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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고린도후서 3-6장 / 추천서와 편지 그리고 영광 / 강정규 목사

2020-10-04 · 고린도후서 3-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추천서 논쟁 바울은 늘 사도권에 있어서 의심을 받아왔던 인물입니다. ‘사도권’이라 함은 한마디로 정말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혹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은 아닌가 이것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의 제자들(사도)에게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시고 승천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사도들과 여제자들과 예수의 형제들과 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 합쳐서 120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모입니다. 그 모임의 대표는 사도 중에서 대표인 베드로였습니다. 성령의 강림 이전에 먼저 한 가지 일을 행하는데, 바로 사도의 숫자를 다시 12로 맞추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12명의 사도를 세우셨는데, 이 중에 유다라는 한 사도가 배신하고 죽게 되었으니 12사도의 한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항상 12라는 숫자로 조직을 갖춥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었고, 신약시대의 교회는 12명의 사도를 중심으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 구원받는 백성의 숫자가 144000명인 것은 ‘12 x 12 x 1000’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행 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중요한 것이 여기서 나타나는 사도의 조건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권 논쟁의 핵심이 되는 것이죠. 어쨌든 공식적인 사도의 숫자를 다시 12로 세운 후,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며 본격적인 교회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생겨난 것은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오순절을 맞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많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 시기는 구약시대의 초실절, 칠칠절이라고도

하였는데, 유월절 이후 50일째가 되는 날이라서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흩어져 있는 곳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올라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즉 가장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집결한 것입니다.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바로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령체험한 사람들이 각 지역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그들에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3000명, 5000명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했다고 하죠. 대부분의 사람은 다시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교회라는 공동체가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유대교는 인정을 해주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는 이단 분파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교회는 이런저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드로 투옥 사건, 스데반 순교사건 같은 것이죠. 당시 예루살렘교회에는 12사도를 중심으로 7명의 집사들,

함께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했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사도행전 4장에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서 헌신했던 바나바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어요. 개척멤버입니다. 문제는 바울이었는데,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교회의 대적자였습니다. 사울 곧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박해한 세력의 행동 대장이었죠.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교인을 잡으러 가던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이 그의 삶을 완전하게 바꿔놓습니다. 바울의 회심사건. 절체절명의

돌이킴의 순간이죠. 그는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을 처단하러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열심히 예수를 전하는 자로 변화됩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도 소식을 들었죠. 하지만 과연 바울이 진짜로 회심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었겠죠. 친일파로 유명했던 사람이 갑자기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것을 믿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의 회심을 믿어주며 그를 사도들과 연결해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울은 잠시 사역을 하였다가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서 10년 이상을 머물며 아마도 복음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하게 되었고, 후에 바나바가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교회’로 파송되어 목회하러 갈 때, 고향 다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불러서 함께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로써 바울이 이방 사역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모든 교회의 시작점이라면, 안디옥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이 일에 대한 책임 사역은 바나바가 맡았고, 예루살렘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방 선교를 위해 바나바를 파송한 그러한 관계였습니다. 당시의 기독교 사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12사도의 영향력과 상징성이 가장 컸다면, 후에 예루살렘교회 목회를 담당했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방사역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록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지금 읽으니 바울이 가장 영향력이 커 보이지만, 실제적인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사도 중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눈에 띄고,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된 야고보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 사역 담당자 정도였죠. 실제로, 바나바와 바울의 1차 이방 선교여행 이후 이방 선교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정할 때에도, 예루살렘교회로 모든 초대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때에도 대표 발언을 했던 이가, 베드로와 야고보였어요. 그들의 지도력 안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의사 결정을 하고 교회를 확장해 나갔던 것입니다. (행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사역했을 때만 하더라도,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는 신뢰가 두터운 존재였기에, 바나바 선교팀의 사역이 오해받을 일은 적었습니다. 그러나 1차 선교여행 이후 바울과 바나바가 팀을 나누고, 바울팀이 주도한 이방 선교 사역에 대해서는 과거 바울의 이미지 때문인지 몰라도 많은 오해와 공격을 받습니다. 바울이 가장 많이 공격을 받는 부분이 바로 ‘사도권’에

대한 것이었어요. 한 마디로 바울은 초대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은 사실 목사가 아니다, 전통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바울의 과거 행적과 맞물리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누군가는 바울의 가르침 받기를 거부하거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사도권 논쟁에 대해서만큼은 적극적으로 항변합니다.

나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죠. 주님이 나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도권 논쟁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당위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중요한 것이었죠. 사실 바울의 관점에서 어떤 타이틀이든 모두 배설물과 같은 것인데, 사도라는 타이틀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도들의 신앙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 바울이 막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신마다 앞머리에 강조하기도 하죠. 자신은 사도 될 자격이 없는

자이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어 사명을 다하고 있고, 사도로서 복음을 심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을 모함한 무리들의 주장은 바울에게 ‘추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화를 즉시 해보거나 소통이 오래 걸렸기에 이름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다니며 자신을 소개하는 문화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사람이 써준 그러한 추천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을 이방인 사도로 부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 2: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이미 이 일에 대해서 역할을 분배했어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나바와 바울에게 이방인 사역을 위해 부탁했던 일을 바울이 그의 편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추천서라는 개념이 이미 관계가 구축된 상황에서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나 이력서도 받아보고 추천서도 확인해보고 하는 것이지요. (고후 3:1b)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고린도교회는 이미 바울이 개척하고 목양을 해왔던 교회인데, 이 상황에서 바울에게 추천서 요구라는 것이 사실 맞지 않죠. 지금 저한테 사귐의교회에서 “목사님 이력서 갖고 오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는 목사님이 싫어요”라는 그저 반대의 표현이죠. 여러분 ‘반대를 위한 반대’ 아시잖아요. 이것은 철저하게 바울을 깎아내리기 위한 논쟁이었습니다. 이런 추천서 공격이 고린도교회에서 잘 먹혔던 것은 고린도 특유의 문화 현상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경쟁과 과시. 호혜와 후원문화 때문입니다. 갑작스럽게 도시가 발전하며 부자가 된 경우가 많았던 고린도에서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경쟁하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를 후원하고 그를 통해 자신도 과시하는 문화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보듯이 교회 안에서도, “나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어.”, “나는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 사도에게 세례를 받았어.”, “야,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가 짱이지. 난 베드로 사도에게 세례를 받은 몸이야.”, “야, 요즘 대세는

아볼로야.” 이렇게 서로 파당을 만들어 다투는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서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경쟁하고, 줄 세우고,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반대로 남을 깎아내리고 험담하기를 즐겨 하는 그런 교회가 고린도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을 헐뜯는 이야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주보에 보면 제가 공부한 학교들은 적어놨습니다. 그것을 적어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공부한 학교가 건전한 신학 풍토를 가진 곳임을 검토할 수 있도록 오픈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과시라면 당장 빼야 하겠죠. 저는 아직 명함이 없는데, 명함에는 딱 한 줄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귐의교회를 담임하는 강정규 목사. 2. 그리스도의 편지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그들의 반대와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서 그들에게 정말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후 3: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후 3:2)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읽습니다. 지금 바울은 베드로, 야고보 같은 교계의 뛰어난 인물에게 받은 추천장이 없다고 공격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추천장이 없습니다. 종이로 누가 써준 추천장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추천장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들이 나의 추천장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추천장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참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에요. 내가 어떤 부모인가? 때로는 내 자식이 나를 말해줍니다. 대체로 자녀를 보면 부모가 보이죠. 물론 여기에는 언제나 가룟유다 TO가 존재합니다. 변수죠.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개척하여 목양하며 양육한 곳이므로 너희가 나의 추천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동시에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편지입니다. (고후 3: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세상에 소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사귐의교회가 소개되고 강정규 목사가 소개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사실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기 위해서 봉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서 받게 될 상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몇 번을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눈 바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고백이 있었죠.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에게 신앙으로 양육한 성도들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요, 기쁨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 자랑할 면류관, 그 열매는 무엇이냐면 주님 다시 오실 때 함께 주 앞에 서게 될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부를 때마다 가슴이 찡해지는 찬양이 하나 있는데요. 저는 특히 선교지에서 그 낯선 땅에 설 때면 이 찬양을 부르곤 합니다. 주께서 주신 동산에 땀 흘리며 씨를 뿌리며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날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 비바람 앞을 가리고 내 육체는 쇠잔해져도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내 사모하는 내 주님께 땅 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노래 가득 안고 주께 드릴 열매. 복음으로 피워낸 꽃들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죠.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주님께 드릴 가장 소중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으로 공로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은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추천서 논쟁, 사도권 논쟁에 대해서 이미 이렇게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친 바 있습니다.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누가 자신을 사도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에게는 사도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교인에게만큼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우리 사귐의교회 성도들이 저를 통해 자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제가 사귐의교회에 주님이 세우신 목사라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감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3. 영광스러운 존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이미 2장에서 언급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과 연결됩니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부름을 받아 성도가 되면서, 우리 마음 판에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넌 세상에서 구별하여 내게 속한 나의 것이야.” 이것을 ‘새언약’이라고 부르죠. 여러분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언약하신 것입니다. (고후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새

언약이 있다는 것은 옛 언약이 있다는 것이죠. 옛 언약을 구약이라고 하고, 새 언약을 신약이라고 하는 것이죠. 옛 언약은 모세를 통해 주셨던 율법으로 맺은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새겨져 주셨고,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임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돌에 새긴 문자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새 언약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 기준이 되는데, 율법의 기능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규정하고 고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실패하면 정죄감을 느끼고, 성공하면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옛 언약은 우리에게 무력함을 안기고 다른 도움이 필요함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옛 언약으로 성공할 수 없기에 구약시대나 우리나 모두 약속한 구원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입니다. 새 언약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관계를 행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 나를 부르셨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내가 하나님과의 새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편지이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죠. (고후

1:22)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내게 이런 일이 있었는가? 당연합니다. 그 보증으로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님이 계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증거이며, 새로운 언약의 소유자라는 보증이며,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내게서 성령이 떠나시지 않으면 나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나요? 저는 그것을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십니까? 내게 성령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새 언약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광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고, 그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완성된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새 언약 영광 안에서 살다가, 종말의 예수의 재림 때 우리의 완전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의 삶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러한 은혜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것이 성도들인데, 그러한 큰 은혜를 입을 사람들이 스펙과 소유를 자랑하고, 학벌, 재산, 외모 등을 자랑하고, 혹 그것이 없다고 벌벌 떠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우습게 하는 것입니다. 혹은 믿는다면서 하나님도 나의 스펙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 세상과 다름없는 끝없는 경쟁과 과시, 세상이 줄 수 없는 영광을 갖고도 썩어 없어질 것에 목을 매며 살아가는 반쪽 자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셨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성령의 인치심이 있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품고 영광을 바라보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고후 5:12b)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가장 자랑스러운 삶이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의 겉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의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 겉으로만 자랑하는 자들보다 우리는 더욱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10만 원짜리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자랑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내심 부러웠습니다. 그것이 없고 살 수 없는 것이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설교자가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자랑하는 친구는 고작 삶에서 그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10만 원짜리

운동화가 없을지라도 그보다 값진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삶이다. 우리의 삶을 더 자랑하고 기뻐하라.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10억짜리 아파트를 자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부러워한다면... 나는 아직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