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은 ‘예배’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사용된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하는 장면이죠. “내가 내 아들과 예배하러 간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러 가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를 ‘예배’라고 표현 했습니다. 모리아 산의 예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 뿐인 아들을 주셨어요. 이 아들을 얻는 일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향한 곳이 모리아 산이죠. 후에 이곳에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면서 이 땅이 하나님의 예배의 땅이 되는 것을 볼 때, 모리아 산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곳을 예배의 처소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은 조금 ‘가혹한 명령’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말씀을 하신 후 어떤 마음으로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으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셔서 우리의 결정을 아시지만, 그분이 우리의 결정에 침범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브라함이 내리는 결정을 그분은 기다리셨겠죠. 그리고 아브라함은 결단합니다. 하나님이 시킨 일이 미친 짓과 같아 보이지만, “거기에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일단 따르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진짜 이삭을 바치고자 칼을 잡고 아들을 죽이려 하니, 하나님이 다급히 외치시죠?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 보통 굉장히 근엄한 분이시잖아요.
그런데 이때만큼은 굉장히 다급하게 이름을 두 번 연이어 부릅니다. 이삭을 죽이는 것을 만류하시죠. 12절에서 하는 이야기를 보십시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서 한 가지를 확인하시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바로 22장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외함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경외하다’라는 단어는 그 의미의 명확성이 좀 확실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경외하다’라는 뜻을 찾아보면, 그 사전적 의미가 이렇게 나와요.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다” 이게 좋은 감정인지 좀 헷갈려요. 유의어가 ‘두려워하다, 어려워하다’입니다. 만약 저는 누가 저를 경외한다고 하면 좀 싫을 것 같습니다. 왠지 거리감 있어 보이고, 차가워 보이는 표현이잖아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것이 있음을 보셨고, 그 경외함을 기뻐하셨어요. 또한 잠언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지혜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죠.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다른 형통함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식하고 느낀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 같이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그 실존적 차이에 대한 정직한 반응인 것이죠. 특별히 저도 예배사역에 관심이 많아서 예배 컨퍼런스 세미나 이런 곳에 참석해 보면,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랑’도 아니고 ‘찬양’도 아니고 ‘감사’도 아니라, ‘경외함’이라고 말합니다. 예배의 어원 자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현장에서 살아왔고, 특별히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경외함’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인간관계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역을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사역의 대상들과 가까이 함께 부대끼며 자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20대에는 특히 사역을 할 때, 적당한 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가끔씩 있습니다. 친구 같은 전도사는 좋을 수 있지만, 정말 친구가
되어 버리고 형이 되어 버리면 안 됨을 느끼는 것이죠. 사역자로서의 적당한 거리가 있을 때는 사역자가 전하는 말씀이 되지만, 너무 가까워지고 그 경계가 없어지면 형의 잔소리, 친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조율의 대가였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과 가까이 하시고, 예수님이 제일 좋아하던 것이 ‘회식’이었어요. 함께 어울리고 3년 동안 제자들과 거의 붙어 지내셨죠. 그렇지만 예수님은 항상 권위 있는 자로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 균형이 참 쉽지 않지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싶습니다. 사실 목회자의 가족들이 이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죠. 저도 아버지가 목회자였고, 그 교회에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때로는 감정이 상하면 말씀을 목사님의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야기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죠. 그럼 잘 안 들리게 되는 것이죠. 설교를
듣고 삐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질서는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시간들 안에서는 반드시 목회자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목회자가 목회자라는 것이 대상으로부터 인정되어야 온전한 사역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목회자가 당연히 목회자다운 모습을 보여야겠죠. 권위라는 것은 나를 권위 있게 대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권위주의죠. 권위는 서로에 대한 신뢰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죠. 건강한 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때, 그런 분들의 태도가 무엇이냐면, 혹시 제가 예기치 못한 일을 행하더라도 “목사님이 하시는 일에는 무슨 뜻이 있겠지”라는 믿음이죠. 당연히 이 믿음은 경험과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너무 부족함이 많은 사람인지라, 여러분도 저를 도와주시고, 무슨 사이비 교주처럼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해함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지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확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알아가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내게 인정되는 것.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라는 것은 그 분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그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그분을 날 향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깨닫고 인정하며 그분을 대할 때,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분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그 신뢰함이 점점 두터워지고, 이제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무슨 뜻이 있겠지”라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성경은 바로 이 태도를 ‘경외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외함은 한 순간에 첫 만남으로 생기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신뢰함 보다는 단순한 두려움인 경우도 구약의 사람들에게 많았어요. 아브라함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하죠.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첫 부르심이 75세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란에서 주어진 것이고, 사도행전 등을 보면 갈대아 우르에 있던 시절부터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교제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첫 만남부터 떠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제 아브라함이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요구하신 것이죠. 길을 떠나는 것까지는 순종할 때가 된 것입니다.
성장한 것이죠. 그러나 이후의 아브라함의 모습은 엉망입니다. (창 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 12: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애굽으로 가게 되는데, 낯선 애굽과 마주하게 되자, 그는 지레 겁먹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혹시 모를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또한 이렇게 겁이 많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다 사람은 이런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후계 문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12장에서 명령을 하시면서 약속을 하셨어요.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 약속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자식을 주시지 않자, 그는 자신의 종 가운데 양자 엘리에셀을 세워서
자신의 상속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15장의 모습입니다.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삼는 당시의 풍습대로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브라함의 모습이었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몸에서 날 자’를 주시겠다고 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 15: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하죠.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나는 ‘주’다.
나는 너의 주인,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라는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요.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자식을 주실 것은 믿었지만, 자신의 아내를 통해 주시리라는 믿음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고자 합니다. (창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이렇게
해서 하갈이 않은 아이가 ‘이스마엘’인 것이죠. 지금 중동 지역의 대부분 국가가 믿고 있는 이슬람 종교가 바로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을 붙잡고,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을 주십니다. 이삭이죠. 99세에 징조로 나타나서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받고도, 20장에서 아브라함은 또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21장에 약속대로 이삭을 얻는 것을 경험하게 되죠. 그리고 22장이
시간이 흘러 이삭이 10대 청소년쯤 되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22장은 이렇게 시작을 해요.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그에게 가장 소중한 ‘이삭’을 요구하십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의 영역입니다. 하나님도 실제적으로 일하시고, 하나님은 또한 실제적으로 요구하세요.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이삭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출생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받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진짜 이삭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고 있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전능자요 생명의 주관자라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경외함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이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말로는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 “하나님이 주셨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뭔들 못하겠어요. 그러나 그것이 진짜 고백이라면 ‘말로만
끝나지는 않아야’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다시 드리기 위해서는, 정말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경외함이 필요했던 것이죠. 말뿐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행동이 나오고 그의 속마음은 기록되지 않지만, 히브리서는 아브라함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그의 삶에 하나님이 경험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믿었기에, 이삭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생사도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말이 안 되죠.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 나는 몰라도. 나는 그저 따를 뿐...” 이것이 아브라함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예배를 받으셨고, 그의 경외하는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이제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 있습니까? 혹시 “나는 아브라함 정도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 뿐인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 대단하죠. 그런데 우리가 모두 이 대단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죠.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가장 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것이죠. 그 은혜를 내게 주어진 사실로 인식한다면, 내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가장 귀한 것을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얻었습니다. 제가 아는 그 하나님은 그렇게 얻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한 이 길에 선 것을 기뻐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동행하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평안케 해드릴 수도 없고, 우리는 하나님을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또한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그분 앞에 내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아브라함이 직면한 기근, 위협, 가정의 고민 등 여러 어려움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 안에서 하나님을 붙드시고, 그것을 딛고 그것을 계단 삼아 하나님 앞에 더욱 성숙한 주의 자녀로, 예배자로, 경외하는 자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가장 지혜로운 길로 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경외함으로 주님 앞에 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