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강정규 목사

2023-08-04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특강 영상 샬롬!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영상으로 여러분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한 주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어디에서 이 영상을 보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이번 주가 휴가라서 한 주간 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이 영상은 휴가 전에 미리 찍어두었습니다. 아마도 이 시간에는 저도 양주에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흩어지는 예배로 드리죠? 저는 서대문구로 가서 개척교회 예배에 함께 참여하려고 합니다. 제가 고읍에 있을 때, 개척한다고

찾아왔던 후배인데, 이번에 교회를 이전하게 되어 저와 재민 형제가 인테리어에 조금 참여를 해서 돕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모습도 보고 싶고, 무엇보다 힘을 주고 싶어서 갈 예정입니다. 혹시라도 함께 가고 싶은 분들은 말씀해주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지난 3주간의 설교로 예레미야 6장까지를 다뤘습니다. 오늘 묵상 본문이 14장까지였으니, 그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죠. 오늘 이 특강을 통해서 저는 예레미야 11장까지의 내용을 여러분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강성묵 간사님이 12~18장에 대한 부분을 설교로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일에는 박예진 간사님이 19~25장까지를 중심으로 설교하면 저희의 예레미야 전반부 여정이 끝나게 됩니다. 오늘 보려는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7장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라고 제목 붙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서 예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유다 각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렘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렘 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렘 7: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예레미야가 선포한 메시지는 이것이죠.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설교 때 다뤘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은 말 그대로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하면 그 땅을 통해 하나님을 누리며 열방의 빛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불성실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등,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를 따라가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도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할 때, 이곳에 산다고 했으니, 그러지 못하면 쫓겨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선언,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제가 만약 한국의 가장 크고 좋다는 교회 앞에 서서 주일에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십시오.”라고 외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내용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이웃 사이에 정의를 행하고, 이방인,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약자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다른 신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백성의 종교와 삶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구원을 보장해준다는 신학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 삶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께서 구원을 주관하시는 것일 뿐, 그 성전의 어떤 행위가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즉, 성전과 현존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의 현현하시는 장소로 받아주셨지만, 그분의 실존이 예루살렘 성전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성전을 떠나실 수도 있고, 그분이 스스로 택하여

성전을 인정하실 때만, 그곳이 여호와의 성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곳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유심히 살펴볼 것은,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 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바알에 빠져드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다른 신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돈이 여러분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돈을 쓰는 주체인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우리에게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요구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렘 7: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렘 7: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렘 7: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전 예배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신앙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4절)는 하나님의 경고는 들리지 않습니다. 도둑질하고(8계명) 살인하고(6계명) 간음하고(7계명) 거짓으로 맹세하며(9계명) 우상들을 섬기면서도(1계명),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은 원칙상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사회에서 저지른 각종 파렴치한 짓과 불법을 예배로 용서받기 위해 성전을 찾습니다. 이들은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리며 자신들의 악행이 사함을 받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고 감사합니다. 성전이 자신들의 범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자들에 의해 점령당한 셈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피 묻은 손을 씻는 곳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이들이 하는 짓은 모두 ‘가증한 일’로 보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이들의 거짓과 위선을 다 지켜보셨기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경각심이 약합니다. 왜 그럴까요? 용서에 대한 길이 확고하게 열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날 용서하기도 이전에, 회개기도 한 번으로 내가

날 용서하고 끝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성전예배를 통해 사회에서 행한 범죄행위가 무조건 용서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과거의 잘못은 이제 깨끗이 씻겨졌고, 사회에 나가 또 잘못을 범해도, 제사를 드리면 다시 용서받을 수 있기에, 이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전에서 세탁을 끝내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 가증스러운 짓을 계속합니다. 자동적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예배’를 가진 자들에게, 예배는 계속 죄를 범해도

좋다는 ‘악(惡)의 면허증’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내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다고 전제합니다. 내 예배를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드려야지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징벌을 더 할 뿐입니다. 우리의 위선을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렘

7: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렘 7: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같이 남유다도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들은 채도 안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북이스라엘과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성소와 예루살렘 성전은 같은 레벨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여호와를 하나로 보았던 그들의 잘못된 시각으로는, 신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못하므로, 예루살렘 성전을 볼 때마다 마치 하나님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는 부적처럼 여겼던 까닭입니다. 그런 유다를 향한 심판 예언은 확정적으로 선포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렘 7: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심판은 취소될 수 있는 단계를 지나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에 하나님은 먼저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십니다. 멸망의 심판이 유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백성을 위한 예언자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유다에 만연해 있는 우상숭배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성전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빈번히 행해지는 우상숭배를 하나님은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낮에는

여호와께 예배하면서도 밤에는 하늘 여왕(렘 7:18)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모른 채 혼합적인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것이 몇백 년에 걸쳐 녹아들었기에, 이제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2000년대에 “부자 되세요”라는 CF가 방영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2000년대 한국 교회 여러 곳에서 축복한다고 외치던 것이 ‘부자 되세요’ 였습니다. 당시에 유행했던 ‘야베스의 기도’나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것도

이런 류의 신앙입니다. 잘 되는 것, 성공하는 것,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 ‘부자 되세요’ 였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한국 교회의 신앙은 위기였던 것입니다. (렘 7: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기억하시죠. 사실상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시키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율법에 대한 법적 준수가 아니라 말씀의 순종이었습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말씀의 순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그런 의미에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금연으로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신앙 좋은 사람이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금연을 힘쓰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 가운데 신앙 좋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있다고 하여 신앙이 좋은 사람인가? 이것에는 항상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것을 율법적으로 지키면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렘 8: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완악함과 어리석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은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여호와에게서 벗어난 길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에 사로잡혀 잘못을 행하면서도 이를 죄악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멸망의 길을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하나님조차도 당혹해하십니다. (렘 8: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렘 8: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이 ‘평강하다’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샬롬이 없음에도 샬롬을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북쪽으로부터 심판하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8장은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탄식이 8:18-9:1까지 이어집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독특하게 예언자의 개인적 탄식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예언자의 탄식 부분은 다음 주일에 강성묵 간사님이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9장에서도 백성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거짓과 악에 대한 고발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이웃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렘 9: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렘

9: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렘 9: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자꾸 잘못된 것을 학습합니다. 내 이익을 위한 노력을 지혜라고 배웁니다. 기계나 차를 다루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고장 난 것처럼 부풀리고,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부풀려서

추가수당을 받아도 그것을 모두가 하는 일이라 여기며 넘어갑니다. 세상에 만연한 거짓이 참 많습니다. (렘 9:9)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서는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그것이 멸망의 원인임을 설명합니다. 그를 통해, 심판이 왜 찾아왔는지를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은 돌이킴을 위한 회초리이기 때문입니다. (렘

9: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렘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이 단락은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살길을 찾을 수 있을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지혜와 힘과 부’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모방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진정 자랑해야 하는 것은 ‘지혜와 힘과 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앎’은 인식론적 행위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앎’은 고백적 성격을 갖는 지식으로,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결단적 행위입니다. ‘여호와께서 누구이신지’를 아는 자는 역사와 삶 속에 계시된 그분의 활동을 깨닫고,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갑니다. 이어지는 10장은 우상숭배에 대한 고발입니다. 이스라엘은 너무 많은 우상을 숭배했지만, 그러면서도 태연스럽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10장은 우상숭배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그것과 비교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형태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10장 후반부는 심판의 선고입니다. 이 단락은 적에게 포위된 예루살렘에게 주는 말씀으로, 주전 597년의 제1차 유배 또는 주전 587년의

제2차 유배를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렘 10:17)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렘 10:1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포위된 예루살렘에게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구원 가능성은 없기에 주민들은 점령군에 의한 유배를 대비하여 짐을 싸야 합니다. 여호와의 극적 간섭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헛된 소망에 불과합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보호자요 구원자셨던 하나님께서 이들의 적이 되어 예루살렘과 유다의 주민들을 멀리 이방 땅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길은 성이 함락되어 황망 중에 사로잡혀 빈손으로 먼 길을 끌려가지 않도록 필요한 물품을 미리 싸놓고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11장은 뒤이어 나오는 13장까지 연결되는 단락의 첫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강조되는 것은 ‘언약’입니다. 유다가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고발이죠. 11:1-14는 유다가 어떻게 구원 가능성을 상실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언약 파기를 고발하며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신명기 율법에 따라 언약을 파기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성경의 기준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언약 파기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주전 587년의 파국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그리고 그 이후 거듭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유다를 심판하는 사건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심판을 경험하고 그 파국적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재난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훈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 말씀의 의미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남유다는 반면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약 백성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지위가 같았습니다. 언약적 삶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이 저주를 불러왔기에,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한다면 그에게 미래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언약에 대해서

실패하기 전에 깨닫고 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렘 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렘 11: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렘 11: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일어난 심판이기에, 그들의 삶의 태도와 기준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것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사와 제물로도 안 됩니다. 예배의 행위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전심’을 다한 순종입니다. 지금 그들이 계속 놓치고 있는 것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렘 11: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대조적으로 비교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좋았던 과거가 제의적 경건에 사로잡힌 현재의 잘못을 탕감해주는 면죄부가 되지는 못합니다. 한때 하나님과 맺었던 특별한 관계(언약)가 이스라엘의 실존을 무조건적으로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지금’, 여러분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내가 과거에 이랬는데….’라는 과거의 열심에 여전히 기대어 현재의 부족함을 회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현재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이기에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 반면, 성경에서 풍성한 나무의 모습이 상징하는 삶이 있습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풍성한 나무와 같습니다. 오늘도 예레미야의 여러 고발들이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삶을 많이 점검하고 돌아보신 분이라면, 저는 오히려 소중하고 귀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나를 해부하는 메스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합니다. 오늘 저와 함께 나눈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죄로부터 한걸음 멀어지고, 하나님과 한걸음 가까워졌길 기대합니다. 이번 주일 흩어지는 예배 잘 드리시고, 다음 주 금요일 팸예배 통해 행복하게 만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