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아이러니(irony) & 하모니(harmony) / 강정규 목사

2021-02-07 · 누가복음 1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 방법입니다. 우주에 점 하나도 안 되는 내가 어떻게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알 수 있나요? 존재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가능해요. 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장 객관적으로 그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배울 수 있는 그러한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언제나 도구는 잘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도구를 만들어도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무용지물인 것이죠. 저는 성결교

목사입니다. 신학적으로 웨슬리안이라고 해요. 그러나 다른 신학적 관점도 있어요. 대표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이죠. 흔히 말하는 장로교 신학입니다. 이것이 완전 다른가? 그렇지 않아요. 신학적으로는 다르지만 신앙적으로는 같습니다. 같아야 해요. 우리는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교단의 차이를 잘못 배우면 매우 편협해 집니다. 그럼 뭐가 다른가?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볼게요. 저에게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아들이 좀 더 어리니

밤이 늦으면 아들에게 이제 그만 놀고 “얼른 들어가서 자”고 말을 합니다. 반면, 딸이 늦게 자서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경우가 있죠. 그러면 딸에게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잠에 대한 제 견해는 무엇일까요? 자길 원하는 것입니까? 일어나길 원하는 것입니까? 질문 자체가 이상한 것이죠? 제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이중적인 사람인가요? 아니죠. 언제, 누구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알면 여러분은 저를 이중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성경의 어느 부분에는 ‘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에는 ‘자지 말라’고 말하는 부분이 적혀 있어요. 이것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 두 이야기 모두 자녀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죠. 신학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강조점의 차이로 나뉜 것뿐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다 관점마다 다를 수 있어요. 문제는 그것을 사용할 때 잘 사용해야 합니다. 일찍 잠을 자야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자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가르치면 사람을 망치고,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는 사람에게 계속 ‘자라’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고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이상한 책이 되고,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하나님이 되어버릴 수 있어요.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명확해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누가복음 10장을 가만히 잘 읽어보면 여기에 매우 유명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강조점은 전혀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반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한번 두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각각의 강조점부터 확인해 봅시다. 1.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라는 것을 볼 때, 성경에 대해서 나름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예수님이

다른 대답을 하면 따지고 시비를 걸려는 태도였던 것 같아요. 질문 내용은 ‘영생을 얻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은 안하시고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되어있고 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 사람은 자신이 율법에 대해서는 ‘교사’인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율법 이야기를 하니까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명쾌합니다. 예수님이라면 뭔가 독특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너무 뻔한 정답을 말씀하시니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 질문을 하는 율법교사의 속내를 이렇게 기록해요.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렇다면

이 질문 또한 정말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의 목적은 자신이 이웃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는 자임을 자랑하고 싶어서 물은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주신 답변이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제가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도 몇 차례 했기 때문에 오늘은 핵심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비유에는 강도만난 사람이 있고, 그는 유대인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이 사람의 곁을 지나가게 된 세 사람이 있죠.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실해야 하는 사람이죠.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또한 레위인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도맡아 하는 자로 구별되었으니,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율법에 성실한 사람일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와 교회에 열심인 성도의 대표 정도가 되겠죠. 그런데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지나가 버립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변명이 있습니다. 율법에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도록 되어있고, 레위기 21장은 시체와의 접촉을 금하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죽은 시체와 같이 보였거나, 피가 묻어 부정하게 될 염려가 있기에 지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 인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몰랐던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주일에 예배를 열심히 드려놓고, 예배 후에는 하나님 뜻과 반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죠. 이들에게 나타난 아이러니는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주님과는 멀리 있는 삶. 세 번째로 그 곁을 지나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리지만,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된 후,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땅에는 이방 민족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혼혈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탄생한 혼혈민족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릅니다. 원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한 민족이었으니, 가장 가까운 형제의 아픔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에 기초하여 혈통이 부정해졌다고 여기며 사마리아인과 사마리아 땅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도움을 준 것입니다. 그것도 대충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철저한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마친 후 이렇게 묻습니다. 36절입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그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을 합니다. 차마 자기 입으로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하기 싫었던 것이죠. 결국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사랑해야 할 순간에 사랑하지 않는데. 그 사랑이 편협한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는 것인데. 교회만큼 ‘사랑’을 강조하는 곳도 없죠. 그런데 때로는 교회만큼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곳도 없습니다. 아이러니죠. 정말 부끄럽게도 목회자의 세계에 들어가면 때론 더욱 삭막합니다. 지방회 회의에 전도사들이 처음 참여하면 많이들 시험에 듭니다. 목회자들의 사랑 없음. 아이러니죠. 정리해보면, 율법교사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인가?” 이것이고, 주님의 대답은 “네가 힘든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하라! 사랑은 누가 내 대상인지를 파악하는 것에 있지 않죠.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서 내가 사랑할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묻는 것에 있지 않고, 내가 이웃이 되어줘야 할 사람을 찾아 그의 이웃이 되어주는 ‘행함’에 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다. 사랑은 동사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이로써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것이 새 계명이다.” 독일의 목사이며 반(反)나치 운동가였던 ‘마르틴 니묄러(1892~1984)’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가톨릭 신도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 신도가 아니었기에 어느 날,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어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동일한 가치로 두십니다. 제가 금요일에 이런 이야기를 했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두순과 같은 범죄자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어떤 뉴스에 나오는 전과자를 사랑하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주님이 만나게 해주신 사람들, 사건들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자리마다 마주하는 사람들. 내가 만나게 되는 사건들. 그 안에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기억하며 거기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이 교회 안에서. 교회 밖 직장과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연히 내가 만난 사건 안에서, 성령님이 “지금 네가 사랑을 행할 때야” 말씀하시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이고 이들의 큰 오빠는 나사로입니다. 즉 3남매인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아끼시는 친분 있는 가족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마르다의 집은 베다니라고 나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귀한 손님인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방문을 하게 되면서, 맏언니인 마르다는 손님 접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분주합니다. 가뜩이나 손님은 많고 일손은 부족한데, 하나 뿐인 여동생 마리아는 음식 준비를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죠. 바쁜 와중에 그러고 있는 동생을 보니 얄미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 가운데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말씀의 내용입니다. 길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마르다처럼 일하려고 하지 말고, 마리아처럼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이 이야기를 보는 것도 가능은 합니다만, 그 경우 앞선 사마리아인 이야기와는 충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누가복음이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한 점을 주목해서 조금 더 폭넓게 해석을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한번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확실한 것은 마리아의 예배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선택을 존중하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하고 있는 ‘섬김’을 비판한 것은 아닙니다. 즉, A보다 B가 더 낫다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죠. “좋은 것을 택한 거야”라는 말이, “너는 나쁜 것을 택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죠. 만약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예배’드리는 것이었다면, 마르다에게 “너도 와서 예배부터 드리거라”고 말씀하셨거나, 혹은 스스로 깨닫고 함께 예배하는 마르다의 이야기로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픈 엔딩이에요. 마르다의 결론이 없습니다. 저는 이 본문이 마르다를

책망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섬기는 일을 한 것에 대한 책망은 아닙니다. 마르다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다뤄요.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마땅히 마리아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사실 그 비난도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께 향해 있었습니다. “주님, 마리아가 날 좀 도우라고 주님이 말씀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모습은 자신의 생각과 기준이 확고한 나머지, 예수님조차 가르치려 한 것이죠. 우리가

누가복음을 계속 강해설교를 하고 있으니, 누가복음의 관심사와 기준에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소외된 계층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고대 사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고, 여성은 성경 교사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받는 일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행동은 당시의 시대상에도 맞지 않는 모습이었죠. 그렇게 보면 마르다의 관점은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점이죠. 여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고, 예수님은 그것은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빼앗지 못한다’라는 표현으로 말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앞선 사마리아인 비유와 연결성이 생깁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마리아인과 마리아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소외된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관심, 따스함을 보여주고 있죠. 이러한 연관성은 누가복음을 몇가지 용법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사마리아인 이야기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 안드로포스 티스(어떤 사람) 귀네 티스(한 여자) <비교> 예루살렘-여리고 <비교> 마르다-마리아 하나님(퀴리오스: 주님) 예수님(퀴리오스: 주님) 누가는 이 두 이야기를 각각의 이야기로 들려주지만, 사실 비슷한 형식 안에서 함께 연결해서 볼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각각의 이야기에는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요. 먼저, 선한 사마리아인은 ‘실제적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점에서 보자면 마르다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왜 마르다가 지지를 받지 못했는지 고민이 필요하죠. 저는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상반되면서도 함께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은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율법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이중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저희 교회 또한 이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로고가 이것을 담고 있어요. with God, with Neighbor.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 마리아는 하나님(말씀)

사랑에 본을 보였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에 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함께 존재하여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죠. 강조점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마치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논쟁과도 같습니다. 그 둘을 가를 수 없듯이, 이 이야기들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아이러니(irony)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모니(harmony)라는 것이죠. 만약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만 주어지고 끝났어요. 그러면 우리는 ‘행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집중하게 됩니다. ‘율법’

아는 것, 지금으로 말하면 ‘말씀’을 아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마르다/마리아 이야기만 우리에게 있다면, 괜히 섬긴다고 하지 말고 ‘말씀이나 잘 듣자’는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성경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각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율법을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칭찬하셨어요. “어 네 이야기가 맞아. 잘 알고 있네. 이제 그렇게 행하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문제는 거기서 잘난 척하면서 한걸음 더 가서 혼난 것입니다. 마리아도 칭찬하지만 마르다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중요하죠. 행함은 중요해요. 필요해요. 다만 마르다가 책망 받은 것은 자기의 기준을 갖고, 분을 내며, 예수님조차도 가르치려 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죠. 그렇게 보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했던 태도의 문제로 다시 연결됩니다. 다르지만 같아요. 아이러니가 있지만 하모니가 있습니다. 이제 메시지를 분석했다면,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올바른 ‘적용’입니다. 메시지의 의미를 잘 알고, 필요한 상황에 맞게 써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잘못 쓰면 망합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행함이 없는 사람)이 ‘마리아’의 모습에 꽂히면 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예배 밖에 몰라요. 예배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 후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죠. 멀리 있는 이웃이 아니라 언니부터 적극적으로 돕고, 손님을 열심히 접대해야겠죠.

그것이 누가복음이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개념으로 온통 뭔가를 행하는 것에만 꽂혀서 뭔가를 하는 것은 충만한데, 정작 그 안에 말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꽂히면, 율법교사의 모습을 비판하며, 앎은 없이 오직 행함으로 뭔가를 얻으려 하게 되겠죠. 행위구원에 빠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되요? 교회에 와서 봉사는 열심히 해요. 그런데 예배만 드리려고 하면 사라져요. 피해 버려요. 10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라지 않아요. 스스로를 잘 파악하셔야 해요. 이 말씀으로 누군가에게 권면을 하고 싶으면 그 사람의 상태를 잘 파악해야 해요. 끝으로 저는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율법교사가 알고 있는 ‘앎’을 ‘삶’으로 옮기는 것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도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예배의 열정과 마르다의 섬김

모두 중요하고 어느 것도 놓칠 수 없지만,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순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같이 먼저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경험하고, 마르다의 섬김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율법교사가 아니라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왔다면 주님은 그에게 먼저 무엇이 중요한지부터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아야 해요. 마리아의 은혜를 경험하고 마르다의 섬김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충만합니다. 저희처럼 작은 교회에서

마르다가 얼마나 귀합니까? 마르다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너무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너무 귀해요. 예배 시간마다 눈을 반짝이면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이 늘 저에게 도전과 은혜가 됩니다. 만약 교회의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나서, 예배 시간에 졸고 있다면... 혹은 교회에 와서 예배보다 섬김만 하고 돌아가는 모습이 지속 된다면... 여러분의 영은 고갈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수많은 마르다를 바라보며, 여러분이 마르다에서 마르다로 되풀이 되며

머물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저의 책임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아이러니가 또 있죠. 마르다에서 마르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은혜를 맛보기 위해서는... 그를 위해 누가 대신 마르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예배 시간에 누군가가 챙기고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분주해요.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마르다의 역할을 해주며, 그 사람이 예배로 나아가 마리아의 은혜를 맛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그 마르다는

누가 되어야 할까요? 바로 마리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마르다의 헌신입니다. 그 이야기는 마리아에서 마리아로 끝나는 것도 올바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은혜를 맛보았다면,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이웃사랑으로 기꺼이 마르다가 되어주는 일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성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연말이 되면 마르다 찾기에 분주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사실 필요한 것은 연말이 이르기 전에 마리아의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하여, 마리아의 은혜가 마르다의

섬김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일 불리합니다. 저는 늘 마르다와 같잖아요. 뭔가를 해내야 하고. 그런데 여러분. 제가 마리아의 은혜를 가장 크게 경험하는 것은 지금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으로 예배에 나아와 최선으로 예배하는 여러분을 보면서 저는 은혜로 채워집니다. 설교를 붙들고 그것을 삶으로 녹여내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을 볼 때, 저는 큰 은혜를 느끼며... 저 또한 목사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으로 여러분을 양육하기

위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동역하고 서로 세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고갈되지 않고 충만함 가운데 섬기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우리 함께 갑시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귐의교회가 가진 우리의 목표를 담아 이 예배당을 설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예배하는 이곳은 with God을 위한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와서 예배하는 이 시간만큼은, 아니 장소의 구분이 아니라, 온라인이든 어디서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순간에는, 다른 것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내 전심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예배가 끝나고 이 예배당을 나서면, 바로 옆에는 with Neighbor를 위한 공간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위로하고, 서로를 세워주고, 때로는 나의 봉사를 통하여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다른 누군가 예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것을 돕고 지원하는 그러한 아름다운 동역이 이 안에 필요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마리아가 되고, 여러분을 위해 기쁨으로 마르다가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하여,

이러한 은혜가 예배로부터 충만하여서 삶을 적시는 그 감격이... 오늘도 우리에게.. 앞으로도 우리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설교 후 찬양을 함께 듣는 시간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균형을 중요시하며 마르다/마리아 이야기를 전했지만, 또 많은 분들은 마리아에 집중하여 그 말씀을 바라보면서, 알게 모르게 마르다의 섬김이 무시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자칫 소외될 수 있는 마르다를 기억하며 지은 찬양이 최근에 발표되었습니다. 2주 정도 되었는데요.

이 찬양을 통해, 교회에서 자칫 마르다의 역할을 빛도 이름도 없이 묵묵히 감당하는 수많은 마르다가 되어주시는 여러분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창작 노트** 민호기 목사 우리의 교회는 강단 위에서 ‘빛’나는 목회자나 찬양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주방과 식당, 주차장과 화장실과 로비와 복도 등 예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들에서 조용히 ‘소금’으로 녹아든 이들의 수고 위에 세워졌다. 성도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차 안내를 하고, 주보를 나누고, 입구에서

발열체크를 하고, 교회 청소를 하고, 강단을 꽃으로 꾸미고... 성별을 초월한 그 모든 마르다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그 중 성도의 사귐이 이뤄지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인 식당의 주인은 대부분 여성들이었고 그들은 마르다의 후예를 자처하며 그 곳을 지켜왔다. 그들에게는 주방과 식탁이 그들의 지성소였으며,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고 내놓고 뒷정리하는 모든 과정이 예배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리아만 기억한다. 마리아의 옥합은 너무도 유명해서 칭송도 받고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지만, 마르다는 일의 분주함에 쫓겨 더 좋은 편을 택하지 못한 사람처럼 다소 부정적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르다는 결점이 있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대부분처럼 말이다. 우리의 예배 공동체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균형을 이루어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