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월까지 창세기 설교 8편을 나눴습니다. 2월 마지막 주일 설교였던 8번째 설교의 제목은 ‘이상한 이삭 가족’이었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인 아들 야곱의 거짓말, 그리고 그 가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해 가는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심판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그 설교의 마지막 부분은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이삭’은 영적으로 둔감해졌고, 하나님의 결정에 반하는 자기 결정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아들과 아내에게 속고, 이 사건 이후로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향력 없는 뒷모습을 남기게 됩니다. ‘리브가’는 너무 지나치게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 어긋난 사랑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20년 만에 힘겹게 얻은 아들과 고작 20년을 같이 살다가, 20년간 생이별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에서’는 어떻습니까?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너무나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이미 내 것, 이미 얻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명분을 눈에 보이는 한 끼의 식사와 맞바꾸는 그러한 잘못된 영적 판단을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육체적 질서도 앞서 있었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았으나,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속이는 삶을 살았는데, 그의 거짓된 행동을 하나님은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반의 집에서 역으로 속임을 당하는 자가 되어 혹독한 시련을 당합니다.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7년간 일하지만, 신부가 뒤바뀌는
속임을 당하여 7년을 더 노역해야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는 자신보다 더 잘 속이는 ‘라반’을 만나서 탈탈 털립니다. ‘거짓’의 대가를 철저하게 경험합니다. 야곱은 20년간 자신의 옛사람의 모습을 뼈저리게 후회할 정도로 연단을 받습니다. 그가 사모했던 ‘장자’는 단순히 축복만 받는 것이 아니죠. 그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족장’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연단시키시고 다듬어 가십니다. 야곱이 자신이 직면할 일을 알았어도
과연 그 자리를 쉽게 탐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그것으로도 끝이 아닙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였던 것과 같이, 야곱의 아들들은 형제 요셉을 팔아버리고 야곱을 속입니다. 아마 그가 돌고 돌아서 느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긋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야곱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동시에 그럼 우리는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복 주세요.
저와 함께해 주세요.”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이 뚫고 들어와서 일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아닌 자로 시작했지만, 그 연단함을 인내하며 그 안에 믿음이 성장했고,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 모두의 ‘신앙생활’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전에 묵상한 36장까지가 야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 묵상하는 37~50장의 내용은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
그 중에 요셉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셉. 우리를 가슴 뛰게 하는 그런 이름이기도 하죠. 37장은 그 요셉이 17세가 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복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자꾸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 야곱에게 일러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형들이 잘못한 부분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내부고발을 한 ‘정직함’으로 해석할지, 아니면 요셉이 철없이 형제들끼리의 이야기를 야곱에게 나쁘게 전하여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한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요셉도 이제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던 나이인데, 이 행동은 꼭 좋은 의미로 기록된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이 행동은 장차 요셉에게 닥칠 좋지 않은 일에 대한 복선과 같기도 하죠. 어쨌든 아버지 야곱에게 있어서 그런 요셉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채색옷은 다윗을 딸인 다말이 입기도 했던 옷인데, 평민이 입기 어려운 장신구가 달린 화려한 옷을 의미합니다. 옷의 색상을 강조하는 표현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런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청소년기의 요셉은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더 합니다. 아버지의 지나친 편애로 인해서인지 조금은 제멋대로인 막내아들 느낌이죠. 그는 자신이 꾼 기이한 꿈 두 가지를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아마도 요셉 스스로도 이 꿈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어떤 큰 계획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시콜콜하게 눈치 없이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꿈의 사람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어린 시절 보여주신 꿈을 그의 삶에서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꾸었던 꿈의 내용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즉 누군가 위에 군림하는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한 꿈을 갖고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면 그는 벌써 넘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삶이 그가 꿨던 꿈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에 꿈이라는 키워드가 몇 번 있으나, 우리는 요셉의 삶을 근거로 ‘비전을 이루는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꿈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에게 비전과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꿈이 아니라 그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꿈을 두 차례나 형들에게 가서 자랑하는 요셉의 눈치 없는 모습을 보면서, 학자들 또한 그에게 ‘인격적 결함’이 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회성 부족, 공감 능력 부족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즉, 모든 삶은 성숙의 시간을 거치며 다듬어지는 것이겠지요. 12절에서 이제 문제의 사건이 시작됩니다. 얼마 후, 요셉의 형들은 멀리 세겜까지 양 떼를 치러갑니다. 야곱이 현재 거주하던 헤브론에서부터 측정해본다면 80km 떨어진 곳입니다.
여러분에게 현실감각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직접 측량을 해보니 양주로부터 남쪽으로는 평택, 동쪽으로는 횡성, 북쪽으로는 개성을 훨씬 더 지나서 봉천읍 정도가 되는 거리입니다. 당시의 유목민들의 삶을 고려하면 이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세겜’이라는 것이 조금 걸립니다. (창 37: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세겜은
불과 2년 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위장 동맹을 맺어 할례를 시켜놓고 몰살시킨 땅입니다. 세겜의 장정들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대거 학살을 당해서 오히려 위협이 적었을까요? 야곱이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 안부를 확인하러 요셉을 보낸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신변에 대한 걱정을 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지금 세겜보다 더 큰 위협은 사실 형들입니다. 그런데 야곱도 요셉도 지금 형제들이 갖고 있는 적개심을 잘 살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의
편애가 이 가족 안에 얼마나 치명적인 아픔을 가져오게 되는지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는 원인을 따지기에 앞서 그 행한 일에 대해서 깊은 반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너무 원인 중심적으로 죄를 다루는 것은 죄를 지은 행위에 대한 타당성을 강조하는 변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형들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다면, 적어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그들은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는데요. 주님은 나의 죄와 허물 모두 사해주셨으니 / 나도
형제의 잘못과 부족함 용서하기 원해요 요셉이 세겜에 갔을 때, 형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무리의 도움을 받아서 요셉은 다시 22km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약 100km의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그가 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봅니다. 채색옷은 화려한 옷이기 때문에 눈에 띄었겠죠. (창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창 37: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꿈꾸는 자는 해석이 조금 아쉬운 데요. 여기서 사용한 원어 표현은 단순히 꿈꾸는 자가 아니라 ‘꿈들의 주인’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형들은 비아냥대며 “저기 꿈 대장 오시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환경, 요셉이 야곱의 품을 떠나있고, 수많은 죄의 변명거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 앞에서 죄를 도모합니다. 자, 여기서 요셉의 구세주로 등장한 것은 ‘르우벤’입니다. 그는 요셉을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고 의견을 냅니다. 왜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고 했을까요? 장남으로서의 나름의 책임감이 발휘된 것일까요? 학자들은 그가 이미 아버지의 아내인 빌하와 간통을 했으므로 아버지의 신뢰를 잃었기에, 더 이상 아버지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소극적이었습니다. 죄가 도모될 때 장남으로서 반대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윌리엄 글래드스톤의 명언이 있죠. “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르우벤 나름대로는 요셉을 살리려는 마음이 있었을 수 있으나, 요셉을 살릴 수 있는 순간은 사실 바로 형제들이 죄를 공모하던 그때였던 것입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형제들이 홀로 있었다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있고, 누군가가 더 적극적으로 이 일을 반대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암묵적 동의와 침묵 속에 그들은 함께 죄를 지은 후, 공범이 된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서로 안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구덩이 속에서 요셉일 얼마나 살려달라고 외쳤을까요? 형들의 비정함은 그 구덩이 옆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죄는 죄를 낳습니다. 그들의 죄는 또 다른 거짓말이라는 죄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지나가던 무역상에게 은 이십에 팔고 나서, 이제 아버지 야곱을 속이기 위해서 요셉의 채색옷에 피를 적십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완전범죄를 성립시킨 것입니다. (창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창 37: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출 22:13)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출애굽기의 율법을 볼 때, 이들의 행위는 목동으로서 최소한의 행위를 하였으므로 책임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자신들은 요셉의 죽음에 책임이 없어진 것입니다. 율법에서 ‘인신매매범’과
‘유괴범’은 살인과 동급의 범죄로 취급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살인죄를 교묘하게 거짓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아버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새끼 염소를 죽여 털을 만들어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숫염소를 죽여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힌 후 야곱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팔려간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37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창 37: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창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그리고 이어서 창세기 38장을 펴면, 우리는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흥미진진한 요셉의 다음 이야기는 온데 간데없고, 갑자기 요셉의 형인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 ‘폰 라드’는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에게서 사라졌듯이,
독자들에게서도 잠시 사라지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되면서 요셉이 애굽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고 있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첫째 르우벤은 간통죄를 저질렀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세겜의 부족을 진멸한 잔혹한 행위로 실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38:1은 ‘그 후에’라는 접속사로서 이 이야기가 37장과 이어지는 이야기임을 드러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유다가 결혼하여 ‘엘/오난/셀라’ 세 아들을 낳습니다. 이때 첫째 아들인 엘의 아내가 된 며느리가 ‘다말’이죠. 아마도 출신은 가나안 여인일 것입니다. 이 일들은 요셉이 17세에 팔려 가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된 그 사이에 일어난 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남성은 15~20세 사이에 결혼을 하고, 30세가 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습니다. ‘엘’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지른 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다말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간통을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다말을 통해 후손을 남기는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죽습니다. 고대 근동에는 ‘계대결혼’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형제가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면, 형제 중 하나가 죽은 형제를 위해서 생존한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고 대를 잇도록 하는 것입니다. 엘의 아내였던 다말을 둘째 ‘오난’이 책임지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였죠. 문제는 오난이 다말과의 잠자리를 가진 후에, 그의 형에게 후손을 주지 않으려고 땅에
사정을 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보시면 더욱 정확합니다. (창 38:9) 그러나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그가 자기 아들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새번역 성경은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오난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행위는 당시에 하나님이 씨를 보존하기 위해 주신 법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오난도 심판을 받아
죽게 됩니다. 셋째인 ‘셀라’만 남았습니다. (창 38: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셀라는 결혼을 하기에는 조금 어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얼마 후에 셀라가 장성하였다고 기록된 것을 봐서, 유다는 셀라도 죽을까봐 핑계를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마지막 남은 아들을 보존하여 대를 이으려하고, 다말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대를 이으려고 합니다. 대를 이으려는 같은 목적을 지녔으나, 두 사람의 계획과 방법은 완전하게 달랐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유다는 그 야곱을 속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이제 며느리 다말에게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야곱의 속임, 유다의 속임, 다말의 속임. 이 세 가지 사건들에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습니다. 모두 ‘옷을 이용한
위장술’과 ‘염소’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 일 후에 친구와 함께 ‘딤나’라는 지역으로 갑니다. 다말은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계획을 실행하죠. 다말은 유다의 반대로 인하여 막내아들인 셀라와 계대결혼을 하여 후손을 남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판단하였고, 최후의 수단으로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씨를 이어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녀는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복장을 하고, 유다에게 접근합니다. 유다는 다말을 창녀로 여겨서 그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아마도 아내의 죽음으로 홀로된 그의 처지가 그의 이 행동을 그래도 설명해주려고 하는 듯 보입니다. 유다는 계획성 없이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마땅한 ‘화대’도 주지 못합니다. 외상으로 처리를 하려고 하자, 다말은 담보물을 요구합니다. 그녀가 요구한 담보물은 유다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도장’, 그리고 ‘지팡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손잡이의 장식 부분에 소유권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다말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그녀가 유다의 아들 외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고, 율법이 있기 전이었지만 고대 근동 전역에서 이것은 사형으로 다스려지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도 다말의 소식 앞에 분노하며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말합니다. 다말은 자신을 임신은 이 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았다고 말하며, 유다에게서 받은 보증물들을 꺼냅니다. (창 38:26) 유다는 그 물건들을 알아보았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나의 아들 셀라를
그 아이와 결혼시켰어야 했는데"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뒤로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유다는 다말의 이 행위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발생된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잠시 넘었던 관계의 선을 지키고 보호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유다의 집안에서 후손이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쌍둥이입니다. 베레스와 세라.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다윗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 즉, 다말은 예수님의 족보이자 왕가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유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계대결혼을 막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데 불순종하였으나,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함에 있어서는 성실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아들들이 죽게 된 것이 ‘다말의 탓’이라고 여기며 정죄하고 비판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창세기
38장은 그런 유다의 잘못들을 고발합니다. 37장과 38장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이 두 장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지만, 이 생뚱맞은 연결은 지극히 의도된 것입니다. (창 37: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창 37: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창 38: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감추어진 죄는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코람데오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세상에서는 우리는 서로를 속이고 내 못난 부분들을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 부분적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그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유다와 형제들의 범죄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위장하였고, 아버지는 속았습니다. 그러나 38장에서 다말에게 역으로 속는 유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마치 그것을 다 아시고 유다에게 거짓말의 대가를 맞이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진정한 회개하면 완전한 자유를 주시지만, 감춰놓은 죄는 밝히시고 그 값을 물으시는 분입니다. 2)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예측할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형제들이 꿈꿨던 완전범죄, 르우벤이 꿈꿨던 구출계획, 유다가 꿈꿨던 아들 지키기 등, 사람은 수많은 일을 꾸미고 계획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것을 항상 뛰어넘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상황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올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작년에 다닥다닥 붙어서 예배하던 사진을 보면 낯설기까지 합니다. 사귐의교회가 코로나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였으나, 재확산으로 인해서 우리도 얼굴을 못 본지가 3주가 지났습니다. 언제 어떻게 예배할지 알 수 없고, 그 사이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교회의 전도길이 막힌 것처럼 한국교회의 미래가 희미해 보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목사의 삶을 위해 자영업자의 삶을 병행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의
생계가 달려 있죠. 매장이 1주일이 영업중단이 되었을 때는 “그래, 1주일만 참자” 했습니다. 다시 일주일 연장이 발표되니 솔직하게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어떻게 감당하지?” 더 염려스러운 것은 2주는 어떻게든 견딘다고 하면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되는거지?” 이것이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미래도, 내 삶의 앞 길도...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이렇게 하면 된다”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럴 때 말씀을 보게 하는 것이고,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 말씀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처럼. (잠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여호와의 뜻. 지금 우리에게 요셉의 삶을 보게하시는 것은, 그의 삶이 예측 못할 고난의 연속 앞에 있었지만, 사실은 그 모든 상황을 통하여 여호와의 완전하신 뜻이 이뤄져가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을 바라봐야 함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신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알 수 없는 위로와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코로나가 우리만 빗겨갑니까?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할 것이고, 그 안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설교 중간에 언급한 것처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 경우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이 내게 주시는 옳은 방향을 향해서 항상 발을 내딛는 실체적인 행동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했는데...”라는 것으로는 어느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말의 기준은 당시에 닥친 상황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다말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집안의 대가 끊겨 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유다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믿음이 실종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을 행하는 것은 나의 잘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연약하고 못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한 삶을 결단하고 내딛는 그 진정성 있는 모습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 힘으로 뭔가를 시작하고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 가운데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단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그의 능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가 내딛는 첫걸음도 없었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엉망진창 야곱의 가족, 말도 안 되는 유다 가족. 하나님께서 이런 가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시는 것이 창세기가 보여주는 하나님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못할 환경과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끝까지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 앞에 어떠한 순종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지연되고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은 작고 연약하고 나는 능력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선명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예배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내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묻고, 삶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