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지 않으리 / 광야를 지나며 / 나의 가는 길 오늘의 말씀은 지난 금요일에 전했던 말씀과 짝을 이루어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금요예배 설교를 듣지 않으셨던 분이 있다면, 꼭 찾아서 들어보심으로 오늘의 말씀과 함께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청년부 수련회를 통해 전한 <위닝 멘탈리티>라는 설교에서, 사실 요셉과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히스기야였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를 그 설교 중에 인용할까 했는데, 2가지 이유 때문에
히스기야 이야기는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사야서 강해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곧 히스기야에 대한 설교를 하는데, 이 이야기를 청년부 수련회 때 다 해버리면 너무 겹칠 것 같은 인간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더 중요한 이유인데요. 히스기야를 신앙의 모델로서 제시하기에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는 그의 잘못된 모습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잘하고 잘못하고를 반복하던 인물이었어요. 나름 종교개혁을 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그의 아버지처럼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에게 비굴한 편지를 보내는 등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이다가, 금요일 설교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인으로서 보여야 될 가장 중요한 모습, 하나님께 무릎 꿇는 태도를 보이죠. 그런데 또 오늘 본문에 보면 닮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금요일에 이어서 ‘우리의 모델 히스기야 2탄’으로 잡았습니다. 이유는 우리에게는 정면교사와 반면교사가 모두 필요합니다. 사실 이것은 두 명의 교사가 아닌 경우도 많죠.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닮아야 할 좋은 점과, 닮지 말아야 할 나쁜 점이 있기도 합니다. 다윗도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주는 사람이죠. 그의 삶에는 우리가 닮지 말아야 할 어둠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간을 극복해나가는 그의 이야기부터 다시 회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다윗, 그의 삶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히스기야의 삶’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에게도 히스기야에게도 이런 어둠의 시간이 존재했다는
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위로와 새로운 길에 대한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선진들의 실패는, 단순히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핑계와 변명이 아니라,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조심하여 넘어지지 말고 믿음 안에 승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저는 그런 의미로 히스기야의 치부를 포함한 그의 이야기를 이사야서 마지막 설교로 전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설교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침략 앞에서,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 무릎 꿇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으로 이겨냈습니다. 38장에서 그는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사 38: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예전에 히스기야였다면 ‘용한 의사’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우리 히스기야가 조금 달라졌지요. 그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기도이죠. 그는 이제 자신의 생명이 여호와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위협에서, 선한 삶을 살아온 자신이 여호와로부터 잊혀졌음을 보며 다시 기억해주시길 간구합니다. 그의 눈물 어린 통곡은 신세한탄이나 비통함에서 나온 것은 아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기도자의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뜻을 바꾸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죠. 예언자들은 운명론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지는 확정된 결정이라기보다는 아직 그 문이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계획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물론 그 결정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하나님이 반응해주셨습니다. (사 38: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사 38: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6절 말씀이 좀 이해가 안 되시죠? 제가 금요일에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렸습니다. 히스기야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문맥의 흐름대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앗수르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시간 배열로는 병 고침이 먼저 있는 이야기이고 앗수르를 물리친 이야기가 뒷이야기입니다.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해주십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기도를 드린 것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기도 하죠. 그에게는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있었어요. 바로, 히스기야에게는 왕의 자리를 이어갈 아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5년의 생명 연장은 아시다시피 죽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연기된 것입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3년 정도 후에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그가 죽은 후 므낫세는 12세에 유다의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아하스의 이야기와 잠시 비교해볼까요. 아하스 왕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징조를 주겠다고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아니오, 저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믿음이 있어서 징조를 보지 않아도 믿겠다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이 부분에서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히스기야는 예언자를 통해 주어진 징조를 받아들입니다. 또 후에는 징조를 구하기도 하죠.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이사야서는 아하스의 불신앙과 히스기야의 신앙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에게 주신 징조가 무엇입니까? (사 38:8) 아하스의 해시계에 비친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갈 것이니, 해도 내려갔던 데서 십 도 올라갈 것이다. 여호와께서 태양을 뒤로 물리시는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스기야의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도 한 가지를 주목해보면 좋겠습니다. (사 38: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그는 스올(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주를 찬양하지 못하니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주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초점에 대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떤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법’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방법을 연구해서 어떤 방법을 통해 내 기도에 응답을 받겠다는 마음 자체가 틀려먹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기술이 되어서는 안 되겠으나, 그의 기도가 자신의 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구하고 있음은 우리의 기도의 초점을 점검하는 측면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38장까지의 히스기야는
괜찮은 신앙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39장의 히스기야를 함께 만나봅시다. (사 39:1)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38장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그 때에’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바벨론은 당시에 서서히 세력을 키우며 부상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앗수르의 세상이었지만, 바벨론은
서서히 야심을 키우며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 바벨론의 왕의 사신, 특별히 그의 친필 서신을 들고 사신들이 찾아오니 히스기야가 한껏 고무됩니다. 작은 나라의 왕을 바벨론의 동맹국가의 격을 갖추어 대우해주기 때문입니다. (사 39: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환대’는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환대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적절한 선이 있는 것이죠. 히스기야는 여기서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것, 특별히 무기고까지 바벨론에게 전부 보여줍니다. 이 행동에 이사야가 매우 당황해서 히스기야에게 묻습니다. (사 39: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사 39: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히스기야가 왜 자신의 나라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을까요? 히스기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생명을 연장 받는 기도의 응답과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을 받고 너무 들뜬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의 일이
아닌 마치 자신의 치적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가 얼마나 괜찮은 나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자랑은 하나님에 대한 것,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이 나라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책임지시는 유일한 분인데, 그는 다른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요. 솔직히 이 39장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너무 마음에 찔리고 부끄러워서 이 말씀을 피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제 모습 안에서 히스기야의 이 잘못된 모습이 딱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힘든 이 상황에서도 저희가 예배당을 더 넓혀서 이전하고, 인테리어도 예쁘게 잘 마치고, 계속 부흥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들 궁금해 하면서 찾아옵니다. 그럼 저는 그들에게 환대한다는 이유로 아주 세세하게 저희의 모든 상황들을 나눌 때가 있어요. 인테리어도 하나하나 소개하고, 과정도 하나하나
소개하고. 물론 그것을 행할 때 제 마음은 정보를 나누고 도움을 주기 위한 마음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정직하게 ‘자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후벼 파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하지만, 사람들에게 말할 때.. 그 안에 교묘하게 나를 부각하고,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딱 바벨론 앞에서의 히스기야의 모습과 같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말씀 앞에 부끄러워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평안케
되고 형통케 된 일이 있을 때가 있죠. 그것을 간증하고 나눔에 있어서 겉은 하나님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결국 나를 드러내고 내 믿음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런 히스기야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깨닫고 얼른 돌이켜야 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을 높이고 주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정말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하고 계시고, 여러분의 노고와 정성을 알지요. 그러나
우리 그것들로 우리의 자랑삼지 말고, 그것은 주님이 알아주시면 족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는 오직 주님을 자랑합시다. 다윗 왕은 두로 왕 히람이 보낸 사절단을 보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삼하 5:11)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삼하 5: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그런데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을 보고 자신을 높였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는 히스기야가 믿음 없는 자로 들통이 난 것이죠. 성경은 바로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마음을 알고자 시험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하 32:31)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아마도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와서 물을 때에, 이미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주신 예언을 알고 왔던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의 대답을 들은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전합니다. (사 39:5b) 만군의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사 39:6)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너의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오늘까지 너의 조상이 저장하여 놓은 모든 보물이, 남김없이 바빌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 주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사 39:7)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 가운데서 더러는 포로로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다.' 바로 유다를 살피고 돌아간 그 바벨론이 히스기야가 자랑했던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왕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심판의 예언을 주십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를 통해 받은 이 심판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전반부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사 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이 말씀은 2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히스기야가 자신의 삶 동안만 평안한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고 받아들여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해석하기보다 36~39장의 이야기를 통해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겸허히 수긍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분께 의존하여 이 심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해방과 개인의 치유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배운 것입니다. 그분께 의지하면 답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39:8의 말씀은 자신의 생전에는 하나님께 의존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세대도 39장의 히스기야의 잘못된 모습이 아니라, 36~38장에 보인 히스기야의 믿음 있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공동체적인 전쟁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고, 개인적인 질병의 문제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전반부인 1~39장. 앗수르가 다스리던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어 왔습니다. 39장의 끝이 바벨론 앞의 유다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것은 어쩌면 그 이후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합니다. 40장은 약 200년이 지난 이후 바벨론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유다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설교부터 연결된 36~39장의 히스기야 이야기는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에피소드를 재배열하면서까지 우리에게
명확한 한 가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히스기야’는 철저하게 한 신앙인의 모델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좋은 모습을 따라가면 36~37장에 나온 것 같이 위기를 극복하고, 38장처럼 때로는 죽음에 대한 심판 고지를 받았음에도 치유함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어떻게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위기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39장 끝은 이제 다시 다윗 왕조에 바벨론에 의한 심판이 선포되면서
마무리 됩니다. 그러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아니다. 38장을 보라는 것이죠.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0장은 애석하게도 그의 후손들이 히스기야와 같은 길을 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희로애락이 있고, 기쁨의 때와 슬픔의 때, 낮과 밤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방법을 배웠다면 이제는 그것을 치열하게 삶 가운데 붙드시고 행하시면 됩니다. 우리에게 항상 길은 열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늘 우리의 고백처럼... 광야에서도 길을 내시고, 사막에서도 강을 내시며..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 위를 걷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고민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위기입니다. 또 그 안에서 개개인의 삶의 고민과 고통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오늘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주님을 노래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