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고린도후서 8-9장 / 연보 : 버리고 세우다 / 강정규 목사

2020-10-11 · 고린도후서 8-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주 은혜임을 / 이것이 영원한 삶 / 주께서 내 맘에 두신 기쁨은 /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캠프사역에 참여했던 친한 동역자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가 참 별로였습니다. 캠프의 대표가 초청 강사에 대해 사례를 할 때, 정해놓은 금액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의 결과를 보고 본인의 마음에 들면 많이 주고, 마음에 안 들면 적게 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의 힘인 것처럼 자랑하면서 늘어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후부터 그 캠프에

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와 유사하게 성도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에 예배에 나와서 빈 봉투를 들고 앉아 있다가 그날 예배가 은혜가 되면 10만원, 은혜가 안 되면 5만원 뭐 이런 식으로, 상품의 별점을 메기는 것 마냥 그날의 예배에 대한 자신의 감상평을 담아서 헌금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간혹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헌금에 대해서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저지르는 실수들이 있죠. 예를

들어, 헌금 시간이 되면 자신을 예배에 데려온 지인에게 “여기는 회비를 얼마 내야해?”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언어의 오류는 사실 우리가 넉넉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다만 계속 그 상태에 머물지 않도록 교회는 가르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성도처럼 헌금에 대한 바르지 못한 태도들도 바르게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로 설교의 문을 여는 것은 고린도후서 8-9장이 우리의

본문인데, 이 두 장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금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가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십시일반’이라는 말처럼, 사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각 성도가 삶에서 공급받는 물질 가운데 일부를 교회에 헌금하므로 그 재정을 통해서 교회의 모든 부분들이 유지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에

순종하지 않고 동참하지 않는 공동체라면 결국 그 공동체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굉장히 특이한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것이 법이고 의무사항이라면 그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텐데, 헌금은 세금처럼 의무사항도 아닙니다. “당신 헌금 안내면 여기 못 들어와요” 이런 입장권도 아닙니다. 물론 헌금을 강요하는 것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떠오르는 2가지 사건이 있는데, 모두 잘못된 예들입니다. 하나는 뉴스에 나온 이야기인데, 교회부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교사의 월급을 줄 때, 십일조를 제하고 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교사들 중에 일부는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만, 절반은 다른 교회를 다니거나 혹은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교회측 항변은 십일조를 무조건 교회에 드리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공제를 하고 월급을 줬다는 이야기였어요. 목사로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도대체 그 교회는 ‘헌금’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헌금 강탈이죠. 또 하나의 이야기는

주변에서 가끔씩 듣는 이야기입니다. 좀 규모가 있는 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직분을 주는데 권사가 되는 분에게는 3000만원씩, 장로가 되는 분에게는 5000만원씩 헌금을 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와 권사가 교회를 섬기는 자리이니, 공동체를 위해 물질을 헌신하는 모범을 보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많이 양보해서... 임직식을 할 때, 그 행사에 대한 비용을 임직자들이 나눠서 준비를 하거나, 혹은 정말 자발적인 마음으로 임직을 받는 분들이 각자 형편껏 마음을

모아서 교회에 어떤 헌물을 하거나, 이 정도까지는 그래도 이해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직분에 대한 값을 매겨서 그 값을 치러야 임직을 주겠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하면, 그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만 임직자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것조차도 강제성이 없죠. ‘자유의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잖아요. 헌금도 동일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헌금은 강제성을 갖고 거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는 헌금에 대해 동참하는 성도가 없으면 망하게 되어 있어요. 만약 어떤 교회가 새롭게 개척하여 헌금을 할 사람이 없어서 재정이 부족하다면 도와야 하죠. 교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서 유지가 어렵다면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공동체의 규모나 상황이 자립이 가능한데,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존폐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 공동체의 생존은 거기까지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곧 성도인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생명력이 잃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교회라는 공동체가 갖는 굉장히 독특한 생존방식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다르죠. 아시겠지만, 저는 창업을 경험해봤습니다. 창업을 하면 시장조사를 합니다. 철저하게 하죠. 상품을 얼마에 판매할지, 몇 개까지 팔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손익분기점을

계산하여 운영을 하죠. 만약 여기가 스터디카페였으면 좌석이 몇 석이고, 오늘 몇 번의 예배를 드리니, 한 사람에 얼마씩을 받을 수 있고... 이런 계산을 하겠죠. 그리고 오는 사람마다 정해진 값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장사할 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않아야 합니다. 저는 개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의 계산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교회는 그런 계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막연해요. 그래서 때론 답답해요. 그런데 저는 그 불안정성이 교회의 진정한 생존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하루가 예측이 안 되죠. 오늘은 만나가 왔는데, 내일은 오려나.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가 늘 광야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저 지켜주시면 그것이 감사한 것이죠. 특별히 하나님은 레위지파와 같이, 그리고 신약의 사도와 같이 그 공동체 안에 공동체의 헌신을 통해서만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두셨습니다. 레위지파는

나머지 12지파가 드린 십일조를 통해 살아가고, 또 그 안에 제사장들은 거기서 구별된 예물을 받고 살아가는데.. 구약 후반부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게 되니 제사장들이 직분을 감당하지 않고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어서 이스라엘의 종교 시스템이 무너지는 일들도 발생을 합니다. 최근에 저와 같이 목회를 하면서 다른 일을 병행하는 목회자가 늘어나서, 거의 대부분의 교단에서 이 일을 막다가 조건부 허용을 시작했습니다. 그 조건이 뭔지 아십니까? “생계형 이중직 허용” 즉, 교회가

사례를 충분히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목회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허용. 그 외는 불가. 저도 마찬가지고 일하며 목회를 하는 사람들의 롤 모델은 대부분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저도 늘 바울 사도를 기억하고 그가 가진 원칙과 마음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제가 사도바울을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이 선생님께서 굉장히 꼬장꼬장하실 것 같아요. 느낌상 자존심도 좀 세실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고린도후서를 묵상하며 그 속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속내를 보며 조금씩 놀라게 됩니다. 아, 이분 안에도 이런 연약함들이 있고, 인간미가 있고, 자신을 좀 믿어달라고 하소연 하는 모습에서... 자존심보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라는 그 사랑이 훨씬 큰 사람이구나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분의 특징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요청하는 것은 또 잘 못합니다. 저도 가끔씩 쉽지 않아요. 성격인 것 같아요. 바울도 자기를 위한 것에는 적극적이지 않은데,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적극적입니다. 특별히 헌금 얘기는 매우 노골적으로 합니다. 왜요? 아마도 이 헌금이 바울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바울은 그렇게 얘기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자비량 사역을 했습니다. 텐트 만드는 일을 하면서 목회를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고린도교회가 돈이 없어서요? 아뇨. 여기 부자 많았습니다. 사례비 받으며 사역하는 것이 싫어서요? 아뇨. 그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사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받아서 바울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에서만큼은 자신이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고 있음을 강조했던 것은, 당시 고린도에는 철학자가 많았고 그들이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으며 살았거든요.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가르침이 그런 철학자들의 가르침처럼 취급될까봐 복음을 위하여 자비량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빌립보교회처럼 바울의 사역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고

협력하고자 하는 것은 거부할 이유가 없는데... 자칫 고린도에서는 사례를 받으면 성도들이 마치 자기들이 바울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고 우쭐하며 복음 앞에 교만할까봐 사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포기입니다. 그런데 또 고린도교인들로부터 자비량 사역을 한다고 욕을 먹어요. 비판자들이 하는 이야기죠. 자기만 특이하고 유별나게 산다는 것이죠. (고후 11:7) 나는 여러분을 높이기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추었고, 또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죄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고후 11:8) 나는 여러분을 섬기기 위하여 삯은 다른 여러 교회에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교회에서 빼앗아 낸 셈입니다. (고후 11:9) 내가 여러분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빈곤하였지만,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누를 끼친 일은 없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교우들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봤을

때는 바울이 자기 사례비 달라는 얘기는 하지를 않고, 남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사람들이 무슨 오해를 하고 시비를 겁니까? 저거 겉으로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쓰겠다고 하고 분명히 자기 위해 쓰려고 저러는 거야. 바울이 분명히 돈이 없을 텐데, 자비량 사역이니 뭐니 한다고 하면서 잘난 척은 혼자 하고 있고... 분명히 우리한테 거짓말해서 선교라고 해놓고 자기가 그거 쓰려고 하는 거야. 이런 루머를 퍼트립니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지속적으로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헌금에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여러분. 저는 정말 솔직히 바울처럼 못할 거 같아요. 저는 바울만큼 저렇게 강철 멘탈은 아니거든요. 제가 만약 여러분에게 어떤 외부의 선교를 위해 우리가 헌금을 모으자고 했는데, 만약 여러분이 목사님이 그 돈을 빼돌려서 자기 필요한데 쓰려고 한다는 이런 이야기가 중론이 되면, 저는 계속 선교헌금에 대해서 추진 못하고 접을 것 같거든요. 오해받는 것이

싫고 힘들어서. 그런데 정말 바울은 확고합니다. 8장 앞부분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갑자기 마게도냐 교회들 이야기를 꺼냅니다. 마게도냐는 그 윗동네에 바울이 사역한 교회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 바울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극심한 가난이 있었는데도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경쟁과 과시에 대해서 설명을 해놓고는, 지금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으니 참 재밌죠. 그런데 초점은 3절입니다. (고후 8: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그들의 모습으로 경쟁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헌금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성도들은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참여했고, 또한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간절히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교회가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참여시켜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면 놀라운 역설이 있어요. 헌금은 꼭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신실한 분들이 더 적극적으로 합니다. 뭐 교회 안에서 대충 형편을 알잖아요. 때로는 이 가정은 너무 어려워서 좀 안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가정이 더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제적 상황이 더 어려운데, 바울의 후원자가 되어주고... 바울이 그 교회에서는 강요를 하지 않음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소식을 듣더니 “우리가 그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런 간절함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런 분들이 하나님의 복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기복신앙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을 싫어한다고 하여 우리가 ‘복’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는 것은 틀린 일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그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지나치게 물질적이거나, 내가 필요한 것을 달성하는 측면으로 해석하면 잘못된 것이지만,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이 복 받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고후 8:10) 이 일에 한 가지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해부터 이미 이 일을 실행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고후 8:11) 그러므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원해서 시작할 때에 보여준 그 열성에 어울리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끝까지 완성하라고, 즉 끝까지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 설교>는 늘 부담이 되는 설교입니다. 아마도 지금은 제가 사례를 받지 않지만, 사례를 받다보면 더 가르치기 어려운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가 생기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이 바울에 대한 신뢰함이 있다면, 그리고 저에 대한 신뢰함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해서 믿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재정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 영적 전쟁의 요충지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재정의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가 있어서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주님의 뜻대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계기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이 헌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가 이 원리들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마음에 새기고 마치면 좋겠습니다. 첫째, 드리는 자는 ‘자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헌금 바구니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헌금 바구니를 돌리면 헌금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헌금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거나 그 이름을 기입하면 헌금에 대한 참여가 늘어납니다. 헌금봉투 종류를 다양하게 만들면 헌금에 대한 전체적인 볼륨이 늘어납니다. 저희 교회는 헌금 바구니를 돌리지도 않고, 예배 시간에 헌금자를 공개하지도, 주보에 이름을 넣지도 않습니다. 헌금봉투도 가급적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재정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는 재정이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헌금을 많이 거두기 위한 요령들을 피하는 것은, 여러분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함입니다. 헌금에 적극적인

것은 좋습니다. 저도 계속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헌금에 참여하는 분들이라면, 위에서 말한 헌금을 많이 거두는 방법이든 아니든 무관하게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께 고백할 것입니다. 위의 방법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압박을 하거나 자랑거리를 만들어서라도 헌금에 동참시키려고 하는 방법인듯 하여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헌금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은 헛된 일들입니다. (고후 9: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두 번째, 재정관리는 ‘투명하고 철저하게’ 여러분, 한국의 교회가 투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이 질문 앞에 여러분도 머뭇거린다면 아마도 교회 밖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조교를 오랫동안 했습니다.

성결대학교 다문화평화연구소 조교를 했는데, 학교의 재정을 타서 운영을 하고 제가 그 전반적인 행정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의 돈을 타서 쓰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복잡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100원을 쓰는 것도 절차가 있고 증빙을 해야 합니다. 반면, 당시 저는 교회의 전도사였는데.. 교회가 재정을 사용하는 방법과 그것을 증빙하는 방법은 학교에 비하면 너무나 허술하다고 느꼈습니다. 교회 안에는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편의주의와, 증빙의 과정과 절차들을

만들어 요구하는 행위를 사람, 특별히 목회자에 대한 불신으로 보는 경향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례를 깨고, 저는 맡은 부서나 사역에서 회계들에게 철저한 기록과 증빙을 요구했기에 보통 회계들이 저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통 제가 같이 밤 새며 영수증 맞추고 계산하고 했었죠. 왜냐면, 물질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임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엄청난 유혹의 힘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동체답게, 투명성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특별히 헌금 관리를 바울을 제외한 3명을 뽑아서 맡깁니다. 사실 보통의 개척교회들은 사람이 없다보니 특별히 초기에는 목회자가 재정에 관여를 많이 하거나, 관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고린도후서를 통해 이 원리를 개척전에 배웠기에, 교회가 개척된 이후로 별도의 재정팀을 뽑고 재정부가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개척이후 지금까지 늘 저희가 가진 원칙이었습니다. 또한 재정부와

각 부서별 운영통장은 최소한 3명 이상의 관련된 사람들이 수입과 지출여부를 함께 확인하고 검증하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우리처럼 엑셀이 있고, 카카오뱅크 모임통장이 있고... 이러지 않았죠. 그들은 당시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투명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후 8:20)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고후

8:21)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좋은 일을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옛날 어르신 목사님들이 자꾸 검증하려고 하면 “너 나 못 믿어?”라고 했죠. 네. 저는 저를 못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정에 대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내세워 방임을 하지 않는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지켜주어 물질로 시험에 들지 않고, 함께 승리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세 번째, ‘균등함의 원리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공평’에 대한 원리를 강조합니다. 여러분.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유로운 자에게는 더 걷고, 궁핍한 자들에게는 덜 걷고. 이것이 공평입니다. 즉 형편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후 8:12)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고, 교회가 구제의 일에 힘쓰다보니 재정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 중에 바나바라 불리는 사람이 자신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을 합니다. 참으로 귀한 일이죠. 그것이 바나바의 신앙이고 칭찬받을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억지로 바나바처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과 신앙에 맞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기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여보, 우리도 뭐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나바가 주목받고 칭찬받는 것에

대한 시샘일수도 있고, 어쩌면 바나바보다 좀 더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을 수도 있어요. 압박을 느낀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부흥회에서 은혜를 너무 감정적으로 받은 것일 수도 있죠. 그래서 자신들도 다 팝니다. 그런데 막상 드리려니까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만 드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반을 드리는 것도 대단한 것이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죽게 되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다고 여러분 모두에게 아들을 받치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바나바에게 주시는 마음의 감동에 바나바는 순종한 것이고, 만약 여러분의 마음에 그런 성령의 음성이 있다면 순종하면 되는 것이죠. 특별히 여기서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은 모든 교회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공평의 원리에 입각한 사명이었습니다. (고후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 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구약을 배우며 살펴본 것처럼, 가난한 자를 돕는 하나님의 방법은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빚진 자를 구제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저당 잡힌 겉옷을 저녁에 내어주는 자이며, 모퉁이의 곡식을 남겨두는 것이며, 안식년과 희년에는 무상으로 해방할 수 있는 순종에 근거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나라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돌봄으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것입니다. 균등하게 한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손을 움켜쥐면 함께 망하는 것이고, 손을 펴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이곳저곳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넉넉하면 그들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또 그들이 넉넉해지면 우리의 부족함을 보충하게 될 것을 믿고, 나눌 수 있으면 나누는 것입니다. 내리사랑으로, 은혜의 종착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연보’입니다.

여러분 연보의 정확한 뜻을 아십니까? 한자죠. 버린 연(捐) 세울 보(補). 나의 것을 자발적으로 버려서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이 연보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겠다는 삶에 반드시 나타나야할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요, 그 형상을 닮은 빛 된 삶의 열매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헌금과 구제에 동참하는 것은 강요된 법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법입니다. 안 지킨다고 구속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궁핍한 자들을 채우시고,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누구도 순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기적을 행하여 일하시겠지만... 순종하지 않은 그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연보의 원리는 꼭 헌금이라는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가진 자들의 자발적 헌신과 나눔으로 필요한 곳에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초기 신자들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마게도냐의 교회들처럼 그들은 가난했지만 하나님을 위한 헌금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러한 헌신이 있었기에 한국에 교회가 세워져 갈 수 있었던 것이죠. 자신을 버려서 다른 이를 세우는 연보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더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을 위해서 뭐라도 더 하고 싶은데, 물질이 허락하지 않아서

아쉬움을 갖는 이들이 ‘시간의 연보’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내게 있는 것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 나눌 시간이 있으니... 시간의 연보를 정하여 교회에서 봉사하고 기도하며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그러한 모습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성경을 몰랐을지도 몰라요. 그들은 우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적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쩌면 우리들보다 더욱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께 속하여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에게 남은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 동안 쌓여왔던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 성경의 요구를 나에 대한 주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시대와 이후의 시대에도 교회가 교회답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을 버려서 다른 이를 세우는 연보의 귀한 삶이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의 사명과 가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