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번째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전체 24장 중 이번에 17장까지만 다루게 되기 때문에, 오늘을 제외하면 1,2회 정도의 설교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번의 설교를 통해서 다룬 내용을 잠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첫 설교는 ‘누가복음은 어떤 책일까’라는 제목으로 ‘누가’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특별히 4편의 복음서가 4개의 ‘초상화’와 같음을 나누었고, 누가복음이 특별히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복음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설교는 4장 본문을 바탕으로 ‘메시아 취임식’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밝히신 자신의 정체와 사역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아 관련 본문을 읽으시고, 이것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죠. 바로 메시아의 희년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메시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복음의 대상이 됨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그들처럼 복음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해서 말한 설교가 세 번째 설교인 ‘프토코스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평지설교를 중심으로 메시아의 나라에 참여하는 백성들의 특징은 ‘프토코스’였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전적으로 삶을 의지하는 가난한 상태. 꼭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연약함들이 주님을 붙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죠.
삭개오가 평생을 붙들고 살았던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의 삶이 변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처럼,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될 때,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네 번째 설교는 ‘신앙 : 길을 걷는 여행’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까지 여러 기적을 행하시며 사역하신 후, 제자들의 메시아에 대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변화산 사건을 통해 영광스러운 소망을 보여주셨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었음을 밝히시며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아직 미숙하지만 이 길에 함께 동행하며 배워가고 있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 길에서도 제자가 되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즉시 순종하는 것이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 길에 서 있고 이 길을 함께 완주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 설교는 ‘irony & harmony’로서
10장에 나타난 2가지 사건을 대비하여 봤습니다. 각각의 강조점은 차이가 있지만, 두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균형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추구할 것인가? 주님의 그러한 가르침이 깊이 묻어나는 것이 10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묵상한 내용은 누가복음 12-13장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유명한 어떤 사건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르침과
사건이 짧은 에피소드로 나타나요. 그래서 저도 참 설교의 주제를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러한 구절이 나와요. (눅 13: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메시지 : 예수께서 계속해서 각 성읍과 마을로 다니며 가르치셨으나, 시종일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에서 ‘여러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또 마주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실제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어요. 그러면서도 그 방향은 주님의 사명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지난 설교에서 본 것처럼 ‘가르침’과 ‘행함’을 통해서 ‘앎’과 ‘삶’의 균형 속에서 제자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씩 바라보면 단편적인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는 말씀들이지만 결국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묵상해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나라의 백성의 삶이 무엇인지를 이 시간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눅 12:1) 그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 (새번역 / 개역개정에서는 수만 명) 메시지 : 무리가 수천 명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일차적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무리’가 있었고 ‘제자’가 있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반면 ‘제자’는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그들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무리보다 더욱 능력이 있는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에서 능력은 딱 한가지뿐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이 한 가지를 결단한 것이고, 무리는 아직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무리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못 받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리도 언제든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 본 것처럼, 부자 청년의 이야기, 제자가 되겠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가르침을 들었다고 모두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오늘날 교회에는 누가 있는가? 바로 무리들과 제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정확한 진단입니다. 이곳에는 무리가 있고, 제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구별해낼 능력은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판단해봐야 합니다. 나는 무리인가, 나는 제자인가? 더
능력 있어서 제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철저하게 자신들의 치부를 공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세상이 말하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삶의 주인을 바꾸면 그 나라를 얻습니다. 13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눅 13:23a)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주님의 대답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많고 적고는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말씀하십니다. 어디까지가 합격인가? 얼마나 많은가? 제자들은 늘 이런 것을 따졌어요. 많고 적음에 대한 것, 합격자의 수는 세상의 관심입니다. 제자가 마음을 둬야할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전념하여라.” 제자의 관심은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진심으로 힘쓰고
있으면 그것이 제자입니다. 그 판단은 주님의 몫이죠. 또 비유로 가르치시죠. “평생 동안 주인 근처에 있었다고 구원 잔치에 앉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어느 날 잔치가 열리면 너희가 들어가고 싶다고 문을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너희를 위한 자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평생 주님을 알았습니다’ 하며 따져도 주인은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안다고 하지만, 너희는 나에 대해서 조금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주님을 알았더라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는 늘 이러한 반전이 있습니다. 탈락의 반전. 그 이유는 무리들이 스스로 자신이 제자인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래도 교회를 이 정도 다녔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내 자리는 있겠지.” 죄송합니다만, 교회에 다닌 세월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돈으로도 못가고, 힘으로도 못가고, 벼슬로도 못가고, 지식으로도 못가고, 어여뻐도 못가고, 마음 착해도 못갑니다. 헌금 많이 해도 못가요. 직분으로도 못가요.
목사라도 참된 제자가 아니면 못갑니다. 거듭나야만, 새로워진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리가 수천 명이 있다고 해요. 뭐 지금 교회들은 수만 명이 모이기도 하지요.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그 수천 명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서로 밟힐 지경으로 몰려들었던 그 무리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님의 팬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그분 가까이 있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많았으나, 정작
그분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따르던 제자는 적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자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 대부분 도망치기도 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에 실패한 듯 보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그 실패 또한 가까이서 따르고자 힘썼던 제자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주님께 전적으로 뭔가를 걸어보지도 않았기에 실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구원에 실패합니다. 반면 제자는 실패한 듯 보이지만, 유다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그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
구원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있으면서 신앙적으로 아무런 고민도 없이 다닐 수 있어요. 죄송하지만, 큰 교회의 일부가 되어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욱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고민과 갈등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냥 말씀을 좋은 교훈으로 듣고 지적 동의만 한 후, 그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는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편안함일 수 있습니다. 반면 제자들처럼 주님 가까이에
가면 불편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요. 우리를 바꾸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고 고민이 깊어졌다는 것은 제자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민을 갖고 주님께 나아가서 기도해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과 다른 주님의 진리를 깨닫고 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바뀐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나라가 가져다주는 세상과 다른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딪힘이
있었어요.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힘써야 했고, 때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이 맡기신 일을 순종하며 따라야 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제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과 눈물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 방법은 간단해요. 내 안에서 성령님이 시키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법도 간단합니다. 듣고자 하면 됩니다.
혹은 물어보세요. 주님 제가 주님을 닮아 어떤 삶을 살면 좋을까요? 방법은 간단하고 순종은 내 몸을 쳐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 기독교의 가장 큰 이슈와 화두는 동성애인데, 저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 교회 안에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그러한 성향이 내면에 있어서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사랑할 것입니다.
함께 그 어려움을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로 이겨내며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목회입니다.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세리 출신의 마태와,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하는 열심당 출신(셀롯)의 시몬이 함께 형제가 되는 것이 주님의 제자공동체입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도 나랑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맞아요. 그런 사람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자라면 성령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안에 소외된 사람들이 보입니까? 보인다면, 느껴진다면 그들이 따스해질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교회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주십시오. 누군가를 비방하는 소리를 멈추고, 자신을 낮추십시오. 세상과 이곳이 다를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힘쓰고, 세상에서 연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연합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걷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힘써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부디 이 말씀 앞에서 물러서지 마십시오. 타협하지 마십시오. 제자라면 말입니다. 위로를 드린다면, 결국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 것은 ‘제자들’ 뿐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니라, 12명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120명의 공동체.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들이 성령의 강림을 맞이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우리 제자로 살아 하나님 나라를 맞이합시다. 2)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의 방식 (눅 12:4)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누군가 여러분을 위협하고 설령 죽인다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실제적인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일이었습니다. 종교 불량배들이 위협한다고 해서 진실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육체를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삶의 방식이
이 세상 너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사실상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내 편을 들어라. 그러면 나도 모든 천사들 앞에서 너희 편을 들 것이다.” 즉,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신앙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심판 앞에서 우리를 위해 증언하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오해나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비방하였을
때 그것은 참고 기다리시겠지만, 성령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면 그것은 참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몰라서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이제는 성령을 모독하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약 너희를 공격하고 박해하는 이들이 너희를 곤란하고 괴롭게 할 때, 너희에게 필요한 말은 성령께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 제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아가는 자라는 것이죠. 성령은 그 삶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삶의 방식은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제자인 것이죠. 12장에는 그러한 세부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죠. 어떤 이들은 유산 분배의 문제까지도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은 사실 거기에 정답은 없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제자된 자들이
더 우선시 여겨야 하는 것이 있다면 ‘탐심’을 부리지 않게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부자는 풍년이 들었으니 더 창고를 크게 지어서 더욱 부를 축적하고 살고자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왜 그가 어리석은 부자가 됩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획은 오늘밤 그를 데려가시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탐심을 부리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어차피 그게 다 자녀들에게 남겨지는 것이니
자녀를 위해 좋은 일을 했네.” 그러나 그 부자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선을 행할 기회에 반응하지 않았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부요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에게도 동일한 가치를 물려준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나누며 살아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면,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을 남긴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누리는 영광과 아버지가 거하시는 나라를 우리에게 상속하여 주고 싶은데, 그 나라는 이런 부자와 같은 삶의 태도로는 상속받을 수 없기에 답답하신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관점을 갖고 사느라,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그러한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해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참새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자녀 된 너희일까 보냐.” 너희를 세세하게 돌보시고
계시니 겁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변하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겁나는 일입니까? 있으면 지키느라 겁나고, 없으면 불안해서 겁나고. 변하지 않는 주님께 내 마음이 있어야 해요. “너희 배속에 넣은 음식이 너희 내면을 바꿀 수 없고, 걸친 옷이 너희를 말해주지 못한다. 먹고 마시는 것은 까마귀도 염려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들로 염려하며 살지 말라.” 주님이 돌보신다는 것이죠. “거울 앞에서 염려한다고 키가 1센티미터라도 커지더냐? 그런 것은
어차피 너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을 보아라. 들판에 있는 꽃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며 그 안에서 아름답게 자라간다. 그 꽃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너희들을 돌보지 않겠느냐?” 손에 무엇을 넣을까에 온통 정신이 빼앗겨 있으면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고 싶으면, 세상 나라의 삶의 방식과는 달라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죠.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라. 하늘 은행은 파산하지
않고 강도 당하지도 않는다.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라.” 세상 나라는 소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에 완주하기 위하여 방해되는 것을 버리는 결단에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스펙이 날 지켜주지 않습니다. 나를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에요. ‘제자의 삶은 무엇을 의지할까?’를 결정하는 것이죠.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가야죠. 주님이 주신 삶. 다만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고,
실력을 쌓는 이유가 달라야 해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터에서도 충실히 살아가고, 돈도 벌고, 잠재력도 개발하는 것이죠. 그것으로 보장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눅 12: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눅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눅 12: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들어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한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 박히는 진정한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이 말씀을 갖고 씨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래요. 저도 마찬가지로 이 말씀에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제 본성은 근심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더욱 추구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자니까. 예수님은 이런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인데 그분이 아시죠. 다만 그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는 눈을 돌려서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29-30절.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일들로 염려하며 안달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도 알지
않느냐. 하나님이 너희의 실체가 되시고 주도하시며, 그가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라.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은 그가 채워주신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 하나님이 너희의 실체가 되시고 주도하시며 공급하신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못 믿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세상의 어떤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제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야 제자입니다. 13장에 넘어가면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삶에서 이런 저런 안 좋은 일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커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은 결국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을 얻느냐, 영적인 죽음을 당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드시죠. 무화과나무를 심으면서 열매를 기대했으나
3년간 기다려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 나무를 잘라내고자 하지만, 정원지기가 더 정성껏 돌보겠으니 1년만 더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관리했는데도 열매가 없으면 그 때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3년의 시간에 맺지 못한 열매. 이것은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를 상징합니다. 나무를 찍어 없앤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질 심판을 상징하죠. 하나님도 지금은 심판을 미루며 회개의 열매 맺길 기다리시지만 그 기다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내가 달라져야 할 부분이 있음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 마음을 잊지 마세요. 내가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내가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내 방식대로 살았던 모습을 돌이키고, ‘무리’로만 머물렀던 모습을 청산하고 제자로 살기를 다짐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삽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 하나님 나라에는 ‘이미’와 ‘아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 땅에는 그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시작된 것이죠. (눅 13: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눅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눅 13: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눅 13: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이 알지 못하게 시작하였으나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적은 누룩이 서 말(27kg, 150인분)의 양식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래서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나라. 주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나라이죠.
지금 우리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필연적인 일이 있습니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 표현입니다.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12: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눅 12: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아마도 이 말씀은 굉장히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죠. 우선 이 49-50절 말씀부터 이해를 해봅시다. 성경에서 불이 상징하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는 2가지 경우로 좁혀집니다. 하나는 심판/정화의 이미지입니다. (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용례는 ‘성령의 불’입니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과 성령의 강림을 연결시킵니다. 즉, 여기서도 불은 두
가지 이미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상에 불을 지르기 위해서 오신 거시죠. (눅 12: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주님이 오신 목적은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았죠. 성령의 강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눅 12: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여기서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세례는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의미하지요. 로마서 6장에서도 세례는 죽음과 연결됩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위하여 주님은 나아가고 있고, 그것을 위해 당면한 괴로움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야 세상에 불이 옵니다. 앞서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있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무리는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이요. (눅 12: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메시지 : 너희는 내가 모든 것을 순탄하고 무난하게 만들려고 온 줄 아느냐?
아니다. 나는 분열과 대립을 일으키러 왔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죄악 세상, 사탄의 통치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사탄의 나라와 영적인 전투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순탄하고 무난할 수 없어요. 그것은 이 세상의 구조와 방식에 대한 인정이기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인정할 수 없어요. 뒤집어야
하고 주님은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세상의 방식과 죄에 대해서 승리하셨고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다만 최종 승리의 날까지 우리는 남은 싸움을 합니다.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음을 여러 비유로 말씀드렸죠. 야구에 빗대어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그때는 끝납니다. OX 퀴즈에서 시간 안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처럼 답을 알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 나라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
나라에 참여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중간은 없어요. 먼저 그 결정의 시작은 내 내면입니다. 나는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 무리로 살아갈 것인가. 거듭난다는 표현은 옛사람의 죽음, 내 본성의 패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 손 들고 항복하여 주님께 붙들린 삶,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가 ‘프토코스’였어요.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거듭남,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서의 분열과 갈등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갈 길을 정한 후에도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나아가던 방향에서 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이킨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맞서게 됩니다.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경험하죠. 그 갈등을 가장 먼저 경험하는 곳은 가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눅 12: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이 말씀은 미가서 7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아마도 가족 안에서 한 신앙을 품고 살아가지 못할 때, 이러한 어려움을 많이들 직면하시겠죠.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어디서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주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은 죄로 인해 망가진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예수님이 맞이해야 하는 것은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거절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내하고 견뎌야 합니다. 우리가 매월 첫 주마다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세상 나라는 대립과 갈등이 있으면 힘으로 그것을 싸워서 무찌르고 짓밟습니다. 애굽이 그러했고, 앗수르가 그러했고, 바벨론이 그러했고, 로마가 그렇게 했습니다. 세상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은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맞이하지만, 그 상황에서 사랑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입니다. 많이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래서 울어야 해요. 그러나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 그렇게 삶으로 나아가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잊지 마십시오. 제자는 딱 한 가지를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다른 능력 내게 없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참된 마음. 그 마음을 주님은 받으십니다. 온전하지 않지만 말씀 앞에 진심으로 온전하게 반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오늘 이곳에 그런 우리의 그런 마음들이 모아져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꿈꾸고 소망합니다. 마무리 :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 세상의 절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에 실제로 적용해야 함을 깊이
고민해보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손 드셔야 해요. 항복하며 고백해야 해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 안에서 일하여 주십시오. 주님을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내 삶의 주인을 바꾸어,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내 주인을 바꾸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거면 됩니다. 다른 능력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연약한 자들과 함께 일하셨지요.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것은 그들이 가장 작은 민족, 가장 연약한 민족이기 때문이고, 제자들의 출신 또한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아니라, 변방 갈릴리의 이름 없고 배움이 짧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이 좋아할만한 구석이 많은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며, 자신은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른 무엇을 준비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스펙 쌓아서 뭔가를 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칫 변명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부르셔서 은혜로 들어갑니다. 믿고 순종하여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신비 가운데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나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도 주님처럼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보여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곧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제자 공동체가 되어서,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그러한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제자들의 변화가 우리들에게 복음의 도전이 된 것처럼... 오늘도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