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이사야 24-25장 / 이사야서에도 하나님 나라가 / 강정규 목사

2020-08-16 · 이사야 24-2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 밝은 빛이 가득해 (지선영, 정진영) - 주 없이 살 수 없네 (김영석, 박현주) - 손잡고 함께 가세 (강정규, 김다은, 전상협, 김태희) -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김민정) - 세상 다 변하고 (천경수, 이비취) - 행복 (길금정, 정은진, 이성희) 1-6장이 서론과 같은 역할을 했고, 7-12장까지는 아하스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13-23장까지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분임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28장 이후에는 히스기야 왕 시대의 이야기로 넘어갈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을 제외한 주일 2편의 설교는 이 시대에 집중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방나라 예언과 히스기야 시대 이야기 사이에 24-27장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금 현존하는 이 땅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세상의 끝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분위기가 요한계시록 같아요. 실제로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요한은 이사야 24-27장에 있는 이미지들을 인용해서 계시록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24-27장을 <이사야의 작은 묵시록>이라고 말합니다. 묵시록. 요즘에는 잘 쓰지 않습니다만, 아마 예전 교회에서는 가끔 사용했던 단어이죠. ‘묵시’는 ‘숨겨진 것을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비슷한 표현이 ‘계시’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나타내신다면, 묵시는 그 안에서 미래에 임할 여호와의 날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금요일에 청년부 수련회를 겸하여 금요기도회

말씀을 전했습니다. 진짜 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가 아닌가는 매우 중요해요. 우리의 믿음은 진짜여야 합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살아가고 그의 뜻에 순종하므로 우리가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본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매우 유명한 믿음장, 히브리서 11장 말씀이었죠.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장이라는 별명답게 이 부분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믿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인데요. 첫째,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상’이라고 하는 단어는

내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인 의미에서 내가 갖는 ‘확신’이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것이고, 객관적 의미에서는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실체’라는 뜻입니다. 바라는 것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주어질 것, 그 사실에 대해서 내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그런 바램이 아니라 성경이 바라고 고대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은 무조건 다 이뤄질거야.” 성공주의 교회들이 신자에게 잘못된 생각을 부추기며 해왔던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사용한 말씀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와 같은 이야기인데,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능력은 비천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풍부함에도 주를 잃지 않으며 항상 자족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주실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꿈꾸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이 땅에 실현될 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인 것이죠.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것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거십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확신하고 그것이 실체로서 나타날 것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확신이에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믿음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체로서 계시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는 것.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이곳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여서, 창조 이후 망가진 모든 질서를 회복하는, 그러한 나라가 완성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을 실제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둘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확증)’입니다. 아직 실체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우리의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죠. 그분의 나라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미래에 나타나고 되어질 일이지만 믿음이 그것의 증거와 확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으로 인해서요. 초월적인 것인데 믿음을 갖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십니다. 바로 믿음장에 나오는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어떠한 것을 행할 때가 있죠. 그러면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모든 것이 진짜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의 증거, 믿음의 확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과 땅은 모두 당시에 보이지 않는 것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구출할 목적으로 방주를 지으라고 했을 때 순종합니다. 근데 성경에 보면 그때까지 비라는 것이 내린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명령, 약속들도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앞에 반응하는 믿음을 보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믿음은 심리적인 확신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있을 거야”,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그에 합당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의 복음은 허황된 꿈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위기가 오면 내가 진짜 믿는가 쉽게 드러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그 믿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지만 흔들어보면 나뉘는 법입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나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가 약속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나중에 대통령이 될 거야.” 이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이것은 자기 확신이고 자기 최면입니다.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니죠.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 이런 것이 믿음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의 말씀에 약속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머리로만 믿고 진짜로는 믿지 않는 사람과는 삶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아하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을 진짜로 믿지 않았어요. 나는 반만 믿어. 믿음에

반을 믿는 것이 어디 있나요. 믿음은 믿거나 안 믿거나입니다. 아하스는 어떤 왕이었나요?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았어요. 그는 믿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믿었다면 그의 실존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당연하죠. 믿음은 행동을 수반하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믿음 없는 자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모두 이 기준으로 평가가 되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 있는 행동을 합니다. 믿음이 없는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믿음은 필수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2.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3.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후렴)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교회를 믿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믿습니까? 목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그를 찾고 그에게 나아가는 자들을 구원하고 지키시고 그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교회에 사람은 많은데 믿음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수 있어요. 오늘 이사야 말씀에

보십시오. (사 24:6)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언어들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남은 자가 적도다.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 사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해석한다면 ‘신실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것이죠. 변함없고 진실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죠.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기에

믿음의 사람들로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가 그 시대의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해요. 왜 그렇죠? 아직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믿음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낙원. 그곳에서 주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죽은 사람은 부활하여 부활의 몸을 입고 변화될 것이고, 죽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를 믿음의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고, 자신들이 이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임을 알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 땅에서 나서 땅에서 죽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계획 안에 이 땅에 왔고 이 땅에서

죽은 이후에는 그가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이 땅에서 믿음 있는 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약속이 없다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만큼 바보가 없는 것이죠. 있지도 않은 허상을 쫓다가 이 땅에서 괜히 누릴 것도 누리지 못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 아닙니까?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봅니다. 허상을 쫓는 바보 같은 사람들. 그럼

있다면요. 아무리 말해줘도 듣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은 그들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 안에서 돌이키지 못하면 다시는 돌이킬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싸움이죠. 말 그대로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믿음을 도우시려고 행하신 일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고전 15: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고전 15:15)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5:1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고전 15:1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고전 15:1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가장 강력한 우리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자(죽은 자)들에게 일어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를 따라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진짜 부활하셨는가? 결국 기독교의 논리는 그렇게 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이 모든 일은 사실인 것이죠.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지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허상에. 저는 부활을 확신합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몇 차례 설교 했어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거짓이라고 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기록들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때 도망쳤던 제자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끝나고, 만약 제자들끼리 모여서 “야, 우리가 예수님이 살아난 것처럼 뻥을 치자”라고 한 것이라면,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말이 되나요? 예수님이 부활 못했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가 다시 돌아와서 성령이 충만해서 순교까지 합니까. 제자들이 대부분 다 순교했는데, 그들에게

그러한 결정적 변화를 만든 것이 뭐였겠어요. 그들이 들어왔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신앙, 죽음 이후를 바라보는 그 신앙의 핵심을 <부활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게 결정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약시대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갖고 계셨던 계획이거든요. 이사야서는 그 장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있어요.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사야 24장의 묵시의 시작을

보십시오. (사 24:1)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사 24:2)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1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에 대하여 많이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파괴되고 흩어지게 될 것을 표현합니다. 2절은

그 대상인데 이 부분이 중요하죠. 백성-제사장, 종-상전, 여종-여주인, 사는자-파는자, 빌려주는 자-빌리는 자, 이자를 받는 자-이자를 내는 자. 뭘 말하고 싶은 것이에요. 이 땅의 삶에는 이런 저런 구분이 있을 수도 있고,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게 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 24:3)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우리의 땅이 공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땅의 공허함. 어디서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제가 2주 전에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함을 질서있게 하신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혼돈하고 공허한 무질서의 세계를 헬라어로 ‘카오스(chaos)’라고 부르고, 여호와께서 그곳에 질서 있게 세우신 세계를 ‘코스모스(cosmos)’라고 부릅니다.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꾼 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반대로 이것이

다시 카오스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은, 땅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땅의 신학에 대해서 제가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공간인 땅이 심판을 받습니다. (사 24:5)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땅이 사람들로 인해서 더럽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예언자는 고백합니다. (사 25: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오늘 이 말씀이 저의 설교의 키 포인트입니다.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갑자기 하나님이 화가 나시고 열 받으셔서 하시는

그러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동일하시죠. 성경에는 일관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이사야를 보면서 히브리서의 고백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뜻을 정해놓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자주 나와요. (사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사 37:26) 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하나님이 막 기분대로 하시고 감정대로 하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은 뜻을 정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이 얘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협박하거나, 없는 것 가지고 공갈치는 분 아니야.” 하나님은 성실하게 자기의 일을 해나가시는 분이고, 진실하게

약속한 것을 이루실 분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은 심판의 시계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가? 여러분이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이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이 심판 이후 어떤 길로 가게 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서 이 질서를 깹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생하게 하셨는데, 죄가 들어와 사망을 가져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죽게 된 것이죠. 주님이 이것을 회복하는 방법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망은 원래 우리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사망을 가져왔어요. 이것이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주님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주님이 사망을 멸하신다는 이 히브리어 표현 ‘발라’는 맹수가 한 순간에 먹잇감을 덮쳐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것처럼 사망을 주님이 집어 삼켜서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그 얼굴에서 씻어주신다는 것은,

죄로 인해서 우리를 힘겹게 하는 모든 세상의 것들, 질병, 수치 등 정신적이고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씻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사 25: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마지막 심판은 정확하게 둘로 사람을 나누게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기다렸던 자, 없다고 여겼던

자.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진실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는 자의 삶을 선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미래의 일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과거의 예언들이 수없이 이뤄진 역사를 우리는 보잖아요. 그럼 그 안에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 전체가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고, 주님이 그것을

약속하시며.. 성경의 믿음 있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서 그 나라를 전하고 갈망하였음을 보면서 우리도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 때까지의 기다림인데,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올 것이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도우실 것입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항상 함께 하시지 못하셨지만, 성령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날마다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을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의 영을 따르고 믿고 소망할 때, 우리도 마침내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의 성경책을 덮어놓고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_ 토비맥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일들은 모든 것이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약속대로 모든 일이 일어났으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일한 소망, 부활하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고백하듯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저는 이 약속도 이룰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 이사야서에서부터 그 나라는 약속되고 있으며, 이 나라는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벧전 1:5)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 하나님의 시계는 가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흐트러짐 없는 주님의 약속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고, 우리를 지키시는 성령의 보호 아래서, 성경이 약속하는 모든 것을 소망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