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24일에 시편 23편을 다룬 것이 시편의 4번째 강해설교였고, 오랜만에 묵상의 순서에 따라 다시 시편 다섯번째 설교를 다루게 됩니다. 성서신학은 대체로 ‘연구’라는 과정을 거치죠. 말씀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 가장 올바른 해석을 찾는 과정을 거칩니다. 저도 이제 제법 그런 과정이 익숙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진리를 캐내는 보람과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어렵다고 느꼈던 선지서들이나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도, 여러분들에게 그 속에
담긴 진리를 전하기 위해 먼저 배우고 알아가면서 나름의 신학적 정리가 되어가는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여타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시편도 연구하고 배워야 하죠. 저도 시편을 가르칠 때마다 책도 보고 강의도 다시 찾아서 듣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시는 면밀히 분석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죠. 때로는 그냥 그 자체를 느끼고 감상하며 깨닫는 부분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분석에 익숙한 저에게 시편 설교는 다른 접근을 요구하기에 한편으로
어려운 설교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고 전해야 하는 저에게 어려운 것이지 오히려 여러분에게는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희소식은 보통의 때보다 설교를 짧게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너무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될지도 몰라요. 저는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시기에 오늘도 이 설교의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귀한 말씀을 깨닫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시편
27편은 시의 표제에도 드러나듯이 ‘다윗의 시’입니다. 표제가 다윗의 시라는 것은 다윗이 쓴 것이거나, 다윗에게 바쳐진 시이거나, 다윗의 상황을 염두하며 읽도록 쓴 시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윗과 관련하여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150편의 시 중에 73편이 이러한 다윗의 시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의 저작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합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다윗의 저작으로 보는 편이고, 다윗의 상황을 떠올리며 시를 읽는 것이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다윗의 시를 다윗의 생애 가운데 특정한 사건과 연관시켜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는 너무 해석을 제한하게 됩니다. 이 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상황에 배경을 맞추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만 시 자체에 드러나는 표현들과 고백들 안에서 우리는 시인이 어떠한 심경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상황에 서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적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시편은 그런 부분에서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시편 27편에서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위협’ 가운데 있음을 말합니다. 마주하는 상황은 위협 가운데 있지만, 그 안에서 이 시를 노래하며 그는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오늘 내 삶에 버거운 문제와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를 한번 찬찬히 살펴봅시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눠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 앞 부분에 해당하는 1-6절이 우리가 오늘 살펴볼 본문입니다. (시 27: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뭐라고 부릅니까? ‘빛’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상황이 무엇이기 때문이죠? ‘어두움’입니다.
어두운 현실 가운데서 있지만 주님은 그 어두움 가운데 나의 ‘빛’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춰지는 것은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 되시는 주님이 어두운 현실 안에 있는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실은 지금이 두렵고 무서운 상황이라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2절에 보면 대적자들이 위협하고 있거든요. (시 27: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시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다윗은 나라를 이끄는 왕입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때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전쟁에 직접 나가서 싸웠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군대가 진을 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2절처럼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고, 더 나아가 3절처럼
적군이 몰려와서 진 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대적의 위협, 전쟁의 위협 앞에 살아가는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전쟁의 위협을 우리 세대는 잘 못 느끼죠.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새벽에 근무를 서는데 어디서 대포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탱크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요. 머리로는 만약 북한이 쳐들어왔다면 벌써 싸이렌이 울리고 난리가 났을테니, 저것은 전쟁 상황이 아님을 압니다. 그런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지금 적군이
쳐들어와서 내 근처에 왔으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3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도 나 아기처럼 고요하며... 여러분. 아기는 딱 한 순간에 고요합니다. 부모의 곁에 있을 때, 부모의 품에 있을 때... 그때 고요합니다. 보통은 안 고요해요. 아기의 시점은 지금 내가 마주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옆에 누가 있는지에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죠. 다윗의 믿음은 바로 그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은 위협이고 두려움이고 전쟁 같아요. 그러나 그 안에서 나는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나의 구원이고 빛이고 생명이고 피난처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시인은 삶 가운데 경험하며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죠.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데, 세상은 이러한 우리를 ‘정신 승리’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정신 승리’라는
표현은, 상황은 안 그런데 그 안에서 정신으로 승리하며 애써 외면하고 좋게 해석하는 억지적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쩌면 기독교인들을 단체로 정신 승리를 하고 있는 무리들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말해보자면 우리는 영의 승리, 영원한 승리를 바라보는 것이죠. 정신 승리는 허구적인 승리라면, 영의 승리는 육의 세계보다 더욱 영원하며 포괄적이며 초월적인 영원한 승리입니다. 우리가 평안한 이유는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진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인이 평안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육신의 위협을 뛰어넘는 평안함의 실제를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믿으면 정말 좋습니까? 여러분 주변의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묻는다고 생각해봅시다. 무엇이 좋은가요? 예수님 믿으면 시간은 더 뺏깁니다. 헌금 안하고 나 위해 쓰면 더 윤택할텐데 그러지도 못합니다. 그럼 환란과 위기를 피해가나요?
어쩌면 예수님을 믿기에 환란이 추가됩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해서 환란을 덜 당합니까? 어려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믿어서 더 좋은 것보다 덜 좋은 것이 많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분명히 더 좋습니다. 예수님을 믿다보면 그것을 느끼죠. 이것을 때로는 설명할 수 없기에 세상이 줄 수도,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제 신앙 안에 오래 머물다보니,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정말 소중한 것을
모른 채 살았겠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의 모든 상황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낍니다.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얻은 것 말고는 사실 다른 것으로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을 얻음으로 우리는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표현을 쓰더라고요. 복이 무엇인가? 복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복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복된 삶을 살게 된 것이 복이죠.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는 얻는 것 없이 포기만 한 것 같은 억울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관점도 철저하게 시인과 같아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가장 큰 행복을 기뻐하며 이처럼 노래합니다. 4절입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사는 것. 그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그분을 예배하고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무엇을 위해 예배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계십니까? 시인은 오직 하나님. 그 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평생토록 그분과 마주하는 삶. 그것이 소원이라고
그것이 내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예배의 마음을 점검해보십시오. 우리는 때론 예배에 나와서도, 하나님께 잠깐 인사하고, 그 외의 다른 것들로 너무 분주하지 않습니까? 혹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기쁘고, 내 삶이 좀 개운해지고, 내 삶의 어떤 것들이 나아지는 것에 더욱 초점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제가 금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하나님을 산타클로스 만들지 맙시다. 아이들은 사실 산타클로스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선물을 들고 오니까 좋아하는 것이죠. 그가 선물 없이 우리 집 굴뚝으로 들어오면 무단침입으로 신고할걸요. 문도 안 열어줄거예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내가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해주시겠지” 이런 마음이라면 우리는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한 대가를 바라고 앉아 있었던 것이죠. 쉽게 말해서 그것은 노동을 한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이 목회를 하셨기 때문에 동네에 구걸하시는 분들이 정말 저희 집을 많이 찾아 왔어요. 이
분들도 알아요. 어느 교회를 가야하는지, 거기서 어디에 사택이 있는지... 워낙 방문자가 많았기에 신발장에 천 원짜리를 항상 준비해놓고 오시면 1000원씩 드렸어요. 그런데 가끔은 새벽예배나 예배 시간쯤에 교회에 구걸하러 오시는 분이 있죠. 그런 분들에게는 예배를 드리고 가시면 5000원이나 10000원을 드리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럼 그 분들은 1만원을 벌기 위해서 예배의 시간을 견디고 인내하며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 예배를 끝까지 참여하므로 얻어질 대가를
바라며... 그런데 우리가 구걸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배하러 나온 예배자인데...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고 나의 마음의 평안, 내 삶의 변화, 문제의 해결, 이러한 하나님 외의 다른 무엇을 위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분명히 바뀌어야 할 모습들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는 항상 주님을 위한 예배,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함이 가장
큰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앉았다가 출석하고 가버리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 사람 만나러 오늘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주님과의 사귐의 풍성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사교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우리에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셨어요. 단계를 겪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처음부터 주님이 우선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어요. 처음에는 사람 만나러 온 자들도 예배
안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주님 만나러 오는 자가 되기도 하죠. 주님이 하시는 일은 놀라우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과정에서 깨닫는 더 나은 모습을 추구하고, 옛 모습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첫 모습이 우리의 결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는 친동생과 같은 형제들이 있는데, 그 중에 CCM 사역을 병행하는 ‘문종혁’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있습니다. 이 형제가 저랑 8사단 오뚜기 부대에서 만났습니다. 부대에 배치를 받고 주일에 교회에 갔는데 제가
피아노를 칠 수 있으니 예배팀에서 반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누가 기타를 치고 싶다고 교회를 온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냐고 하니까 교회는 안 다닌데요. 그런데 군대에서 기타를 너무 치고 싶은데, 교회에는 악기팀들이 있으니 기타 치러 교회를 온 것입니다. 마침 기타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렇게 예배팀이 결성됐습니다. 얼마 후에 지선영 집사님이 그 팀의 베이스 주자로 합류하게 되었죠. 제가 그 중에 제일 나이도 많고, 신학생이고 하다 보니...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매주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리스도의 교제를 나누었죠. 그 안에서 ‘문종혁’이라는 기타 치러 교회 온 형제가 서서히 하나님을 배워가고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휴가 가서 술을 진탕 마시고 온 무용담을 늘어놓았던 친구였는데... 서서히 함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를 요청하고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을 함께 신앙생활을 했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군대
이후에 혼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지는 못할 것 같아서, 저보다 3개월 먼저 전역을 하니... 제가 전역을 하면 함께 교회를 다니기로 약속을 했고, 그 형제가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도 그 교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사역을 하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찬양 앨범도 내고, CCM 쪽에서도 여러 사역을 하는 그런 예배자로 살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신앙이 어떻게 한 번에 나오겠습니까? 사실 이 다윗의 시는 굉장한 신앙적
내공을 보여주고 있죠. 다윗이 처음부터 이런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삶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깨닫고 때로는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며 이런 고백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우리의 신앙적 모델이고 우리의 목표가 되는 시입니다. 나는 아직 이런 신앙이 아니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이 바라는 것은 푯대 없이 걷는 신앙은 헤맬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우리가 닮아야 할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신앙은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기준이었습니다. (왕하 16:2)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찾고 계신 것이죠. 그러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왕하 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만약 누군가가 목사님의 신앙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최종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는 ‘바울’이요,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는 ‘바나바’요, 순수한 열정에서는 ‘베드로’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서는 ‘다윗’을 닮는 것이 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윗. 그는 왕이기 이전에 예배자였고, 예배를 일과
사명으로 여기는 자이기 이전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이어지는 고백을 살펴봅시다. (시 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시 27: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여전히 자신의 삶에 환란이 없을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현실을 도피하지도 회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 가운데 주님의 보호가 나타날 것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이 현실과 동떨어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따로 신앙 따로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이란 현실에 뿌리박힌 신앙입니다. 영성은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 가운데서만 아니라, 일상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유행했던 교회의 표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굉장히 멋있는 표현이고 확 끌리게 만든 표어입니다만,
사실 기적이 상식이 되길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적은 기적이어야 합니다. 기적이 상식과 같이 나타나는 삶은 현실을 현실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현실을 현실답게 마주하되, 그 안에서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힘이 영성입니다. 이것은 기적이 상식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기적만을 바라는 삶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현실 안에서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환난 날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주신다고 말합니다. 안전하다는 것이죠. 높은 바위 위에 두신다는 표현 또한 그렇습니다. 6절은 그런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확신하는 표현입니다. 대적들이 둘러싸고 위협할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는 승리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승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이 자신의 싸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인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입니다. “주를
찬양, 손을 들고 찬양.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 아니니.” 우리의 싸움은 내게 있는 환란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서 맡기고, 그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높이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다윗이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었고, 다윗은 그렇게 살아갈 때 자신이 여호와의 보호를 받으며 결국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울의 길이 있었습니다. 인정받으며 시작한 길이었습니다.
먼저 선택받는 은혜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을 마음에서 잃었습니다. 결국 다 잃었습니다. 다윗의 길이 있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항상 선택받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왕이 됩니다. 그러나 왕의 자리에서도 하나님 밖에 모르는 바보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실패해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힘이었고, 끝내 하나님 마음에 가장 흡족한 한 사람이
된 이유였습니다. 오늘 다윗의 시를 기억하시면서... 다윗이 가장 원했던 그것을 나의 원함으로 가져와... 진정한 마음의 고백을 주님께 드리며... 현실의 삶 가운데 살아계시는 주님의 보호와 승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