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사도행전 9장 / 인(人) / 강정규 목사

2021-02-19 · 사도행전 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금요기도회를 시작하면서, 금요기도회 설교만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강해설교’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또 때가 되면, 금요일도 특정한 책을 한권 정해서 강해를 해나갈 수도 있고, 어떤 책을 갖고 시리즈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를 처음 개척하고 나눴던 것처럼,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에 대해서, 다루는 설교를 자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귐의교회입니다 우리는 사귐의 기도를 원합니다 하나님 지금 이곳에 왕좌의 게임 불편한 진실 빈

집의 거짓된 자유를 버리고 자유를 위한 구속, 구속을 경험한 사랑 하나님 나라의 회복 Being Useless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고요한 속삭임 갈급함의 청신호 한 형제와의 대화 작년 10월 이후로 금요일마다 나눴던 설교는 모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초점보다,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설교”를 마음에 두고 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특별히 누가복음을 주일마다 다루면서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주일마다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저도 제자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계속 묵상하고 고민하게 되는데요. 오늘도 하나님이 사람을 세워 가시는 방법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가 요즘에 시간 날 때, 보는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이미 3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인데, 그때는 안보다가 최근에 보고 있는데요.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입니다. 그렇게 흥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많은 사람이 이 드라마에 대해 지금도 기억하고, 명대사에 많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소개를

찾아봤더니 이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무엇일까? 교회가 무엇일까? 사실 작년 말부터 저를 고민스럽게 만드는 질문들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목회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회를 이루는가? 뻔한 답들도 많이 있겠지만, 혹시 제 안에 그 질문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더욱 질문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목회는 참 어렵다’ 입니다. 성경공부, 설교는 노동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노동의 시간을 성실히 거치면 그에 비례하는 결과물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목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습은 획일화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르고 공동체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죠.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답이 된다는 명확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정말 각 사람에게 진리로 전달되고, 우리 공동체의 삶의 방식까지 투영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가 함께 바라봐주고 기다려주며

그리고 사랑하며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되라, 먼저 신자가 되라, 먼저 학자가 되라, 학자가 되기 싫은 사람은 목사가 되지 말라. - John Calvin 저는 칼빈이 했던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자가 되는 삶을 살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정말 시간을 쪼개어 배우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평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시 보면, 결국 목사가

되는 길의 첫 걸음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먼저 되고, 거기서 우리는 신자가 되고, 목사가 되기 위해 학자가 되는 것이겠죠. 목양실의 책상 앞에서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며 수많은 시간을 학자처럼 보내어 보다가, 문뜩 사람을 좀 더 이해하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방법으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는 하찮은 변명을 지금 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머리 식히는 것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많이 배웁니다. 사실

정말 예기치 않았지만 제 삶을 많이 바꿔놓은 것이 드라마였어요. 제가 드라마를 그렇게 다 챙겨보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그때도 뒤늦게 몰아서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청년부 전도사인데.. 나는 청년들의 삶을 너무 모르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들은 자신의 삶을 아무것도 모르고, 경험하지도, 아니 공감하지도 못하는 내가... 무작정 설교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다그칠 때, 그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이들의 마음을 만져주었을까? 아프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항상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신학교라는 곳에서만 공부를 하고, 다른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저의 모습에 과제가 남게 되었죠. 언젠가 교회 밖 세상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봐야겠다는 생각들. 그리고 개척을 하면서 일터에서 4년 동안 그 과제를 아주 조금은 실천해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제가 아마도 많은 성도님들을 잘 이해해주지 못하고 다독여 드리지 못할 때가 많을 거예요. 지금도 그런데 교회 안에서만 계속 살아가던 저였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종교 엘리트주의에 빠졌을지도 몰라요. 요즘 새삼 깨닫는 것은 예수님은 왜 30세까지 평범하게 사셨을까? 그분은 평범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보통 젊은 나이에 뭔가를 빠르게 빠르게 이뤄내고 성취하는 것을 유능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최연소’라는 타이틀에 얼마나 집착을 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때를 기다리셨고, 그 시간까지는 종교인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삶을 사셨다는 것이죠. 거기에 저는 ‘공감’의 키워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 아쉬운 것이 예수님이 결혼을 하셨더라면 어떠했을까? 좀 더 우리의 삶에 현실적이고 선명한 교훈들이 더 많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허튼 생각도 해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부를 수 있고, 타자를 기준으로 볼 때는 ‘하나님 이해, 사람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는 결국 진정한 사랑은 ‘세 가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하나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왜 여기에 ‘자기 사랑’이 들어가느냐?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거든요.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지 못하면 결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든요. 그리고

참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배워서 가능해지는 것이죠.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사람 인’이라고 잡았습니다. 사람 인(人)은 여러 해석이 있는데, 두 변이 서로 의지하는 형태라고도 하고, 한자의 첫 모습인 갑골문의 형태를 보면 한 사람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아마도 처음으로 그림문자를 만든 사람이 결국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리지 않았겠어요? ‘인간’은 ‘사람 인 + 사이 간 = 사람 사이’를 의미하는 표현이에요. 결국 인간이라고

하면 사람과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포괄하는 내용입니다.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혼자 있어도 우리는 예배할 수 있죠. 그러나 교회는 어원 자체가 모임입니다. 한자의 교회도 ‘교’는 가르칠 교, ‘회’는 모일 회입니다. 물론 우리는 가르침보다 사귐이 더 본질이라고 말했지요.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도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하는 모임이 교회이죠. 주님 또한 이 땅에서 공동체를 항상 이루셨죠. 제자 공동체. 그 불편한 일을 주님은 늘 추구하십니다.

주님은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제자들을 각기 전도를 보낼 때에도 둘씩 보내세요. (눅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초대 교회시대라고 부르는 때, 가장 강력하고 독보적인 전도자라면 단연 사도 바울입니다. 실제로 그는 매우 뛰어난 신학자이자 설교자였으며, 열정 있는 복음전도자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항상 동역자가 있었어요.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실라. 바울과 디모데. 또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볼로. 그러나 이러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바울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어쩌면 바울보다 덜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1. 스데반 스데반과 바울의 관계를 아시나요? 어떤 관계죠? 살인자와 피해자입니다.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박해합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그 강경한 무리 가운데 청년 사울이 있었어요.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사울이라고 불렀죠. 바울의 무리들이 스데반을 죽입니다. 돌로 쳐서 죽여요. 여러분,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입니까? 한 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스데반이 그 돌에 맞아 죽어가는 과정에서 기도를 하죠.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그런데 이 기도가 누구의 기도를 닮았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죠.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를 받았어요. 스데반도 예수님이 가셨던 발자취를

따라 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참된 제자이니까요. 스데반도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하며,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응답됩니다. 바로 이 무리 가운데 속해 있던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찾아가셨고, 그 만남을 통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2. 아나니아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 앞을 못 보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준비시킵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바울은 지금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잡아서 처단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나니아에게 명하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참된 제자란 어떤 자입니까? 딱 하나를 잘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아나니아가 얼마나 싫었겠어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바울이 맞이한 이 심판과 같은 사건이

통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울을 찾아갑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이 표현은

아나니아의 순종을 의미하죠. 그가 바울을 찾아가 기도하고 그로 말미암아 바울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하시는 것을 방해하는 한 가지 요소가 있어요. 사람의 불순종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 내에 선한 뜻을 실현하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해나가실까요? 사람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후속작이죠. 이 영화에 너무 중요한 대사가

있어요. “누가 신에게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누군가 가족이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신이 뿅하고 묘한 감정을 느끼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사랑을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갑자기 핑크빛 기운을 주셔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죠. 계속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고 하나 되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그 일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용하기 위해 다듬어가고 계신 이 순간, ‘아나니아’의 순종이 없었다면 다시 누군가를 부르시겠죠. 또 그 누군가가 순종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땅을 헌금하고 그것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나오는 그 아나니아보다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사람. 우리가 대부분 기억조차 못하는 이름일지 모르지만, 그가 없다면 바울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바울의 회심 사건에 있어서 절대적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3. 바나바 마지막으로 바나바입니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헌신했던 인물이었고, 복음 전파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회심한 사울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간첩과 같이 교회 공동체 내로 침투하려는 계략으로 여깁니다. (행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행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 바로 바나바가 바울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며 그의

편에서 그를 변호해 주었기에 바울은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를 데리고 선교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죠. 바나바가 바울을 믿어주고, 그와 함께 일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지금과 같이 기억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즉, 스포트라이트는 바울이 받았을지 모르지만, 바울의 삶의 순간순간 그를 돕는 결정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아마도 주님은 그들을 마음 깊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스데반, 아나니아, 바나바. 이들의 헌신과

순종, 용서와 사랑, 포용이 있었기에 바울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바울에게 선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만한 이유와 명분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이 시간, 나의 좌우를 바라보십시오. 화면을 통해 예배하시는 분들도 우리 공동체를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누군가를 두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세우고

돕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연약하고 힘들 때 내 주변에 힘이 되도록 붙여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품고, 서로를 세워주고 이해하고 함께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이곳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스데반이 됩시다. 우리가 아나니아가 됩시다. 우리가 바나바가 됩시다. 그리고 바울과 같은 이가 됩시다. 각자에게 주신 모습대로, 각자에게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며, 주어진 시간들을 살아가는 사귐의교회 모든 형제자매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