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고린도후서 2:14 / 그의 승리로 말미암아 / 강정규 목사

2021-01-08 · 고린도후서 2:14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예수님이 복음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다루면서 살펴봤던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로마 황제에게 사용되던 그 단어를 우리의 진정한 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이 진리를 고백합니다. 성육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죠. 바이블 클래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예수님이 12월 25일에

진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정확한 탄생일은 모르지만, 봄일 것이라는 추정이 많습니다. 또한,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탄생하신 때를 의미하지만, 예수님의 존재는 그때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존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죠.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겐 출생이 시작이지만, 그분에게는 D-day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서 세상에서의 사명을 위해 출동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시작에 있습니다. 그리고 끝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고 부릅니다. 그럼 성령님은요? 마찬가지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함께 존재하셨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 1: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복음의 앞부분을 ‘말씀 기독론’, ‘로고스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말씀’이신 예수님이죠.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혼자 계시다가 천지를 창조하려니까, 외롭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해서 ‘예수’라는 아들 내지 부하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아버지-아들의 관계로 지칭하는 것은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로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관계를 설명하시는 것이죠.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등상, 주의 오른팔, 이런 표현들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진짜 우리와 동일한 모습을 갖고 계시다면 무소부재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예수님을 아버지-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시는 것이죠. 자꾸 이것을 우리의 틀로 해석하려다보니까,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는데.. 그럼 뭔가 허전하죠. 그러다가 뭘 찾아요? 어머니 하나님. 그러다가 이단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고백처럼 ‘예수님 = 말씀’이시고,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기는 오기 싫으니까 누구를 대신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죠.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에게 신비이고, 이것은 마음먹고 따로 다뤄야 할만큼 큰 주제입니다. 적어도 오늘의 초점은 삼위일체는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죠. 그는 모든 인류보다 앞서 계셨고, 인류를 초월하여 계셨으나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인류보다 뛰어난 존재가 인류의 삶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요즘 누가복음 본문이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어떤 인간이었을까요? 어려서부터 남달랐을까요? 남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또한 모든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이죠.

형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김일성은 전설 같은 어린 시절 무용담을 갖고 있던데, 그에 비하면 예수님은 평범했을 것 같습니다. 보통 아기들처럼 ‘응애~ 응애~’ 했을 것 같고, 침도 질질 흘렸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으니 저도 추측만할 뿐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12세 때 성전에서 가족과 헤어졌던 기록을 살펴보면 몇 가지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가족들은 그에게 특별함을 느끼지 않았다. 평범했다는 소리죠. 둘째, 그러나 소년 예수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죠. 마리아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놀라며 깨닫죠. 특별하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다시 상기합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성탄’은 그분의 시작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반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으므로 그의 삶 또한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와 인간의 본성이 주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계셨고, 그는 신이셨으므로

인류 구원 프로젝트라는 미션을 위해서 잠시 ‘낮아지신 것’ 정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 잠시니까. 그는 신이니까요. 태초부터의 시간 속에서 이 땅에서의 33년은 ‘순간’이죠. 그리고 신이신 예수님은 그 시간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기에 죽어도 부활할 것도 알고, 훗날의 승리도 아니까 잠시 고생은 되지만 참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랑 달랐으니까... 이 말 하나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신 길을 우리와 다른 길, 즉 나는

갈 수 없으니 가지 않아도 되는 길... 이렇게 생각하면 오해라는 것이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는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분 또한 인간이 겪는

모든 한계와 결핍을 경험합니다. 죄의 유혹도 당합니다. 시험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달리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셨고, 죄가 없는 모습으로 인간을 위한 대제사장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이중부정을 통해서 강한 긍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동정한다! 이 땅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낮은 자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금수저가 흙수저를 어찌 압니까? 우리 맨날 정치인들보면 삼겹살 가격도 모르고

버스비도 모르고 그러잖아요. 신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공감하겠는가? 창조주와 피조물인 그와 우리의 간격은 너무나 멀어 보이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으므로 누구보다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신다는 것입니다. 스포츠에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명선수는 잘 못하는 선수, 2군 선수, 자신만큼 플레이 할 수 없는 선수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감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독이 되어도 못하는 선수를 살리기보다 이해하지 못하고 질책합니다. 하여 명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감하십니다. 동정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그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탄의 시험을 많이 받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들에게 죽음은 늘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길 힘은 기도라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하겠어.” 맞습니다. 예수님이 꼭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영으로 마주하기 위해서 기도가 방법인 것이죠.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힘도 기도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사탄은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이 포기하도록. 인간의 한계 안에 무력해지도록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이 이 싸움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사탄의 공격과 통치 안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완전한 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예수님이 죄인의 길로 가지 않은 이유를 ‘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험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신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항합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를 만류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시면서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만약 죄를 이기신 이유가 예수님은 신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한다면, 그는 우리와

다른 시험을 당하셨던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그는 우리의 한계를 다 수용하고 동일하게 고난을 당하셨으나 이겨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온전한 순종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죠? “다 이루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사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 하나님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냥 훗날 자신의 삶이 사람들의 모범이 될 것이니 그 모범을 보여주려고 잠깐 기도의 모범, 예배의 모범을 솔선수범한

것이 아니에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그의 삶의 어려움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매달렸습니다. 그가 아들이시지만, 그가 받고 있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처음부터 순종하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도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종함으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셔서, 하나님과 자기에게 동일한 마음으로 그분을 쫓아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하신 일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다 이루셨다는 그의 승리와 최종의 승리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여정이 있는 것이죠. 주님은 성육신하셔서 공생애의 사역을 다 끝내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6: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요

16:22)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 16: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요 16: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에덴에서부터 인류를 뒤덮은 그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서 잠시 남은 환난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주님 편에 있으면 결국에는 평화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는 완전한 승리를 말해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잘 묘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오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내가 이기도록 해주신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항상 잘 되고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성공하고, 높아지고 이런 것을 보장받은 말씀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전혀 다른 관점이거든요. (새번역)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공동번역)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배경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수치스러운 포로들을 ‘개선 행진’에 끌고 갔습니다. 고대의 전쟁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승전한 군대가 개선을 하는 행진입니다. 당시의 개선식에서는 향을 피웠기

때문에 이 말씀에 그 이미지가 분명히 있는 것이죠. 개선행진의 앞에는 대장군이 서고 그 뒤로는 군대들이 섭니다. 그리고 마지막 후미에는 전리품들이 따라오는 것이죠. 이 전리품 중에는 전쟁 포로도 있습니다. 자, 그럼 이 말씀은 전하는 바울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라고 생각할까요? 개선 장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그의 군대? 아닙니다. 바로 전쟁에서 그의 승리로 말미암아 얻은 전리품, 바로 포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전쟁에서 취득하신 그의 포로가 됨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가득한 죄의 세력에 대해서 싸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개선행진을 하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인 것이죠. 그러면서 그가 죄악된 세상에서 살던 죄악된 백성들 중에 일부를 포로로 잡아서 그분의 나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능력으로 그 나라로 가는 것이지, 우리가 그 나라를 찾고 쳐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뭐에요? 그리스도께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져서 그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오래하다 보니까 ‘종’을 너무 고상하게 생각해요.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데, 종이라고 하지만 마치 그것이 직책인 것처럼 느껴져요. 그리스도의 포로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제자의 사명을 뭐라고 하셨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부르시죠.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해서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장면을, 어부들이 작살에 물고기를 꿰어 짊어지고 가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렘 16: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겔 29:4)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암 4: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그러니까 주님은 구약에서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아서 끌고 갔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가득한 죄의 통치에 대해서 승리하시고 자신의 나라로 끌고 갈 포로들, 비유에 의하면 물고기들을 얻기 위하여 제자들을 어부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에 묶여 있는 자들을 불러내어

강하게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지... 성경은 그렇게 모호하지 않아요. 그는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구체적인 사명을 다하셨어요. 그것은 죄에 대해서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개선행진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개선행진이 끝나면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은 무엇입니까? 개선행진 중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행진 대열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닙니다. 전쟁 포로가 무슨 우리의 힘이에요. 그분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는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 대하여 이기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와 싸워 이기시고, 나의 옛사람과 싸워 이기신 것이고, 나를 사로잡아 당신의 개선행진에 끼워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의 승리로 말미암아 나를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에 대하여 말입니다. 사탄은 이미 정복된 존재입니다. 그분은 사탄의 통치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얻으시려고 지금도 끌고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발버둥 치죠.

다시 저 멸망의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승리의 대열에서 이탈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죠. 주님이 보면 우리의 그 발버둥이 참 어이가 없어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해하십니다. 우리의 무지를. 우리의 연약함을. 그럼에도 우리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말씀을 보면서 깨닫고, 그 주님께 지면됩니다. 져서 끌려가면 됩니다. 그 길이 옳아요. 주님께 지는 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학적으로 분명히 이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은 부딪힘이 있고 저항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그 주님의 분명한 사랑을 붙잡고, 기도해야 해요. 내가 주님의 이 승리의 행진에 끝까지 함께하길 원한다고 기도해야 해요. 주님은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 어려움을 잘 아십니다. 그는 우리의 상황에 공감하시면서 놓치지 않으려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그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의지하며 오늘도 주와 더불어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주님이 이기셨으니, 우리도 죄의 유혹을 거절하고 끝내 이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