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예전에 이 본문을 시작하며 ‘엑스캘리버’ 이야기로 시작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서 왕’ 이야기의 내용인데, 캔터베리 대성당 돌계단에 꽂혀있는 검이 ‘엑스캘리버’입니다. 그것을 뽑는 자가 왕이 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우터 왕이 죽습니다. 바로 그 검을 ‘아서’가 뽑아서 왕으로 인정받게 되는 내용이죠. 구약에는 메시아에 대한 수많은 예언들이 있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약속을 이루는 분임을 신약 성경 곳곳에 있는 ‘약속의 성취’ 구절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가 가장 강력하게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러한 본문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사건부터 주목해서 봐야 하는데요. 누가복음 2장까지는 탄생부터 유년기까지. 그리고 3장에서 세례요한이 등장하고,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는 셈입니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나타남 조차도 구약의 예언을 따른 것임을 강조하죠. 신약이 시작되며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요한이 아닙니까?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요한이 강력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니까, 사람들 안에서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가 나타난 것입니다. (눅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메시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랬더니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난 아니야” “그럼 누구?” “내 뒤에 오시는 분!”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메시아를 준비하는 자’라고 밝힌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모습에서부터 나타나요. 그의 외형까지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거든요. 먼저 구약의 예언을 봅시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후로 침묵기가 400년 가까이 이어지니까 구약의 마지막 시대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약속이죠.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엘리야가 와야 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엘리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뭔가 번뜩이는 특출난 사람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메시아?” 아니면 “엘리야?” 이러는 것이죠. 예수님께도 그랬잖아요. 그런데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의 모습이 정확하게 엘리야를 닮아 있는 것을 우리는 말씀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하 1: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이 한 이야기인데,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선지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그가 엘리야로다’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외형적 특징인 것이죠. ‘많은 털과 허리에 가죽 띠’. 그럼
세례 요한의 모습을 봅시다. (마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었는데, 아마도 이유는 엘리야와 달리 요한은 털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털이 없기 때문에 대신해서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다녔어요. 영락없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자 그럼,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이죠. 신약은 세례요한을 예수님보다 먼저 기록합니다. 이유는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으로 신약에
등장했다면, 바로 그 뒤에는 메시아가 등장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죠. 복음서를 보면, 세례요한보다 6개월 늦게 출생하고, 조금 늦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께서 바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으로 세례가 행해집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죠. 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 성자 예수님의 세례, 성령님의 강림. 즉 삼위일체의 모습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에 있어서 출발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셔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가 서른 살 즈음이죠. 복음서를
읽는 우리는 이제 이쯤 되면, “예수님이 메시아구나” 정확하게 인지합니다. 우리는 아는데,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특히 나사렛 사람들. 왜냐면 그곳은 예수님이 쭉 자라신 고향이니까요. 다른 복음서와 함께 보면,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 가시기 전에 갈릴리 지역, 특히 가버나움 지역에서 사역을 하십니다. 누가는 그 이야기는 한 줄로 압축해버려요. (눅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눅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그리고 사실상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신 이 사건이 예수님이 메시아 사역의 시작, 메시아로서의 취임식과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누가에게 이 장면은 중요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회당이라는 곳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예배장소입니다. 원래는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지만
포로생활 가운데 성전을 갈 수 없기에 지역마다 회당을 만들고 그곳에서 모이는 전통이 생겨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집니다. 그곳에서 예배는 남자 10명이 모여야 이루어집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쉐마를 읽고 다시 기도문을 읽으면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축도하는 형식입니다. 그곳에서 랍비들이 가르칠 수 있어요. 예수님도 당시에 랍비와 같은 인물로 받아들여졌으니 여기에 들어가서 가르치는 것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 날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언을 읽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그냥 좋은 말씀인가보다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오셔서 행하실 일에 대한 중요한 예언입니다. 원래 이 말씀이 적혀있는 이사야 61:1-2을 한번 다시 읽어보시죠.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 말씀은 ‘메시아 희년’에 대한 말씀이에요. <희년>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_ 2019.09.29. “우리도 가나안에 있습니다” (여호수아 13-21장)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고, 율법에 따르면 7년마다 안식년이 있습니다. 이때는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 농사도 중단해야 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땅에도 쉼을 주며 자연의 복원력에 따라 토지를 회복시키는 방법입니다.
이 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자생적으로 자라나는 것만 먹을 수 있습니다. 자생한 것에는 주인이 없으므로 누구나 모두 함께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6년째 해에는 3년에 해당하는 소출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6년째 해(1년), 안식년(1년), 씨뿌리는 해(1년), 3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이 먹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안식년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해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희년은 그럼 무엇인가?
안식년이 7번 행해지고, 즉 49년이 지난 후에 찾아오는 50번째 해입니다. 즉, 7년씩 7번이 지나면 ‘희년’이 오는 것입니다. 희년에 대한 말씀을 보시죠. (레 25:10)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희년은 처음 땅 분배한 그 모습대로 모든 것이 원상복구
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종이 되었던 자는 자유민이 되고, 땅을 빼앗긴 자들은 자신들의 땅을 다시 얻습니다. 이것은 모든 땅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희년에는 하나님이 처음 주신 그 모습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수아 때 처음 주셨던 땅 분배의 때로 리셋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강력한 신앙고백 안에서만 가능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모든 사람의 생명의 근원인 땅에 대해서 이것을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레 25:23)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문제는 이 언약 안에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는데, 그들이 막상 소유를 갖자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을 지키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피라미드와 같은 세상의 구조를 하나님의 통치의 구조로 바꿔야 하는데, 막상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서 가나안 사람들이 했던 것같이,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을 더 움켜쥐고 더 위로 올라가려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추구하고 따르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희년은 누가 가장 원했겠습니까. 땅을 잃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이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수저가 대대로 금수저이고, 흙수저는 대대로 흙수저인 그 피라미드와 같은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던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니까요. 당연히 희년이 지켜지길 바랐지만, 부자와 권력자들은 이 판이 뒤집어 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억압과 착취, 양극화. 있는 자들은 더욱 누리려 하고, 없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없는 그런 세상이 이어지니까,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린 결정은 그들 모두를 종으로 만드십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그들 모두에게서 땅을 빼앗은
것입니다. 부자건 가난한 자이건, 모든 것을 잃고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 포로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고나니, 모든 유대인이 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희년으로 원상복구 해주시는 것. 이해가 되세요? 이사야에 나타난 메시아의 희년에 대한 이 말씀을 모두가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리셋(reset). 다시 시작하는 것.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바로 그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제가 메시지 성경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그가 나를 택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셔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사면을,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눌리고 지친 이들을 자유케 하여,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라고 선포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50년이 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속죄를 행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 이것이 희년입니다. 이사야서는 이것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바로 그가 메시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제가 설교 초반에 말했던 예화의 ‘엑스캘리버’입니다. 메시아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죠.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은 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메시지 성경의 표현입니다. “회당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분께 모아졌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문을 여셨다. ‘방금 너희가 들은 성경 말씀이 역사가 되었다. 이 성경 말씀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여러분, 제 삶은 그렇게 부유하지도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평범했어요. 그런데 저의 눈으로 보기에도 세상은 너무 기울어져 있어 보입니다. 유엔의 통계를 보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음식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합니다. 지금은 매년 충분한 음식이 있지만, 그 중의 1/3은 버려지고 있고, 동시에 누군가는 굶어 죽고 있습니다. 상위 0.1%가 갖고 있는 자산이 하위 90%의 자산보다 더 많습니다.
왕이 다스리던 고대 사회보다 지금 세상의 양극화는 더 심하고, 오히려 더 견고한 피라미드 사회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개척교회의 생존율을 2%라고 말합니다. 100개가 세워지고 몇 년 지나면 2개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 세계에서 크기 기준으로 상위 50개 교회 중에 24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아마 그 중에 한 개 교회의 헌금만 나눠도 98개 교회가 유지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도 견고한 피라미드가 형성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창조주가
존재하고, 그 신이 인류를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 세상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기를 바랐다면... 이미 충분한 공급이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독점하고 대대로 소유하여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 세상이 신의 뜻일까? 세상은 말할 것입니다. “약육강식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먹을 것이 적어서 그 중에 강한 포식자가 살아남는 동물의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먹을 것은 충분하지만 이기심으로 강함을 유지하려는 그 욕망으로 인해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기뻐하셨던 그 창조세계의 모습이 아닙니다. 죄가 가득한 세상의 결과입니다. 누가복음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메시아 사역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잃어버린 세상을 회복하시는 메시아의 일하심도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우리의 욕망대로 사는 것을 당연하듯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 잘못된 삶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끝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 ‘리셋’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잃어버리기 전, 그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가 죄악으로 망가진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죄악으로 나아가던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선언이고, 동시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희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죄악의 세상과 싸워 이기시고 승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로 개선행진을 하고 계시다고 했어요. 이 개선행진의 끝나서 그의 나라에 임하면, 완전한 승리, 평화가 그 땅에 충만한 것이죠.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D-day와 V-day로
설명합니다. D-day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 표현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온 작전명이었습니다. 연합군과 나치 사이의 전쟁인데, 이 전쟁의 성패를 가른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D-day라고 부릅니다. 이 D-day의 상륙작전으로 인해 사실상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졌습니다.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마무리 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의 최후 저항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에 연합군은 독일을
이기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최종적 승리의 날이 V-day 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메시아 취임식>이라고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셨죠. “메시아 희년의 이 말씀은 오늘 이루어졌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선언된 것입니다. 주님이 회복하는 그 나라가 ‘시작’된 것이고, 이것은 이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임한 것이죠. 그분은 이미 승리하셨고, 그분의 개선행진이 끝나면 완성될 것입니다. 아직
남겨진 시간 안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이죠. 이 세상과 함께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아 희년을 바라보며 그분의 나라에 참여할 것인가? 오늘 나사렛 회당의 설교를 통해 주님은 메시아의 시대가 왔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눅 4:22) 예수께서 어찌나 말씀을 잘하시는지, 보고 듣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알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들의 반응은 놀라움입니다. 긍정적인 놀라움의 표현도 있었지만, 이내 그들은 계산적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그들 앞에 서 계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가버나움에서 행했던 그 기적들을 당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좀 행해서, 우리에게 먼저 혜택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 때 큰 흉년이 있었고,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는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사르밧) 과부 한 사람만을 찾아갔다. 또한 엘리사 때에도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침을 받았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메시아 희년의 그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히려 교만한 유대인들이 아니라, 간절함을 가진 이방인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은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누가복음에서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특징은 낮은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알려주셨어도, ‘요셉의 아들’로 보는
자들, 그들이 받을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기대는 분노로 바뀌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지나쳐 복음으로 회복시킬 대상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바로 누가복음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습니다. 신약시대는 로마가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고, 피지배층으로서 너무나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포로기 때처럼, 즉 메시아가 오셔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만큼은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삶을 바꾸지 않아서 그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가 결국에는 다 잃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백성들도 메시아를 원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정작 메시아의 은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을 바꾸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나에게 맞춰주셔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도와줄 존재가 되어주기만을 바랬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런 자들이 누릴 은혜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는 매우 큰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으나, 그 선언을 들은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도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4장 후반부에 나사렛을
떠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 갈급한 자들을 향해 가십니다. 귀신의 영에 눌려 있는 자들을 만나서 고치시고 자유케 하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메시아 희년 사역이죠. 그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바로 쫓겨나가는 귀신들입니다.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사람들은 보면서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밝히 아는 대적 사탄의 무리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나라가 임한 것을 고백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삶 가운데 목마름이 있고 갈급함이 있습니까? 그 갈급함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그 갈급함과 어려움들로 인해서 여러분을 하나님께 나아오게 만들었다면, 더욱 찾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너무나 중요한 사건들로 사용된 것입니다. 메시아의 복음의 대상이 되었던, 사르밧(사렙다) 과부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그 과부도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과 아들이 한 끼 식사를 하면 끝날 밀가루 한 줌. 그것을 먹으면 이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엘리야가 요구합니다. “그 먹을 것을 내게 먼저 주시오.”
바꿔 말하면,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이 여인의 기준에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나한테 있는 그걸 달라고 합니까?” 우리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고, 무엇보다 구원의 생명을 얻습니다. 나아만은 어떻습니까? 그는 충분히 교만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보다 훨씬 큰 시리아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친 나병을 해결할 능력은 없었어요.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종을 보내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전하기만 합니다. 이때 나아만의 반응이 뭐였는지 아세요?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그의 하나님을 부르며 상처에 직접 안수기도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가 공감하는 반응입니다. 훨씬 더 큰 나라의 장군이 왔는데... 이것이
그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이 순종합니다. 6번까지 해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그런데 7번 몸을 씻으니 그의 나병이 고쳐지고 깨끗하게 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그러나 그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 복음이 나를 살리는 복음이 될 것인가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봤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역설입니다. 간절히 메시아를 원했지만 정작 눈앞에 있는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자기중심적인 그 기준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인데, 우리가 당신과 같은 고향사람들인데... 이러한 선민의식은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교만한 사람? 가장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언제나 연약함, 무력함,
절망은 소망을 향해 문을 여는 기회가 됩니다. 그로 인해 여러분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을 만나서 바뀌게 된다면, 여러분을 겸손하고 낮아지게 만들었던 그 일들은 여러분이 주님의 자녀들로 거듭나게 만드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성도 여러분들이 평안하고 형통하고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로 여러분이 주님과 더 멀어질 것이라면, 차라리 여러분이 계속 갈급했으면 좋겠습니다. 갈급함이 핵심이 아니라, 여러분이 주님 안에 계속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형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당할 시험을 감당해내며 주님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앞에 반응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이 가득한 그런 삶이길 바래요. ‘말씀에서 길을 찾고, 순종하며 함께 걷는 교회.’ 우리가 올해 세운 교회의 목표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여러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였다면, 우리가 순종하며 함께 걸어 나가길 바랍니다. ‘희년정신으로 순종된 공의를 행하는 교회.’
사귐의교회의 5가지 비전 가운데 마지막 선언입니다. 메시아의 희년.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젠가 미래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품은 교회로서 희년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가슴에 새기며, 어떻게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세상의 피라미드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방향이 아니라, 주님이 지으신 모습대로 살아갈 것인가. 저는 이 길에서 여러분과 함께 그 답을 찾아 나아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옛적에 그들이 육신이신 예수님 앞에 서 있었다면,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와 나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 우리가 오늘도 이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마음을 열어 반응할 때, 우리는 주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주님. 그 주님을 높이며 찬양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