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의기도>라는 책은 사귐의교회 가족들이라면 비교적 익숙할 것입니다. 그 책은 예수님 시대에 살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상당히 진지하고 열심 있는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보며 칭찬하고 존경했습니다. 그의 사회적 지위 또한 높았기에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명예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그를 알던 사람들은 ‘저런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생활, 그 경건한 행위들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수없이 예배를 드리고, 정해진 날마다 금식하고, 부지런히 기도하며 구제하는 삶을 살면서도 영적인 공허함이 그에게 가득했습니다. “뭐 다 이런 거지. 신앙이 원래 이런 거지!”라고 스스로를 속여 넘겼다면, 괜찮은 신앙인으로 구원받았다는 자만 속에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유명한 서기관들을 찾아가 상담해 보아도 “당신 같은 사람이 무슨 걱정인가?”,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가?”, “너무 깊이 따지지 말고 우직하게 믿어라!” 이런 대답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 그분에게 가면 이 공허함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당장 찾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서 갈릴리의 무명의 전도자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은 밤, 남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딱딱한 전통과 형식을 추종하는 삶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에게 사로잡힌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에 들어가고, 살아있는 진짜 사귐을 통해 새사람으로 지어지고, 새로운 존재로서 매일을 살아가는 그런 변화가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 영성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 이미 ‘종교’는 있었지만 ‘영성’이 없었던 것이죠. 영성이란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누는 실제적인 교제, 관계입니다. ‘종교’는 그 관계를 더 깊이 만들어 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종교 자체에 붙들려서 영성을 놓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신지 짐작이 가시죠? 예수님을 통해 종교인에서 주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신앙인으로 나아갔던 ‘니고데모’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갈등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없다면 저는 갈등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진심입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신앙생활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파하지 않는 신앙생활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곪아버리면 때를 놓치면 더 많은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어릴 적부터 교회에 빠져본 기억이 없습니다. 주일에 아무리 아파도 예배드리며 쓰러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예배에 들어갔습니다. 반항심도 딱히 없어서 교회의 요청에 순종하며 섬겼습니다. 중1 때부터 교사, 성가대, 찬양팀 등을 특별한 이유 없으면 계속해서 섬겼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하며 사역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름 칭찬받으며 그렇게 좋은 신앙인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삶에는 공허함이 가득했습니다. 교회에는 있으나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내 마음과 내 삶에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 제가 무엇을 이루었기에 이제 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저는 멀었고 여전히 넘어지며, 삶에 대한 후회와 책망도 합니다. 그러나 제 삶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을 깨달은 후에
분명 달라졌습니다. 바로 그 차이가 ‘사귐’, 즉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붙들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교회에 나오고 예배하며 헌신하고 계십니까? 교회에 오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니까, 정작 예수님하고는 아무런 교제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에만 집중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혹시 그것이 여러분의 모습이라면 저는 그런 여러분에게 신앙은 그러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인식시켜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또한 열정이 있는 나라입니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고, 신앙적 열심을 갖고 순위를 매긴다면 세계에서 가장 열성적인 나라 가운데 분명히 꼽힐 것입니다. 열정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열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자산입니다. 바울은 항상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향해 열정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던 것이죠. 그 열정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열심, 예배의 열심, 기도의 열심은 항상 옳습니다. 다만 바울의 그것과 같이 방향의 문제에 대해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다시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기도’를 사랑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사모합니다. 그런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뜨겁게 기도하여 내 삶의 여러 문제들과 함께 기도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치 야곱의 기도와 같이 환도 뼈가 위골되고 평생 불구가 될지언정,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을
받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러나 자칫 우리는 그 과정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기도를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현상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나의 요구’를 말씀드리는 것이고,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얻는 것’이고, 그 응답을 경험해야 능력 있는 기도이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얻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해도 얻지 못했다면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목표를 이룰 때까지 불굴의 의지를 불태워, 금식이라도 하며 응답을 봐야 하는 것, 그것이 적어도 제가 자라며 수없이 들었던 ‘기도’였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이 “왜” 문제인가,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2-3) 이
말씀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 기도가 응답된다고 해도 그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사귐의 기도에 이런 예화가 소개됩니다. “몇 년 전 외국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귀국 준비를 하면서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아이들 선물을 쉽게 고를 수 있었는데, 아내에게 줄 선물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사 가야 좋아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선물을 찾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하게 돌아온 당신이 선물이지, 다른 선물이 뭐 필요해요.” 나는 이 말에 감동했다. 아직 철이 없는 아이들은 아빠보다 선물을 더 좋아했지만, 성숙한 아내는 남편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기도에 대해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줍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선물 꾸러미에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에게 관심이
있는가? 헨리 나우엔이라는 영성가는 우리의 신앙을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태도를 통해 지적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성탄절에 산타클로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그가 주는 선물이다. 선물만 받으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이내 잊어버린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구원 획득’에 있거나, ‘내 삶을 조금 더 좋게 만드는 것’에 있다면... 그것에 머물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분들은 이제는 그런 잘못된 모습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서 나는 벗어나 있고 안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이것에 대한 경계를 풀면 늘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잘 빠져듭니다. 왜냐면 내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전개될 때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정말로 수많은 경우에 그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반면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낙담합니다. 힘들어 합니다.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기도의 예시를 하나 가져와 봤습니다. “하나님, 제 아이가 지금 대학 진학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원하는 대학은 A대학인데, 아버지의 생각은 어떠세요? 아이에게 과연 그 학교가 도움이 될까요? 저는 B대학을 원하는데, 그건 어떨까요? 어느 대학이 이 아이의 앞길에 가장 도움이 될지, 저도 제 아이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이 기간에 저희가 하는 모든 결정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게 해주시고 그곳에서 또 다른 꿈을 위해 노력하게 해주십시오. 제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제 아이의 마음을 다스려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구체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간청하고 떼쓰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며 상담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구체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의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다 맞추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문서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채워 넣는 것은 ‘기도’가 아니며, 그것이 설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 유행했던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와 같은 문장들은 실상 기도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거짓됨을 발견하고, ‘참된 나’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 안에서 ‘나’를 찾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변화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이죠. 만사가 변화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실 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만약 ‘나’는 그대로 있으면서 ‘만사’가 변화되기만을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의 요구에 맞추기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네. 듣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자꾸 내가 말하는 것만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감자마자 말을 시작하고 말이 끝나는 즉시 눈을 뜨는 것은 잘못된 기도 습관이다. 우리가 목이 쉬도록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별로 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거장을
만난다면 그분께 내 말하기 바쁘겠나요? 아닙니다. 아마도 그 거장으로부터 듣고 싶을 것입니다. 배움을 얻고 싶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귀를 기울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다는 것. 이것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시고 그분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육성이 아니기에 영으로 듣기 위해 집중하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깨달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력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묵묵히 앉아 우리의 영을 집중시키고, 영적인 눈이 열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이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서 기도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기도가 주문서처럼 주문한대로 이뤄진다는 잘못된 기대가 바로 이러한 절망감을 가져다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응답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기적 욕심도 모두 구하는 대로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욕심대로 기도해 놓고 응답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자기 편의대로 잘라 읽습니다. 앞부분은
잘라내고 뒷부분만 인용하죠. 그러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라고 외치죠. 그러나 그 말을 따랐다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조건문입니다. 이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 결과도 보장됩니다. 그러므로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 즉 사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와 관계하고 동행하고 함께 살아가는 친밀한 분으로 먼저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기도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기 위한 교제의 시간입니다.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기도의 실패가 있는가? 기도의 유일한 실패는 기도하지 않는 것 뿐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내가 원했던 것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실패인가? 아뇨. 어쩌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없는 것이 더 좋기에 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모든 기도는 응답 됩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하나하나에 대해 그에 맞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기도 응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1) 요청이 잘못된 것이라면, 하나님은 “안 돼”라고 말씀하신다. 2) 아직 적기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천천히”라고 말씀하신다. 3) 당신이 틀렸다면, 하나님은 “성장하라”고 말씀하신다. 4) 하지만 요청도 올바르고 시기도 적절하며 당신도 올바르다면, 하나님은 “좋아”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판단하세요. 아무거나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 맞도록 하나하나 응답하십니다. 내 생각대로 ‘YES’가 아니라고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 잘못된 것까지도 응답하신다면 우리는 기도를 매우 매우 조심스럽게 마치 중대한 발표나 보고를 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세요. 우리가 해로운 것을 구할 때는 절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마음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른 말만, 올바른 것만 구하려고 노심초사 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기도를 드리든 하나님은 그에 맞게 응답하세요. 특별히 기도의 초보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반응하실 거예요. 오늘 이 시간 기도를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분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과의 사귐을 경험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 상태에 있는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그분과의 깊은 교제 속에 거하고 있으면 그동안 욕심으로 구하던 모든 요구가 하찮게 느껴집니다. 그 안에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내가 하나님을 얻고 그 분과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그 상태 자체입니다. 그 사귐의 기쁨과 평안을 오늘도 여러분 안에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