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회복의 길” / 강정규 목사

2024-09-06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랜만에 다시 <하나님 나라의 도전>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저희가 주로 사용하는 것이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풍삶초를 가지고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는 이것이 기존의 다른 복음 전도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풍삶초는 복음을 바로 전하기보다,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기 나누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되기까지 신뢰를 얻고, 고민도

던지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 방식의 복음 전도가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굉장히 유용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복음을 소개하는 소개자이며,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을 믿어달라고 우리가 애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죠. 아직 필요 없다고 여기면, 저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깨어진 세상이 그 사람에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결국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면, 복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우리의 삶을 보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다시 복음을 나눌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전하고, 그리고 듣지 않더라도, 그의 초점이 우리에게 왔다면, 우리가 복음 안에 잘 살면 그것이 통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보다 조금 더 명확하게 ‘복음’에 대해서 말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풍삶초는 굉장히 부드럽게 복음에 대해서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기에,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더 직설적으로 복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거칠지만 정확하게 나눠야 할 수도 있거든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 <하나님 나라의 도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도전>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해 살고 싶은가?’ 우리가 지난 2편의 설교를 통해서 다룬 소주제는 ‘깨어진 세상’과 ‘자기중심성’에 대해서입니다. 저희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망가지고 깨어졌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그 안에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세계도 그렇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세상이 왜 이럴 수밖에 없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며 살았는데, 이것이 한 번에 정리되는 느낌의 단어가 ‘깨어짐’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현상만 보다가 ‘원인’을 통해 현상을 보니 더욱 선명하게 세상의 한계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왜 깨어짐을 먼저 이야기할까요? 내가 깨어져 있고 세상이 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복음에 대한 절실함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져 있는 세상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순응하며 살기도 합니다. 혹은 깨어진 세상에서 그나마 안정적인 파편 속에 살아서 상대적 평안함 속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의 만연한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깨어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나’의 문제가 아니면 괜찮다거나,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고, 물려주고 싶어서 누군가는 ‘대의’에 동참합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심정의 헌신과 희생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길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평안과 구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며, 하나님의 비전과 대의에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저는 사귐의교회를 이 시대에 꽤 괜찮은 ‘파편’ 혹은 배가 침몰한

상황에서 그나마 안전한 ‘구명보트’로 그저 우리끼리 생존해 있는 것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 이미 들어온 여러분도 잘 지켜내야 하지만,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하고자 하시는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반드시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우리가 이 설교를 통해 복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여, 나도 살고 누군가도 살리기 위한 마음을 갖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우선 우리는 깨어진 세상의 거대한 조류를 이해해야 합니다.

나도 만약 그 거센 조류 안에 속하여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이 다 이렇게 산다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기보다는 세상의 넓고 큰길을 따라가겠다는 모습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를 진심으로 따른다는데, 그 삶에 어떤 포기와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회심은 일회적인 것으로 완성이 아니라, 회심 이후의 그 마음과 결단을 평생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수리남>에 제일 많이 나왔던 구호는 ‘Fight for Money’입니다. 돈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죠. 우리는 그것과 달라야 합니다. Fight for Jesus. Fight for His Kingdom.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전보다 더욱 거센 싸움을 회심과 함께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세상이 우리를 적으로 보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회심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회심 이전의 나와 싸워야 하고, 내 회심을 다시 바꿔놓으려는 세상 혹은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우리에게는 ‘공격 무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무찌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유혹 앞에서 말씀의 진리, 성령의 보호를 무기 삼아 버티는 것입니다. 방어해 내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하고 있는 쪽은 버티면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의 이 가르침을 ‘시이고견 : 시험은 이기고 고난은 견디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입니다. 원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도 ‘사탄’이 잘못한 것입니까? 사탄이 유혹했죠. 그러나 그것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마음, 죄의 가장 근원적인 그 마음, 자기중심성이 거기서 동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과 다른 능력과 지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구별된 능력을 보입니다.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가장 비슷하다는 동물을 아무리 모아놓아도 인간이 이룬 문명을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생물학적 DNA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 우리와 동물의 차이를 나누기 때문이죠. 저는 이것이 창조론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창조되었느냐의 문제보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창조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별함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이자, 세상 경영의 대리자로 삼아 함께 일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창

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창세기의 증언을 그대로 본다면, 사람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 세상인데, 이 세상은 ‘사람 창조’를 기다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기능하게 되었고, 사람 또한 그 하나님의 섭리에 맞게 살아갈 때 온전한 세상으로 작동되는 것이었죠. 하지만 인간에게 주신 특별함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 필요 없어도 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근거가 됩니다. 인격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주도권을 가지고 해나가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 모든 죄의 근본이 됩니다. 만약 자기중심성을 갖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문제는 세상이 그렇지 않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빼버리면 세상은 충만함을 잃어버리고 공허해집니다. 하나님을 삶에서 몰아내 버리면

인간은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고 한계에 갇혀 버립니다. 제가 아내랑 종종 예전에 봤던 괜찮은 드라마를 다시 보기 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를 조금씩 조금씩 함께 보고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수아 : 좋은 차, 좋은 집.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여유로운 생활. 나 어렸을 때부터 꿈꿨었어. 새로이 : 이뤘네. 수아 : 응. 나 진짜 열심히 살았다. 근데 뭐랄까? 요즘 기분이 이상해. 분명

원하던 삶인데, 공허하달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제가 예전에 이 드라마를 볼 때는 몰랐지만, 다시 이 장면을 보니까 확 느껴지더라고요.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느끼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이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주 명확하게 그림처럼 그릴 수 있도록 이 문제의 원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렘 2:13)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다시 오셔서 그분에게서만 오는 영원함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세상의 것들이 있죠. 그런데 그것은 화병에 꽂혀 있는 화초와 같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세상의 어떤 성취감으로 빛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온전해지지 않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창조주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여러분, 비둘기가 공원에서 맨날 살면서 ‘아... 공허하다’ 하고 있을까요? 다른 피조물들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우리에게 있는 여러 한계와 공허함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노력도 해왔습니다. 1) 양심과 선행 양심을 따라 착하게 살고 선을 베풀며 살아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모습은 인간이

가진 자랑스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계가 명확한 존재이기에 사실 우리 마음의 넉넉함은 쉽게 고갈됩니다. 대체로 선이란 넉넉한 마음과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작은 고갈에도 내 감정과 태도는 쉽게 뒤바뀝니다. (렘 17: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피조물의 태도는 일정한 편인데, 우리는 더 나은 듯 보일 때도 있지만, 반대로 가장 거짓되고 부패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생태계의 안정적인 피라미드에 늘 균열을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우리 때문에 균형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이미 수많은 종이 멸종되어 사라졌습니다. 법으로 금지하지 않았으면 바다의 고래까지도 멸종되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최강의 육지 동물인 코끼리도 인간에 의해서 상아만 잘리고 버려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는 본성상 오른손이 좀 선한 일을 하면 왼쪽 새끼발가락에까지 알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대부분 누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행이 지속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전>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나는 귀신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무서워하는 귀신이 하나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그 귀신을 자주 본다. 그 귀신 이름은 ’섭섭 귀신‘이다. 대부분 사람은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뭔가 열심히 했는데, 그것도 본성에 맞지 않게 희생하면서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매우 섭섭해한다. 심할 때는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던 일을 그만둬 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선한 일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하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즉, 우리에게 있는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는 일은 환경과 여건이 좋을 때는 작동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반할 때나 선을 위해 고통받을 때면 쉽게 무너집니다. 무엇이 더 선한 일인지 알면서도 선을 좇지 못할 때도 있고, 한술 더 떠서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2) 탐구와 연구 인간의 본질적 질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정의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요즘 인문학 열풍이 일어나는 것은 경제적 풍요만으로는 인간의 근원적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 지성을 축적해 왔고,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통찰력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전도서의 저자는 오히려 지혜가 많아지고 아는 것이 많아지면 걱정도 커진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모습은 오늘날 많은 지식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현상이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분석하고 논증하지만, 지식과 삶이 따로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보면, 지식인들은 적지 않은 경우 매우 비겁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차라리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이 더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지식인들이 자신이

가진 지식 때문에 번뇌도 많고 걱정도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주장만큼 사는 것도 벅찬 세상에서 인간의 연구와 탐구로 과연 근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3) 기도와 종교 행위 누군가는 우리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 생활도 합니다. 신에게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지성을 다하고 신심으로 신에게 나아가면 신이 인간에게 반응할 것이라고 믿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 밖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모습들도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어떤 예배의 행위들이 아닙니다. (호 6: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저희교회에서는 때로는 서운할 정도로 이런 부분에서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의 능력으로 찾아내어 만나고, 그분을 이해하며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할 것입니다. 4) 회복의 길 그럼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구원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깨어진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을 주시고자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길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을 하드디스크 포맷하듯이 확 뒤집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인격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적으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를 일으키거나 통치자를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구원 역사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한 사람을 찾아가신 일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11장을 원 역사라고 부르는데, 창조와 타락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격적인 일 하심은 12장, 아브라함과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을 보이며 자신에게 찾아와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그가 더 똑똑하거나, 그가 더 특별한 경험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하나님에 관해 진실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만큼 진실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따라가며 그는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여기에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로부터 민족이 일어나려면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자녀가 생기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점점 절망하고 체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현실적인 것으로 타협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종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자녀를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창 15: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과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하여 믿음으로 따라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우리는 그것을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기대하시는데, 이 믿음은 세상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정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간절하게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바를 ‘큰 믿음’으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까요?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나 정성의 깊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에 관해 알고 깨달은 만큼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나의 정성과 열심으로

신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만큼, 하나님에 대한 말씀의 이해만큼, 그 하나님께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 곧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지 않지만, 그 존재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상을 주시는 것일까요? 내가 원하는 것? 자동차, 연인, 배우자, 성공, 병의 치유 등일까요? 성경을 잘 보면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 간절히 찾는 자에게 주시는 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저는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도대체 그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니다.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주시리라는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를 깨어짐으로부터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발휘할 근거는 바로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 의지’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찾으려면 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결단하셨기에 찾는 자가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변함없는 진리인 성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을 손아귀에 넣고 자기 입맛대로 하려는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히 내 존재를 하나님께 의지하여 살아가고 싶은 자, 하나님의 뜻 안에 나를 내어드리고 살아가려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결단과

찾아오심, 우리의 반응과 붙듦으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러하듯이, 우리를 먼저 회복시키신 후 회복되어가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 양심대로 사는 것, 인생이 무엇인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교회 생활하는 것, 이런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알아라. 나를 안 만큼 나를 따라라. 나를 알면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안 만큼 진실하게 내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런 믿음을 볼 때 나는 기쁘다.”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시려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부모라면 자기 자녀를 이용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노후의 안정을 얻으려 하거나 금전적 유익을 구하려

한다면 건강한 부모라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부모라면 자녀가 세상 속에서 의미 있고 멋지게 살아 주길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도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자녀와 부모가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를 무시하고 없는 듯 여기며 자기 혼자 잘 사는 자녀를 보면, 그가 아무리 성공했더라도 부모는 슬플 것입니다. 하나님도 같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 만큼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명사가 아닙니다. 한번 믿으면 끝이 아니라, 믿고 그렇게 사랑가는 것이니 믿음은 ‘동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것이 인간에게 차이가 있다고 한들, 하나님의 존재적 크기에 비하면 우리가 그를 아는 지식은 도토리 키재기 수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양이 우리에게는 중요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된 만큼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더 관심을 두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시작점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치유해가는 비전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일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 함께 믿음으로 그 회복의 길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