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과 4장에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명씩 등장을 합니다. 오늘 여러분도 그 예수님을 만나는 한 사람이 되길 바라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3장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고, 4장에서는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두 사람은 차이점도 있었고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차이점> 1) 니고데모는 남자이고, 우물가 여인은 여자입니다. 2) 니고데모는 유대인이고, 우물가 여인은 사마리아인입니다. 3)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의 지도자였고,
우물가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연 많은 가련한 여인입니다. 4)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 왔고, 우물가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공통점> 두 사람 모두 목마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죠. 4장에 기록된 <우물가 여인 이야기>에 대해서 조금만 더 설명드릴 것은, 이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에 대한 시간적 해석이 두 가지라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유대인의 시간 개념을 사용한 것인가, 아니면 로마인의 시간 개념을 사용한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여기서 예수님과 여인이 만났던 시간이 6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대인의 시간을 사용한 것인가? 혹은 로마인의 시간을 사용한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죠. 유대시간을 전제에 두고 해석한다면, 이 여인이 자신의 도덕적 부정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남들이 오지 않는 뜨거운 정오에 나와서 물을 긷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 됩니다. 반면, 로마 시간으로 여긴다면 오히려 예수님이 종일토록 걸으시고 저녁 6시쯤에 지친 몸으로 우물가에서 그 여인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더 은혜로운 것은 유대시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시간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른 사건들은 모두 로마 시간으로 해석할 때 자연스럽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그 대상이 유대인의 명절을 잘 모르고 있음을 전제하며 설명한 것을 볼 때, 유대인을 위한 관점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복유라는 찬양 사역자는 ‘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라는 곡을 내면서 ‘유대 버전’과 ‘로마 버전’을 같이 냈습니다. 보시면 가사를 약간씩 바꿔서 정오의 일과 저녁때의 일로 나눠서 발표했던 것이죠.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만남입니다. 갈급함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밤늦게 찾아왔던 니고데모나, 혹은 갈급함을 숨기고 싶었으나 예수님께서 말을 거시면서 그 여인의 갈급함을 두드렸던 사건이나, 모두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한걸음 더 진리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하나님 앞에 ‘경외함’의 필요성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대로 우리가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예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에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낮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도 함께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은 세상의 다른 강자들처럼 약자를 착취하거나, 우리를 자신의 도구화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고전문학을 생각해보세요.
옛날 용왕 이야기도 사실 그런 거 아닙니까? 바다에 성이 나면 사람을 바쳐서 그 신을 달래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그건 목적에 근거한 관계입니다. 나도 그 신을 어떻게든 달래서 내 목적을 이루면 됩니다. 바다가 심술만 안 부리면 됩니다. 그런 신과 진지한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나 내 목적을 방해받지 않고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 수단이죠. 하지만 우리가 믿는 유일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달라요. 우리를 향한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그 사랑하심에 기대어 우리도 신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높으신 하나님의 위대함,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저는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어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가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에 그는 우리를 가장 잘 압니다. 우리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갑니다. 한치 앞을 예측할 능력이 없는 제한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영원불멸하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이것은 존재의 차이 때문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다스림의 대상으로 주신 다른 피조물보다 뛰어납니다. 제가 개미보다 똑똑하고 훨씬 많은 것을 할 줄 알며, 개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존재의 차이죠.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고 뛰어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는
완전해집니다. 이 완전함은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을 이루는 완전, 성공의 개념이 아닙니다. 반대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면서 주셨던 그 완전한 상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범하자마자 불안해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숨고,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함께 살던 보시기 정말로 좋았던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결핍을 갖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공허함이고, 다른 말로는
종교심이죠.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 하고, 그를 위해 뭔가를 붙잡으려고 해요. 그게 종교로 나타나면 종교심이고,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죠. “나는 무신론자야.” 그 이야기는 “나는 그 공허함을 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충족할거야”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대신 다른 무엇에 집착을 하죠. 돈이든, 권력이든, 쾌락이든, 자기 자신이든, 혹은 자녀이든. 그러나 그런 다른 것으로는 태초에 주셨던 평안함, 샬롬이 충족되지 않아요. 만족이 없어요. 항상 결국에는 공허합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면 근심이 없나요? 아니요. 어쩌면 그는 더 근심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멋진 집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행복한 가정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멋진 침대를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단잠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자여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살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죠. 따스한 햇빛, 시원한 바람, 생명력을 주는 공기, 영원한 생명, 참된 사랑. 다 하나님이 근원되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 공허함, 갈급함들이 반대로 생각해보면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질병 중에 가장 무서운 질병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통증은 고통스럽지만 통증을 느낄 수 있어야 우리는 내 안의 문제를 발견하고 살 수 있어요.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에 채워지지 않는 부분, 그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 신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경험을 하기에 여러 가지로 힘쓰죠. 그러나 돈도, 명예도, 쾌락도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이 갈급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데, 진짜 하나님을 경험하면 못 떠납니다. 왜냐하면, 생수의 근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 가운데 때론 불편하고 때로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안에서만 채워지는 그것을 경험하면... 다른 것이 없어도 만족한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신비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것들로 내 삶을 다 채울 수 없어요. 다른 것들로 채우고 채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나서
그가 느끼는 갈급함의 이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라고 말해요. 그는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이었고 지적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아는 듯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거듭난 삶,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것은 모르고 있는 것이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해되지 않을 이야기를 하십니다. 물을 달라고 해놓고, 여인이 반응하지 않으니까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게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인이 어이없어 하죠. 선생님은 물을 구할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에서 생수를 구해서 주겠다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 4: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요 4: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신을 그 갈급함을 해결할 영원한 생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생수를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게 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허함을 채우게 된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내면은 채워졌지, 그들의 외면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은 주님을 만나기 전이나, 만난 후나 동일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바뀌면 나를 괴롭히던 그 외적 상황과 환경을 품고 이겨내는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내 내면의 깊은 곳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부요해진 것입니다. 내 외적 상황은 가난할지 모르나, 나는 부요해요. 예수 하나로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해요. 예수가 뭐길래.. 예수님을 생수로 믿고 그분과
전적으로 연합한 사람들의 삶이 그랬어요. 그들은 풍족한 삶을 위해 더 많은 무언가를 가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삶을 향해 주저함 없이 살아갑니다. 때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는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죠. 아뇨. 세상의 기준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정상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죄로 인해서 비정상이 되었다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의인으로
바뀌면서, 거듭나서 정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처음 창조한 그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그렇다면, 오늘 내가 여전히 하나님과 별개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함을 얻으려 한다면... 아직 내 내면이 그리스도로 채워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와 우물가 여인은 그 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장면에서 모두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두 사람 모두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라고 말씀하시죠. (요 3:10) 우물가의 여인을 향해서는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4:18) 예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것이죠. 내가 그분을 모를 뿐이지, 그분은 우리를 깊이 아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알고 계십니다. 니고데모와 우물가의 여인. 두 사람의 처지는 달랐으나 예수께서 내린 처방은 동일합니다. 그 처방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왔던
세상이 인정하는 그 삶을 그만하고, 다시 태어나서 주와 동행하라. 예수님 없이 살아왔던 세상이 멸시하는 그 삶을 그만하고, 영원한 생수인 주와 동행하라. 그 어떤 삶이던지 예수님을 얻어야 우리의 공허함이 채워집니다. 니고데모처럼 경건한 종교생활과 사람들의 인정으로 채울 수 없고, 우물가의 여인처럼 여러 남자들을 만나서 다양한 삶을 살아봐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갈급함이 해결됩니다. 우리의 목마름이 채워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로 나아오라”
말씀하셨어요. 우물가의 여인이 반응합니다. 비록 성경을 살펴보면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그녀가 그 해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았기에 그가 속한 마을 공동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니고데모의 삶도 변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요한복음 7장과 19장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
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식에 100리트라의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약 34kg이나 됩니다. 이 양은 보통 사람의 장례에 쓰는 양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양은 왕의 장례에 사용될 규모임을 지적하며, 이것에서 왕의 장례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처음에 그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지만, 이제 자신의 신앙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 다시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가 너의 삶에 있는 공허함, 갈급함을 채우는 영원한 생수가 되겠다. 이제 나와 함께 거듭난 삶을 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듭난 삶. born again.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과 반드시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서 그 공허함을 찾으려 했던 내가 죽는 것입니다. 종교생활로 본질 없는 예배를 해왔던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방법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죽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 내게 주어진 삶을 그냥 살아왔던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수이신 그분을 먹고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밥입니다. 내가 떡이다. 직역하면 밥입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참된 그분과의 사귐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관계를 통해 채우려고 했던 내 외로움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채우는 것입니다.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그분이 주인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헛된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참된 소망을 갖고 현재로부터 영원까지 주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삶으로 부르시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주님은 반드시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해답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