨론의 심판 예언까지 한 뒤에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벨론에 잡혀간 두 명의 왕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죠.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는 시드기야와 감옥에서 해방되어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여호야긴. 그 둘의 모습을 마지막에 보여줌으로써, 예레미야 전체가 하고 싶었던 대조된 삶의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고, 심판과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며 마치는 것입니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 한 권의 책으로서 메시지가 살아나고,

각 부분의 메시지에는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점이 예전에 시편을 이해하는 방식과 최근의 시편 연구가 남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예전에는 하나의 시가 가진 메시지에 주목했다면, 지금은 한 권의 책으로서 시편이 가진 의미의 중요성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편은 하나의 책 안에 5개의 챕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섯 챕터를 나누는 기준은 동일한 편집자의 표기에 따른 것입니다. 각 챕터 마지막에는 제사장의 축도인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로 이루어진 영광송과 회중의 화답인 “아멘”이 담겨 있습니다. (시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시 72: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89: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각 챕터는 내용의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기승전결을 만들어 냅니다. 많은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모세오경과의 연관성입니다. 예를 들어, 1권에 해당하는 시편 1~41편은 마치 ‘창세기’의 메시지와 같이 인류 창조에 대한 강조점을 갖고 있습니다. 2권인 42~72편은 마치 ‘출애굽기’와 같이 ‘구원’에 관한 메시지를, 3권은 ‘레위기’처럼 예배와 성소에 관한 메시지를, 4권은 ‘민수기’처럼 인간의 방황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메시지를, 5권은 ‘신명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찬양에

대한 강조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에 지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편 하나하나의 메시지가 담은 강조점을 모아서 구성했을 때, 각 권의 강조점이 모세오경의 메시지와 연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의 활용은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러 모이면, 랍비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줍니다. 그때 선포하는 것은 ‘토라’입니다. ‘토라’는 우리가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즉 이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있는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회당에서는 토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응답을 올려드립니다. 바로, 이 응답이 ‘시편’이었습니다. 그러니 토라와 시편의 내용이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시편의 시들은 구전으로 전수되다가, 이것이 오늘날 형태로 모이고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 것은 포로기 혹은 귀환쯤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으로 시편을 읽은 첫 번째 독자는 포로기의 백성일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이야기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듯이,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1세대의 약속의 땅 입성 실패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포로 상황과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앞서 4권이 민수기의 내용과 연결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약속의 땅에 대하여 실패한 포로가 된 유다 백성의 상황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4권 마지막에 있는 시편 106편의 내용인데 그들의

배경에서 읽으면 영락없는 귀환에 대한 소망입니다. (시 106:4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모세오경의 관점으로 이 시편을 읽으면, 광야의 실패를 극복하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고백이 됩니다. 그러하기에 이것을 민수기적 시편으로 분류해서 회당

예배에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시편을 하나의 책으로 읽게 되는 독자들에게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오게 될 약속을 떠올리는 현실적인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뒤이어 5권을 시작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시 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시 107: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그래서

시편은 하나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연결해서 보면 마치 역사서처럼 하나의 긴 스토리가 되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숲의 관점에서 시편을 보는 방법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오늘 주어진 시편 105편의 나무를 보듯이 이 안의 내용에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 105: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시 105: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하는 일을 만민이 알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먼저 그분을 알고 누리되, 더 나아가 모든 만민이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2절도 그분을 노래하고 찬양하라고 말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을 말하라고 하죠. 여기서 하는 일들은 대부분 ‘입’을 사용하여 하는 일들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신

일과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전하여 세상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시 105: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시 105: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3~4절은 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그분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라는 것은 이 또한 증언이죠. 그리고 3, 4절에서 ‘찾으라’는 명령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듯이, 잃은 것을 찾기 위해 수색하듯이 적극적인 추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포로기에서 이 시편을 읽었던 유대인들이라면, 성전도 무너지고, 약속의 땅에서도 쫓겨난 자신의 현실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이죠. 다른 비본질적인 것이 더 중요했던 사람들은 ‘무엇이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이신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으므로’가 삶의 동기와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모함은 그냥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자연스럽게 되는 부분도 있으나, 우리가 다른 것을 사모하거나 마음을 잃어버릴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힘써 사모하라, 얼굴을 찾으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이 있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구하는 사람이 받을 것이고, 찾는 사람이 찾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릴 것이라는 이야기는 신앙이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이런 신앙을 인위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 간절하게 구해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인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시겠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목사로서 제가 보더라도 간절하게 예배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예배 시간에 보입니다. 설교 시간에도 여러분의 눈만 보더라도 간절하게 말씀을 구하는 자와 아닌 사람이 보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필요하면 주시겠지’라는 느슨한 마음이 필요해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찾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반대로 합니다. 세상의 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적극적이고 필사적입니다. 뭐가 조금이라도 할인하면 그것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알기 위해서 힘씁니다. 적어도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더 간절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유 가운데, 밭에 감춘 보화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시 105: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시 105:7) 그가 바로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시 105:8) 그는,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그가 허락하신 약속이 자손 수천 대에 이루어지도록 기억하신다. 우리가 언약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설교에서 여러번 강조하며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의 백성뿐만 아니라 우리도 ‘새 언약의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언약 안에 있는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언약의 당사자에게 대한 서로의 헌신입니다. 약속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속 이행은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삶의 행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를 친히 보호하시며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과 삶에 있던지 유효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주님 또한 최선을 다하십니다. (시 105:9) 그것은 곧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요, 이삭에게 하신 맹세요, (시 105:10) 야곱에게 세워 주신 율례요, 이스라엘에게 지켜 주실 영원한 언약이다. (시 105:11)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물려줄 기업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셔서 이삭과 야곱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지키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온전히 정착할 때까지 수백 년이 걸렸기에, 사람은 그 약속을 다 잊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영원하시기에 그것은 영원한 약속이 됩니다. 시편 기자는 요셉의 이야기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사용하여서 자기 백성의 모든 길을 인도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요셉을 따라서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야기, 그곳에 속하여 살면서 백성의 숫자가 크게 불어난 이야기, 그로 인하여 애굽으로부터

미움과 학대를 당한 이야기 등 출애굽기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를 시편 기자는 언급합니다. (시 105:26) 그러므로 그가 종 모세와 택하신 아론을 보내셔서, (시 105:27) 백성에게 그의 표징을 보이게 하시고 함의 땅에서 기사를 행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애굽에 내려진 재앙에 대해서 상기시킵니다. ‘피, 개, 이, 파, 악, 독, 우, 메, 흑, 장.’ 애굽에 내려진 이 10가지 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우선 시편 기자가 증언하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애굽의 통치자 바로와 하나님의 대언자 모세와 아론 사이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출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광야로

나오게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애굽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제국 형태의 국가였고, 말 그대로 피라미드화 된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밑에 있었고, 바로는 그곳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미디안의 목자로 40년 동안 살던 볼품 없는 모습의 모세가 찾아와서 바로에게 명령하듯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바로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이것은 어쩌면 바로에게 당연한 대답입니다.

말 그대로 바로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신에 불과합니다. 설령 그런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애굽에는 이미 수많은 신이 있는데, 고작 애굽의 노예들이 섬기는 신에 대해서 바로가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바로 그 피라미드 세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열 재앙’ 사건입니다. (시 105: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그곳을 어둡게 하셨으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시 105:29) 그들의 물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그들의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시 105:30) 그 땅에 개구리가 많아져서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시 105:3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그들의 온 영토에 이가 생겼도다 (시 105: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그들의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시 105:33)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 (시

105: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수많은 메뚜기가 몰려와 (시 105:35) 그들의 땅에 있는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들의 밭에 있는 열매를 먹었도다 (시 105:36) 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제일 먼저, 나일강이 심판을 당합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젖줄입니다. 고대 국가들이 모두 강을 중심으로 문명을 이루었죠.

이집트 문명의 기원은 나일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치십니다. 나일강이 피로 물든 현상이 7일 동안 지속됩니다. 7일이라는 것은 창조의 시간과 같습니다. 이는 애굽에 이룩된 창조의 완전함이 7일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판하시는 역창조의 서막이 오른 것입니다. 이어서 그 나일강에서 올라온 개구리들이 애굽을 뒤덮습니다. 심지어 바로의 궁궐 침실까지 들끓게 됩니다. 그리고 이집트 전역의 먼지가 이로 변하여 애굽 사람과 짐승을 괴롭히고

파리가 그 땅을 덮어버립니다. 또한 전염병으로 가축이 몰살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이 유일하게 미치지 않은 곳이 하나님의 백성이 머무는 애굽 안에 있던 고센 땅입니다. 구별된 보호가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악성 종기가 애굽의 모든 사람과 바로가 자랑하던 주술사들까지 덮칩니다. 이어서 우박이 내려서 애굽의 식물을 초토화합니다. 이때부터는 애굽 사람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메뚜기 재앙으로 남겨진 우박의 피해 속에서 살아남은 농작물도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 어둠이 애굽을 뒤덮습니다. ‘흑암’의 재앙입니다. 흑암의 재앙은 빛이 있기 전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계를 주었다면, 애굽에 내려지는 심판은 바로의 죄악으로 인해 점점 창조를 역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애굽 사람들에게는 ‘태양’의 숭배가 가장 심했습니다. 태양신 ‘라’가 있었고, 그의 후손이 ‘파라오’로 믿고 있었죠. 하나님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십니다. 오직 고센 땅에만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열 번째 재앙, 마지막 최후의 심판이 애굽에 선포됩니다. 이로써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던 바로와 애굽은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 앞에서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제국의 인프라가 모두 박살 납니다. 강력한 피라미드 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난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 나타나는 요소들은 다신교 국가 애굽의 만신전에 있는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나일신 ‘하피’, 개구리신 ‘헤켓’, 황소신 ‘아피스’, 하늘신 ‘누트’, 태양신 ‘라’ 등 10 재앙이 모두 애굽이 믿는 우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이기에’라며 무시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 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출 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이렇게 본다면 사실상 시편 105편은 우리가 최근까지 봤던 예레미야 설교와 맥을 같이 합니다.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특별히 시편 기자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도하심이었음을 강조하며 시편 105편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 애굽의 피라미드 체제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여 애굽에서 전리품을 가득 안고 그 땅을 나옵니다.

피라미드가 뒤집힌 것입니다. (시 105:37) 그들로 은과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가운데서 비틀거리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시 105:38) 이집트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떠날 때 기뻐하였다. 애굽을 나온 그들 앞에 펼쳐진 삶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이 세상의 시선에서 가장 공허한 곳입니다. 그러나 본래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하나님’은 채우신 창조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을 때 ‘충만한 곳’이 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광야에서 가장 충만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을 펴서 뜨거운 태양에서 자기 백성을 숨기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밝혀주셨습니다. 먹거리를 찾을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을 갈라서 물을 주시며 마른 땅에 강을 내셨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광야인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없는 상태일 때,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의 문제는 늘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변덕이 없습니다. 주님은 절대 먼저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안에서 주님을 붙드는 것은 언제가 가장 안전한 선택입니다. 시편 기자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105:42) 이것은 그가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하신 말씀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시 105:45)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늘 최선을 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믿음은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면 할게요.’ ‘하나님이 먼저 해주세요.’는 안타깝지만, 성경이 기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는 것이 히브리서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을 보이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여러 환경 속에서 자꾸 흔들거리는 우리의 문제이지, 하나님은 흔들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흔들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억하십시오.

흔들거리는 마음을 지켜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을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야고보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빛도 창조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은 빛에 의한 그림자도 없을 만큼 크시고 변함없고 영원하다는 표현입니다. 어쩌면 오늘 시편 기자가 이 고백을 우리 안에 일깨우며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늘을 좀 봐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문제가 아무리 커 보인다고 하더라도, 나를 대적하는 힘이 아무리 커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며 오늘 예배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그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 시편의 첫 고백처럼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이 역사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하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 한번 기억하고, 그분 앞에서 내 삶을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나는 작은 문제 앞에도 흔들릴 정도로 때론 연약할 수 있지만, 그분은 우리와 하신 약속을 영원히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드려진 삶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지키시는 우리가 믿을만한 유일한 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의 존재만큼 크지 않기에, 우리가 오늘도 힘써 해야 할 것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 앞으로 내 삶의

근원과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 감정과 상태는 바람 앞에 그림자의 흔들림처럼 커지고 작아지지만, 그림자도 없을 만큼 크신 그분의 손 위에 내 삶을 맡겨드릴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 105: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