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거짓 위로, 참된 위로" / 강정규 목사

2023-07-30 · 예레미야 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2023년 7월 30일 주일예배는 <청소년부 주관예배>로 진행되었습니다. 평소 청소년부가 교육관에서 별도로 예배하는데, 이날만큼은 청장년과 함께 예배하며, 모든 예배를 청소년부가 주관하였습니다. 청소년부 예배팀이 찬양인도를 하고, 청소년부 대표교사가 청소년부에서 하던 것처럼 설교를 했고, 결단의 찬양도 진행했습니다. 아래는 청소년부 주관예배의 영상입니다. https://blog.naver.com/bcmm20th/223175456874 청소년부 주관예배 순서가

끝난 후, <예레미야 시리즈> 3번째 설교를 청장년을 대상으로 전했습니다. 오늘은 청소년부 주관예배로서 특별한 예배를 드렸기에, 오늘은 예레미야 6장을 짧은 메시지로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죄의 ‘임계점’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공의를 드러내십니다. 북이스라엘은 단 한번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지 않았기에, 임계점에 더 빨리 이르렀고, 하나님은 앗수르의

침공을 통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남유다는 종종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왕이 등장했었기에, 그로 말미암아 임계점에 이르는 시간을 더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왕이 ‘요시야’입니다. 요시야 통치 13년에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하죠. 그후 4년 뒤, 성전을 재건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요시야는 그 말씀을 기준 삼아서 바라보며, 말씀에서 벗어난 것들을 과감히 바꾸어 가기 시작합니다. ‘죄’를 의미하는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으로 봅니다. 과녁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거기서 벗어난 것이 죄라는 의미이죠. 매우 적절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도, 내 뜻대로 하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죄이죠. 우선 죄를 죄로 깨달아야 하고, 중요한 것은 돌이켜 바른 길로 행하는 회개에 있습니다. (왕하 22:11) 왕이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는, 애통해 하며 자기의 옷을 찢었다. (왕하 23:3) 왕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를 것과,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과, 이 책에 적힌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주님 앞에서 세웠다. 온 백성도 그 언약에 동참하였다. (왕하 23:25) 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요시야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씀’을 기준으로 유다 전체를 개혁했습니다. 요시야가 왕이 초기에 남유다 또한 죄악된 삶을 살았기에,

예레미야도 유다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언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기회를 주시죠. 율법책을 발견하는 사건을 통해 요시야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 율법책은 신명기로 보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에는 이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 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28: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제가 하나님 나라 시리즈

설교 때도 중요하게 다룬 본문입니다. 말씀을 지켜 살아가는 공동체에 나타나는 눈에 띄는 현상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서 요시야에 대한 평가가 딱 이렇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살룸에 대한 예언을 보면, 요시야에 대한 평가가 드러납니다. (렘 22:15b)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렘 22:16)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요시야에 대해서 ‘정의와 공의를 행한 왕’이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한 왕’으로 그 시대가 형통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어두운 시대에 한줄기 빛과 같은 모습으로 유다가 죄의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도록 힘썼던 왕이었던

것이죠. 그때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종교의 변화는 종교심만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심한 이후, 그 사람의 인격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저는 그 회심을 믿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인데, 어떻게 종교심만 좋아지겠습니까? 회심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국가로 보자면, 종교개혁의 변화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시대의 유다

사회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실제적 애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보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후, 예레미야는 유다의 변화를 기뻐하며, 그의 경고 예언들은 멈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가 죽게 된 후, 유다의 모습은 다시 예전으로 빠르게 돌아갑니다. 어쩌면 유다는 마지막 돌이킬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유다의 모습을 ‘배신’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백성은 진짜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렘

3:10)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마지막 기회를 남유다는 놓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유다를 바벨론 땅에 포로로 보내는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됩니다. 6장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군에 의한 예루살렘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북쪽에서 유다를 공격하는 적군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앗수르, 바벨론 등 강대국의 침략은 분명 그들의

야망과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두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사용할 수 있는 더 크신 분입니다. 그것으로 유다를 다루십니다. 이유는 유다가 더 이상 자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악했기 때문입니다. (렘 6:13)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렘 6:14)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앞서 언급한 신명기의 말씀대로 살면, 그 모습으로 인해 이뤄지는 세상은 피라미드 구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남유다는 그렇지 못합니다. 백성 안의 연대성이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이것이 피라미드 세계, 자본주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지금의 세상도 그렇습니다. 제가 자꾸 세상을 따라 살지 않아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하고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우 경계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도 영향을 받고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살면서 가나안의 문화를 따라서 유다가 타락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 가운데 나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 살 것인지 끝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렘 6: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파수꾼으로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를 세워 위험을 알리고 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미 거짓된 예언자들이 전해주는 달콤한 ‘샬롬의 메시지’에 길들여진 귀에, 회개를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외침은 허공을 치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의 종교지도자,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백성들에게 ‘괜찮다 괜찮다’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함께 망한 것이 예레미야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사실 여러분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설교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제가 66권을 따라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저도 말하다 보면, 위로와 축복을 말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예레미야의 설교를 통해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점검하며 돌이키게 된다면, 저는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런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우리 함께 말씀을 붙들고,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구별된 존재로

살아갑시다. 세상을 따라 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서로에게 참된 위로와 힘과 도전이 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