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열왕기상 19장 / 고요한 속삭임 / 강정규 목사

2021-01-22 · 열왕기상 1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는 제가 때로는 독한 설교자 혹은 부담스러운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로서 가장 큰 사명이라고 여기지만, 동시에 여러분을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때로는 그 설교들이 너무 무겁고 때로는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알기에 저도 가끔씩은 아픕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뭔가를 잘 하고 있기에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여러분들보다 더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 많은 부끄러운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제가 먼저 찔리고 다치고 아픈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앞에서 제가 너무 큰 죄인임을 깨닫죠. 아마 제가 잘하고 있고 실천하고 있는 것만을 설교할 수 있다면, 저는 어떤 설교도 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저 저도 말씀 앞에 충실하고 순종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은 수술용 메스처럼 날카로워서, 의심이든 변명이든 무엇인가 갈라내고, 우리 마음을 열어서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게 한다고 표현합니다. 때로는 말씀이 우리의 죄성과 변명들을 도려내고 파헤치는 수술용 칼과 같겠으나, 동시에 우리를 어루만져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주일에 전한 예수님의 설교, 4복 4화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말씀과 같이 가난, 배고픔, 울음, 핍박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계시다면, 오늘의 말씀을 통해 그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언급된 것이, 가난함, 배고픔, 울음, 핍박이라고 했는데... 구약에서 이 모든 것을 다 경험했던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엘리야’입니다. 그는 우리가 역대하를 공부할 때 다뤘던 북이스라엘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아합 왕 때의 인물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신앙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따르는 엘리야는 굉장히 외롭게 그들과 싸우게 되었죠. (왕상 18: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엘리야의 대결 장면이죠. 850 vs 1 입니다. 정말 살벌하고 외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엘리야는 끄떡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850:1의 싸움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아무것도 아닌 우상의 대결이었죠. 대결 방법은 제단을 준비하고, 제물을 바치되, 불은 각자의 신이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판결은 백성들의 몫입니다. 먼저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이 바알에게 기도를 합니다. 오전 내내 기도를 하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습니다. 뒤이어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가져와 제단을 쌓습니다.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죠. 그리고 도랑을 파고 도랑과 제물에도 물을 흠뻑

부은 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저는 주의 종이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지금 이 순간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 제게 응답해 주십시오. 제게 응답하셔서, 주는 참 하나님이시며 이들에게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이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제물과 장작을 다 태우고 그 불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도랑의 물까지 다

말려 버립니다. 이 대결을 주변에서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온 백성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모두 외칩니다.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엘리야가 외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십시오.” 이 일로 아합은 완전히 기가 죽습니다. 엄청난 승리잖아요. 엘리야도 얼마나 흥분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우상 선지자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를 절망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너를 응징하고 되갚아 줄 것이다. 내일이면 너도 그 예언자들과 같이 죽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편지를 받은 엘리야의 태도가 ‘무너짐’이었어요.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좀 이해가 되는데... 이런 거죠.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바뀌는구나.”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했더라면 소망도 없는데, 막 뭔가를

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면서 드디어 이제 뭔가를 이뤄낼 것 같은 소망을 품습니다. 아합도 엘리야의 승리 앞에서 무너졌으니까요. 바알 선지자들도 모두 죽였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세상이 하나도 안 바뀌고 더욱 거세게 나를 위협해요. 소망한 만큼, 기대한 만큼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야... 안 되는구나.” 그 큰 승리도 소용이 없구나.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산을 만나요. 동산도 넘고 계곡도 넘고 저 마지막 정상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도달했어요. 거기 서보니 앞에는 그보다 더 큰 산이 있거나, 절벽이 있어요. 우리는 그때 좌절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 너무 힘들게 해서, 이 사람을 어떻게든 품어보려고 하면서 간신히 품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날 힘들게 하는 상황을 만나기도 하죠. 어떤 사건을 믿음으로 잘 이겨냈어요. 그런데 더 절망적인 사건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인 탈진을 하죠. 거기까지는 기도하며 부르짖으며 온 힘을 다해 왔고 해냈는데...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도

않은 무력감의 상태인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도 사역에 있어서 그런 적도 몇 번 있어요. 저도 열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부교역자 시절부터 교회의 어떤 부분을 바꿔보겠다고 정말 교회에서 잠을 자며, 내 모든 열정을 다 쏟으며 교회를 갱신해보고자 노력해보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이 한계에 부딪히고, 오히려 오해를 받고 이런 경우들도 있었어요. 그러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힘이 없어요. 그렇게 해봤는데도 안 되는데... 이런 마음이 찾아오는 것이죠.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엘리야가 도망칩니다. 승리를 했는데 결국 엘리야가 도망치는 것입니다.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가 사막 길을 걸어가다가 로뎀나무 아래에 이르러 그 그늘에서 쓰러집니다. 그러면서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이러며 쓰러져

잠이 든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힘들면,,, “주님 저 좀 데려가 주세요.” 혹은 아예 신앙에서 떠나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결국 신은 없어.” 이런 모습이 될 때가 있어요. 엘리야는 자신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다며, 열등감 속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우울증의 모습이에요. 엘리야와 우울증은 선뜻 연결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이것이 또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도 가끔씩 찾아옵니다. 우리가 사역하다가 Burn out

된다고 말하죠. 다 타버린 것입니다. 저도 사역을 하면서 상담을 많이 하는데, 이런 상담이 많았어요. “열심히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잘 안돼서 속상해요. 하나님이 안 느껴져요. 하나님은 날 안도와 주시나 봐요.”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어쩌면 이곳에 앉아계신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답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로는 답이 다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일지는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말하면서도

이 말이 위로가 될까,,, 때로는 아무말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런 것 아시나요? 위로를 해낼 능력이 없는 거예요. 마음은 진짜 가득한데.. 위로하고 싶은데.. 제가 어떻게 위로 하겠어요. 여러분, 보통 이런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정말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이 많거든요. 만약 열심히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었다면, 안도현 시인처럼 이렇게라도 얘기했겠어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열정을 말하는 책의 제목처럼,

‘한 번이라도 모든 걸 걸어본 적 있는가?’ 이렇게라도 말해주겠죠. 그런데, 엘리야와 같이 힘겨운 신앙의 여정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신앙대로 살아보고자 노력했던 성도들을 만나면, 해줄 말이 없어요. 제가 그래서 그런 청년들에게 했던 대답은 고작, “나도 네 얘기를 들으니 참 속상하다” 였습니다. 정말로 속상했습니다. 너무나 속상했어요. “하나님, 믿는 자들의 삶에 평탄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 뜻대로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해주세요.” 이것이 제가 그런 상황 앞에서 늘 하던 기도였습니다. 누가 이 엘리야에게 더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요. 갈멜산에서 그 대결을 펼쳐서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을 다 죽였는데도 세상이 안 변하는데...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의 모습은 사실 엘리야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다른 성경 인물들도 그랬어요. 모세, 예레미야, 욥, 요나 등도 이러한 실의에 빠진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아요.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그러한 제자의 삶을 살아도 때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현실 앞에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쳐 쓰러질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반드시 제 목회에 그러한 시간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이 엘리야를 어떻게 대면하시는지 보세요. 우리가 말씀에서 길을 찾읍시다. (왕상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엘리야는 잠이 들어있습니다. 잠만 자려하는 모습도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또 어떤 시점에 이르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만 자려 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엘리야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지금 그의 지친 모습에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실망하셨을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엘리야, 너 그것밖에 안 돼? 너 나 못 믿니? 이게 무슨 초신자 같은 모습이야, 너 선지자 맞아?”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천사를 통해 그를 어루만지고 먹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자도록 하십니다. 육체와 정신적인 피로를 우선 해결해주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고 싶은 것은 전인적인 위로입니다. 일어날 수 있도록 먹이시고, 쉬게 하고, 위로합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어루만지십니다. (왕상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번에 하시는 말씀은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입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다가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남유다의 끝자락인 브엘세바에 와 있는데, 주님은 호렙산이라고 불리는 시내산으로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멈춰 서서 쉬어야 하지만, 또 다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은 후에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엘리야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근간이 흔들린 것이 아닙니다. 회복이 있은 후에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찾아온 위기, 탈진, 절망. 그 상황에서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해야 할 것은 위로요, 위로 받은 신앙인이 해야 할 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물으시죠?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질문을 주님은 두 번이나 연달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는 엘리야의 대답을 통해서, 엘리야가 왜 탈진에 빠졌는지, 우울증에 빠졌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엘리야에게도 이 과정을 거쳐 성숙해야 할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좌절은 엘리야를 성숙시키는 또 하나의 과정이 되고 있는 것이죠.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그의 대답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모습은 ‘비교’입니다. 그가 지쳐 쓰러졌을 때에도 그는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처지를 말할 때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장 우월했다는 영적 교만함이 엿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살았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으며,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앞장섰다고 말합니다. 틀리지 않아요. 우리도 엘리야가 그런 사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월감이 자신의 처지를 더욱 외롭고 절박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나 밖에 없어...” 찬양에도 이런 가사가 있어요.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우리가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살다가 지치게 되는 이유도 사실 이것과 연관이 깊습니다. 나만 하고 있는 것 같은 섬김, 남들과 다른 헌신과 삶, 탈선도 타락도 하지 않았던 순전한 삶. 그런데 이것에 대한 나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깊은 회의감을 갖습니다. 영적인 외로움과 심한 경우 배신감에 빠집니다. 엘리야의

삶이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게 살았던 사람일수록, 더 소모되고 지쳐서 영적인 탈진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그의 대답 속에 나타나는 두 번째 모습은 ‘외로움’입니다. 엘리야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토록 없는지... 자기 혼자 이 어려움을 짊어지고 가고 있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영적 교만함과 영적 외로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그러나 이러한 천지가 진동하는 역사함 가운데 여호와는 계시지 않습니다.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모든 불이 지나간 뒤에 ‘부드럽고 고요한 속삭임’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구약에서 대부분 하나님의 임재는 지진과 불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마주했던 것처럼 그런 강렬한 하나님의 일하심,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쳐있는 엘리야를 찾아온 주님의 모습은 그 불이 지나간 이후에, 부드럽고 고요한 속삭임이었어요. 이 또한 사명을 고취시키려는 주님의 마음보다는 엘리야를 토닥이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님을 봅니다. 주님이 엘리야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줄이면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나는 너를 통해 계속 나의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너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지쳐 쓰러질 수 있지만, 네가 나를 버리지 않고, 네가 내 사명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시 알게 하시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의 사람이 그의 동역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할 남겨진 사역을 충실히 하다가, 하늘로 부름을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게 됩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인 것 같다고 느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고, 또 엘리야와 같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그 신상에 입 맞추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세요. 우리가 이기길 응원하세요. 때론 지쳐 있는 나를 일으키고 손 잡아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쓰러지는 것은 때론 내가 막을 수 없어요.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넘어질 수 있으나 주님 손을 붙잡고 일어날 수 있어요. “내 삶은 왜 이래.” 나만 너무 어렵고 고된 신앙의 여정을 감당하는 것 같은 외로움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안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그러한 공동체가

되길 바래요.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위로받지 못하고, 특별히 주변에 신앙인이 없는 경우는 더욱 외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 안에서 주님의 위로를 얻고, 함께 이 길을 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가 주는 위로함이 충만해지길 바래요. 예배 안에서 그러한 힘을 얻고 그러한 소망을 얻고 우리에게 남겨진 삶을 힘내어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오늘 이 찬양으로 함께 힘을 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