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누가복음은 어떤 책인가? / 강정규 목사

2021-01-03 · 누가복음 1:1-4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다음세대 영상 누가복음을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을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하려면 뭘 알아야 해요? 간단합니다. ‘누가’와 ‘복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저자 : 누가 ‘누가’를 먼저 이야기 해봅시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사도행전을 ‘바울’이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바울에 대한 이야기가 많죠. 누가가 바울의 동역자였거든요. 그는 직업이 의사였고, 사도들의 제자였고, 나중에는 바울과 동역했던 그런

인물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이 복음서는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졌어요. 그만큼 누가는 초대교회 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누가가 신약성경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는데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치면 2157절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 13권을 다 합치면 2032절. 사도요한이 쓴 요한복음, 요한1-3서, 요한계시록 다 합쳐도 1407절입니다. 즉, 누가는 혼자서 신약성경 1/4에 해당하는 기록을

남긴 사람입니다. 복음 누가복음은 ‘누가’라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을 말해봅시다. 복음은 ‘유앙겔리온’이라고 해서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Evangel’ 혹은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Gospel’이 복음이죠. 신약성경은 네 편의 ‘복음서’로 시작을 합니다. 이것을 사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원래 ‘복음’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안에서 사용되는 고유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유앙겔리온’은 로마 사회에서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황제의 탄생, 황제의 즉위, 전쟁의 승리 소식을 전할 때 ‘유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보통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휘를 빌려 쓰되, 그 안에 새로운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집어넣고 ‘단수’로 사용했죠.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단 한가지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가 전하고 외칠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이죠. 정리하면, 4편의 복음서는 4명의

각기 다른 저자가 복음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복음이 무엇인지는 이해가 되셨죠? 네 편의 복음서 그러면 복음은 1개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우리에게 증거하는 성경은 4개입니다. 복음서가 4편이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축복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가 됩니다. 왜 그런지 알려드릴게요. 4편의 복음서를 서로 면밀하게 비교하여 읽다 보면, 우리는 시험에 빠집니다. 어떤 시험이냐면, 서로 얘기가 맞지를 않는 것이죠.

이것은 성경을 깊이 읽다보면 가끔씩 마주하는 문제입니다. 분명 성경은 오류가 없고, 완전한 진리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는 결코 틀려서는 안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4권의 책을 펼쳐놓고 비교하면서 읽다보면 반드시 여러분은 낙담하게 됩니다. 상충되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그럼 우리는 당연히 어떻게 반응을 하냐면 둘 중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게 되는 것이죠. 이러다가 성경 자체를 믿지 않고 신앙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해요.

그런 분들에게는 복음서가 4권인 것은 저주겠죠. 제가 어릴 적 꿈이 기자여서 저도 팩트체크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저도 성경을 배워가고 신학을 하면서 이러한 부분을 굉장히 고민했던 시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4권의 책이 서로 상충되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의 어려움을 갖는 분들을 심각하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지 마시고 조금 더 인내하면 들어봐 주십시오. 우리는 2021년을 살고 있고, 지금

우리의 시대가 갖는 기준과 2000년 전의 기준은 관점 자체가 다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언어에서도 부정확성은 많다는 것이죠. Gold 이야기를 해봅시다. ‘순금’이 무슨 뜻입니까? 초록창에 검색해보시면 ‘다른 금속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금’이라고 나옵니다. 그럼 이것에 정확히 일치해야 순금이라는 단어가 맞는 것이죠. 그런데 그 기준이 변경됩니다.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는 순도 99%를 넘으면 순금으로 분류합니다. 1990년대부터는 99.9%를

넘어야 순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1980년대까지는 순도 99.5%의 금을 순금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기준에서는 순금이 아닌 것이죠.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펴 보시면 누가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정확하게)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질서정연하게)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눅 1: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2000년 전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이 전하여 준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쓴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죠. 저자도 그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자는 자신이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정확하게 미루어 살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데오빌로 각하라는 사람에게

그 일을 전하기 위해서 차례대로, 질서정연하게 기록하여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저자가 ‘정확하게’, ‘질서정연하게’ 예수님의 일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만 그럴까요? 마가복음에 대해서 A.D 130년 경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는... 주님에 의해 말하여지고 행하여졌던 것들을.. 정확하게 하지만 순서대로는 아니게 기록하였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떻게

정확한 글인데 순서는 맞지 않는 정확함이 있을까?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수사학적 정확성’입니다. 수사학이라는 것은 전달을 위한 기법이죠.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을 가장 우선에 두고 기록했다는 것이죠. 그 방법이 시간의 순서보다 설득하기 위해 구성된 구성의 순서대로 기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4편에서 각각 구성을 달리하다보니,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배열순서가 우리의 눈으로는 뒤죽박죽입니다. 자, 질문해봅시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뒤집어엎으신 일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언제쯤 하셨던 일입니까?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후라고 생각하시나요? 요한복음을 펴서 읽어보시면,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 첫 사역인데, 그 직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십니다.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다른 곳에서는 가장 마지막 사역이거든요. 이런 기록을 보면 우리는

“그럼 둘 중에 하나는 거짓이 아니야?”라고 반응을 합니다.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성경을 쓴 저자들은 우리의 관심에 그들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들은 순서의 정확성 보다는 예수님께서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수사학적 정확성을 갖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의도였어요. 이것을 여러분에게 가장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림 세대’와 ‘사진 세대’의 차이점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 사진들은 누가 찍었든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관점으로 팩트를 체크합니다. 아쉽게도 이순신 장군은 사진이 없습니다. 다만 그에 대해서 그린 수많은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많은 초상화가 있지만 각각이 모두 다릅니다. 그러면 뭐가 진짜 이순신 입니까? 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그린 것입니다. 다 이순신 장군을 잘 보고 느끼는 대로 그린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지금 우리가 보면서 비교해서 누가 그린 눈이 맞느냐, 누가 그린 입술이 맞느냐

하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죠. 여러분. 이순신이 몇 년 전 인물입니까? 16세기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1세기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런 시대에 대한 이해함이 없이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성경을 비평하는 것은 스스로 오류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진리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죠. 그러나 성경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을 저자로 사용하셨고, 독자 또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독자였습니다. 그 시대의 저자가 그 시대의 독자를 향해 기록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하고, 우리가 그 시대를 이해해서 그 시대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지 성경의 언어와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깊은 의미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글은 저자를 이해하며 읽어야 정확하죠. 제가 여러분에게 좋은 마음으로 쓴 글의 일부를 후대에 누군가 부분적으로만 떼어내서 나쁜 의도로 읽는다면, 그것이 바로

왜곡인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잘 이해하려면 성경의 저자의 시대와 상황과 그 배경 안에서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의 은사이신 <양용의 교수>께서 이렇게 수업시간에 가르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적 기원이 있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 균형이 무너지면 이단이 된다. 복음서에는 신적 기원이 있는 동시에 인간적 기원도 함께 가지고 있다.” 끝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서가 4편인 이유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귐의교회의 2020년에 대해서 어떠했는가? 제가 여기 있는 여러분들에게 모두 종이를 나눠드리고 자세히 적어달라고 했다고 합시다. 아마도 다 기록한 후 거둬서 보면 여러분은 분명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표현이나 기록하는 순서들이 다양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2020년 중에 각자가 더욱 인상 깊게 느낀 사건이나, 예배나 그런 것들을 더욱 비중 있게

기록하겠죠. 잔잔한 착각들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절 데코 때 몇 명이 모였더라? 여기서는 10명, 저기서는 12명. 또 누군가는 ‘여러 명’ 이럴 수 있는 것이죠. 사무연회 때 누가 발언을 했는데, 그 재청을 누구는 ‘지선영 집사님이 했다. 누구는 박재용 집사님이 했다.’ 이렇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안건이 중요한 것이죠. 그러면 100년 후에 누군가가 2020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싶으면 한 명의 기록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러 명의 기록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 사건과 사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명의 기록입니다. 당연히 검증 된 여러 명이죠. 진짜 2020년을 보내고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 바로 그것이 네 편의 복음서입니다. 복음서가 한 권이면 여러분이 크고 작은 차이들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겠지만, 그만큼 복음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다양하게 느낄 수 없는 것이죠. ‘맹인과 코끼리’의 이야기와 같이 한명의 맹인은 사실이지만 실체를 알기에 부족한 정보를 전달하겠지만,

여러 명의 이야기가 모여서 그 실체를 우리에게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합창을 좋아합니다. 소프라노의 소리만이 아니라 4부로 부를 때 그 풍성함이 더욱 아름답죠. 그것을 들으면서 왜 4가지로 찬양을 해서 혼란스럽게 하냐고 하는 사람은 바보에요. 저는 4편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각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목적을 가장 우선시에 두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사역 안에서 눈 여겨 보고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특징들이 드러나는 것이죠. 또한 이 책을 누구를 위해 썼는지에 따라서 그 내용이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를 하는 것과,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설교를 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눅 6: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마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누가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이 대상이니 율법에 나온 재판의 상황을 특정해서 겉옷을 담보로 잡으면 가치가 없으니, 속옷을 달라고 말하는 그런 자 앞에서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는 그만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 누가복음은 대상이 이방인입니다. 내게서 뭔가를 얻어가고자 하는 사람인 것은 동일해요. 다만 유대인의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겉옷을 빼앗지 속옷을 빼앗지는 않죠. 그러나 이 상황을 활용해서 누군가 너에게 겉옷을 얻고자 할 때, 속옷 까지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메시지는 동일하죠. 이런 디테일은 각 저자와 독자의 상황까지 함께 보면 유익합니다. 깊이가 생기죠. 그런 것 없이, 마태복음이랑 누가복음이랑 왜 틀려요. 뭐가 맞아요? 마태가 맞으면 난 거짓말 하는 누가 이야기는 듣지 않겠어요. 이것이 내가 정확히 성경을 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듣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듣고자 하면 들려요.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뜻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기 때문인 것이잖아요. 수신자 끝으로 듣는 대상인 수신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은 1차적인 수신자를 ‘데오빌로 각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데오빌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각하라는 칭호를 볼 때, 로마제국 내의 고급관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에 책을 제작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출판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준 후견인들에게 책을 헌정하는 것이 그리스-로마 사회의 문화적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데오빌로에게 헌정됩니다.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행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러나 결코 한 사람을 위해 누가가 이렇게

방대한 책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대표적 수신인이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복음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누가복음이 이방인들을 위해 쓰였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는데요. 마태복음의 족보는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죠. 누가복음에도 족보가 있는데 하나님까지 그 기원이 올라갑니다. 그만큼 모든 인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유대인의 용어인 ‘랍비’나

‘호산나’ 등의 용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대 사회의 관습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이것은 대상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조금 더 읽기 쉬운 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아십니까? 누가 또한 신약성경 저자들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백성이 되어 우리를 주님의 백성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징 특별히 저자 누가는 역사 기록을 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우리에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의사라는 그의 직업을 미루어볼 때, 조금 더 글이 정돈되어 있고 질서 있는 느낌이죠. 그러므로 4복음서 중에 가장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편의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다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신약 그 어떤 책보다 부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누가복음에서의 가난은 당연히 물질적인 가난을 말하지만, 그 외에도 영적 가난, 관계적 가난,

사회적 가난 등을 포함합니다. 즉, 소외되고 결핍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의 소외 계층인 ‘여인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며 외쳤던 ‘프토코스’(가난한 자)의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들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반드시 도우시는 분이니까요.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2021년에 사귐의교회가 이 누가복음을 마주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힘겹고, 교회를 떠나있는 영적 가난에 빠진 가나안 성도의 숫자는 급증하고 있으며, 관계적 고립을 경험하고 사회적 양극화 속에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이 더욱 많아진 시기입니다. 누가복음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누가복음이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두 달은 누가복음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단 4절만을 봤는데, 사실 이 서문에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이유죠. (눅 1: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모든 사건이 허구가 아닌 실제임을 누가복음 첫 부분에 고백하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다.” 이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그 놀라운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해듣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은 4절에 나타납니다. (눅 1: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신자는 데오빌로 각하이지만,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배운 것들. 그 여러 가지 성경에 대한 지식들이 누가복음을 배워가는 8주의 시간 동안, 그 모든 일이 사실임을... 그 모든 일이 나를 위한 일임을... 그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붙드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