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신앙 : 길을 걷는 여행 / 강정규 목사

2021-01-31 · 누가복음 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길. 성경에서 길은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눅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주의 길, 그가 오실 길. 때로는 ‘길’은 주님의 사역과 일하심에 대해서도 표현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길’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그가 이 땅에서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도 길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죠. 길.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 해야 하는 일, 꿈꾸는 비전. 많은 것을 내포한 표현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이러한 ‘길’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서에는 ‘여행 길’ 단락이 존재합니다. 보통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과정을 이러한 ‘여행 길’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여행단락이 16:21-20:34까지 있습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가복음에서도 여행단락이 8:27-10:52까지 이어집니다. (막 8: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보시는 것처럼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나서는 것이 여행의 시작이고, 그 여행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늘 종료됩니다. 그럼 누가복음은 어떠할까요? 누가복음은 가장 길게 여행단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여행 단락이 무려 11장입니다. 누가복음 전체가 24장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반에 가까운 내용이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단순한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다는 의미가 아니죠. 그곳에 주님의 마지막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인류 구원의 십자가 사명을 향해 본격적으로 나아가는 때가 된 것입니다. 9:51이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데요. 이렇게 시작하죠.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하나님의 때, 그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고 고치시는 메시아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셨다면, 이제 때가 되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즉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1. 여행을 위한 준비 제가 여기서 매우 의미 있게 보는 것은 이 길을 예수님

홀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제자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즉, 주님이 가신 길은 목적 지향적으로 그것만을 위해서 가신 길은 아니에요. 혼자가면 더 빨리 가죠. 단순히 십자가 지는 것이 목적이면 이 땅에 오시자마자 십자가 지시면 되죠.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에 제자들은 ‘짐 덩어리’일지도 몰라요. 뭔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방해나 하고 마음

아프게 하는 존재들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도 그들과 함께 가십니다. 왜냐하면, 보여주셔야 하거든요.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사명을 이루시는지... 그래야 제자들이 나중에라도 깨닫고 변화되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는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사람을 얻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가시는 모든 길에는 제자들이 함께 하고 있고, 함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전체 주제는 메시아 취임식으로서 살펴보았던 4장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메시아 사역이 시작되고 메시아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토코스(가난한 자)로 대표되는 여러 잃어버리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나라가 오셨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사람을 실제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어요. 누가복음 9장에서 여행을 떠나기 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병이어 사건이죠. 이 사건이 중요하지만, 오늘 다루지 않는 것은, 작년 3월 15일에 마가복음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식탁>이라는 말씀으로 오병이어를 다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유일하게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메시아의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와 칠병0어가 함께 기록되기도 하는데, 한번은 유대지역, 한번은 이방지역에서 펼쳐지며, 이 메시아의 풍성한 잔치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참여하도록 초청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건 직후 베드로의 고백이 이어지죠. 드디어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믿음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씩 깨달아가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나서, 예수님이 앞으로 자신이 갈 십자가 길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세요. 이제는 너희도 정확하게 이 길을 알아야 한다는 그런 의미겠죠. 제자들도 하나님의 때에 도달한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보면, 우유를 먹을 때에 있는 성도들이 있고, 고기를 먹을 때에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거든요. 제자들도 자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에게 밝히 보여 예수님이 가실 길을 알려주십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인데... 제자들도 각자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스승이 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제자입니다. 그럼 제자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하면 ‘누구든지’ 그 길을 따라가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맡겨진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고난만 말하면 안 되잖아요.

고난 뒤에는 뭐가 있어요? 영광입니다. 영광을 알기에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은 아니잖아요.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길을 가기 전에 영광에 대한 <예고편>을 하나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길의 끝에는 고난이 있고 죽음이 있어요.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잠시나마 보여주는 것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변화산은 산 이름이 아니라, 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된 몸을 입으셨기에 이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죠.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우리가 여기서 변화된 예수님의 몸을 ‘부활의 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라고 이해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는 소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변화된 예수님 곁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일까요? 제가 구약성경을 나타내는 용어가 ‘율법과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대표 모세,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의 옆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구약이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렸던 그 예언된 메시아라는 것이죠. 십자가를 향한 길을 출발하기 전,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으므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도 그곳에 나타납니다. (눅 9: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눅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이 그것을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뭐겠어요. 후에 그들이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깨닫고 난 후에 이 일들에 대해서 증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십자가도 몰랐고 부활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 모든 일을 깨닫고 이 사건들에

대해서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이 그 후에 시작되는 것이죠. 이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제자들을 양육하고 가르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제자들이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갈릴리에 있을 동안은 우유를 먹는 때입니다. 1단계입니다. 시속 20km로 천천히 가도 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9:51의 시작처럼 승천하실 기약이 다가오고 있고, 이제는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제는 기어를 올려 성장해야 하는 때가 된 것입니다. 이 길이 끝나면 예수님은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길. 누가복음은 실제적인 이동경로에 대한 설명은 많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행 단락은 여러 사건들과 가르침(비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주님이 가시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러한 가르침들입니다.

즉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2. 갈 길이 먼 제자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잠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을 유추해봐야 하는데요. 얼마 전,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했고, 그 후에는 변화산 사건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때가 되었다며 ‘예루살렘으로 가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미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것 중에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은 들어오지도 않고, 오직 ‘영광의 길’만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 아닙니까? 예로부터 성전과 왕궁이 있던 곳. 이들은 지금 이미 자신들의 기대로 만들어진 그 성공의 꿈나라에 가 있었던 것이죠. 이것은 제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 명확한 증거로 나타납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변화산

사건까지 경험한 후, 여행길 바로 직전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지,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지, 누가 유명해 질지 다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투고 있었다는 것은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마침 지난 3주년 설교가 이러한 제자들의 논쟁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데려와 가르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정신을 못 차려요. 제자 중 요한은 “주님, 어떤 사람이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우리가 막았습니다.”

이렇게 말해요. 이유가 뭐냐면, 그가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2제자 외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 중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자, 제자들이 막은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권리,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에게 늘어난 것은 특권의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야.” 이런 의식이 가득했던 것이죠.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그런 자를 막지 말라’고 가르치세요. 그들은 우리 편이라고 말입니다. 너희들만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과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면서 곧 제자훈련이 끝나가는데, 제자들의 상태가 여전히 이랬다는 것입니다. 3년 가까운 시간을 배웠는데 말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라는 지역을 지나가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매우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수르에게 정복을 당하고, 혼혈정책에 의해서 주변 나라들과

북이스라엘 주민들 간의 피가 섞이게 됩니다. 그 후손들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유다에 속한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인데, 주축은 유다지파 사람들이죠. 이들이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면서, 바벨론에는 수많은 지역에서 끌려온 포로들이 있었으므로, 구별하기 위해 이들을 부른 표현이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귀환 백성들은 옛날 남유다 출신의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중시했고,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들은 깨끗하고 저들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대인들을 좋아할 리 없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지역에도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고,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쩌다 피치 못해 들어가게 되면 그 후에 정결예식을 행하기도 한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고 예수님도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구주가 아니시죠. 만약 그분이 유대인만을 위한 구주였다면 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땅으로 가십니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을 그곳에 보내어 준비시킵니다. 가뜩이나 특권의식에 가득찬 그들은, 왕이 되실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시작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뭔가 된 것처럼 그런 상태였어요. 그런데 막상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을 몰라보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서로 감정이 좋지 않다고 했잖아요. 그랬더니 제자들이 화가 난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눅

9: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바로 앞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자라고 가르쳤는데, 배척을 당하니까 저주를 해요. 이들은 제자라는 특권의식은 가득한데, 주님 닮은 제자의 행실은 없는 것이죠. 주님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사실 주님이 사마리아에 가신 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라는 지역 자체가 매우 소외된 지역이잖아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모두 로마의 속국이지만, 그 안에서도 더 많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도 특권의식이 있었고, 제자들도 그랬어요. 이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어야 하는 것이죠. 이 여행길에서 반드시 그들이 배워야 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3. 제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 배척을 당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향하는데, 그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자들, 즉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에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와 제자를 삼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겠다는 3명의 사람을 만납니다. 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제자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이죠. (눅 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첫 번째 제자 후보가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님이 그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이 땅에 안식처와 보호처가 없었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과정을 감당해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역시 소유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마음을 두고 고난도 감내하는 것입니다. 12제자도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어요. 새롭게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최근에 코로나 국면이 다시 심각해졌습니다. IM 선교회가 이제 이슈의 중심에 섰습니다.. 저는 그 단체가 뭐하는 단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단체 시설이 전국에 40개라고 해요. 전국 11개 시도에 퍼져있고, 거기에 속한 구성원만 841명이 확보되고 계속 확보되고 있다고 해요. 그 단체가 나름의 회원을 모집한 비결을 뉴스에서 봤는데요. 결국 사람들의 성공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공짜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유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일 나쁜 것은 복음을 파는 나쁜 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거기에 와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광주에 122명이 함께 합숙하다가 확산이 되었는데, 절반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회원 가입비가 300만원에, 매달 95만원씩 비용을 내요. 6살부터 와서 합숙을 합니다. 저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들을 그곳에 보냈을까. 제가 답답한 마음에 글을 하나 썼는데요. 기독교

내에 이단을 분류하는 기준이 있고, 그 울타리 밖에 있는 명백한 이단과... 그 경계선에 모호하게 서 있는 단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는 우리가 한 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코로나는 이단과 건강한 기독교인을 가려서 걸리지는 않는다. 즉, 모두가 인정하고 참되다고 하는 교회나 목사들도 코로나에 걸린다. 코로나에 걸린 것이 죄는 아니다. 어느 누가 안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신앙은 삶과 연결된다. 삶은 혼자 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기독교와 세상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내 신앙과 가치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적어도 공공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각자가 희생하고 지켜야할 삶의 모습이 존재한다. 코로나 시대의 기독교에게 그것은 정부의 방침을 따르며, 그 안에서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임금지는 기독교에만 내려진 처벌이나 탄압이 아니라, 모든 업종, 모든 사람에게 내려진 것이다. 교회만 모이지 못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업종의 사람들이 생사가 걸려 있음에도 방침을

지키느라 영업을 못하고 모임을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게도 제한이 걸린다. 20명 미만, 혹은 좌석의 10% 등이 그런 조치들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전부가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기에 따르는 것이다. 함께 사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지키면서도 코로나에 걸리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욕하고 싶지 않다. 나도 걸릴 수도 있다. 10% 미만으로 모였고 모임도 안하고, 식사도 안했는데 교회에 코로나가

생겼고,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면 난 철저하게 그들의 편이 되어 돕고 싶다. 신천지가 처음에 시끄러웠다.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단이다. 이것은 이단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다. 사랑제일교회가 그 다음에 터졌다. 나는 전광훈을 정상적인 목사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이단으로 정확하게 분류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인터콥... 그리고 IM 선교회 등이 코로나 전파의 중심에 서 있다. 즉, 어떤 곳은 명확한 이단이고, 아직 그것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그런데 이 단체들의 공통점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의 가치를 위해서 독단적이거나 위법적인 행동을 했고, 그로 인해서 코로나가 확산되는 전파지가 되었다. 이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는지 참된 신앙을 가졌는지... 신학적으로 깊이 따져볼 수 있겠으나... 그런 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이들은 잘못된 행동을 한 단체들이다. 세상과 연결되어 살아가면서 자기만을 생각하고 희생하지 않으며,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모습들에 화가 난다. 코로나가

이단이어서, 잘못된 단체여서 걸리는 것은 아니다. 신학적 판단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잘못된 행동들, 위법한 행동을 해서 코로나가 걸렸고 집단 감염의 원인을 만들었다면... 난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힘들게 방역 지침을 지키느라 애쓴다. 정말 눈물겹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저들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앙은 삶을 보면 안다. 코로나 걸린 것은 죄가 아니다. 지금 방역수칙을 어기고 집회를

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안 걸렸다고 무죄도 아니다. 이기적인 행동,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그것을 신앙의 열정인 듯 포장하는 그 행위가 죄이고 위선이고 겉멋이다. 방역수칙을 지키느라 모이지 못하고, 교회 운영이 어려워서 문을 닫더라도...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참된 신앙인이다. 신앙은 삶을 보면 안다. 저는 코로나라는 이 상황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 입장에서만 보면 우리도 고난의 시간이에요.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제자라면 어떠해야 하겠는가? 진짜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위기를 맞이하지 않으면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절박하면 드러나요. 진짜 모습이 나와요.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흔들어보면 드러나는 것이죠. 그 사람의 신앙이 드러나요. 목사도 똑같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왜 믿는지도 드러나고요. 예수를

정말 믿는 사람인지도 드러납니다. 우리가 다 부족하죠. 맞아요. 모두가 부족합니다. 성경은 제자들도 얼마나 부족한 존재들인지 보여주잖아요. 그렇지만 부족함이 핑계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는 원래 연약하니까 십자가 지는 일에서 빼줄게, 이러시지 않아요. 이것은 선택이 아니에요.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사명입니다. 피하면 안 돼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정체성입니다. 신분이에요. 소금이면 짠 맛을 내는 것이 당연하고, 못 내면 버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다운 맛이 없으면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은 제자의 본성입니다. 순종하는 삶이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습니다. 당연해요. 제자들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무너진 길에서 다시 걸어가요. 그것이 제자입니다. 출발이 같은 것이 아니라, 마무리 하는 곳이 주님이 가신 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따라가는 것이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제자입니다. 순종으로 길을 걸어가는 자 그것이 제자입니다. 다른 2명의 이야기도 보십시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유대 사회에는 아버지의 뼈를 모으는 것을 자녀들이 합니다. 그의 요구는 임종을 지켜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시신을 매장한 이후, 남은 뼈를 보아서 가족묘에 있는 조상들의 뼈와 합치는 두 번째 매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0절이 그것을 보여주는데,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례하게 하라는 것은,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 즉 조상의 뼈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두 번째 매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고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매장은 날이 정해져 있기에 그 기간까지 연기해 달라는 것이죠. 그러나

주님은 예수를 따르는 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그에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세 번째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요구도 합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을 따랐어요. (눅 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5: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이들의 모습은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았고, 결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도 즉시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말하지만, 제자가 된 후에도 가족과 함께 살았으며, 예수님이 그의 장모를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즉, 2명의

제자 후보들에 대해서 지적하신 것은 그들의 ‘태도’입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가, 자신의 우선순위가 더 먼저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를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하고 짧은 목회를 해나가며 정말정말 깨닫는 것이 있다면,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아요. 끊임없이 방법을 찾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삶으로 드러나요. 뭐라도 해본다니까요. 순종은 삶으로 반드시 드러납니다. 막 뭔가를 하려다가 안 되는 것은 보여요. 다 알아요.

해보지도 않는 사람과 해보려다가 안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반면,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습니다. 여러분, 핑계를 찾으면 끝이 없어요.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는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사람은 말로만 합니다. 하려고 했는데.... 이래서 안 되고... 누구 때문에 안 되고... 그런 사람의 삶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요. 차라리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다 걸고 가보다가 실패라도 해보는 것이 낫습니다. 실패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교만입니다. 길이 보이면 걸어가 보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어도 가는 것입니다. 길 앞에서 난 이래서 못가요, 저래서 못가요 하지 마십시오. 누가복음은 말합니다. 제자들도 부족했다. 그래도 그들은 주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 외에도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결국 따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주님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주님이 가셨고 제자라면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날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의 옛 사람이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철저히 순종하려면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저도 요즘에 참 고민이 많아요. 문뜩

나는 주님 뜻대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마음만큼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아직 죽지 않은 제 모습으로 인해서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 하지 않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조금 느리고 조금 비틀거려도...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옛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려 싸워대고, 다른 가치들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핑계들 뒤에 숨으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고 품어서, 성령을 의지하여

오늘도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통과하여 주를 따르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각자 모두 다른 환경에서 부름을 받았고, 우리의 모양도 생김새도 삶의 방식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며 나아가는 그 길만큼은 주님의 길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이 멈추게 되는 그 날에도 그곳은 이 길이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