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 너 근심 걱정 와도 / 대단한 믿음 없어도 / 선한 능력으로 금요일에는 창세기 44~47장까지의 내용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요셉이 형들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며 동생 베냐민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죠.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가족이 다시 눈물로 상봉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야곱의 가족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48장은 정착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 48: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앞의 내용과 연결되지만 약간의 시간 간격이 있다는 의미가 될 텐데요. 바로 앞인 47장의 끝에는, 죽을 날이 가까움을 깨달은 야곱이 요셉을 불러서 ‘유언’을 합니다. 그 내용은 자신이 죽으면 조상들이 있는 가나안 땅에 장사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유언이 있은 후, 48장에서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을 찾아가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고센 땅에 있는 아버지의 위중함을 궁중에 있는 요셉에게 알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풍년의 때에 태어났고, 야곱의 가족은 흉년 2년 차에 와서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아들들의 나이는 대략 20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오자 야곱은 몸을 일으켜서 침상에 앉아서 말을 합니다. 바로 그가 겪었던 하나님과의 대면에 관해서 말입니다. (창
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창 48: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이 약속을 기억하며 요셉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2가지에 대한 것입니다. 1) 후손의 번성 2) 가나안 땅의 점유 그러니 이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야곱 또한 순종하고자 나를 약속의 땅 조상의 묘지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의 약속인 후손의 번성에 대해서도 신실하기 위해 요셉의 아들들을 부른 것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요셉의 아들이니 야곱의 손자이죠. 그러나 야곱은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우선 여기에서 2가지 표현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의 태어난 순서는 ‘므낫세-에브라임’인데 야곱은 ‘에브라임-므낫세’로 지칭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장남과 차남의 순서를 바꾼 것이죠. 실제로 축복의 과정에서 야곱은 이 둘의 순서를 바꿉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손자의 반열에 있는 이 형제를 아들의 반열로 올려서 양자로 입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손자를 양자로 삼는 것은 이상할 수 있지만, 고대 근동의 문서에는 가끔씩 이런 사례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시므온을 언급한 것이 의미심장하죠. 르우벤은 야곱의 12아들 중 첫째, 시므온은 둘째 아들입니다.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그 두 아들의 지위를 대체하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요셉의 아들들이 야곱의 첫째와 둘째가 된다는 것은 요셉에게 장자권을 부여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야곱은 유언도 요셉에게 했고, 자신을 장사하는 문제도 요셉에게
부탁합니다. 역대상에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자의 실제적 축복은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아들들로 구성되는데, 거기에 삼촌들과 함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갑니다. 요셉의 자리에 요셉을 대신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포함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레위지파가 종교를 담당하며 구별되므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2개의 지파 + 요셉과 레위를 뺀 나머지 10지파가 12의 구조를 이루고 땅을 분배받아 살아갑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를 포함하여 12지파라고 부르기 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반지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엿이 한지파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더더욱 그렇죠. 야곱은 마지막 죽기 전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리고 요셉을 축복합니다. 이후에는 모든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끝내 숨을 거둡니다. (창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향품으로 처리하도록 지시를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야곱의 장례가 며칠 동안 치러진지를 아십니까? 70일입니다. (창 50: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창 50: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요셉의 명을 받은 의원은 아마도 애굽의 왕실 주치의였을 것입니다. 의사는 야곱의 시신을 40일 동안 특수한 향품으로 처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실 것 같은데, 가장 쉽게 표현을 하자면 ‘미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라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으셔야 할 것은, 애굽의 장례문화에서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미라로 만드는 것은 부자와 고위층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70일의 장례가 보여주지 않습니까. 미라로 만드는 과정은 시신의 뇌와 장기를 모두 적출하고 거기에 대신 강력한 방부 기능이 있는 값비싼 약품과 향품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시신을 특수한 액체에 오래도록 담급니다. 이어서 세마포 끈으로 전신을 감아 완성하는데, 이 과정은 오래 걸리면
70일까지 걸렸다고 합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40일간 시신처리를 했고 30일을 더 애곡하여 70일 장례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집트에서 얼마나 큰 예우를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당연히 이 예우는 요셉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장례는 가나안 땅에 묻는 것이었으므로, 가나안에 매장하기 위한 대규모의 장례 대열이 구성됩니다. 대열의 마지막에는 이집트의 병거와 기병들도 합류했으니, 마치 군대 행렬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죠.
이집트가 미래의 이스라엘을 위해 극진히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훗날 있을 출애굽에 대한 전조가 된다고 학자들은 보는데, 400년 후에 애굽의 군대는 호위가 아니라 해하려고 뒤따라 왔던 것이 큰 차이가 될 것입니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야곱이 죽었습니다. 장례를 잘 마친 후, 형제들은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이런 것이죠. 혹시 요셉이 우리에 대한 복수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가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은 참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복수를 행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와서 엎드립니다. (창 50: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형들인 실제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고, 먼저 바짝 자신들을 낮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요셉의 대답 속에 그의 신앙이 또 나타납니다. (창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예전에
그런 영화의 제목이 있었죠. “복수는 나의 것” 요셉의 신앙고백은 그것과 전혀 반대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요셉이 가르쳐주는 삶의 모습은, 복수하는 삶이 아니에요. 용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나의 마음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수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자는 복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죠. 단순히 소극적으로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까지 요셉은 나아갑니다. 그 다음 구절이 참 중요합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요셉에게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픔이겠습니까? 잊을 수 없는 일이죠. 제가 전에도 언급했지만,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이 비뚤어진 행동을 해도 그것은 요셉에게 있는 그 상처로 인한
것이지 요셉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죄’로 봤습니다. 형들이 나에게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것이 요셉의 기준이었어요.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가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비대면으로 예배 중에 있습니다. 오늘은 그래도 몇분이 오셨지만, 최근 한 달 정도는 거의 못 오시게 했죠. 제 마음으로는 성도님들과 이곳에서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죠. 거리두기
2.5단계 시행할 때는 저희 아이들도 집에 놓고 왔습니다. 지난주에도 성도님 한 분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하며 오시지 말라고 했어요. 제 마음이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최근 2~3주 동안 자꾸 누군가가 저희가 대면 예배를 드린다고 신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고를 하면서 유튜브 한 번 보지 않고, 6월에 드렸던 예배 사진을 캡처해서 신고를 하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억울하죠. 그렇지만 이해하려고 생각합니다.
“교회 때문에 참 많이 화가 나셨나보다.” 그리고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닥친 이 상황을 잘 타개하기 위해 함께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철저히 하려고 가림막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떠한가, 세상이 어떠한가, 환경이 어떠한가... 이것을 바라보면 그것은 때로는 악하고, 힘들고, 절망적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저는 우리교회에게 이 코로나가 결코 위기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교회는 늘 목사인 제가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성장해왔습니다. 개척할 때 목회의 슬로건이 ‘Slow Church’ 였습니다. 저는 개척 3년 만에 이렇게 이전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이 속도가 저에게 조금은 버거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코로나가 없었으면 더 많이 교회는 커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이었을까? 분명 저희는
성장통을 겪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과부하가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서 멈춰버린 이 시간들 안에서 나를 점검하고 우리를 점검하고 내 신앙을 점검하고 사역을 그리워하고 공동체를 그리워할 수 있음이 감사인지도 모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순간들도 그에게는 ‘돌아보니 감사’로 고백하게 되었어요. 형님들이 나에게 정말 좋지 않은 일을 했고, 그로 인해서 내 삶은 정말 심하게 꼬였지만... 그 삶을 보내며 요셉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악한 사건도 사용하셔서 그 결과를 선으로 바꾸셨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죠. 악한 것이 나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호요청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기도에도 그런 부분이 있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건과 사람과 환경이 우리에게 닥칠 때가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모두가 그러했죠. 그때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왜냐하면, 내 뜻에는 이것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것을 통해서도 선한 일을 행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믿기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서 깨달은 것이 이것이죠. “내가 만약 애굽에 오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요셉이 애굽에 오지 않았고, 가나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가 기근을 맞이했다면...
우리는 요셉의 사건만 바라보지만,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 우린 조금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죠. 요셉은 처음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는 정체를 밝히면서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다
구원하시려고, 아니 애굽과 주변의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크나큰 위기에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고작 흉년 2년 만에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앞으로 5년이나 이 일이 더 진행될 것을 요셉을 알았기 때문이죠. “형들이 만약 나를 애굽으로 팔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요셉은 흉년의 시기를 보내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애굽에 팔려온 것이 가장 큰 절망인줄 알았는데, 사실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요셉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고난이라는 것만으로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고난이 은혜입니까? 고난은 고난이죠. 고난이 은혜가 되는 것은, 내가 고난 중에 주님을 깊이 발견하고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죠. 요셉은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 있던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키고 돌보시고 계시니, 나는 그분의 편이 되어 살아가겠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삶의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를 하겠습니까? 이것을 더욱 큰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애굽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준비되는 ‘요람’입니다. 인큐베이터입니다. 고센 땅은 그렇게 하나님을 배워가며 나라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바로 출애굽의 그 때까지... 이들이 애굽의 풍족한 환경 가운데, 요셉의 보호 가운데 있지 않았다면 400년 동안 그렇게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한 번 그보다 더 큰 관점에서 이해해 볼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며 했던 약속이 있었죠.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약속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그들을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복이 흘러 넘쳐서, 주변에까지 그
복을 전하게 된다는 것이죠. 복의 통로와도 같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 즉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이 아브라함을 거쳐 이삭에게,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그리고 야곱을 거쳐서 이제는 요셉과 12 형제들에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땅의 모든 민족이 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을 큰 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신실함을 어학사전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믿음직하고 착실하다.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불범죄의 가능성이 있고, 하나님께는 범죄의 불가능성이 있다. 풀어 설명하면,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죄를 지을 가능성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없어요. 절대적으로 신실합니다. 그의 약속 앞에 신실합니다. 그가 약속한 것을 그의 신실하심이 이루시죠. 그는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정직하고 가장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신실하심이 깨지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의 존재가 신실하신 분인데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실하심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은, 나도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 앞에 나도 신실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실함과 같은 단어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나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하며 요셉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고 계신다.” 그리고 요셉도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으며 이렇게 그의 자녀들에게 유언합니다. (창 50: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내가 총리이기에 너희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들을 돌보실 것이고, 그가 약속하신대로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러면 그 때에 꼭 내 해골도 그곳으로 가져가 다오.” 이것이 요셉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이 유언은 400년이 지난 후, 광야 40년의 세월을
거쳐서, 여호수아 시대에 땅을 차지한 후 이뤄집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그의 계획을 이루셨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수 24:32a)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요셉의 마지막 예언에서 두 번이나 사용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돌보다’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세상이 가는 방향에서 벗어나 내가 지시할
방향으로 살아가는 자, 즉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내가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저는 이 약속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올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돌보신다는 그 약속을 이렇게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돌보신다는 것이 무엇인가? 요셉이 사용한 ‘돌보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파카드’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뜻은 무엇이냐면 ‘방문하시다’입니다. (Gn 50:24) And Joseph said to his brothers, "I am about to die, but God will visit you and bring you up out of this land to the land that he swore to Abraham, to Isaac, and to Jacob." 돌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 멀리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속에 그가 방문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그가 ‘반드시’ 돌보실 것이다(God will surely visit you)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감옥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셔서 돌보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곳에 주님의 샬롬이 임한 것입니다. 저는 이 약속이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께 기대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어디에 있던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오늘도 신실한 주의 자녀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