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우리는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의 희년에 대한 말씀을 읽으시고,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 것에 대하여 다뤘습니다. 사실 시간적 순서로 따지면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에 오시기 전에, 이미 가버나움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어떤 사건보다 나사렛 회당의 설교를 예수님의 사역 초반에 가장 대표적인 일로 배치하면서,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목표와 방향으로서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복음의 대상으로 가난한 자들이 지칭되고 있습니다. 또한 메시아를 통해서 억눌리고 묶인 자들이 자유하게 되고, 암흑과 같은 어둠 속에 있는 눈 먼 자들은 다시 보게 되는 소망을 얻게 되리라 선언합니다. 바로 여기서 언급된 복음의 대상은 프토코스(ptwcov")입니다. 프토코스는 ‘가난한 자’로 번역되지만, 가난의 정도에서도 가장 절박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1)
거지로 몰락한, 구걸하는, 기부금을 구하는 2) 부, 영향력, 지위, 명예가 없는 제가 지난 주에 희년을 말씀드렸죠. 결국 이것은 ‘땅’의 주권과 관련이 깊은 이야기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시고, 각자 분배 받은 땅을 통해 양식을 공급받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모두는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는 존재이며,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매 50년마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기회를 주어, 다시금 새로운 출발선에 설 기회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영원한 부자도, 영원한 가난한 자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고 그 앞에 순종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왕’도 주시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희년과 희년 사이의 과정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입니다. (신 15: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 공동체라면, 그 안에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가 없을 수 있는가? 순종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있는 자가 반드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해 손을 펴서 나누어 공평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를 통해 가난한 자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 원리는 신약에서 바울이 헌금에 대해서 가르칠 때도 적용됩니다. (고후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 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교회들 안에서도 마땅히 조금 더 나눌 수 있는 교회가 어려움에 있는 교회를 돌보고 채움으로 함께 균등할 수 있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항상 이 일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아마 담임목사 사례비도 아예 없고 창립도 안한 개척교회가 남을 선교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명령이니까
창립하기 전부터 선교비를 분류하고 선교하기 시작했어요. 사귐의교회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는 만큼 더 큰 사명감으로 여겨야죠. 이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하고 나서 어떠했습니까? 광야에서는 모두 땅이 없고 모두 만나를 먹으며 공평하게 살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소유를 누리면서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에게 부의 집중이 일어나요. 여기까지는 자연적 현상입니다. 부요하게
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의 부요함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나눔보다 소유를 추구하고, 자기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생존 방식은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경제적 양극화는 곧 사회적 양극화로 연결되고, 하나님이 원하셨던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이렇게 양극화 된 세상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가난한 자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서, 결국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들, 프토코스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프토코스는 자신의 생존을 남에게 의지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욱 심한 박해와 착취였습니다. 이것이 어디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이겠습니까? 이방 나라는 모두 그래요. 세상 나라는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나라 말고... 다른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고... 내 백성이라면 내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남들 다 그렇게 살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교회가 세상과 다르니까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지,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길을 가면 교회는 무의미한 것이죠. 누가복음에서 이러한 양극화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비유가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인 것입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이 먼저 잘못을 했죠. 그가 폐륜을 저질렀고, 재산을 다 날려먹었고, 이유야 어쨌든 ‘가난한 자’가 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의 종이 되어
빌붙어 살아갑니다. 그 사람의 돼지를 치면서 살아가는데, 너무 착취를 당해요. (눅 15: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그의 가난에 대해서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가 의지할 것은 유일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줄 것 같은 그의 아버지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염치가 없죠. 그런데 왜 가요?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눅
15: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죽기는 싫으니까 체면이고 뭐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여러분, ‘돌아가다’라는 표현이 어디서 많이 본 표현이 아닙니까? 역대기에서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이잖아요. 돌아가면 맞아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님이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죠. 세상의 기준으로는 받아주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것이죠. 이스라엘 안에서 이러한 부의 양극화,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져 갑니다.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부자에게 도움을 청해도, 더 어려움만 당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누구를 의지하고 붙드냐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동기가 신앙은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을
돌봐주십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의 불순종을 지속적으로 경고하십니다. 구약에 수많은 내용이 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자여서 경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경고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이스라엘에 대하여 리셋을 하십니다. 유다 전체를 심판하셔서 그들 모두를 땅 없는 자들로 만드셨죠. 바벨론 포로입니다. 그들 모두가 가난하게 되었더니,
그들 모두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들을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십니다. 프토코스가 된 유대 전체를 구원하셔요. 그렇게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프토코스의 문제는 외형적으로는 여러가지 결핍의 문제이지만, 그 내면의 중심은 ‘의지함’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프토코스를 맞아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지는 않습니다. 반면, 이유야 무엇이든 그들이 맞이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의지하는 마음을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 가난’은 ‘절대적 의지’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는 프토코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누가복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말하는데, ‘가난’은 대표적으로 ‘경제적 가난’을 말하지만, 사실 그 외에도 다양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또 별개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심한 경제적 가난에 직면하게 되면 복합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회적으로 외면 당하죠. 계층이 생기게 되는 세상의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관계적 가난에도 직면하기 쉽습니다. 사회경제적 가난이 그들을 관계적으로도 고립시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전혀
예상하기 힘든 가난이 있는데, 바로 영적, 정서적 가난입니다. 정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죠. 재벌 총수, 연예인, 이런 사람들이 심한 우울증과 자살을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봤을 때 그들은 풍족해 보이지만, 그들의 영과 마음이 가난한 상태인 것이죠. 바로 프토코스는 이런 모든 분야에서 결핍과 어려움에 빠져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가난에 이르렀던지, 그 가난을 통해서 때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어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메시아가 오셔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그런 자들이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메시아를 봐도 그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여기서 의인은 자칭 의인입니다.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프토코스와 정반대인 것이죠. 이런 자들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고, 그들은 복음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붙들고 끝까지 사는 것이죠. 반면 가난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거듭난 삶,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대상은 달리 구분되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도 그 구성원의 특징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6장에 열 두 제자의 명단이 나오죠. (눅 6: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눅 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눅 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였죠. 그리고 마태(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셀롯이라는 시몬은 ‘열심당에 속한 시몬’이라는 뜻이에요. 유대 독립운동원입니다. 세리는 당연히 부유한 계층이었죠. 어부는 자영업자입니다. 배를 갖고 있으니 나름 사장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양한 출신과
직업을 갖고 있었어요. 복음의 대상은 출신이나, 인종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왕도 될 수 있고 종도 될 수 있습니다. 노약자도 될 수 있고, 어린 아이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름 받은 이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서도 왕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그는 신앙에 실패할 것입니다. 사울은 왕이고 싶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종이고 싶었습니다. 그 둘의 다른 결말은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가난한 자’에 대해서 나오지요.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이 그렇지 않습니까?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는 심령(마음)이 가난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즉, 마태는 영적 가난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렇게 부담스럽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을 좀 더 실제적인 모습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앙은 항상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것이에요. 마태복음은 8복을 말하고 누가복음은 4복을 말해요. 이 복(마카리오스)은 이 땅의 성공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의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잘 보시면 4복이라고 하지만, 우리 눈에는 앞의 전제 조건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가난해라. 배고파라. 울어라. 핍박 받아라.” 그러나 성경은 자신 있게 이것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제조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상황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붙들린 이후, 거듭난 자들이 이 땅에서부터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입니다. 실제적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통해 행복하고자 하지만, 실상 거기에는 결핍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을 얻은 자들은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가 우리 안에 충만해 짐으로, 우리의 상황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가 주시는 행복함을 누리는 것이죠.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마카리오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입니다. 말씀을 좀 더 집중해서 분석해보면, 이 전제 조건이 마태복음과 달라 보이죠.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가난입니다. 어떤 이들은 누가복음의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적으로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우니, 마태복음처럼 심령이 가난한 경우를 지칭한다고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4복과 4화의 대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복과 저주는 4가지 같은 경우에 대해서 대조되고 있습니다. (눅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4가지 경우는 ‘가난함-부요함, 배고픔-배부름, 울음-웃음, 핍박-칭찬’입니다. 그리고 현재적(지금)입니다. 누가복음 전체가 이 관점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4복에 해당하는 삶을 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4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부자는 지옥으로 연상되는 곳에 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부자와 거지라는 그들의 삶의 결과는 복과 저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심령이나 영적인 문제로 치부하여 현실에서 도피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누가복음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부자 청년 이야기를 통해서 이것을 말해주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왔는데, 주님이 그에게 재물에 대한 마음이 큰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죠. 네가 정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명령에 대한 반응이 무엇입니까? (마 19: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우선순위를 확인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의지함의 대상을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프토코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이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하는데 그에게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기에 어려운 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찾은 행복은 자신이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주시는 복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반면 제자는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부자는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까? 아니요, 될 수 있죠. 부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프토코스가 되면 돼요. 그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는 계속 부자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게 말이 되나요? 누가복음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사람을 소개하죠. 부자 청년은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며 나아왔다가 실패했다면, 매우 부자인데 다른 가난에 휩싸여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뒤집어진 사람이 소개되고 있죠. 바로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잖아요. 세리 중에 대장입니다. 세리는 돈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직업입니다. 매국노입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오직 돈만 바라보고 가야하는 직업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마태(레위)도 세리였습니다만,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가장 컸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안에도 프토코스가 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어요. 그는 외로웠습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있었어요. 그것이 그의 갈급함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갈급함을 찾아가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가서 마무시겠다는 소리에 삭개오는 너무 기뻐했어요. 반면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눅 19: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사람들의 눈에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맞아요, 나쁜 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다 멀리 했습니다. 그로인해
생겨난 삭개오의 갈급함에 주님이 찾아가셨어요. 돈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삭개오였는데, 그날 그는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삶의 태도를 바꿉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지금까지 돈이 최고인줄 알고 돈만 바라보고 돈만 의지하여 살아가던 그의 삶에, 예수님을 마주한 이후 삶의 의지하는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바꾸지 못해 실패했고, 삭개오는 바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님을 찾게 할 만한 결핍이 있는 것은 은혜로 나아가는 기회가 됩니다. 복음서의 이 가르침은 우리가 우리 삶에 마주한 고난, 어려움, 질병,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결핍을
하나님은 복된 길로 나아가는 근거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설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에게는 무거움을 줄 것입니다. 부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 이런 설교를 하지 않으려 하죠. 삭개오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은데, 많은 경우 부자 청년처럼 이 설교 앞에 떠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 교회에 왔는데, 나는 더 잘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 것인데... 혹시
이런 분들이 계시다면, 환영합니다. 제가 은과 금은 드릴 수 없지만, 그보다 더욱 귀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행복한 삶으로 여러분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을 갖고 조금 더 인내하며 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권면 드립니다. 다윗과 같은 왕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때 그 나라가 달라졌던 것처럼, 저는 하나님 안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자들에게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말씀 앞에
겸허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은 우리 모두와 멀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4복과 4화는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인가?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모두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너희는 제자가 되었으니 4복의 대상이 되고, 복음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4화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제자들도 화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만약 4화를 설명하면서 ‘그들, 세상 사람들’은 화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으면, 복음을 듣고 안 듣고 문제로 갈린다고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모두 ‘너희’입니다. 지금 이곳에 계신 성도님들에게 하는 말씀인 것이죠. 우리는 부와 가난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내가 현재 가난하면 부에 대한 경고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닌 줄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자를 동경하고 그것을 소망하고 있다면, 상황만 바뀌어 내가 부유하게 되면 바로 하나님을 떠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내 현재적 상황과 관계없이 이 경고를 새겨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유함에 대한 동경도 내 의지의 방향이 틀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의지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좀 더 실제적인 언어로 내 삶의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결단입니다. 금요일에도 봤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이삭을 요구하셨어요. 이삭을 드릴 수 있으면 아브라함은 다 드릴 수 있는 것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설명하셨습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다시 말해 내 모든 소유와 맞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찾게 될 것이다. 굶주림에 지친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메시아의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된 것이다.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너희는 복이 있다. 아침이 되면 기쁨을 맞게 될 것이다. 누군가 너희를 깎아내리거나 내쫓을 때마다, 너희 이름을 더럽히거나 비방할 때마다 복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기뻐하라, 그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좋아하며, 온 천국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평해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것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복음에 더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적기에 그것을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반면, 부자는 누리는 것들이 많은 만큼, 포기해야 하는 각오의 무게도 더욱 무겁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두손 든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프토코스)들이 이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현재적으로 부유한
자나, 현재적으로 가난한 자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차별이 없어요.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자. 다 팔 수 있는 자.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자가 역설적으로 복음에 반응하는 일에는 더욱 이로운 위치에 있습니다. 사회 경제적 가난을 마주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 앞에 더욱 반응할 수 있었고, 여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더 반응하여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강함이 된 것이죠. 이것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자주 보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수많은 경험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대개 잘 나갈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완전히 망한 다음,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질병, 어려움 등을 겪으며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많죠. 부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와 같은 비유가 나오는 것이죠. 우리가 손에 움켜쥔 것이 많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저는 아무리 부자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내가 의지하던 것을 포기하는 일이 가득히 나타나길 바랍니다. 재정에 대한 가르침을 나눌 때가 종종 있습니다. 늘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제자는 모든 초점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참된 제자는 부를 추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때로는 내게 부유함이 상속되거나 부유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유함을 추구하거나 유지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항상 손을
펴서 나누며, 내 소유가 내 것이 아닌 내게 맡겨진 것이라는 사명감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에게 이 말씀을 가르쳐주신 교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복음을 들었는데 여전히 부자라면 그는 제자가 아니다.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인데, 아직도 자기 소유로 뭔가를 남겨놓고 있다면 그것이 부자이다. 제자가 되면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모든 제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다. 모든 소유를 팔았기 때문이다. 내 소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가난하다. 한 달에 얼마를 벌던지, 차가 무엇이던지, 집이 무엇이던지 다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그러면서 교수님께서 실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었는데요.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에쿠스를 샀다. 모든 교인이 다 속앓이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목회자라면 말이다. 그런데, 벤츠와 렉서스를 가진 성도가 목사님이 에쿠스를 산 것에 대해서 비판한다.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물론 벤츠와 렉서스를 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떠한 단면을 보고 평가할 수는 없다. 때로는 사회적 지위에 맞게, 혹은 어떤 이유로 좋은 차를 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이 돼서는 안 되고, 그것이 과하다면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하나님의 것을 지나치게 사용하고 있다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목회자는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으면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부자인 것이다.” 여러분. 저도 일터에서 돈을 법니다. 장사를 하다보니 하루 매출마다 관심을 가져야 하고, 어쩌면 늘 돈이 주는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더 갖고 싶고, 더 누리고 싶은 욕망이 제게도 있습니다. 아마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제가 말씀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것을 당연한 본능으로 여기며 본능에 충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어디 돈의 유혹 뿐이겠습니까? 높아지고 싶은 마음,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 그 또한 늘 저를 흔들어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고, 제가 지금껏 연구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그 본능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저의 삶을 일깨웁니다. 이 땅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일깨웁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이 땅에서의 내 삶을 바꿔야 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프토코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 삭개오는 자신이 붙들고 살았던 평생의 삶의 기준을 그분 앞에서 바꿈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백성으로 나아갑니다. 부자 청년과 삭개오의 실제적인 대조. 두 사람 모두 복음을 만났고 복음을 들었으나 그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저는 그들의 결론도 반드시 다르리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주저함 없이 모든 것을 다 팔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참된 행복의 길을 선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친 주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을 사는 방법.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방법. 세상의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프토코스가 되는 것은 좁은 길로 가는 선택입니다. 세상이 가야 한다고 하는 길은 넓은 길, 쉬운 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길을 원합니다. 그러나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여 가신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우리 모두는 가난하기 싫어합니다만, 제자는 모든 소유권을 주께 드렸고 모든 것을 팔았기에, 절대적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굶주리기 싫어합니다. 이 굶주림은 나의 것을 끊임없이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손을 펴야 하고, 굶주린 자와 함께 굶주려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쾌락보다
때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눈물로 고난을 통과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그들이 눈물 없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기에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은 무고한 핍박과 수고와 십자가를 마주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 그 길을 걸어가셔서 끝내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고난이 절망이 여러분을 덮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로 인해 여러분이 두 손 들고 주께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주님은 그런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와 계신 것입니다. 복음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떵떵거리며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보다...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서 마주한 절망이, 눈을 들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약함을 강함으로 사용하십시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 은혜를 아시죠?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한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가난함이 가난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토코스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샬롬의 나라, 그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진리를 믿고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프토코스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행복이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그 행복의 길에 여러분과 함께 서 있음이 감사합니다. 이 길 끝까지 우리 함께 동행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