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시네 / 날 향한 계획 / 시간을 뚫고 / 감사해 위로. 한 주간 제 마음에 가장 많이 다가온 단어였습니다. 위로하고 싶었고 위로받고 싶었던 상황이 유독 많았던 한 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위로의 전문가 중에 한 사람이 바나바였죠. 그런 바나바를 사람들은 참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바나바를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위로’만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꾸짖고 가르쳐야 하죠. 보통 이 약할은 바울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과 같은 사람을 바나바에게, 그리고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바울에게 붙여주신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역할을 참 잘하셨습니다. 요즘에 ‘강약약강’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람들을 꼬집는 단어이죠. 하나님은 그와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죠.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자, 힘 있는 자들의 잘못된 모습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반면, 약한 자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시고 위로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신자들은 처음에는 위로를 더 받지만,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내 삶을 고난에 직면하여 자라가게 하시는, 그리고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그런 공의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는 ‘성령님’께서 위로자가 되어주셔서, 우리가 믿음의 그 싸움 안에서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죠. 저는 집에서 ‘위로’의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양육할 때 보통 저의 포지션입니다. 아무래도 엄마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훈계의 몫이 엄마에게 더 있게 됩니다. 그로 인해, 위로의 사람인 저는 미움도 덜 받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좋은 면도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에서 저는 ‘위로’의 사람으로만 남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딜레마입니다. 성도님들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받으려는 목회는 자칫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을 군인의 삶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딤후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에게는
착한 지휘관이 좋은 지휘관이 아닙니다. 또한, 스포츠에서도 착한 감독이 좋은 감독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목표에 함께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이 그들의 역할입니다. 군대의 지휘관은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 하고, 감독은 팀을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만큼은 ‘위로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백성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때로는 나쁜 리더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의
사역에서도 항상 그런 딜레마가 있었어요. 바울의 초점은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좋은 목사로 기억해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싫은 소리도 하고, 모진 말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의 그 마음을 그렇게 받아들여 주는 성도들도 있지만,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교회가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런 고린도교회에게 바울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단순히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지금 이러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가 되기는 쉽습니다. 제가 유튜브로 강의를 올리고 그것을 제 목회의 바운더리 안에 없는 누군가가 보고 배우게 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죠.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것은 차라리 편하다고 말하기도 하죠. 단순한 설교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목사가 되는 것은 영적인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하죠. 바울에게는 그러한 책임의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한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라 여러 교회를 함께 세우고 섬기는 순회선교사였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들은 가정에서 모이는 형태였으므로 교회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사역지는 워낙 이곳저곳에 있었죠. 그러다 보니 바울은 몸이 하나이고,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죠. 그리고 마치 자녀들 가운데도 말 잘 듣는 자녀와 반항하는 자녀가 때론 공존하듯이,
바울이 사역한 교회들도 각기 달랐어요. 특별히 고린도교회는 말 그대로 탕자였습니다. 그런데 또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복음이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전파된 때입니다. 2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중심적인 도시가 고린도였습니다. 이 지역에 복음을 심고 자라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1년 반 정도를 섬깁니다. 그래서 2차 선교여행 기간의 절반 이상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게 되는데, 그 후에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계속해서 좋지 않은 여러 소식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었다. 교회가 잘못된 삶을 추구한다.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편지로도 그들 안의 문제들이 해결이 안 되고 오히려 더욱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디모데를 보내어 전달합니다. 디모데는 고린도교회에서 함께 사역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의 부교역자 신분이며, 바울에게는 영적 아들과 같은 대리자를 직접 고린도교회에 보내어 성도들을 모아놓고 이 편지를 읽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했으면... 잘 해결되겠지. 이런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디모데가 들고 간 편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고린도전서입니다. 제가 이번 6월에 4편에 걸쳐 한 달간 설교했던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_ 고린도전서 1장 바울의 사랑법 _ 고린도전서
8-9장 우리 계속 좋은 교회 합시다 _ 고린도전서 10-11장 Worthless Servant _ 고린도전서 12-13장 우리가 한 달을 설교해도 다 다루지 못할 만큼 그런 심오하고 섬세한 가르침을 전했으면 당연히 그들이 깨닫고 돌이켜야 할 것 같은데... 디모데가 낭독하는 이 편지를 듣고 난 후 그들의 반응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디모데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원래 바울은 디모데의 방문과 고린도전서 편지로
잘 수습될 것이라 기대하며, 그 이후에는 내가 여러분을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고전 16:5) 나는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여러분에게로 가겠습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를 지나서 (고전 16:6) 여러분에게로 가면, 얼마 동안은 함께 지낼 것이고, 어쩌면 겨울을 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은, 내가 가려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쓰여있어요. (고전 16:24)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아멘. 바울이 이렇게 사랑 표현을 하며 편지를 썼고, 디모데가 가서 전하였는데 잘 해결이 되지 않았어요. 지금 바울은 멀리 에베소에 있습니다. 몸은 에베소인데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마음이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와 고린도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소아시아 대륙에 있는데,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에 있어요. 배로 가도 멀고 육로로 가면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너무나 중요시했기에 포기할 수 없죠.
그래서 원래 고린도전서를 쓰며 세웠던 계획은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고린도에 가는 것인데, 안 되겠는 것이죠. 마케도니아도 가긴 가야 하죠. 바울은 여러 교회의 목회자이니까 다 소홀히 할 수는 없죠.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케도니아를 들렀다가 천천히 갈 수가 없죠.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로 직행합니다. (고후 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고후 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그러니까 원래의 계획은 마케도니아 갔다가 고린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일단 고린도부터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도를 갔다가 마케도니아를 갔다가 다시 고린도를 가는 계획이 돼버린 것이죠. 즉 고린도에 두 번을 가려는 마음을 갖고 우선 고린도로 갑니다. 빨리 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좀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그 안의 어려움도 좀 해결하려는 목회자의
마음으로 달려갑니다. 그렇게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뭐,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게 되니 그럴 수도 있죠. 저도 부교역자 시절부터 뭐 이런 장면을 많이 봤습니다. 아프지만 사람이 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그럴 때 가장 큰 위로는 그때 목회자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죠. 누군가 막 대적을 하고 모욕을 해도, 그들을 꾸짖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죠. 그런데 아마도 고린도교회 교인들 안에서 누군가 바울을 대적하고 모욕하였을 때, 모두가 마치 동조하는 것처럼 침묵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어쨌든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 일로 심각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원래 계획은 고린도로 가야 하는데 차마 고린도로 다시 가지 못하고 에베소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실 바울의 에베소 사역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에베소의 사역도 버거운데, 고린도교회는 힘이 되기는커녕, 바울의 마음을 이렇게 무너지게 만드니 바울이 심각한 마음의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요.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9a)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살 소망이 끊어졌다. 내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여러분.
물론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삶에서 힘겹지만 버팁니다. 다 힘들죠. 직장 생활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흔히 가족 생각하며 버틴다고 말하잖아요. 냉정하게 말하면 가족을 생각해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 벌기 위해 참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자비량 사역자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돈을 받지도 않았죠. 마케도니아에 있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협력도 잘하고 바울을 재정적으로 지원도 하고 그런 교회였는데,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보면 속만
썩이고 바울을 힘들게만 하는 교회였죠. 보통 사람들이라면, “고린도교회는 포기해야겠다. 어차피 거기, 베드로파도 있고, 아볼로파도 있는데... 내가 아니면 아볼로가 가서 하든지, 베드로가 가서 하든지... 나 싫다는데... 난 이제 아니야.” 이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수모를 겪고 온 뒤에, 더욱 고린도교회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향해서 다시 눈물로 편지를 씁니다. (고후 2:4)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세 번째 편지인 ‘눈물의 편지, 혹독한 편지’ 입니다. 아마도 ‘진실은 통한다’라는 마음으로, 정말 마음을 담아서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써서 보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디도’를 통해서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달합니다. 아마도 디도를
보내고 바울이 계속 그 결과를 기다렸을 것 같아요. (고후 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거기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후 2:13)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드로아에 갔는데도, 아직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기에 사역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복음에 미친 사람이 바울인데... 바울의 심경이 어떠했는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디도를 만나려고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이 아픈 손가락 같은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우선순위가 된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 한 마리, 목자라면 그 한 마리가 마음에 걸리기에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디도를 통해서 만남의 결과를 듣는데, 이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에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죠. 사역자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목회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달라져 가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는 모습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습니다. 사귐의교회가 큰 교회가 되는 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곳에 속한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해가는 것은 저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이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만드시고,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것처럼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시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보내시는 것이죠. 마치 디모데에게 바울이 편지를 들려 보낸 것처럼. 그런데 구약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합니다. 적대시합니다. 그리고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직접 오시죠.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가르치시죠.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그런 바울조차 적대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 앞에 세상이 그러했죠. 아마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고린도교회를 향한 눈물의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죠.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눈물의 편지에 담긴 바울의 마음도 이러하다면,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기다림은 어떠할까요? 바울의 이 편지에 고린도교회가 반응하여 변화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앞부분에는 그러한 상황을 겪으며 깨달은 바울의 마음들이 잘 드러납니다. (고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고후 1:4)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인하여 우리도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에 있는데요.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위로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해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초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교회가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가 어떤 위로인가요. 사람들이 이제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내 목회에 잘 따르게 된 것에서 위로와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자신이 끝끝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서 끝까지 행하였을 때... 그들에게 결국에 올바른 변화가 나타난 것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지를 굉장히 열심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역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교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성경을 고르고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고 혼잡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노여워하는 말씀도 강직하게 전했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그런 목회자가 되길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에게 착한 목회자가 아니라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목사가 되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 관계로 풀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면, 미워하지 않을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특별히 복음 앞에 타협이 없었어요. 이렇게 하라고 했을 때 불편하다고 왜 우릴 힘들게 하냐고 아우성을 해도,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힘들어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자신의 리더십을 부정하는 그들에게 눈물로 혹독한 편지를 써 보낸 것은, 그들을 복음 안에서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 안에서 주님의 방법이 옳았음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따라 꼭 이겨봐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바울이 받은 위로란
그리스도의 위로입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도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바울에게는 고린도교회 목회 과정 가운데 겪는 고난이죠. 여러분이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며, 주변의 누군가를 신앙으로 전도하고 양육하기 위해 감당하는 고난입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 넘칠 때, 복음 안에서 받는 복음의 위로가 그에게 넘친다는 것입니다. (고후 1:6)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인한 환난을 당하는 것은 교회가 복음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복음 안에 위로를 받는 것도 교회가 복음의 위로를 계속 받을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 바울의 복음의 가르침 안에서 자란 교회도 복음의 고난을 견디어 낼 힘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복음의 고난은 나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므로 견디며 주님의 위로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면 즉각적인 위로를 더 찾게 됩니다. 누군가 내게 위로의 말을 전해주면 거기서 힘을 얻죠. 그러나 사람의 위로는 잠깐입니다. 제가 혹시 여러분에게 위로를 하고, 여러분이 제게 위로를 할 수 있죠. 위로를 받죠.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잠깐이에요. 우리가 진정으로 위로를 받는 유일한 방법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불변하니 그 변함없는 말씀의 위로가 영원토록 우리가 붙잡을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 여러분 참된 위로는 어디서 옵니까? 위로부터 옵니다. 내가 주의 말씀 안에서 참된 위로를 받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 위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옆으로 가야 합니다. 주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 존재로부터 나오는 위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그 위로, 내가 경험한 그 위로의 은혜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 위로의 방법은 때로는 따스함이 아니라 절실한 권면이었습니다. 혹독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영혼을 살리기 위한 복음의 권면이었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바라보며 그 주님의 살아계심 앞에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예배팀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동아리 활동이었죠. 그 안에서 우리는 늘 관계적인 어려움을 겪곤 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기독 학생들의 모임이었으니 늘 어려움을 겪었죠. 그때마다 우리는 늘 “우리가 더 친해져야 해”라고 생각하며 친교 프로그램과 관계 해결을 위한 노력들을 했습니다. 잠깐의 영향은 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우리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삶에서 이런 일을 반복합니다. 관계적 어려움, 사람들 안에서 상처를 받으면 다른 따스한 사람의 위로를 구하며 회복하길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위로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는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위로를 얻으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위로를 구했고, 사람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고, 슬프게 한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사람이 나에게 위로를 주지 않는다고 너무 애달파하지도 마십시오.
위로해주는 이가 없다고 외로워하지도 마십시오. 그 모든 마음을 갖고 주님께 더욱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이 가르치신 그 삶을 사십시오. 참된 위로는 그 길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과 다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다른 곳에 살아서 다른 것이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서 다른 것입니다. 바울의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고후 1:9)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 1: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 같은 위기 앞에서, 내 자신의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살았고, 그 경험으로 오늘 내게 있는 위기와 고난들 앞에서도 주께서 나를 지키시리라는 믿음과
앞으로도 계속 건져 주시리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혹시 이 예배 전까지 그 위로를 사람에게서 얻으려고 하셨다면 이제 마음을 바꾸십시오. 세상이 주는 여러 상처와 어려움 가운데서 괴로울 수 있지만, 이 시간을 통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졌다고 아쉬워하기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진 것에 감사하십시오. 옆에서 주는 위로가 없어서 슬퍼하지 마시고, 위로부터 오는 참된 위로를
받고 그것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진리로 위로하여 일으키는 삶을 사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의 모든 계획은 틀어졌고, 세상을 사는 모든 방법도 달라졌으며, 이런저런 어려움과 갑갑함이 여러분에게 있는 줄 압니다. 위기라면 위기이고 고난이라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더는 이것에 좌절하지도 이것 때문에 우리의 영성이 떨어졌다고 핑계하지도 맙시다. 코로나로 인해 힘들다, 어렵다, 이래서 안 된다, 못한다는
이야기 이제 그만합시다.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 잠깐 서로가 위로하여 줄 수는 있겠으나, 그 안에 영원한 위로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내 삶이 변화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계속 내 신앙이 위축될 변명과 핑계가 될지도 몰라요. 어쩌면 코로나 이후에도 어쩌면 모이지 않는 것에도 코로나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는 것에도 코로나 때문에.. 내 영적 성장이 더딘 것에도 코로나 때문에... 계속 이럴지도 몰라요. 세상의 눈으로는 맞습니다. 세상의 예측으로는 더욱 좋지
않은 것이 예측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눈은 주 안에서 새로워져 주님이 주시는 믿음 안에 새로운 소망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전도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더욱 힘든 사람들에게 오히려 소망 되신 주님을 전할 기회이고, 많은 교회가 발가벗겨져서 욕을 먹고 있지만, 오히려 이 시간을 통해 우리 스스로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혹시 코로나로 인해서 잠들어가는 내 영이라면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십시오. 나태해져 가는
나의 삶이라면 깨우십시오. 때로는 혹독한 말로 다짐해서라도 나를 흔들어 깨우십시오. 세상의 어떠함에 위축되지 말고 말씀으로 담대해지십시오. 간절하지 않은 나의 예배의 마음이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오늘도 혹시 예배를 등한시하고 멀리하고 삶의 우선순위 가운데 다른 것을 행하고 있다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십시오. 말씀대로 살아서 참된 주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맛보아야 그 경험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위로부터 오는 참된 위로를 얻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위로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르게 세워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시대 탓, 환경 탓 그만하고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는 주님의 위로를 구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을 걸어갑시다. 여러분 그러므로 지지 말고 꼭 이기십시오.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위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