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라 / 행복 / 밝은 빛이 가득해 / 마음의 예배 / 하나님의 사랑이 금요일에는 창세기 41장까지의 내용을 함께 읽으며 조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갔다가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애굽의 총리가 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41장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을 전할 내용은 42-43장의 내용입니다. 우선 42-43장의 흐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그 중에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해서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창
42: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창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형들에게 애굽은 동생 요셉을 팔아버린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땅에 흉년이 심하였고, 유일하게 애굽에만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아버지 야곱의 재촉을 받고 애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은 ‘베냐민’은 보내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제는 총 12명이었는데, 이 중에 라헬이 낳은 아들이 11번째 요셉과 12번째 베냐민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라헬도 죽고, 요셉도 죽었습니다. 아마도 그 모든 사랑을 베냐민에게 쏟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총리가
된 과정은 여러분이 아시죠. 그는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고, 그 이후 극심한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바로의 꿈을 제대로 해석하고,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한 대비책까지 제시하면서 애굽의 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요셉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의 언어입니다. (창 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 41:28)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창 41: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요셉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고 그는 늘 고백합니다. 지금 애굽에서 요셉이 행하는 일은 작게는 애굽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지만, 크게는 전 세계를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만약 애굽마저 식량이 없다면 큰 일 나는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셔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고 계신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이 엎드립니다. 이것은 요셉의 어린 시절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죠. 이것을 꿈으로 보여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봐요.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또한 외형적으로도 20년의 세월이 지나기도 했으며 구레나룻을 면도한 애굽식 스타일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남자는 헤어스타일이 70% 입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이 갑자기 특이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창 42: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어찌 보면,
갑자기 생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린 시절에 자신을 팔아버린 것에 대한 앙갚음일까요? 그보다는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며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면, 형들이 20년 전 그대로 매정하고 우애가 없는 그런 자들의 모습이라면... 그럼 걱정되는 부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감싸주시던 아버지는 무사하실까? 내 동생 베냐민은 나처럼 험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닐까?” 요셉은 아마도 그런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가족 이야기를 꺼내면 뭔가 이상하잖아요. 그러니 자신의 신분을 들키지 않은 채 그것을 취조하고자, 형제들을 ‘밀정’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신분을 의심하니까, 밀정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모두 형제라는 것을 내세웁니다. 상식적으로 밀정을 보낼 때 전원 다 형제들로 보낼 리는 없겠죠. 그러나 요셉은 계속해서 형들을 밀정이라고 의심하니, 형들은 가족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들이 실제로 친형제들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요셉은 그럼 그 이야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와서 결백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창 42: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요셉은 신분이 정확하게 확인이 될 때까지 모두 옥에 수감되어야 하며, 형제 중 한명이 고향으로 가서 막내를 데려와야 그 말이 사실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여전히 옛날
모습 그대로 거짓말을 하는 그러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9명이 옥에 갇히고 1명이 가서 베냐민을 데려와야 하는데, 이것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3일이 흘러갑니다. 3일이 지나면서 더욱 급해진 것은 오히려 요셉입니다. 왜냐하면, 고향에 정말 남은 가족들이 있다면... 지금 흉년이 극심한 때에 하루가 급한 상황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3일 후 요셉이 제안을 다시 합니다. 1명만 옥에 갇히고 나머지 9명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1명만 보내면
가나안에 있는 가족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명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형제들에게 결단이 필요합니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형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닥친 난처하고 괴로운 상황 앞에서, 20년 전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그 행동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인과응보’를 떠올리는
것이죠. 지금 요셉과 형들은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있냐면, 요셉이 애굽 언어로 이야기를 하면, 가운데서 통역이 그 말을 히브리말로 전하고, 형제들이 히브리말을 하면 통역이 애굽말로 요셉에게 고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요셉은 히브리말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형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는 것이죠. (창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형들이 요셉의
일을 꺼내며 괴로워하니까, 요셉에게 옛날 감정이 올라왔던 모양이에요. 요셉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감옥에 남을 한 사람으로 시므온을 지목합니다. 이 부분이 조금 재미있는데요. 열 명 중에서 대표라면 그래도 장남인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앞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르우벤이 형제들에게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해서 죄를 짓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말하거든요. 요셉이 그것을 들었죠. 그러니 르우벤을 감옥에 가두지 않고, 둘째 형인 시므온을 남으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의 인간미가 조금은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이제 9명의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베냐민을 데려와야만 시므온을 풀어준다는 명령을 받고 말입니다. 곡식에 대한 값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제들의 곡식 가방 안쪽에 곡식을 팔고 받은 그 돈을 그대로 넣어서 보냅니다. 즉, 곡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돈은 다 돌려준 셈입니다. (창 42: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형들이 이것을 돌아가던 길에 발견합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곡식 값을 치르지 않고 곡식을 훔쳐온, 혹은 돈을 다시 훔쳐온 상황으로 비춰질 상황인 것입니다. 당연히 오해를 풀어야하는데, 문제는 다시 애굽으로 가기에는 가나안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염려스러운 것이죠. 그래서 일단은 무거운 마음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형제들은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빨리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단호합니다. (창 42: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다는 것은... 야곱은 베냐민을 보낼 마음은 전혀 없기 때문에 시므온은 이제 죽은 목숨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베냐민이 안 가면 시므온은 못 오죠. 그러니 시므온도
없어진 것입니다. 시므온은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야곱의 지나친 편애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또 옳지 못하게 보입니다. 야곱은 베냐민에 대해서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베냐민을 ‘내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야곱의 마음이 드러나죠. 시므온을 구하려면 베냐민이 가야하는데, 아버지는 결코 보낼 수 없다고 하니... 시간만 흐르게 됩니다. 그렇게 1년이 흐릅니다. 자, 1년이 지났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그렇습니다.
곡식이 다시 떨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베냐민을 안 보내면 모든 가족이 죽게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창 43: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을 의미하죠. 저 아이는 베냐민입니다. 아버지께서 베냐민을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애굽으로 가서 곡식을 사오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가족 모두가 다 살 수 있습니다.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데려가야만 이 모든 위기가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이죠. 시므온이 잡혀있는 위기, 절도범으로 몰린 위기, 굶어죽을 위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입니다. 결국 야곱이 동의하게 됩니다. (창 43: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갑절의 돈을 가지고 간 이유는 그 전에 치렀던 비용을 다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2배의 돈과 예물을 챙겨서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베냐민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1년을 어쩌면 더 기다리지 않았겠습니까? 혹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고, 이미 베냐민도 나처럼 죽여 버린 것은 아닐까? 아마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며 형들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또 잡혀 있는 시므온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요셉이 구덩이 안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자신도 느꼈을 것입니다. 드디어 형들이 다시 애굽에 온 것입니다. (창 43: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요셉은 그들과 함께 온 한 사람. 베냐민을 가장 먼저 찾습니다. 베냐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형들과 함께 왔음을 보고 우선 형들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첫 번째 만남 때 계속해서 자신들을 밀정이라고 몰아붙이는 무서운 애굽의 총리를 기억하며 왔을 텐데, 얼마나 긴장하며 그 앞에
섰겠습니까? 갑작스럽게 요셉이 형들을 환대하니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우리를 잡아서 죽이려나보다. 그래서 요셉의 집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창 43: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창 43: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창 43: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창
43: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 서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항변하기 바쁜 것이죠. 요셉의 집 청지기는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형들의 가방에다가 돈 뭉치를 다시 넣었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창 43: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청지기의 이 말이 참 인상적이죠.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 그가 너희에게 베푸신 것이다. 애굽 땅에서 전해지는 복음과 같이 들립니다.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의 분부대로 형제들을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로 이 본문을 읽으면 눈에 들어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정탐꾼’을 히브리어로 ‘메라겔’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발’을 뜻하는 ‘레겔’의 파생어입니다. 즉,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서 발을 씻는 것은 이들이 정탐꾼이라는 혐의가 씻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자, 아버지의 안부를 묻습니다. 어쨌든 베냐민은 데리고 왔으니 남겨진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평안하고 잘 계십니다”라고 대답하죠. (창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은 베냐민을 바라봅니다. 이미 베냐민도 나이 서른이 넘었을 것입니다. 워낙 어린 나이에 헤어졌으므로 그가 베냐민이 맞는지 다시 물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소자여” 말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소자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나 영어에서는 “내 아들아”라는 표현입니다. my son. 이 표현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끼는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애정 어린 호칭입니다. 베냐민을 보자 또 요셉은 감정이
북받칩니다. 그는 다시 자기 방으로 가서 한참을 울고 나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온 형제가 둘러앉아서 함께 즐거워하며 식사를 하는 것으로 43장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43장의 이야기 안에서 제가 주목하여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초점은 설교의 제목처럼 ‘설득’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설교가 설득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설득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그 안에서 주신 원리로,
성령의 지혜로 가능한 것이죠. 전도도 그렇습니다. 전도는 내가 복음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설득을 당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상대방에 ‘변화’가 나타났을 때 그것이 설득이 된 것입니다. 설교에서 중요한 것도 변화이죠.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들은 대로 다 빠져나가 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소 귀에 경 읽기’라고 말합니다. 물론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겠지만, 그것은 3년 동안의 느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변화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3년 동안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전도도 설득하는 것입니다. 전도로 말미암아 상대방이 의지하던 대상이 바뀌고 마음의 중심이 변화되어야 설득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설득’은 우리의 사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로든 삶으로든 설득해야죠. 요셉이 형들을 ‘밀정으로’ 의심했을 때에, 형제들은 요셉에게 그들의 무고함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왜 설득이 되지 않습니까?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득력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진실성입니다. 믿어져야 하는 것이죠. 요셉에게 있어서 형들의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뭐라고 말합니까?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형제들이 증명을 하기 위해 아버지 야곱을 설득합니다. 먼저 르우벤이 나서서 설득을 합니다. (창 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그러나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왜요?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여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그러한 르우벤의 행동은 크나큰 배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는 끝내 아버지 야곱을 설득합니다. (창 43: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창
43: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사실 논리로만보자면 르우벤이나 유다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르우벤은 아들을 담보로 걸었고, 유다는 자신을 담보로 걸었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르우벤은 자신이 야곱에게 미움의 대상이기에 자신을 담보로 거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차이가
분명 있습니다. 르우벤의 이야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내 아들도 죽이소서. 다 죽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유다의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베냐민을 보내시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의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실제로 창세기 44장에서는 베냐민이 억류될만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때 유다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켜서 베냐민 대신 자신이 옥에 들어가겠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희생에 대한 각오가 거짓이 아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설득에는 진실성이 있습니다. 유다는 야곱을 설득할 때에도... 모든 가족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물로 삼습니다. 그런 유다의 이야기에 야곱은 태도를 바꾸고 허락을 하게 됩니다. 이 유다의 이야기 분명히 낯이 익죠.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물로 내놓으신 그 분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실제로 그분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이야기가 성경 전체가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뒤틀어진 우리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설득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죠. 이 복음의 메시지가 통했다면 우리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복음 안에 담긴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은 공허한 외침이 될 수 있습니다. 대신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의 모습은 결코
공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삶에 설득력이 있다면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메시지가 살기 위해서는 메신저가 그 메시지에 진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희생하시며 사랑함으로 우리를 살리셨다는 복음을 가장 잘 전하는 방법은, 바로 내가 그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서 희생하고 사랑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반드시 여러분의 삶이 복음에 설득당해 변화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 상대방을 향해 그러한 희생과 사랑으로 전할 때
거기에 설득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왜 이렇게 싫어합니까? 성경의 가르침,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싫어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다고 싫어합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며 쓴 이야기들입니다. 그는 비폭력주의자인 간디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스탠리 존스가 인도에서 선교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기독교’가
가진 이미지였습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여러 강대국, 특별히 기독교 계통의 국가들의 침략을 받아왔던 인도에서 ‘기독교’는 곧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기독교가 하는 얘기라면 사람들이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인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기독교>와 <예수>를 분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와 예수는 달라. 예수님은 제국주의자들처럼 당신들을 침략하는 어떤 이방의 세력이
아니라, 인도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당신의 삶에 함께하시는 그러한 분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되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스탠리 존스에게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은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은 반드시 당신네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고 타협을 하지 마십시오.” 한 힌두교인이 복음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정말 이상적이고
멋진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정말 전혀 그분을 닮지 않았군요. 만약, 기독교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우리 힌두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순간은 훨씬 빨리 찾아왔을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기독교’는 도대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도 “교회와 예수는 달라”라고 말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설득되었는가? 나는 진정으로 복음 앞에
설득되었는가? 나에게는 그럼 그 설득의 결과로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세상을 향해 복음으로 설득하는 자로서... 과연 내 삶은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가? 내 삶을 통해 세상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 가까운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유다처럼 나를 희생하는 그러한 마음과 태도가 있는가? 세상은 교회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교회가 전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세상 앞에 예수를 바르게 나타낼 자 또한 우리 크리스천뿐입니다.
기독교인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생명력은 염분에서 나오는데, 바다의 염분은 3%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바다가 썩지 않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세상에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를 닮고 따르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인지가 중요합니다. 부디 복음 앞에 설득 당해 복음으로 살아가서 세상에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