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이 시간 어 교수님을 좀 모시기 전에 먼저 우리 본문 말씀 한번 같이 읽고 그다음에 교수님 모셔서 함께 말씀 듣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참다운 제자 공동체 마태복음 18장 1절로 4절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같이 한 목소리로 네절의 말씀이니까요. 한번 같이 천천히 뚜박뚜박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읽겠습니다. 시작.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네. 아멘. 어, 우리 설교자 우리 양유 교수님을 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가 의사 전달을 좀 더 뚜렷하기 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좀 벗어도 괜찮겠습니까? 이거를 이렇게 쳐 놓으셨다고 해서 제가 알고 아 여러분 이렇게 이 자리에서 비록 지극히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아 이렇게
설교를 할 수 있다는게 참 너무나 큰 감사요 또 특권이라 생각이 됩니다. 특히 오늘은 우리 사귐의교회 설립된지 세도를 맞는 3주년 기념 예배에 또 부족한 저를 우리 강목사님께서 특별히 초청해 주셔서 제가 기쁜 마음으로 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어제 일이 있어서 밤에 일이 있어서 그 제가 이사한 곳이 문막인데 문막에서이 일 보고 우리 아들 집에 평창동입니다. 하고 여기 왔다가 이제 끝나면 다시 문막 집으로 돌아가는 조금은 긴 여행의 한 과정으로 여러분들 아침에 이렇게
만나게 됐는데요. 아 이렇게 참 제한된 수이지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너무 큰 행복이에 저희들의 요즘 상황인 거 같습니다. 그렇죠? 아, 사실은 귀한 건데 귀한 줄 모르다가 그 귀한 것이 제한될 때 정말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시기이고 그래서 이 시기가 끝나면 우리가 전체가 모여서 함께 예배드릴 때 그 공동체적 예배의 소중함을 더욱더 깊이 누릴 수 있는 그러 연단의 기간이다. 이렇게 저는 지난 1년을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3년 중에에 준비 기간까지
하면 한 4년 되신다고 하는데 교회로 설립된지 3년 동안에 1년을 코로나 19의 기간으로이 연단받는 그런 기간을 보내신 거 같아요. 근데 아까 언뜻 우리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까이 기간이 오히려 모든 성도님들이 한 마음으로 교회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러 또 좋은 기회가 돼서 앞으로가 더 많이 기대가 된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그렇게 일해 가시는 모습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하다. 이런 취지의 말씀을 제가 들었는데요. 정말 그런 거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흩어지고 그럴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것이 바로 사탄이에 노리는 노림수이겠지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사탄의 계획 이상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우리가 떨쳐 버리고 더욱더 굳건한 마음으로 이제 3년 됐는데 앞으로 30년 300년 주님 오실 때까지 사실은 이 자리에이 시간에 오실 수도 있는데요. 우리가 그냥 우리 생각으로 어 앞을 내다 보는 것이죠.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그 오실 때까지 우리가 더욱더 굳건히 세워지는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 읽으신 우리 함께 읽은 그 말씀을 가지고 아 말씀의 교재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 우리는 사실 매 주일마다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 왜 모여야 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뭐 굳이 모일 필요가 있냐? 개인적으로 그냥 성경 읽고 개인적으로 좋은 목사님 인터넷 설교를 듣고 뭐 TV에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 찬송도 하고
헌금도 해서 좋은 일에 쓰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겠느냐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없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때로는 것이 운동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개인적인 어떤 그런 양태로 나타나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요. [콧방귀] 자, 그런데 왜 우리는 이처럼 번거롭게 매 주일마다 한 자리에 모여 가지고 함께 만나며 예배를 드려야 할까? 그리고 이 코로나 19의 상황에서는 함께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줌으로라도 이렇게 얼굴을
좀 보고 싶은 사실은 저기 그 화면에 저 얼굴보다도 우리 성도들의 얼굴 보는게 전 더 행복해요. 예. 예, 설교야 그냥 목소리로 들으면 되는 건데 성도들의 얼굴은 그냥 그 설교 듣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요. 아까 중으로 찬양하는 그 모습을 이렇게 화면을 조금씩 바꿔 주시면서 봤는데 가정적으로 때로는 혼자서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향한 큰을 가지고 찬양하는 모습을 볼 때 야, 성령께서이 가운데 공동체적으로 임하시는구나. 사실은 저는 작년에 이제 은퇴를 1년
앞두고 주미라는 그 강의 방식을 처음 해 봤습니다. 야, 내가 이 그뭐 뭐죠? 은퇴하기 전에 이 어려운 일을 또 해야 되나라는 막 그 부담이 엄청 컸어요. 왜냐면 그전에 줌이라는 말도 몰랐거든요. 근데 프로그램을 배우고 컴퓨터를 거기에 적응을 시키고 뭐 해 가지고 하는데 처음 첫 시간을 하는데 학생들이 딱 출석 부르고 난 다음에 자기 화면을 다 꺼 버리는 거예요. 왜냐면 자기 모습 보여 주는게 좀 쑥스러우니까. 제가 빈 화면만 보고 한 시간을 강의하고 니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이제 교수에서이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 얼굴을 좀 보여 달라. 그래야이 교감이 있는 것이지 비화면 보는 것은 너무 힘들다 해서 그다음부터는 이제 얼굴을 보면서 하는데 과연 현장 수업만큼 효과는 없지만 아 그러나 아 그래도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참 효과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참 우리 사기 교회도이 어려운 시기에 줌으로라도 우리가 만나서 예줌의 건강 가운데 만남 그것도 만남입니다. 예 사도들이 어려웠을 때는 편지로 편지가 오 그
요즘 인터넷 이메일처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먼 길을 사람이 가지고 가서 그거를 주고 그걸 읽으면서 만났거든요. 영적으로 만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은 이처럼 좋은 문화의이기 덕분에 저희들이 실시간으로 만나서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것 이게 사실은 공동체 예배입니다. 다른 형태죠. 물론 현장에서 만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더라도 그러나 그것을 갈망하며 고대하며 사실 우리가 여기에 성령께서 함께 임재하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데
다른 형태의 동행을 우리가 기대하고 있거든요.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께서 삼위일체로 임마누엘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성전도 필요하지 않은 해도 달도 별도 필요하지 않는 왜냐면 가장 빛나는 빛이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 회전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저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뭔가 했어요. 그랬더니 해가 뜨면 그림자가 뺑 돌잖아요. 해의 방향에 따라 어두운 부분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게 태양빛의 한계예요. 그런데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면 태양을 통해서 우리가 보았던 그 밝은 빛의 실체를 누릴 수 있는 그 빛은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온 산지 사면이 다 예 빛으로 가득찬 그러한 때를 내다보며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동행하고 있는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적으로 만지고 동행할 수 있는 그러한 때를 내다보는 소망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주으로 예배드릴 때도 함께 만날 소망을 가지고 예 함께 예 허그도 하고 악수도 하고 예 식사 교재도 하고 식사 교재를
안 하니까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뭐 진수 성찬이 아니더라도 밥하고 뭐 김치 한계를 놓고 밥을 먹더라도 같이 먹는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근데 요즘에는 교회에서 그걸 못 하게 하니까이 몰래하다가 또 코로나가 막 발생하기도 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뭐 꼭 안 해도 소망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소망의 믿음이거든요.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는 함께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 소망 가운데 더욱더 자랄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우리가 생각하면
이렇게 주으로라도 만나는 것 이게 놀라운 은혜다. 근데 중요한 것은 만나야 되는 것이에요. 어떤 모습이든지 만나야 된다. 왜 만나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그 이유는 교회 본질에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이냐를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히브리어로는 카할이라고 하고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이 에클레시아 교회라는 단어는 카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온 것인데요. 그 카할이라는 말의 의미가 뭐냐? 모임, 회합 이런 뜻입니다. 무구의 모임이냐? 예.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다. 그게 카할이요 에클레시아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교회인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이 교회예요. 모임, 회합 그게 교회예요. 그래서 우리는 인식이 교회하면 사귐의교회 이렇게 써져 있으니까 아 저 건물이 교회구나 이렇게 착각할 수 있어요. 근데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에클레시아 교회는 공동체적 모임이다. 근데 그 공동체는 누구의 공동체냐?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다라는이 기본적인 개념, 본질적인
개념 그게 교회에에 그 내제돼 있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의 머리가 그리스도다라고 바울은 얘기합니다.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께서 [콧방귀] 머리시니까 우리는 뭐가 되겠습니까? 몸이 되는 것입니다. 몸. 그러면 이 몸이 생명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생명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머리에 붙어 있어야만 되는 것이에요. 머리 없는 몸은 생명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예수님이시요.
세운 다음에 그 교회의 주권도 예수님이 가지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회는 우리 강 목사님의 교회일까요? 아니에요. 아니면 이 교회 지금 100평이나 되는 이 교회 건물을 준비할 때 헌금 제일 많이 하신 분이 지분을 간다 그러잖아요. 요즘에는 지분을 가장 많이 가졌으니까 그분의 교회일까요? 세상은 다 그래요. 뭔가 많이 투자하고 누가 이끌고 하면 그 사람의 모임 그 사람의 그 집단이 되는 거예요. 근데 교회는 그렇지 않아요. 교회는 누가 세웠든지 누가 헌금을 많이
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강 목사님 중요해요. 저의 또 사랑하는 제자이기도 하고. 아, 그러니까 이 문막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죠. 근데 뭘 멀진 않아요. 그냥 가면 한시간 반 정도면 가는데 막히니까 3세시간 가까이 걸리더라고요. 어제 밤에 오는데 그렇게 많이 걸렸어요. 근데 자, 우리 강 목사님이 아무리 능력 있고 아무리 선하고 예.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더라도이 교회는 강 목사님의 교회가 아니에요. 어떤 집사님의 교회가 아니에요. 장로님의 교회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면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다라고 했어요. 머리다. 모든 교회의 주권과 중심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이 한 가지 사실만 우리가 잘 기억해도 교회가 잘못 가지 않습니다. 그냥 머리가 그리스도신데 그 머리의 생각대로 머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몸이 어디가 있어요? 그렇죠?
예.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모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하라는 대로 하면 잘못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그리스도께서 머리고 그러면 몸이 교회라 했어요. 몸이.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예요. 우리가 모여야 교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있어 가지고는 그게 교회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어 마태복음에서 16장에서는 교회를 세우겠다 하시고 18장에 가서는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인데요. 거기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거기에 내가 함께 하겠다라고 했어요. 두 세
사람이 모이면 모임이 중요한 거예요.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5만 명이 됐건, 100명이 됐건, 20명이 됐건, 두 명이 됐건 예수님은요. 일단 모이면 그 모임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근데 혼자는 교회가 아니에요. 예. 혼자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래서 선교사님들 그 미개척지에 파송할 때 꼭 몇 명씩 보낸 줄 아십니까? 둘씩 짝을 지워 보내요. 왜요? 둘이 가야 거기에 교회가 세워지는 거예요. 제가 그 젊었을 때 교회 없는 마을에 교회 세우는 사역을 열심히
했었는데요. 그때 교회 없는 마을에 교회를 세울 때 사역자가 가야 되잖아요. 가면 부부가 되게 갑니다. 부부가 가면 이미 거기에 교회가 세워진 걸까요? 안 된 걸까요? 이미 세워졌어요. 왜냐면 두 사람이 모여 있으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으니까 이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그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오. 두 사람, 세 사람, 백 사람, 천사람. 그 모임이 공동체요. 그게 교회다. 그래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 개인 특도의 원리를 따라 세워져 가고
성장하는 예. 어. 도를 닦으면 깨달음이 오고 깨달음과 더불어 구원에 이르는 예, 이런 종교가 아니에요. 교회는 철저하게 공동체적 개념 이것이 없이는 교회의 의미가 없는 그런 특징을 본질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먼저 기억하는게 중요합니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이면요. 당연히 좋죠. 여러분들 이렇게 제한된 인원만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뭐 김집사님, 최집사님, 김형제, 최형제 다 왜 김씨와 최씨만 나오는지 모르지만 저는 참고로 양이고 제 아내는 박씨입니다.
제가 어떤 편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예. 우리 에스라 가까이에 최영장군 묘가 있어서 최시가 조금 친숙하긴 합니다. 아무튼간에 누군가 보고 싶잖아요. 만나고 싶잖아요. 예. 함께 만나면 좋은 면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고 그 사람이 슬플 때 같이 눈물을 흘려 줄 수 있고 즐거울 때 같이 행복해 할 수 있는 예. 사실 같이 행복해 하는 건 별로 안 해 줘도 돼요. 혼자 좋으니까. 근데 슬플 때는 정말 같이 해 주면 큰 힘이 되거든요. 예.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을 같이 만들어 주는 이 도움이 되는 것, 뭔가 도움이 되는 것. 이게 같이 모임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 도움이 되는 이러한 장점이 있어요. 모이면. 그런데 장점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게 때로는 의도적으로 형제를 자매를 어렵게 할 수 있고요. 힘들게 할 수 있고 예 그래서 마침내는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떨어져 나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18장 후에 보면
바로 그러한 떨어져 나감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긴장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공동체로 모임, 개인 득도의 원리를 따라 우리가 구원을 이룬다면 굳이 모일 필요도 없고 혼자 잘해 가지고 혼자 아 그 구원받으면 되죠. 근데 교회는 그런게 아니라는 거예요. 함께 모여야 되고 모여서 함께 자라나야만 되는데 함께 자라나는 과정 속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일까요?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교회에 도움을 주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해를
끼치게 되고 그 해를 끼침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형제가 자매가 떨어져 나간다면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장 7절에 실 여러분들 성경책 안 가지고 계시면 예로 여기서 보니까 그렇죠. 18장 10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예.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다 했어요? 있을 수밖에 없다 했어요.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예외죠. 아니에요. 지금이 18장은 교회 공동체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근데 교회 공동체 안에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있을 수밖에 없다 했어요.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원하지 않아요. 교회 나올 때 누가 그런 것을 의도적으로 원하고 나오게 했어요. 야, 나 교회 나가지고 열사람 실축하게 해야지. 이런 목표 세우고 나오는 사람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요.이 귀한
시간에 그 좋은 그 뭐예요? 그 기회들을 다 내려놓고 또 돈 헌금도 막 해야지 되고 그러는데 누가 교회로 오겠어요? 안 오죠. 물론 신천지는 이제 자기 쪽으로 끌고 가려고 오기는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이렇게 교회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없어요. 다 아 내가 나가서 하나님의 좋은 백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가 되어서 공동체의 유익을 끼치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겠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나오죠. 근데 그런 목적을 가지고 나왔는데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내가 남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왔는데도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이 읽은 이 짧은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뭔가? 다른 것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그 실족하게 하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문제의 근원이 어디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공동체하면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들이 대다수예요. 그니까 그 문제의 근원을 우리가 잘 살펴보고 그 문제의 근원을 해결함으로써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세우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서로가 함께 성장하는 그러다운 제자 공동체가 되는 길이 여기 있다라고 지금 1절부터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제 본문을 좀 띄워 주실 수 있나요? 그 1절부터 4절을 제가 한 절 한 절 1절을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음으로 하시는 분들도 지금 참석 참여하시는 분들도 함께 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귀로는 안 들어도 성령께서 우리의 예배에 함께 동참하고 계시니까요. 자, 1절 같이 읽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 1절의 요지는 뭔가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질문을 던집니다. 초미의 관심사와 관련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예, 하나의에 요소입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뭐에 관심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우리 중에 누가 원문을 좀 더 잘 번역하자면 가장 큽니까? 1등에 대한 관심이에요. 자, 그러면 여기에 우리 1등 한번 정해 볼까요? 1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유, 우리 목사님이 1등이죠. 예. 이렇게 생각하실 텐데 예. 지도자는 뭐 지도자 맞아요. 근데 지도자가 1등은 아니다라는 점을 지금이 본문은 가르쳐 주는 거예요. 지도자도 있고 뭐 같이 돕는 사람도 있고 동역자도 있고 뭐 여러 가지 기능들은 다 있어요. 근데 어떤 기능을
하더라도 우리의 관심 가운데 누가 1등이냐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의 12 제자들이 그런 관심을 가졌어요. 늘상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들 가운데 예 도토리 키제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야 누가 더 크냐? 그게 이제 확실한 거는 확실한 거는 옛날에 저희 그 학교에 가면 학기초에 학생들은 키를 재거든요. 그래서 큰 큰 순서부터 아니 작은 순서부터 큰 순서로 쭉 정해요. 그다음에 번호를 먹깁니다. 1번 2번 3번 4번 그때내데가 누구하고
같은 짝이 되고 싶으면요 뒤지를 사 가지고 거기에 딱 맞추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선생님이 와서 다 알죠. 꽉 내리면 키가 낮아져요. 원투 원치 않는 키대로 아무튼 번호가 먹여지는 거예요. 예. 그러면 오히려 쉽습니다. 누가 1등이고 누가 꼴찌인지 그죠? 예. 작은 순서부터 1등 주면 키가 제일 작은 사람이 1등이고 키 큰 사람이 꼴찌가 되는 거예요. 자, 이렇게 확인한 거는 괜찮은데 제자 공동체 안에서 그게 확인하지가 않아요. 목사님은 열애로 준다 할지라도 뭐
사모님까지 열래로 둬요. 그냥 뭐 목사님, 사모님 특별한 거는 아닌데 특별해요. 왜냐면 교회 지도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예.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목자의 역할을 해라라고 임명을 하셨기 때문에 목사님이 사모님이 중요해요. 중요한데 그래서 잠시 여로 두고 예 들어오면 복잡해져요. 우리끼리 한번 해 보는 거예요. 우리 중에 누가 제일 크냐? 누가 1등이냐? 막 따지면 저마다 각각 내가 1등이라는 이유가 수백 가지가 생겨요. 내가 1등이지. 당연히 예 놀라워요. 사람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 아무리 도토리 키잭이 비슷해 보여도 자기는 너무나 월등하게 1등인 거예요. 내가 1등이지 누가 1등이야. 예. 12제자들 나름대로 최대한의 헌신을 다 약속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헌신이 크면 클수록 1등에 대한 기대는 더 커지는 거예요. 예. 그래서 되게 이제 교회에서 요즘에는 이제 그런 일이 별로 없을 수도 있는데 요즘에도 그럴 수 있어요. 그 교회에 있으면 그 주방이 있잖아요. 주방은 되게 이제 그 권이 있는 권사님들의 영역입니다.
예. 교회 나온지 적어도 2, 30년은 돼야 주방해 가지고 이렇게 이제 성 섬기는 건데도 권위가 있어야 돼요. 아, 그러니까 주방에 가서 열심히 섬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가 뭐냐? 섬긴 다음에 내가 1등이라고 거기서 자꾸 주장하는 거예요. 내가 제일 많이 섬겼어. 내가 제일 많이 섬겼어.이 1등 다툼 어디에나 있어요. 어디에나 있어요.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1등입니까? 누가 제일 큽니까? 그러 예수님께서 시청각 교육이 굉장히 유용합니다. 특히
중요한 교훈을 결정적인 교훈을 할 때일수록 시청각 교육이 중요해요. 충격적인 방법입니다. 그중에 제일 어린아이 하나를 세웠습니다. 야, 너 일 좀 와 봐. 제자들이 있는데 누가 1등이냐 그러는데 어린아이가 나오니까 굉장히 이게 상황에 맞는 상황입니까? 아닙니까? 1등이야 하면 대통령을 불러오면 모르겠는데 조그만 어린아이 코리그의 어린아이를 불러 야 이일로 와 봐 딱 세웠어요. [콧방귀] 제자들이 왜 이러지 예수님 뭐 하려고 저러시는 거야? 궁금했습니다. 2절의 내용이에요.
예.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셨다. 그런 다음에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3절.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인데요. 3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냥 읽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데 여기에 엄청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죽느냐 사느냐의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게 3절의 기준이에요. 근데 어떻게 하면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못 들어간다가 나왔어요. 왜 그럴까요? 1절의 질문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1절에서 제자들이 질문을 하자 그 질문의 문제점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냐 이걸 보여주고자 하시는 거예요. 여기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경우들이 마태복음에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이 경우마다 정말 중요한 원리를 얘기하실 때이 어 서두를 꺼내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레고대 휘민. 예. 아멘 레고대 휘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하면 진실로 진정으로 이런 의미에요. 그러니까 이거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과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이이 말씀 정말 마음속 깊이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원리다. 죽고 사는 원리다. 그니까 교회 아무리 많이 나와도 아무리 오래 나와도 아무리
열심히 나와도 결국 죽어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가 살려고 나오는 것인데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리고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나오는 것인데 정장 열심히 죽기까지 살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너 하나님 나라 못 들어온다라고 하면 얼마나 허망해요.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우리의 그릇된 관심 때문에. 우리 중에 누가 제일 큽니까?"라는이 그릇된 관심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라고
말씀해. 돌이켜. 돌이켜라. 돌이킨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회개의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가 휴브라는 단어가 있어요. 휴브라는 단어의 의미는 뭐냐? 예. 방향을 바꾼다. 주인을 바꾼다. 삶의 방식을 완전히 180도 바꾼다라는 뜻이에요. 그걸 회개라고 해요. 그니까 회개란 마음이 좀 슬퍼지고 애통하고 이것이 회개의 다간이에요. 그건 회개의 기본이고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방향이 전환돼야 되는 것이에요. 관심이 달라지고 삶의 방향이 달라져야
되는 것이에요. 지금 제자들은 그릇된 방향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 중에 제일 크냐? 그러니까 그걸 돌이켜라. 방향 전환을 해라. 너희들 다 1등되고 싶은데 방향 전환을 해서 무구와 같이 되라. 여기 지금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 여러분이 말씀 어린이 주일날 설교 본문으로 많이 쓰이는 본문입니다. 예. 제가 통계적으로 다 살펴보지는 않았는데 제 경험상으로는 어린 주일 날이 본문 가지고 설교하신 목사님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저도 뭐 모태 신앙이니까 지금 이제 65년 넘게 살았잖아요. 학교에서도 나가래요. 이제 65세가 넘으니까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 해 가지고 제가 2월 말로 이제 학교도 그만두게 됩니다. 근데 한편으로 너무 감사해요. 아, 이때쯤 이제 쉬라고 하는 것도 이제 제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그때 그만두라 그러면 이제 그때는 뭐 그냥 그런데 아직은 뭔가 그래도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만두라고 하니까 지금부턴 정말 제가 그동안에 해야 된다. 하고 싶었던 그런
꼭 필요한 일을 집중할 수 있으니까 학교에 있을 동안은 그럴 수가 없잖아요. 가르쳐야 되죠. 뭐 또 회의 준비해야 되죠. 뭐 또 논문 써야 되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해야 할 일에. 근데 지금부터는 이제 24시간 내내 잠자는 시간 빼놓고는 다 제가 그 생각한 대로 예 그 일들에 집중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근데 중요한 것은 예 65세가 되니까 끝나는 거예요. 예 나가라. 자 어린아이. 어린아이의 의미가 뭐냐? 오랜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어린이 주일날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그분들이 주로 어 뭐 옛날 얘기니까 요즘에는 제가 별로이 어린이 주일날이 본문 가지고 설교들은 적이 별로 없어요. 근데 어렸을 때이 본문 가지고 하면 아 여러분 어린아이 여러분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이 천국이라는 말은 마태만 쓰는 고요한 표현이고요.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 보니까 해바셀레이아 두세우이 강대상에 딱 써져 있더라고요. 야 우리 강목사님
역시 하나님 나라 중심적으로 사역을 하시는구나. 제가 그냥 막 감동이 됐어요. 여러분들은 읽을 수가 없죠. 그래도 이건 이건 읽으실 거 같아요. 목사님이 설명하셨겠죠. 이게 뭐냐? 이거 갖다 놓으시고 뭐 생각도 없이 이렇게 놓으셨을 것 같진 않고 이 하나님의 나라 아 헤바슬레이아가 나라고 투세우가 하나님의 근데 그거를 어 유대인들은 되게 이렇게 표현했어요. 해 바셀레이아 톤 우라논 하늘들의 나라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않아서 그걸 하늘이라고
대체해서 이렇게 표현을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마태만 천국 하늘나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예.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예 유일한 기준이 뭐냐?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중요해요.이 기준을 잘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게 뭐냐를 물어보면 쉬운 답이 아니에요.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게 뭘까요? 백개는 그래서 어린아이의 성품과 관련해서이 얘기를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진하다,
순수하다, 순결하다. 순자돌림으로 쫙 가다가 이제 끝나면 순종을 잘한다. 좋은 건 다 갖다 붙여요. 욕심이 없다. 뭐 좋은 건 다 붙이는데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보니까 이게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정말 애들이 순수해요. 순진해요. 예. 순결하기는 해요. 예. 근데 순종을 잘해요. 아이고. 내가 우리 아들 딸만큼 순종해서 하나님 나라 들어간다면 100번이라도 들어가겠다. 이런 마음이 아마 여러분들에게 다 있을 거예요. 그죠? 순종 잘 안 해요. 어린아이들의 이런
성격, 성품, 그들의 특징을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쉬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문맥상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뭔가면 지위예요. 누가 제일 큰가, 누가 제일 높은가? 이게 지금 제자들의 관심이에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문맥을 한 절만 내려가면 그 답이 있습니다. 우리 4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이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게 뭐라고요?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답이 바로 다음 절에 있는데 그죠? 우리는 성경을 참 마음대로 읽어요. 문맥의 흐름 속에서 잘 따져가면서 읽으면 답이 있는데 별로 생각 없이 그냥 내 생각대로 본문을 읽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성품을 가져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낮은 지위를 가져라. 낮은 지위 이게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지금 제자들은 우리 중에 누가 제일 크냐, 누가 제일 높으냐 이걸 가지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답으로이 3절을 주시는 거예요. 너희들 그렇게 높은데 관심, 높아지는데 관심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돌이켜라. 그 관심을 높아지려는 관심을 돌이켜서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는데 어린아이처럼 되는게 뭐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춰야 된다. 낮아지는데 관심을 가져라. 그 교회 딱 문에 들어오는 순간 모여 있는 사람들끼리 해야 할 중요한 관심사는 뭐냐?이 중에 누가 제일 낮은가? 내가 제일 낫다.
나는 제일 낮은 사람이다. 내가 가장 낮은 사람이 아닌 것 같으면 낮은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기대와 목표라도 가지라는 것이에요. 낮아져라. 가장 낮아져라. 그게 돌이키는 겁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사는 길 이제 확실해졌죠? 어떻게야 살아? 날 수 있는가? 그런데요. 교회의 문제가 어디에서 생기느냐? 다 도토리 키잭이 자기가 더 잘 났다. 내가 더 크다. 내가 제일이다. 여기에서부터 생기는 것이에요. 지위에 대한 관심은 반드시 권리가 따라갑니다. 내가 제일
높으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까 총돌이 생기는 거예요. 김집사님은 이렇게 하고 싶은데 최집사님은 이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또 김씨 최씨 나와서 죄송합니다. 예. 좋은 일에 자꾸 얘기를 해야지 되는데 제가 이렇게 충돌에 얘기해서 죄송하고요. 역시 혹시 김집사님 계시면 용서하십시오. 예. 그냥 하는 얘기예요. 그냥 하는 얘기. 예. 왜 충돌이 생기느냐? 서로 자기가 높다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 문제들은이 지위다툼부터 시작이 돼요.
거기로부터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거예요. 지위에 대한 관심을 내려놔라. 더 낮아져라. 그러면 이 모든 문제가 근원부터 해결되어 갈 수 있다. 마음의 관심사를 바꾸라는 것이에요. 내가 높다라는 기대부터 높아져야지라는 목표에서부터 나는 낫다. 나는 낮아져야 한다. 더 낮아져야 한다. 목표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라는 것이에요. 근데 교회라는게 주일날 모일 때만 교회가 아니에요. 이제 히브리서에 보면 아까 우리 강목사님 저에게 히브리서 배우셨다 그랬는데 히브리서는요
모든 책의 목표가 어디에 있느냐? 13장에 있어요. 13장의 내용이 뭐냐? 예배예요. 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분의 고유한 희생제사의 궁극적 목표가 뭐냐?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완전하게 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다.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근데 예배하면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공동체적으로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만 생각하기 쉬운데 히브리서에서는 두 가지의 예배를 얘기합니다. 뭐냐? 하나는 개인적인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모여서 드리는 찬양 두 가지의 예배의 영역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공동체라는 것은 함께 모여 있을 때만 교회가 아니에요. 흩어져도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 가정도, 직장도, 모든 사회의 모임들도 다 예배의 자리예요. 공동체에 의미가 있어요. 흩어져 있는 공동체인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도 낮아짐의 원리가 사용되어야 한다. 적용되어야 한다.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이 또 하나 생깁니다. 낮아지는게 뭐죠?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라
했는데 이건 비유잖아요.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그 뭐이 뭐 무슨 세포 그거를 조작해 가지고 어린아이가 막 되는 이걸 얘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린아이처럼 했으니까 어린아이의 특징을 너희의 삶의 원리로 삼아라는 거예요. 그럼 어린아이처럼 낮아진다까지는 얘기를 했어요. 그 낮아지는게 뭐냐? 이것도 한번 질문을 던져 봐야 되죠. 낮아지는게 뭐냐? 우리는요. 성경을 읽을 때 다 안다 생각하는데 정말 아는 건가? 따져 보면 애매한 부분들이 참 많아요. 낮아지는게 뭐지?
그냥 느낌은 있어요. 아, 낮아지는 건 낮아지는 거지. 근데 구체적으로 낮아지는게 뭐냐 하면 잘 감히 안 와요. 그러면 만약에 이 낮아짐을 말씀하신게 사회적인 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교회의 직책과 관련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낮아지면 가장 낮아지려면 뭐가 돼야 되겠어요? 초임 교사가 돼야죠. 신익 교사. 예. 선생님의 서열 중에서 교장선 꼭대기고 신입 그 이제 그 선생님이 제일 막내잖아요. 아니 정년을 다 앞두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신입 교사가 될 수 있어요? 지금 신입 교사 되려면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는 분 거의 없어요. 그때 당시에는 뭐 그냥 선생님 되는게 조금 쉬웠을 수도 있는데 요즘에는 하늘의 별딱이잖아요. 선생님 되는게 그것 쉽지 않은 일 아무튼 낮아지는게 그런 걸까요? 회사의 회장님은 신입사원이 돼야 될까요? 그런 걸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이게 사회적 지위에서 낮은 지위를 가져라.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원리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원리의 핵심이 뭐냐를 우리가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요. 마태복음 20장입니다. 혹시 좀 본문을 화면에 띄어 주실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부터 28절까지 좀 화면에 띄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장 26절부터 예. 20 5절부터 좀 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25절부터 28절 가능하시죠?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이 미리 강 목사님이 필요한 거는 미리 말씀하시라 그랬는데 제가 아 이거를이 얘기를 안 한게 제일 실수입니다. 예. 혹시 그러면 여러분 휴대폰에
그 나오시면 휴대폰에 대게 계신 분들은 되게 계신 분들은 성경책 펴셔서 좀 보시면 되고요. 20장 25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직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세상 얘기하시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다 직권자들하면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 아니에요.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특성이 있느냐? 아래 있는 사람들을 부리는 특징이 있다는 거예요. 예.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거예요. 이게 높은 자리에 높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근데 26절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읽기를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예. 너희 중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 그건 세상의 원리지 교회의 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의 원리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부리는 건데 제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이게 핵심입니다.
제자는 세상의 원리와 똑같이 살아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는 세상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그러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참다운 제자 공동체는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그걸 거꾸러 가는 거예요. 세상의 원리는 높이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부리는데 제자 공동체는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딱 하나의 원리만 있습니다. 너희 중에 예 누구든지 으뜸이 1등이 되고자 하는 자 가장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지 된다고요?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 4절과 예 연결해서이 얘기를 하면 예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져라 했는데 낮아짐이 뭐냐를 여기서 섬김이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섬기는 것이다. 물론 낮아짐에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뭐냐?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제1 특징하면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함께 모여서 서로를 도울 수도 있고 서로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했는데 해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뭐냐? 자기가 잘났다. 내가
높다. 이거 주장하다가 해를 끼치는 거예요.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가운데 해가 끼쳐지는 거예요. 근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첫경이 뭐냐? 자기가 낮아져서 남을 섬기면 예. 섬기는데 싫어할 사람 있어요. 예. 부부지가 안 해도 내가 뭐 잠자리 누워 가지고 뭐 필요한데 불을 켜고 뭐를 찾아와야 되는데 아파. 여보 거기 저기 뭐이 뭐이 붙이는 파스 있죠? 뭐 구체적인 이름을 얘기하면 좀 그렇고 저기 파스 좀 갖다 주세요. 물파스 좀 갖다 주세요. 하면 다
지사고 있다가 아이 당신이 아주 왜 나한테 그래라고 하면 이제 그 부부 사이에 금이 가죠. 예. 알았어요. 뭐 얼마나 아파. 내가 갔다 올게. 라고 딱 갖다 주면 그동안에 그냥 뭐 이런저런 뭐이 문제 생겼던게 그 한 번에 섬김으로 쫙 놓아져요. 아 우리 남편 최고다. 우리 아내가 최고야. 뭐 이런 예 섬김처럼 우리의 마음을 예 너그럽게 해 주고 풍성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게 없습니다. 섬김. 근데 섬김은 누가 하느냐? 종들이 하는 거예요. 집권자들이 하는게
아닙니다. 세상 원리로 오면 종들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같이 한 절 읽겠습니다. 27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니까 섬길 때 어떻게 섬겨야 되느냐? 종처럼 섬기라는 거예요. 직권자들은 시키는 사람들이요. 종들은 섬기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안 하면 안 되는 모습으로 왜 우리의 머리가 누구시라 했어요? 그리스도시라 했어요. 근데 그 그리스도의 명령이 뭐냐?
섬기라는 거예요. 그니까 우리는 내가 뭐 잘났다고 섬기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뜻이 형제 자매를 섬기라는 것이니까 종으로서 섬기는 거예요. 종이 돼야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도 안 하면서 목사님들이 이렇게 되면요. 목사님의 설교를 아무리 잘해도 그 설교에서 꽃투리가 생겨요. 아이 목사님 오늘 그 말 실수했어. 아유, 국어 공부도 안 하셨나? 이러면서 이제 목사님 막 그 긁는 거예요. 굉장히 좋은
설교인데도. 근데요. 어떨 때 그러느냐? 말만 하고 섬기지를 않으면 그래요. 근데 목사님이 그냥 솔선 수범해 가지고 막 섬기면 막 설교에 체계도 안 맞고 막 그래도 헛소리만 안 하면 뭐 말실수도를 하고 뭐 이래더라도 다 덮어져요. 아, 우리 목사님 얼마나 힘드시면 저럴까? 얼마나 애를 쓰시면 저럴까? 예. 다 덮어져요. 왜요? 삶으로 다 보거든요. 성도들이. 목사님만 그런게 아니에요.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다 서로서로 보이거든요. 섬김 가운데 모든 것이 덮어집니다.
내가 말만 잘하고 섬기지를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효과가 없어요. 근데 잘 섬기면 한마디에 말할 때 그 말에 엄청난 힘이 실립니다.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해요.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은 야, 너희들 섬겨. 나는 너희의 머리야. 머리가 시킨 대로 해. 뭐 잔말이 많아. 뭐 이렇게 딱 하시면 가장 번가 있어 보이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잖아요. 그니까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치실뿐만 아니라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보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28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20장 28절입니다. 읽기를 시작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성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김의 절정을 스스로 보여 주신 분이에요. 제자들이 섬겨라고 명령하신 것만이 아니라 내가 섬긴 것처럼 너희도 섬겨라.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섬기셨는가? 섬길 때는요. 뭔가 내가 아끼는 것들을내어
놓아야만 합니다. 시간을내어 놓아야 되고요. 재능을내어 놓아야 되고요. 힘을 써야 되고요. 거기다가 돈도 써야 됩니다. 그렇죠? 돈 안 쓰고 섬길 수 있어요? 아니에요. 돈을 써야 돼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소중한게 뭐냐? 사람 목숨입니다. 내 목숨이에요. 목숨은 하나밖에 없어요. 돈은 쓰면 벌면 되는데 목숨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섬기시기 위해서 그 목숨을내어 놓으셨다 했습니다. 목숨을내어 놓으셨다. 우리의 대속물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죄인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내어 놓으시고 섬기셨다. 종으로서 섬기셨다. 이런 섬김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아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높아지는가? 여기까지 우리가 봐야 우리 사귐의교회이 사귐이란게 펠로십이죠. 교재. 그게 공동체를 전제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이 말씀 준비하면서 교회 이름 참 좋다. 참 좋다. 거창하지 않고 굉장히 실제적인 교회의 본질을 담은 교회의 이름이구나라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목사님 어떤 의도로 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무튼이 본문과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한 원리를이 제목이 제목이 아니죠. 이름이 담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요. 자, 예수님의 이런 섬김의 결론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제가 좀 읽어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과 같이 읽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제자는 항상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원리입니다. 본분이에요. 그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가장 높으신 분이세요.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높은 지위를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회장님이더라도 회장님의 지위를 주장하지 않아요. 교장 선생님이라도 교장 선생님의 지위를 주장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종되라고 말씀만 하신게 아니라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어떻게 하기까지 순종하셨다 했습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섬김의 도구로 사용하셨는데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예, 섬기셨다는 원리를 우리는 마태복음 20장 28절과 빌립보서를 연결해서 보았을 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9절부터 11절까지는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이 원리를 우리가 확인하기에 어떻게 높이시는가?
9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 얼마나 지극히 높아지게 하셨는가? 만물을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높이셨어요. 그니까 가장 낮추신 분. 우리가 아무리 낮아져도 하나님으로서 낮아질 순 없잖아요. 사람으로서
낮아지는 거죠. 근데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낮아지셨어요. 그니까 그분의 높아지시면 그분에게만 적용되는 높아지심이 있어요.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자리로 다시 올라가시며 모든 세상의 존재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정도로 높이셨어요. 그럼 우리가 사람으로서 낮아진다면 사람으로서 최고의 권위에 오를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더하시겠다. 그게 뭐냐? 왕의 지위예요. 왕의 지위.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를 왕삼는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왕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기재기가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높아짐과 낮아짐은요. 둘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섬기는 자는 높아져서 왕이 되고 스스로 높아지는 자들은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모두가 다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항상 섬기는 자로 살아간다. 원리를 아무리 잘 깨달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죠? 예수님은 순종하셨다. 순종의 최종적 결과가 뭐냐?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겟샘에서 그 순종을 위해서 밤을 세고 철하기 기도하시면서 동일한 말씀으로 세 번이나 기도하셨잖아요. 세 번이란 말은 끝까지 하셨다는 거예요. 응답을 받으실 때까지. 그 순종이 그리 쉬운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 예 섬기셨어요. 섬김의 극치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될까? 아, 섬김은 자동적으로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섬김이란 항상 예, 섬김이란 항상 기도를 통해서 점점 점점 자라나는 거예요. 예수님도 순종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만 됐듯이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지 섬겨야 할 목표가 생기면 그 섬김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 순종의 결과가 섬김이다. 이해가 되시죠? 순종의 결과가 섬김이다. 근데 그 순종을 위해서는 기도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공동체가 그냥 이루어지는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부정적 기도를 통해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때로 하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의 원리를 통하여 섬김의 목표를 순종해 가는 그런 가운데 참된 사귐이 있게 되고 그
사귐의 공동체가 참된 제자 공동체가 된다. 앞으로 3년 앞 지금까지 3년 동안 그렇게 해 오셨다면 앞으로 더욱더 예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성장은 멈추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잘 섬겨 오셨듯이 이름이 그걸 보여 주잖아요. 그 이름에 걸맞게 더 잘 섬기는 그래서 주님께서 오셨을 때 우리 사기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 그들을 향하여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자들 그게 다 섬김의 결실들이거든요. 예.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제 내 모든 것을 맡기겠다. 책임을 덜어 주는게 아니라 더 큰 책임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게 왕이에요. 우리를 왕삼깼다. 그게 높은 지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 놀라운 왕적 지위의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우리 사기 교회 모든 성도님들 섬기시는 삶의 열매들을 계속 맺어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귐의교회 3주년
기념 예배를 저희들이 드리면서 참다운 제자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관심이 많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 명령하셨는데 명령만 하시지 않고 스스로 그 길을 가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셨는데 우리 사귐의교회 모든 성도님들 지금까지 3년 동안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더욱더 잘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 자기를 높이는 자가 아무도 없고 교회 안에서 누구나 다 낮아지고 낮아짐의 증거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이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임이 있는 그러한 사귐의교회가 되도록 주님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네. 네. 우리 예배팀 나와 주시고요. 우리 같이 저희는 항상 설교 후에 어 설교와 가장 갈려 있는 촬량을 하는데요. 어 오늘은 저도 좀 약간 즉흥적으로네 고르게 됐습니다. 우리 찬양을 먼저 하고 싶은 거는 우리가 작년에 매 예 예배 시간 끝마다 불렀던 낮은 곳으로 한 찬양이 있는데요. 우리 오늘 말씀대로 어 우리
더 낮은 곳으로 주를 따라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함께 같이 먼저 찬양하며이 말씀을 다시 한번 우리 마음 가운데 되세길 수 있는 시간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우리의 섬김이 더 낮은 곳으로 우리의 고백이 더 낮은 [노래] 곳으로 쓰러져 있는 그들을 향해 그들을 [노래] 향해 당신이 [노래] 그때 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낮은 [노래] 곳으로 우리 초대하네 함께하자고 함께하자고 말씀하시네. 우리도 [노래] 우리도 예수 그 길에 따라 함께 가기 원하네.
함께 가기 원 한번 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우리 초대하네 함께하자고 함께하자고 말씀하시네. [노래] 우리도 예수 그 길을 따라 함께 가기 원하네. 함께 가기 원하네. [노래] 주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네. [노래] 십자가 십자가 피흘린 예수의 손으로 모든 아픔을 위로하시네. 우리에게 [노래] 보여. 주님이 우리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네. 십자가 피흘린 [노래] 예수의 손으로 모든 [노래] 아픔을 위로하시네. 우리에게 [노래] 보여주셨네. 우리 사귐의 공동체가
주님 닮은 참다운 제자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귀한 말씀 잘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오늘은 어 특별히 하나을 좀 더 하고 싶은데요. 어 저희가 2017년에 예배하면서 어 축복 시간마다 처음 불렀던 찬양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이 가사가 떠올라서 이제 우리 함께 모여서 할 때 우리가 주를 찬양하며 주님을 자랑하고 우리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든 공동체 한 사람 속에 주님이 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축복하면서
찬양하겠습니다. 네. 이제 우리 함께 모여서 이제 우리 함께 모여서 [노래] 주를 노래 주를 찬양하며 주를 찬양하며 자랑하네. [노래] 형제잠의 모습 속에서 형제의 모습 속에서 [노래] 하나님 영사 하나님 모습을 하나님 모습을 그려보 우리 자우에 계신 분 있다면 축복하면 생합시다. 이제 우리 [노래] 함께 모여서 주를 노래하네. [노래] 주를 찬양하며 [노래] 사랑하는 형제 자매 모습 속에서 형제 잠의 [노래] 모습 속에서 하나님 영상 하나님 모습을 하나님 모습을
[노래] 그려보 아멘 주는 나의 모습 주는 [노래] 나의 모습이 모두 사랑하셨네. 모두 사랑하셨네. [노래] 사랑하 나도 당신 모습. 나도 [노래] 당신 모습 있는 그대로 그저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노래] 사랑하리라. 이제 우리 [노래] 함께 모 주를 노래합시다. 주를 노해 주를 찬양하며 주를 [노래] 찬양하며 사랑하 함께하는 형제잠의 모습 속에서 형제 잠의 모습 [노래] 속에서 하나님 영상을 하나님 모습을 드려보네. [노래] 우리 한번 축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혹시 같이 예배하는 분들 있다면 우리 사랑의 말로 함께 축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축복을 전합니다. 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당신의 삶 닮았습니다. 저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번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네. 하나님 축복합니다. 네. 네. 축합니다. 네. 우리 정시사님 한 마디 해 주십시오. 여러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네. 편점의 인도. 자, 여러분이 살의 교회입니다. 아멘. 주는 나의 모습. 주는 [노래] 나의 모습
있는 그 모두 사랑하셨네. 모두 사랑하셨네. [노래] 사랑하 나도 당신 모습 나도 당신 [노래] 모습 있는 바꾸려 하지 말고 그저 사랑한 [노래] 우리 한번 고백하겠습니다. 우리 한번 자신의 가슴이 소고 주는 나의 모습 주는 나의 [노래] 모습 있는 그대로 모두 사랑하셨네 사랑하 나도 당신 모습 나도 당신 [노래] 모습믿는 있는 그대로 그저 사랑하리라 그저 사랑하리라 [노래] 사랑하리라. 사랑의 주님이 날 [노래] 사랑하시네. 내 모습 [노래] 이대로 받으셨네.
사랑해. 주님이 [노래] 나 사랑하듯이 나도 널 사랑하며 [노래] 한번 사랑의 주님이 사랑의 주님이 [노래] 나의 사랑하시네 모습 이대로 [노래] 받으셨 사랑해 주님이 사랑의 주님이 나의 사랑 나도 널 사랑하며 나도 너 [노래] 사랑하며 섬기 아멘 주신 사랑으로 주가 주신 [노래] 사랑으로 섬긴 나의 사랑할 사랑으로 날 사랑할 [노래] 사랑으로 섬기리 [노래] 아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닮아서 그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귀한동체가 되기를 다시 한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