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교회에 오신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블로그를 통해서 저희교회를 알게 되었던 것처럼, 요새는 정말 온라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유튜브도 요즘에는 활발히 이용하고 있어요. 저뿐 아니라 많은 목회자분들이 거의 반 유튜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튜브로도 소통하지만, 글은 블로그에 쓰다 보니, 그 글을 매개체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 특징은, 상대방은 저를 너무
잘 알고... 저는 상대방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심히 불리합니다. 처음에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사는 곳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분으로부터 쪽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의 설교강의를 매주 조금씩 순서대로 정독하고 있는 초보신자입니다. 목사님의 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있어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한가지만 드리려고 합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실망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하여 여쭤봅니다. 저 또한 창조과학을 최근 알게 되어서 너무 신기하고 기뻤고 제 믿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이 잘못 된 건지 궁금하여 쪽지 드립니다^^ 제가 이런 쪽지를 무서워합니다. 제가 가끔씩 어떤 부분을 비판하거나 바로잡는 글을 쓰는데, 그로 인해서 시달린 적도 참 많기 때문이에요. 제가 한국에서 유명한 어떤 강의에 대한 문제점을 정리한 글이 있죠. 최근까지 30000명이 넘게 그 글을 읽었더라고요. 공감도
400건이 넘습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어떤 현상과 신학에 관하여 글을 쓸 때는, 자칫 성도님들이 그 현상에 빠져서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을까, 조금이라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역할을 하길 바라며 글을 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러한 강의 혹은 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지자분들이 메일 혹은 쪽지로 너무 심하게 비판하셔서 그 글을 내릴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제게 위로의 글을 남겨주셨어요. 위로와 응원 드립니다. 글을 올리시는 것을 멈추지
마시고, 계속 지속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고 아픔입니다. 목사님의 글을 보고 회개할 자와, 돌이킬 자와 자신의 하나님을 만날 자들을 위해 끝까지 힘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내 역할이 있는 것인가 보다. 그로 인해서 받는 핍박이 있다면 그냥 그것을 감당하는 것도 저의 몫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온라인도 사역지이다.” 이런 마음을 먹고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질문을 받은 것은 또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창조과학회>에 대한 의견입니다. 제가 실망한 부분을 말해달라고 하니 조심스러웠죠. 그런데 제가 이 질문을 받고 이 분께 성실하게 답변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이 분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제 설교를 조금씩 순서대로 정독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본인이 ‘초보신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제 설교가 혹시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고민을 하는 사람인데, 초보신자가 그것을
하나씩 순서대로 정독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운 것이죠. 그런데 감사하게 최근에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듣습니다. 초보신자들로부터. 그래서 이분께 답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 답을 드리며 적었던 내용이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한번쯤은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서, 그 내용들을 기초로 오늘 설교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먼저 그분께 드린 첫번째 메일입니다. < 첫 번째 답장 > 안녕하세요. 이렇게 얼굴도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신앙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주신 질문에 대한 답은 1시간으로도 부족할 만큼 조심스럽지만 총체적으로 말씀을 드려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비교적 간단히 2가지만 말씀을 드리면... 1. 글에도 장르가 있습니다. 시가 있고, 소설이 있고, 뉴스 기사가 있을 수 있죠. 시로 쓰인 것은 시로 읽어야 하고, 소설로 쓰인 것은 소설로 읽어야 합니다. 시로 쓰인 표현을 뉴스 기사처럼 읽으면, 시는 거짓투성이가 됩니다. 소설은 허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읽어야 하죠. SF 소설을 뉴스로 읽으면 문제가 되듯이 말입니다. 성경을 계시라고 합니다. 흔히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말하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계시는 성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기 때문에 '일반 계시'라고 말하죠.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인간이 정리하고 파악한 것이 '과학'이죠. 그러므로 과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과 과학 모두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과학은 과학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와 뉴스에 대한 비유와 같이요. 왜냐면 성경 자체가 과학적 입증을 위해 쓴 표현이 아닙니다. 제 전공이 '성경신학'이라서 성경해석학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과학적 관점으로 읽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중 과학으로 설명되는 것은 믿으려하고, 반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반 성도님들은 과학을 신뢰하기에, 그 과학적 증명으로 성경의 내용들을 증명한다는 것에 굉장한 관심을 갖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러한 부분에 굉장히 집착하고 희열을 느꼈습니다. 과학으로 증명이 되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방식으로 주변에 그 이야기들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성경을 연구하며 깨닫는 것은... 그 방법론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학보다 성경의 진리는 더 큰데, 과학의 렌즈로 성경을 보다보면 그 렌즈에 맞는 것만 찾고 그 외의 것들은 놓쳐버리는 과오를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더군요. 성경은 과학으로 증명되어야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과학을 거쳐서 해석되도록 우리에게 주신 책이 아닙니다. 시를 뉴스의 관점으로 팩트체크 해서 이 시의 이 부분이 사실이고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오히려 왜곡하는 것처럼, 성경은 성경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의 과학이 아니라 1세기 성경의 첫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야만 그 뜻이 명확해 집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설명하는 것이 창세기의 천지창조입니다. 만약 어린 자녀가 아이가 어떻게 생기냐고 할 때,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설명을 해도 아이는 모르죠. 과학적 입증보다 중요한 것은 더욱 중요한 진리인데, 때로는 "엄마 아빠가 사랑하면 아이가 태어나는 거야"라고 하는 설명이 오히려 그 진리를 더 잘 담아내기도 하죠. 아이에게 맞기도 하구요. 동일하게 창세기의 독자들은
지금과 같은 과학적 상식이 없고, 사실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천지를 창조하며 가졌던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의 기록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신학적 선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그것을 따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이라고 봅니다. 과학적 구성이 아니라, 신학적 메시지를 담은 구성으로 6일의 창조 순서에 따른 의미와 메시지에 주목하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 과학으로
보면 당장 창세기 1장과 2장만 하더라도 서로 상충됩니다. 인간과 동물의 창조 순서가 다르죠. 이것은 1장과 2장이 각각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오류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부분들은 너무나도 많아서, 성경이 100개의 진리라면 창조과학회가 입증해냈다며 가르치는 것은 2~3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2~3개는 과학적 증명 과정에도 부합하여 그것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으나, 오히려 나머지 97개는 과학적으로 증명하기에 어려움이
있거나 때로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결국 성경 전체로부터 진리를 발견하기 어려워집니다. 2. 창조과학회의 잘못된 성경 관점과 무리한 방법론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안식교와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그 안식교 맞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단은 아닙니다만, 한국이 좀 더 명확히 이단을 구분을 하는 편이니까요. 물론 지금 창조과학회에 있는 분들이 안식교도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안식교의 성경해석은 '문자적 해석'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문자적 해석도 해석의 한 부류이기도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한 시를 문자로 해석할 때 그 의미에 다가서지 못하는 것처럼, 문자적 해석이 가능한 본문과 그렇지 못한 본문들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문자적 해석으로 연대를 설정하면... 족보에 나타난 수명을 다 더해서 그것으로 연대를 측정합니다. 그러나 신약 마태복음 1장의 족보만 하더라도, 구약의 족보와 다릅니다. 족보 또한
메시지이기 때문인데, 임의로 몇 사람을 빼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족보에서 7번째 인물, 14대 등의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리한 방법론은 이미 현대 과학에서 동의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여 과학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과학적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검증방법이나 자료인 것처럼 소개하는 경우들도 있죠. 제가 경험한 것으로는, 잘못된 사실을 증거처럼 한참 동안 예시로 사용하다가, 결국 팩트체크를 추궁 당하니, 사실이
아니라고 입장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제가 설교에도 언급했는데, '커티스 회사' 관련 부분이 창조과학회의 과거 주된 주장이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bcmm20th/221658308008)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 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해럴드 힐(Harold Hill)은 자기 회사의 과학자들이 전자계산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10만년 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 그 사이에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 갑자기 기계가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순간 모든 과학자들은 긴장했습니다. 그것은 전자계산기에 제공한 정보에 이상이 있거나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즉시 기계 기사를 불러서 조사를 했으나 기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가 지시한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그 하루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하루가 모자랐습니다. 과학자들이 이 문제의 원인 규명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를 하다 마침내 성경책을 놓고 그 시대의 궤도를 전자계산기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10장 13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찾아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다는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24시간에서 40분이라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나머지 40분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계속 성경을 조사하는 중에 열왕기하 20장 1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는 말씀을 찾게 되었는데 그 십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니 40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신화나 전설처럼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와 섭리를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이야기는 거짓입니다. 실제로 커티스라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 나사(NASA)에서 했다는 다른 버전도 있는데, 실제 나사에 확인 결과 루머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창조과학회> 세미나를 통해서 여러 번 들었는데, 그곳에서조차 이제는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누는
것은,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아니 과학책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설프게 증명하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일들이 더러 존재합니다. 저도 이런 것에 굉장히 집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들으면, “거봐~ 성경이 얼마나 과학적이야”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욱 믿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고민해보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꼭 성경이 문자 그대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가 문자 그대로 6일이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그리고 나를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6일이든, 수만 년이든 그것은 그분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즉,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너무 무리한 방법론을 사용하다보니, 오히려 최근에는 과학자 중에
기독교인 학자들의 지지까지도 못 받게 된 것입니다. 창조과학회가 존재하고 나름대로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7~8년 정도 전부터는 창조과학회의 입장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여전히 어떠한 분들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증명이라는 생각이 주는 신뢰감이 크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의 진리를 신앙의 진리로 삼는데 있어서, 성경적 해석을 배우고... 과학은 과학으로, 성경은
성경으로 대하며 그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설명과 답이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네요^^ 목사님 답변 너무나 감사합니다. 정확한 반박의 글 보다 이글이 더 이해가 잘 되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창조과학회의 글을 보면서 제 믿음에 보탬만 주고 거기서 더 과학적으로 파는 것은 멈춰야 할 것 같네요. 저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보신자지만 목사님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와 깨달음을 받고 있습니다.
개신교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서 다양한 교리와 책을 섭렵하다보니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목사님은 정말 포용력과 유연성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이웃사랑은 어떻게 실천하면 되는 걸까요.. 제가 일하는 장소에서 혼자 있을 때 야간에 손님으로 자주 가난한 사람(겨울에 엄청 춥게 다니는) 한 두 분 정도를 만납니다. 예전에는 그냥 불쌍한 사람이다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는데 성경공부를 하고 그분들을 보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제자신이 죄를 짓는 느낌도 들구요. 그들에게 제가 돈을 줘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옷을 선물해 줘야 할까요. 제가 사장도 아닌데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걱정 되기도 하고 자주오시는 분이라 매번 오실 때마다 어색할 것 같기도 하구요. 그냥 무기명으로 드릴 수 있다면 편할 테지만 그렇게도 방법이 없고, 돈을 주면 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죄책감 해소를 위해서라는 느낌도
들구요. 저는 남는 여윳돈이 있는데 가지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한 달 먹을 치 내일 먹을 치 돈만 놔두고 이웃을 위해 내 소유를 전부 주는 것이 좋을까요? 한국 컴패션을 통해 기부를 소액으로 시작했는데 크리스천의 이름으로 더 힘든 외국의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먼저일까요? 이웃사랑의 우선순위를 모르겠습니다. 크리스천 형제와 아이들에게 먼저 기부, 그다음 불신자에게 이런 식일까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는데 어느 정도의 자산은 저축을
해도 되는 걸까요? 그것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을지 궁금합니다.. 먹고 마시는 건 걱정 말라고 하셨는데, 아직 하나님을 체험해본 적이 없어 저는 하나님이 표적을 보여주지 않아도 믿고 따르는 삶을 살려고 하기에, 초자연적인 역사(예를 들어, 돈이 없다고 갑자기 돈을 주시는) 그런 것은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삶을 스스로 생존을 유지하면서(저축도하고), 이웃에게 형제에게 일정부분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이것보다 제가 먹고 살만큼 이외에는 모두 이웃을
위해 베푸는 것이 좋을까요? 바쁘실 텐데 자꾸 질문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두 번째 답장 > 다시 인사를 드립니다. 교회를 다니신지 얼마 안 되었는데, 기독교 교리와 관련된 책들을 섭렵하셨다고 하니 놀랍네요. 그리고 단순히 신앙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실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셨습니다. 저도 20년 가까이를 교회 안에 있는 사택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는 늘 구걸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와야하지만, 무작정 도움을 드릴 수는 없는 경우들이 많은데요. 그렇게 어떤 관계성 없이 만나게 된 분들이라면 '지속성'과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감당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매주 5명씩은 오셨습니다. 금액을 너무 많이 주면 감당도 안 되거니와 소문을 듣고 더 많은 분들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그냥 당시에 저희 집은 문 앞 신발장에 1000원짜리를 많이 바꿔놓고 1000원씩을
드렸습니다. 그분이 다음주에 또 오건, 새로운 분이 오건... 찾아오시면 늘 그렇게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예배 시간에 교회에서 주무시고 계시거나, 예배당을 내려가는데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시면... 가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신 김에 예배 보고 가시면 5000원 드릴개요. 만원 드릴게요. 이렇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돈으로 예배를 사는 것은 아니라, 그렇게라도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으며 변화되길 기대하셨던 것이겠죠. 저도 목회자가 되고 부교역자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교회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 중에는 위의 사연처럼 1000원이라도 바라고 오시는 분들이 아니라.. 나름의 스토리와 노하우를 갖고 오시는 분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그분들이 쓰는 '레파토리'(?)가 매우 비슷합니다. 일단 이분들은 절대 구걸하러 왔다고 말하지 않고, 목사님과 신앙상담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자신들을 저에게 안내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만나면 자신의 장황하게 사연을 이야기하고, 부모님은 대부분
안계시거나, 의지할 가족이 멀리 지방에 있다고 말하며... 결국은 자신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혹은 교회에 그것을 도움받기 위해 왔으나 그것까지는 염치가 없어서) 친척들에게 갈 차비를 좀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5만 원쯤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저는 드리지 않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싫은 것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작지만 매달 40~50만 원 정도를 구제합니다. 5만원 드릴 돈이야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베푸는 것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을 많이 겪다보니 제가 사실 검증을 가끔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그 친척분과 통화를 해보고 선생님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면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결국 안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는 수위를 낮춰서 그럼 자기가 오늘 하루 종일 밥을 못 먹었는데 여기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냐고 합니다. 만약 교회에 드릴 먹을 것이 있으면 드립니다. 없으면 그냥 한 끼 식사 하시라고 5000원 정도를 드리며
보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일화들을 소개하는 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이 무엇일까 저도 항상 고민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이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인가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각각의 신앙인들이 정해야 하는 것 같은데... 2가지 정도의 원리를 저는 갖고 있습니다. 1. 제가 신학교 때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을 때, 결국 그 이야기는 너도 가서 '이웃'이 되어라, 혹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인데... 그 이웃은 내가 어떤 악인, 조폭, 마피아
같이 나와 사실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울타리에서 우선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만나는 사건들의 섭리를 믿으며)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의 가족들 중에 어려움이 있거나, 제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어려움을 듣거나, 저는 교회의 목사로서 주변 교회의 어려움, 어떤 도움의 소식을 들으면 먼저 반응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구제의 부분입니다. 사랑으로서는 말 그대로 가장 가까운 가족을 사랑하고,
자주 만나는 교인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사랑할 때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멀리서 찾기보다 오히려 내 삶에 마주하게 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 그 외, 보다 질문과 가까운 모르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부분에 대한 제 원리는.... 제가 가진 재정 안에서 '구제'를
위해 사용할 금액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정 원칙'과 관련이 있는 것이죠. ‘몫가름’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가진 소유(월급) 중에서 하나님의 몫, 나의 몫, 구제를 위한 몫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나의 몫에는 말씀하신 미래를 위한 저축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구제를 위한 몫을 정했으면,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마음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제를 위한 몫은 내가 다 흘려보내기로 한 돈이므로 어차피 내 돈이 아니라 여기는 것이죠. 다만, 사연을
정확히 모르는 분들의 경우는 '돈'으로 직접 지원하실 때는, 이 돈이 정말 그분의 삶을 위해 사용될지 좀 살피며 지원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유흥을 위해 쓰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서 돈을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차라리 '환대'가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본인의 재정 관련된 내용으로 돌아가면, 원칙을 미리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내 몫이
과하지는 않은지... 그 균형감을 살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저축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몫이 너무 과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헌금과 구제가 너무 줄어들지는 않도록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게 재정의 몫가름을 하고 가급적 그 원칙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건강합니다. 예를 들어, 저도 이런 저런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졌었는데... 정말 궁핍할 때는 저축도 못했지만, 지금은 자녀 2명을 키우고 있고, 나름 주어진 재정 환경 속에서 저축을 합니다.
보험도 듭니다. 그 자체가 정죄감을 느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헌금도 각자의 형편에서 자원하는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끝으로 체험에 대한 얘기인데요. 저는 그렇게 궁핍하지도, 그렇게 부유하지도 않은 형편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정말 적당히요. 그런데, 주변에서는 많이 체험하는 그런 기적을 저는 잘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이해가 되는데... 제 환경에 이미 좋은 부모님을 주셔서 제 필요를 주님이 채우셨기에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좋아하죠. 그런데 사실 일상에서 내게 베푸시는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는... 광야는 기적의 삶이었습니다. 만나를 먹었지요. 얼마나 큰 기적을 매일 경험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광야의 시대가 끝나고 정착의 시대(여호수아 시대)에 가서 땅을 주신 이후로 만나는 끊깁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끊긴 것이 아니라, 이제 땅의 소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급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다가, 땅의 소출을 먹으며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상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을 통해서 제가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분이 늘 제 곁에 계셨기에 저는 기적적인 어떤 것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농경시대에는 땅의 소출을 통해 먹이셨다면, 지금의 사회에서는 월급과 여러 가지 수입을 통해 나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제 삶에 기적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개척을 하고 나서입니다. 정말 막연하고, 정말 기댈 곳이 없고.. 하루하루를 예측할 수 없는 그 삶이 시작된 후... 저는 광야에 있는 것 같았고... 정말 예기치 못한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마음껏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에 의존하는 삶은 건강한 신앙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 일상에 있는 은혜를 발견한다면... 더욱 깊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불신자에서 교회를 다닌 지는 한 달, 성경공부는 시작한지 6개월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교리와 객관적 검증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궁금증과 힘든 점을 해결 못 했는데, 목사님 글과 내용을 통해 많이 해결되어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답변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후에 이 형제님이 저희 교회에 헌금을 보내셨더라고요. 그런데 그 금액이 저희가 최근에 설교 초청을 할 때
드렸던 사례비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저의 사례비가 아니라 형제님의 마음을 담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언택트 시대에 메일을 주고받으며 한편의 설교에 담아야 할 내용을 전할 수 있음에 참 감사한 시대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가 주고받은 메일 중간에 마침, 이번 주 묵상 내용인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인용했죠. 저희가 주일에도 이 비유를 잠시 다루겠습니다만, 딱 2가지만 기억하십시오.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했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자기중심적 질문입니다. 그는 율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웃 사랑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 있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물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웃들을 사랑했다고 자신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점은 그와
다릅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타인의 입장에서 누가 그의 이웃이 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2) 결국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은 “너도 가서 다른 사람에게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어라”라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영생을 얻는 사람,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너의 필요가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 이웃은
막연한 대상이라기보다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마주하게 되는 특별한 사건일 수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마주하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다른데 멀리서 내 이웃을 찾지 마십시오. 내 삶에 마주하게 되는 사건에 반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을 향해서도 동일하죠?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너의 사랑과 도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보이거든 그에게 이웃이 되는 삶을 사는 것. 앎이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예전에 한 청년이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를 저에게 물은 바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내가 그의 편에 서면 나는 지금 내 친구들을 잃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딱 한마디를 했습니다. “답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두려워말고 그것을 하면 된다.” 저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귐의교회도 그런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써 붙이면 뭐하겠습니까? 우리가 실제로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저는 누군가 이 교회 공동체를 마주할 때, 이곳에서 사랑이 있는 따스한 공동체이길 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를 볼 때 이 안의 사랑과 행복함을 보고 ‘제자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꼭 그렇게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담을 넘어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사랑을 나누며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가 서 있는 곳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도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