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이사야 28-36장 /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 강정규 목사

2020-08-23 · 이사야 28-3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 나를 향한 주의 사랑 이사야서의 일곱 번째 강해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섯 번의 설교를 통해서 이사야의 서론 / 이사야의 소명 / 아하스 시대의 이야기 / 이방나라 예언 / 이사야의 소 묵시록 등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이제 다시 남유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28-39장을 다룰 것입니다. 이제 시대는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통치하는 때입니다. 이 시대에도 화두는 ‘앗수르’입니다.

아하스와 히스기야 모두 앗수르의 위협 앞에 서 있었는데, 차이가 있었다면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존하는 길을 선택했고, 히스기야는 앗수르를 대항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25세에 남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추구한 정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반 앗수르, 친 애굽 노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하스 때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었죠. 그럼 히스기야는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니까 괜찮은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앗수르라서 안 되고 애굽이라서 되고 이런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의지하는 남유다의 태도가 궁극적으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쉽고 자주 직면하는 문제로 생각해보면, ‘재정/물질’의 문제가 이와 유사합니다. 돈은 죄가 없습니다. 돈은 가치중립적인 것이죠.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그 마음이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마음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사야

28장은 이렇게 시작을 하죠. 이 부분부터가 이제 본격적인 히스기야 시대를 다룰 것이죠. 그 시작은 북 왕국에 대한 것입니다. (사 28:1) 술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인 너 사마리아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술에 빠진 주정꾼의 도성, 기름진 평야의 높은 언덕에, 화려한 왕관처럼 우뚝 솟은 사마리아야, 시들어 가는 꽃 같은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는 모두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하스 왕 때에 남유다를 침공한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은 아하스가 앗수르의 참전을 요청하면서 앗수르에 의해서 격퇴 당합니다.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사야 28장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또한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동일한 잣대와 관점으로 이사야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위험 신호를 감지합니다. (사 28:7)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독한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포도주 항아리에 빠졌다.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리니, 환상을 제대로 못 보며, 판결을 올바로 하지 못한다. 나라가 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건강하게 세워져야할 것이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의 영역’일 것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바르게 법을 집행할 때 옳은 판결을 해야 하죠. 그래야 깨끗하고 공정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종교의 영역’일

것입니다. 특히 유다와 같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을 추구하는 나라는 예언자들이 올바른 선포를 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종교의 영역 안에 갇혀있는 신이 아닙니다. 종교적 열심히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유다의 법과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묻는 분입니다. 이사야가 보니 제사장과 예언자, 즉 법을 주관하는 자와 말씀을 주관하는 자들이 비틀대고 휘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잘못된 선포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제사장은 잘못된 판결로 무죄한 자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잘못된 모습들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비판을 직면하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끈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단 앞에서의 다윗의 모습이 대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죄악된 모습도 문제지만, 죄악을 주님이 깨닫게 하실 때 그 앞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사야가 남유다의 잘못된 모습을 비판했을 때, 그 대상이 된

이들은 발끈해서 이사야를 공격합니다. (사 28:9)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 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그들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이사야? 가서 젖 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해~” 저도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가끔 만날 때가 있습니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신앙적인 권면을

하면... “그건 다 알죠. 그런데 너무 철없는 소리 아닌가요, 낭만적인 이야기 아닌가요, 어릴 때는 제가 그렇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하는 경우들이 있죠. 이들도 이사야에게 “어이~ 그런 이야기는 저기 가서 그런 말 들어줄만한 어린 애들한테나 가서 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15절을 읽으면 이들의 태도를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한다. “우리는 좋은 생명보험을 들어 두었다.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괜찮다. 다 대비해 두었다. 전문가의 조언대로 다 해두었다. 우리는 안전하다.” 그들은 술판을 벌여놓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 “아휴~ 철없는 소리 하고 있어. 그런 얘기는 저기 가서 당신 얘기에 반응할 애들한테나 하세요.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해.”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삶의 안전을 이미 다 대비해 두었으니 괜찮아. 완벽하게 우리는

준비해놓았어. 우리의 삶은 안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예수를 믿는다면서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이런 순간이 가장 슬픈 때입니다. 설교는 설교로만 듣고, 삶은 각기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경우들을 보게 되면... 참 허무하고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지 성경 18절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애지중지하던 생명보험 증권이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죽음을 막아 보겠다고 세운 그 모든 면밀한 대책들은 그저 착각과 거짓의 꾸러미일 뿐이었다. 재난이 닥쳐오면 너희는 아스러진다. 29장에서도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이어집니다. 13-14절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바른 말을 거창하게 떠벌리지만, 그들의 마음은 딴 데 있다. 겉으로는 나를 경배하는 듯해도 진심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나서서 그들을 놀라게 하겠다. 깜짝 놀라 소스라치게 만들겠다. 만사를 통달했다고 여긴 현자들이

알고 보니 바보였다는 사실이 폭로될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긴 똑똑한 자들이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들의 이중성, 예배의 모습은 있지만 예배자로 살지 않는 모습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아하스 시대의 이사야에서부터 계속 나타난 모습입니다. 히스기야 시대가 되었어도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그대로 오늘 2020년의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거창하게 주님을 말하고 그 주님을 고백하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고, 겉으로는 경배하지만 진심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죠. 교회의 가르침보다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더욱 많은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잡다한 지식과 기술과 경험을 우상으로 삼는 헛똑똑이 바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신앙의 목표가 ‘철 들지 않는 것’입니다. 철 든다는 것이 분명 좋은 것이지만, 자칫 세상 안에서 여러 경험을 하면서 철이 들어버리면 신앙의 순수성이 약화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표현해본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헛된 것을 쫓는 사람들을 반역한 세대,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사 30: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여러분, 하나님의 행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열심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할 때, 그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가득한 것을 바라보시는

것이 주님의 행복이 아닐까요? 우리 중에 부모가 된 자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죠. 부모 노릇 하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러니 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고 해서 자녀 없이 부부만 살아가는 사람들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희생’이 수반되고 이타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없어도 되는 자식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자녀

삼아서 그들을 살리시겠다고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생고생을 하시는 분이시죠. 우리가 부모로서 느끼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을 위해 내가 조금 희생하여 일하고 집에 왔을 때, 자녀들이 나를 반기고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화답하고 그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자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행복도 그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놈의 자식들이 “하나님 아빠 싫어요. 우리는 옆집 애굽 삼촌이 더 좋아요. 이제 애굽을 아빠라고

부를래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향해서 반역한 세대,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할 만하죠. 저였으면 더 심하게 얘기했을 거예요. 히스기야가 왕이 된 지 6년쯤 되었을 때,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이제 앗수르 입장에서 눈에 가시 같은 아람과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죠. 그런데 아하스 때와 달리 남유다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애굽과 편을 먹고 자신들을 대항하는 것이죠. 앗수르가 히스기야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앗수르는 남유다로 내려와 남유다의 성읍을 점령해오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의지해야 한다는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데 없는 사람 취급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와 닿았습니다. 이사야 30장 8절부터입니다. 이제 가서 이 사실을 전부 기록하여라. 책에 적어 두어 그것을 보고, 오는 세대들이 교훈을 얻게 하여라. 지금 이 세대는 반역자 세대, 거짓을 일삼는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한 마디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들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말한다. “제발,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그만하시오.” 그들은 설교자들에게 말한다. “그런 실용성 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세요. 다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나 해주시지요. 구식 종교 이야기는 따분하단 말입니다. 우리에게 전혀 와 닿지 않으니.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야기는 이제 집어치우세요. 듣기 곤혹스럽네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이야기로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삶에 대한 주님의 마음으로. 내 삶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주님의 음성으로. 그런 사람들의 삶이 말씀을 통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사야가 말하는 남은 자들이죠.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남는 자.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삶과 거리를 두고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저건 내 삶과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종교는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겨서 교회를 나온 것일 뿐,

자꾸 나를 바꾸려고도 뭘 요구하지도 마세요. 기분 좋아지는 덕담이나 축복이나 해주세요.” 종교는 갖고 싶습니다. 하나의 보험쯤으로 여기는 것과 같이 나를 위한 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날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해주는 교회와 목회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신 나를 바꾸려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내가 정한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괴롭게 하고 부담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대해주고, 내게 위로와 축복만 있기를

바라는 그런 것이죠. 인스타에 커피 한잔과 묵상하는 모습 정도는 고상하게 올리고, 프로필에 힘이 되는 성경구절이나 좋은 글귀 정도는 올리고 싶으나,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포기도 자기부정도 하고 싶지 않은 신앙인. 오늘 본문이 강력하게 비판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봤을 때, 저희처럼 작은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비교적 적을지도 모릅니다. 편안한 신앙생활을 위해 작은 교회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숨을 수도 없어요.

목사님과의 거리도 너무 가깝고, 내가 교회에 왔는지 안 왔는지도 다 알아요. 그래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장소가 크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갑니다. 거기서도 듣기 싫은 이야기는 패스! 실용성 없는 이야기도 패스! 내가 듣기에 좋은 이야기만 흡수. 저는 압니다. 저처럼 여러분을 매일 괴롭게 하는 설교를 하면 여러분이 싫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설교는 제가 뭘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고, 제가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선지자들의 선포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로 인해, 우리 교회는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사람은 못 오는 교회가 된다면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많은 사람이 모여서 헛된 일을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이단에는 늘 그렇게 사람이 많고, 이상한 목회자 밑에도 참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초점은 크고 작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실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수없이 이 부분에 실패합니다. 오히려 위기가 없을 때는 하나님도 잘 믿는 것 같아요.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늘 위기 앞에서 들통이 나버리죠. 진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할 때는 다른 것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를 반복하려고 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진짜 도움이 돼? 이제 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와 이야기 할 때 답답해하죠. 무슨

이야기를 해도 ‘기도하세요’라는 답밖에 이야기 안 한다고. 물론 저는 “기도하세요”라고만 답하기보다 현실적인 방법들을 고민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한 노력도 할 것입니다. ‘기도하세요’라고만 하지는 않겠지만, ‘기도 없이’ 무언가를 하려고만 하는 것도 완벽한 실패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뜻을 물으며, 그 앞에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항상 가르치죠.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철저하게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분께 듣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 가까이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저 멀리 애굽의 바로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눈앞에 있는 도피처와 피난처와 해결책을 보지 못하고 헛된 것을 쫓는 이들이 바로 영적인 맹인인 것이죠. 여러분, 이 하나님의 답답함에 공감이 되지 않으세요. 내가 전공한 어떤 분야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논문을 쓴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이 있어요. 제 앞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궁금해 하면서 끙끙대고 있어요. 저는 막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외치죠. 그런데 제 얘기는 듣지도 못하고 나는 보지도 못해요. 그래서 저기 신천지에 가서 이 말씀의 해석을 물어보자고 하면 제가 얼마나 미치겠어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시죠.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보지 않습니다. 찾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결국 남유다가 어떤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지 보십시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옵니다.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다 점령당하고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에워싸이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자기가 가진 여러 방법들을 동원해 봤어요. 예루살렘 성 밖에 모든 물의 근원을 막아서 앗수르가 물이 없어 돌아가게 해보려고도 합니다. 또 성벽을 보수하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어 전투력을 키워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는데 진단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잖아요. 성경에서

말하는 원인은 남유다가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돌이키는 계기로 삼으시려고.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고 계속 헛된 처방만 하고 있으니 안 되는 것이지요. 결국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는 또 헛된 일을 합니다. 그가 아버지 아하스에게서 보고 배운 대로 헛된 일을 또 합니다. 첫 번째는 앗수르 왕에게 굴욕적인 편지를 쓰는 것이지요. 아하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두 번째는 앗수르 왕에서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과 금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 14년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는 편지를 써서 그에게 빕니다. 산헤립은 은 300달란트, 금 30달란트를 히스기야에게 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곳간에 그만한 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과 왕궁의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보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죠. 그러니 히스기야가 누구에게 묻습니까? 이사야. 비로소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찾습니다. 이제야.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다 빠지고 다 실패한 후. 참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보면 안 그러면 좋겠는데, 사실 이것이 우리의 삶에도 반복되죠. 내 힘으로 하려고 이것저것 해보고 결국 주님 앞에 와서 무릎 꿇는 것은.. 다 안 될 때, 내가 다 실패했을 때. 그때 주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전부터 내 옆에서 나를 도우려고 우리보다 더 갈급하게 나를 바라보고 계셨는데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핵심은

이것인데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래요.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시간까지는 그렇습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내 삶을 변화할 시간이 남은 것이에요. 히스기야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돌이키고 바꿔야 할 내 삶의 모습이 있다면,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성령이 내 안에서 깨닫게 하는 내 잘못된 모습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회개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 삶에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놓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반응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없는 존재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3가지 포인트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의 삶의 지난 시간들을 사탄은 공격할 것입니다.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대치된 상황에서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랍사게’라는 신하를 보냅니다. 이쪽에서는 랍사게가 나왔고, 유다 쪽에서도 세 사람이 나갑니다. 랍사게가 여기서 히스기야에게

흔히 말하는 팩트폭행을 합니다. 뭘 믿고 우리와 맞서겠다는 것이냐. 이집트 믿고 까부는 것이냐. 이집트는 우리에게 상대도 안 된다. 혹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할 참이라면, 너무 늦지 않았느냐? 히스기야 네가 예배 처소들도 다 축소시키지 않았느냐?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이 보낸 거야. 다름 아닌, 너희 하나님이 너희와 전쟁을 벌이라고 해서 온 것이야. 지금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지금껏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살다가 이제 와서 하나님 찾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지금 네가 고통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틀린 얘기가 아닐지도 몰라요. 사탄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우리를 이렇게 정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비록 죄악 가운데 살았다고 할지라도 돌이켜 나아올 때 정죄하지 않으세요.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떠납니다.

그런 그가 돌이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떠나서 함께 하지 못한 그 시간들이 아쉬울 뿐, 늦게라도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고 돌아온 아들을 정죄하지 않고 위로하고 맞아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언제나 지금이 최선입니다. 돌이키기에 늦은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때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에 걸릴까봐 접촉하지 않고 조심하죠.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는 어땠는지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죄와 접촉하고 죄에 물듭니다. 우리를 그 상황에서 보호하고 지키려는 행동을 잘 못하죠. 손 세정제로 손도 씻고, 환기도 자주 시켜서 깨끗한 공기도 마시고, 마스크로 내 호흡기도 보호 하듯이... 죄로 물든 내 모습도 회개로 씻고, 찬양을 부르고 들으며 내 마음도 깨끗하게 하고, 말씀으로 나를 보호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목사라고 별 수 있습니까? 날마다 내

모습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부족함이 느껴지면 더 주님께 다가가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저는 죄에 노출되고 그 안에서 영향을 받아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일의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이고, 이 돌이킴은 언제나 지금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여러분이 생각하는 종교의 틀 안에 가둬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실 영역은 모든 것입니다. 그분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그분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줄게”하시며 다가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역사를 위해서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분야에 먼저 자리 잡고 있는 나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꽉 붙잡고 있는 그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내 힘을 빼야 합니다. 오늘 히스기야는 정치의 영역에서만큼은 자기가 왕이니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주관대로 해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더 늦어지고

더 망가졌어요. 다 실패한 후에야 그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보다 지혜롭고 그분께 정말 올바른 답이 있음을 믿는다면, 이제 그분이 내 모든 영역에서 결정권자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예배만 앉아서 받는 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하시도록 그분을 초청하고 그분께 그 모든 결정권을 내어 드리십시오. 이사야 35장의 말씀을 읽으며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고 계신다.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시려고.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시려고.

여기로 오고 계신다. 그분께서 오고 계신다! 너희를 구원하시려! 보지 못하는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던 귀가 들을 것이다. 절던 자들이 사슴처럼 뛰고, 목소리 잃었던 자들이 소리 높여 노래할 것이다. 광야에 샘물이 터지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거운 모래밭이 시원한 오아시스로 변하고, 바싹 말랐던 땅에 물이 흘러 넘칠 것이다. 비천한 승냥이도 마음껏 물을 마시고, 불모였던 땅에 초목이 무성해질 것이다. 큰 길이 열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길. 바보라도 길 잃어버릴 염려 없고, 사자나 위험한 들짐승이 없으며, 그 어떤 위험이나 위협도 없는 길. 오직 속량 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몸값을 치러 주신 백성, 그 길을 걸어 돌아올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후광, 그 기쁨을 두르고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올 것이다. 큰 길을 만드시는 주. 큰 능력을 행하시는 주. 그러나 그 크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며,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하십니다. 바보라도

길 잃어버릴 염려 없고,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며 동행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