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gain / 오직 예수 뿐이네 / 부르신 곳에서 / 아버지의 마음 / 주는 완전합니다 / 예수 닮기를 금요일과 주일. 두 번의 시간이 이사야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저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설교>의 형식을 빌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이사야 36-39장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이사야가 시와 같은 ‘운문’ 형태로 대부분 그
예언들이 구성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린 바 있죠. 그 중에 아하스 이야기와 히스기야 이야기는 ‘산문’, 즉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36-39장까지 네 장도 그렇습니다. 36-39장에 대해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이것이 또 시간 순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6-39장을 시간 순으로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약속 (38장) - 질병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 ▷ 므로닥발라단의
사신 파견 (39장) - 므로닥발라단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는 히스기야 - 바벨론에 의한 약탈과 유배의 선고 ▷ 산헤립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공격 (36-37장) - 구원 약속(38:6)의 성취 ▷ 바벨론에 의한 약탈과 유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순서와는 다르죠. 성경의 문맥에 따라 읽게 되면... ▷ 예루살렘의 구원 (36-37장) -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구원 -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37:35) -
38:6의 약속과 상관없는 예루살렘의 구원 ▷ 히스기야의 발병과 치유 (38장) - 기도로 생명을 얻은 신앙인 히스기야 -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미래적 약속 ▷ 므로닥발라단의 사신 파견 (39장) - 히스기야의 정치적 불신앙 - 유다에 선포된 바벨론에 의한 약탈과 유배 문맥에 따라 읽게 되면, 38장에 나타난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이 미래적인 것이 됩니다. 또한 심판(바벨론 약탈)도 미래적입니다. 이것이 동시에 히스기야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죠.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의지했기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이죠. 히스기야를 이스라엘의 상태와 동일선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이지만,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극복하게 된 것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매달리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히스기야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열린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메시지가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죠. 마치 설교를 배치하고
구성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메시지를 부각하여 전달하듯이, 선지서도 역사의 실제적 흐름보다도 그 의미와 연결성을 통해 우리에게 명확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후대에 이 글을 받는 우리에게 더 명확한 신앙적 교훈을 주는 셈이죠. 우리도 주어진 문맥에 따라서 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가 전할 내용은 36-37장에 있는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 말씀을 다루는데, 열왕기하 18장 13절
이하의 내용이 정확하게 이 부분과 동일합니다. (사 36:1)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왕하 18:13)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이 시기는 앗수르의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어 ‘산헤립’이 왕이된 때였습니다. 사실 이 때부터 앗수르와 바벨론이 치고박고 하는 형국입니다. 산헤립은 바벨론의 공격에 잠시 당황하지만, 다시 쫓아내고
동쪽의 산악지대를 평정합니다. 그리고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원정을 떠납니다. 궁극적인 목표인 애굽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유다를 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이 다 점령을 당합니다. 이제 그 상황에서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랍사게’를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랍사게’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헌작 시종대관’을 가리키는 직분의 이름으로 왕의 측근에 속하는 직책입니다. 한마디로 왕의 말을 전하기 위한 특수임무를 받고 파견된 사람입니다. 비슷한
임무를 페르시아에서 수행한 사람이 있었는데, 페르시아 왕궁의 헌작 시종대관으로 왕의 특별 임무를 갖고 예루살렘으로 파견된 인물이 ‘느헤미야’였습니다. 아하스 때와 마찬가지로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이 일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랍사게가 온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의 임무는 히스기야 왕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것이었습니다. 36장 4-10절에서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이 나오죠. 그는 예루살렘 주민을 선동하여 항복을 받아내려는 목적으로 연설을 합니다.
애굽에 의존하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그의 조롱(6절)은 이사야의 고발과 거의 일치합니다. 또 여호와의 뜻에 따라 올라왔다는 주장(10절)도 배역한 예루살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앗수르를 선포하는 이사야의 메시지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게다가 랍사게는 ‘언어 천재’였습니다. 그는 이 연설을 ‘유다 말(히브리어)’로 하는 것입니다. 즉, 그의 이 말을 성벽에 나와 있는 유다 사람들이 듣게 되는 상황인
것이죠. 그래서 유다의 협상단은 랍사게에게 유다 말대신 ‘아람 말’로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랍사게의 목적 자체가 자신의 연설로 백성들을 동요시키는 일이니 거절합니다. 36장 13-20절까지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이 나옵니다. 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군대에 맞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너희를 속이는 것이며 여호와를 들먹이더라도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 36:18)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며 예루살렘의 마지막 소망을 꺾고자 한다. 그는 실제로 앗수르 앞에 무너진 여러 나라를 언급하며, 특별히 북이스라엘(사마리아)조차도 자신들에게 멸망당한 것을 언급합니다. 사마리아를 구할 수 없었던 여호와께서 어떻게
예루살렘을 구할 수 있겠는가? 이는 유다 사람들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어려움을 제공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랍사게의 이러한 연설 앞에 유다측 협상단은 응수하지 않고 돌아옵니다. 그들은 히스기야에게 랍사게가 한 말을 전하게 됩니다. 이 모든 말과 상황을 전해들은 히스기야의 심경이 어땠을까요? 죽을 맛이겠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왕의 자리는 그에게 너무나 무겁고 힘겨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부터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여러분이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의 삶에 새기길 바라거든요. 히스기야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고 베옷을 입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애도를 하는 제의, 즉 자기죽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가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사 37:1)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그가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는 것은, 그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오직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부 수련회
설교를 겸한 <위닝 멘탈리티>라는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혹시 듣지 못하였다면 한번 찾아서 들어보십시오. 제가 거기서 제 삶이 배운 이기는 방식을 설명했는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어요. 히스기야의 모습도 똑같습니다. 내 힘으로 안 될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저는 코로나가 많이 힘듭니다만, 한국교회가 정화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떠나거나, 혹은 하나님을 바르게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그가 하나님의 전으로 기도하기 위해 나아가고, 두 번째 했던 행동은 이사야에게 여호와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기도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리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가 아하스하고 매우 달랐던 부분입니다. 아람-이스라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아하스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 묻기를 거부하고 앗수르를 의존해버리죠. 그것이 그가 실패한 이유였어요. 히스기야는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던 모습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사야를 통해서 듣기를 구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전한 자신의 심정이 성경에 나와 있어요. (사 37:3) 그들은 이사야에게 가서, 히스기야 왕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은 환난과 징계와 굴욕의 날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낳을 힘이 없는 산모와도 같습니다.” 히스기야의 마음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느껴지세요? 이것이 유다를 이끄는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자기 고백입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어쩌면 이 고백은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일하실 공간이 히스기야와 유다 안에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사 37:6)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 37:7)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랍사게의 항복 종용에 응답하지 않은 유다를 향해서 이제 산헤립이 직접 쓴 서신을 히스기야게 보냅니다. 내용은 전과 동일합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업적 뿐 아니라, 선왕들의 업적을 들먹이여,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여호와를 직접 모욕합니다. 결국 히스기야의 저항이 실패할 것이라 말하죠. 히스기야는 항복하라는 글을 들고,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앗수르 산헤립의 최후 통첩을 듣고, 성 밖으로 항복하러 간 것이 아니라, 성전 안으로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분명 히스기야가 변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처럼 산헤립에게 굴욕적인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기도를 올리는 자가 됩니다(37:14-20). (사 37:16) 그룹들 위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주님, 주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사 37:17)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주님, 눈여겨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전한 저 산헤립의 망언을 잊지 마십시오. (사 37:18) 주님, 참으로 앗시리아 왕들이 여러 나라와 그 땅을 마구 짓밟아 버렸습니다. (사 37:19) 여러 민족이 믿는 신들을 모두 불에 던져 태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신들이 아니라, 나무와 돌로 만든 것들이기에, 앗시리아 왕들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사 37:20)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 37장 21~35절이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크게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산헤립의 교만에 대한 고발 2) 앗수르의 군사적 성공과 운명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선언 3) 산헤립의 시도가 아무 성과 없는 실패로 끝날 것을 선포 (왕하 19: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왕하 19:28)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왕하 19: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왕하 19: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하나님은 산헤립의 침공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산헤립도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이유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 37:32)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므로.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으로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유효한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열심. 이것으로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십니다. 또 하나,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이것은 다윗과의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사 37:35)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제가 요즘 이사야를 묵상하면서 ‘큰 길을 만드시는 주’ 찬양이 계속 오버랩 되는데요. 큰 길을 만드시는 주, 큰
능력을 행하시는 주, 그는 나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주, 어둠 속에 빛이 되시는, 그는 나의 하나님. way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my God, that is who You are. 그가 큰 길을 만들고 큰 능력을 행하시는데,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신실하게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예루살렘성 공성전에서 패배합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왕하 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폴 존슨은 ‘헤로도토스 <역사>’ 인용 _ 이 사건은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 때문이다. 요세푸스 _ 하룻밤에 수많은 쥐 떼가 나타나, 앗수르 군의 활과 그밖의 무기를 갈기갈기 쪼아 놓았다.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산헤립은 도망치듯 자신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에 대한 심판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약 20년이 흘러서 그 예언은 성취됩니다. 그가 자기의 신전으로 들어가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례셀이 그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산헤립의 마지막은 성전을 찾아간 히스기야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했던 히스기야는 긍정적인 응답을 받은 반면에, 산헤립은 자신이 섬기는 신 니스록의 전에 가서 경배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앗수르와 산헤립의 교만. 하나님이 없는 듯 대항하던 그들의 최후입니다. 앗수르는 수많은 군사를 잃게 되어 나라는 점점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산헤립은 처참하게 살해당합니다. 모든 역사는 이 일을 우리에게 사실로 보고해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결국 앗수르는 70년만에 완전히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범람하는 물로 수도 니느웨가 멸망당하고, 6m의 토사가 쌓여 1846년 발굴 될 때까지 2450년 이상을 깊은 땅속에 묻히게 됨을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옵니다. 위기를 없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목표가 아니라, 위기 가운데 주님을 붙드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 앞에 답을 구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보호와 동행 가운데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