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에 대한 두 번째 설교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지난주 설교로 우리가 이미 다뤘습니다. 개인별로 복습하고 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리가 안 된 분들을 위해서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시대가 지속되다가, 결국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그때 남유다도 47개 성읍 가운데 예루살렘 하나 남은 상황이 되는데,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시죠.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므낫세, 아몬 왕 시대를 거치고, 요시야가 왕이 됩니다. 요시야 통치 13년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명을 받습니다. 예레미야가 사역한지 4년 후, 성전을 보수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고(왕하 22:8), 요시야는 말씀을 기준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과 우상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세웠으며, 유월절 예배를 다시 회복합니다. 이 당시 유다는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신흥 강호 바벨론의 등장으로 앗수르의
지배력이 약해졌던 타이밍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남유다는 종교개혁과 함께 왕권 강화를 이뤄냈던 것이죠. 근동의 패권이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던 시점에 애굽이 나섭니다. 애굽의 바로 느고가 동맹국 앗수르의 위기를 도우며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한 것이죠. 이 애굽의 군대를 요시야가 막아서게 되고, 609년 므깃도 전투에서 결국 요시야가 죽습니다. 이로 인해, 유다는 다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이어서 605년에는 갈그미스에서 애굽 vs 바벨론의
대결이 펼쳐지는데, 바벨론이 승리하며 명실상부 최강국으로 올라섭니다. 약 100년 동안 최강자로 군림했던 앗수르, 그 앗수르의 지배에서 유다도 벗어나게 되었으나, 이후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 낀 처지가 됩니다. 양 강대국 사이에서 강대국의 입맛에 따라 유다의 왕은 폐위되고 세워지곤 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전부터 유다를 향한 예언자로 살았던 예레미야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유다의 왕과 백성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보자면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 낀 약소국 유다가 균형 외교에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그들이 친애굽 노선을 택했던 것은 정치적으로도 잘못된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남한산성>이라는 영화에 빗대어 이 상황을 설명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자면 관점 자체가 바뀝니다. 애굽과 바벨론 중 누가 더 힘이 센가, 누구를 의지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관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세상에는 늘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이 그보다 크신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강대국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스기야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이 그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선택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 시대의 앗수르 침공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강대국의 정복 전쟁이지만, 신학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이사야 시대의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도구 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남유다를 심판하셔야 했을까요? 남유다가 심각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 예배가 없었는가? 아닙니다. 풍성한 제물이 동반된 예배가 남유다 안에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사 1: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유다 백성들은 시마다 때마다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많은 제물을 가져가면 되겠지?” “주님은 우리의 제물을 보고 기뻐하시겠지?”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우리가 헌금을 많이 드린다고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헌금에 담긴 것이 나의 과시이고,
나의 만족이고, 나의 투자 혹은 내 부끄러운 삶에 대한 변명이라면... 그래서 그 헌금 속에 내 예배의 마음과 고백이 담겨 있지 못하다면 억만금으로라도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 1: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들은 제사와 예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러 뜰만 밟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사 1: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사 1: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여러 행사와 절기도 싫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받고 있는 것이 지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기도하여도 듣지 않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하더라도 듣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 듣지 않습니까?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우리는 얼마 전에 민수기를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절기’를 가르치는 장면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니라, ‘시간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장소에 들어와 있어서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구별된 시간을 드리기에 예배자입니다. 절기는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고,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간을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음 없이 시간만 떼우는 관계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의무감으로 만나는 만남을 좋아할 수 없죠. 겉모양만 있을 뿐, 마음은 없는 껍데기 신앙이라면 과연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딤후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을 보면, 수많은 잘못을 행하는 사람들의 죄 목록이 나오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조차도 5절에 보면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다가, 때가 되어 경건 생활을 한다고 나오는 그 겉모습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위선’으로 보시고 그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여러분. 북이스라엘이 왜 멸망합니까? 앗수르가 강해서입니까? 앗수르가 강한 것이 맞지요. 그러나
그 논리대로 보자면 남유다도 앗수르에게 망했어야 합니다. 앗수르의 침공 앞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차이는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도 예배도 있었고 절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짜 믿지 않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멸망하고 맙니다. 유다도 히스기야 시대에 있던 앗수르의 공격 앞에서 자기가 의지하던 방법대로 했을 때는 멸망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그 위기에서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히스기야 다음에 세워진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 아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하 21: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왕하 21:20)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리고 세워진 왕이 ‘요시야’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참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행동이 ‘심판’입니다. 영원한 심판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은 현세적 심판을 통해서 사람들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래야 영원한 심판 전에 돌이킬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참고 참다가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죄에는 항상 임계점이 있습니다. 임계점(Critical Point)에 다다르면 하나님의 심판은 나타납니다. 즉, 므낫세, 아몬 시대를 거치면서
남유다는 다시 하나님의 심판 임계점에 다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요시야가 왕이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13년에 예언자가 되죠. 이때는 종교개혁 전이었습니다. 그 시기의 남유다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남유다가 돌이키도록 경고하시려고 부르신 것이죠. 그래서 예레미야의 소명기사를 보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렘 1:14)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북쪽에서 재앙이 넘쳐 흘러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내릴 것이다. (렘 1:15) 내가 북쪽에 있는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이 땅으로 불러들이겠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몰려와서, 예루살렘 모든 성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사방에서 그 성벽을 공격하고, 유다의 모든 성읍을 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1:16) 내가 이렇게 내 백성을 심판하는 까닭은, 그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서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숭배하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렘 1:17) 그러므로
너는 이제 허리에 띠를 띠고 준비하여라. 일어나거라. 내가 너에게 명하는 모든 말을 그들에게 전하여라.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그들을 두려워하면, 오히려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무서워 떨게 하겠다. 이 북방왕국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볼 때,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북쪽에서 유다를 항해 내려오는 ‘바벨론’을 의미할 것입니다.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말씀에서 보듯이 남유다의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상숭배를 오해합니다. 하나님 안 믿고, 다른 신을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하나님을 안 믿었을까요?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에서 꼬박꼬박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나를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우상숭배’를 하며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여기서 드려놓고, 실제로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우리는 과연 그 우상숭배의 죄와 무관할까요? 예배는 이곳에서 드리지만, 내 삶이 실제로 더 의지하고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은 전혀 다른 판단을 합니다. 자신들은 할 것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 탓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배했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았느냐며, 하나님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부재를 탓합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많은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런 마음, 이런 분노가 있어요. “내가 주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런 헌신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시는가?” 저는 신앙생활 하다가 몇 번 이런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여러분, 반대로 저도 사람인지라 가끔 제가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다보면, 정말 이런 기도가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 이 형제가, 이 자매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함께 기도하고 응원하게 되는 삶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교회 안에는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그 삶을 보면,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싶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제대로,
전심으로 믿어본 적이 없는 안타까운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의 남유다의 백성들이 예배는 드리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버린 삶이라고 고발합니다. 예레미야 2장의 메시지 성경 말씀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라! 너희, 이스라엘의 집이여! 하나님의 메시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너희 조상은 나를 버리고, 거품에 불과한 우상과 붙어살다가 자기들도 거품이 되고 말았단 말이냐?” 제사장이라는 자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고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종교 전문가라는 자들은 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통치자들은 내게 도전했고, 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전하면서, 허망한 꿈과 우둔한 계획에 지나지 않는 우상을 좇았다. 나의 백성은 나의 영광을, 허망한 꿈과 우둔한 계획에 지나지 않는 우상과 바꾸어 버렸다. “내 백성은 이중의 죄를 범했다. 그들은 나를 버렸다. 그들은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대신 땅에 물웅덩이를 팠다. 물이 새는 물웅덩이, 하수구나 다를 바 없는 물웅덩이를
팠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너의 두개골을 박살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네가 하나님을, 바른길로 인도하려던 네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냐? 이제 와서 이집트로 도망간다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시원한 나일강 물 한 잔 정도일 것이다. 앗시리아로 도망간다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청량한 유프라테스강 물 한 잔 정도일 것이다. 너는 악행의 대가로 실컷 두들겨 맞을 것이다. 불충의 값을 톡톡히 치를 것이다. 감히
네가 ‘나는 죄로 나 자신을 더럽힌 적이 없습니다. 음란한 신 바알들을 찾아다닌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느냐! 왜 그렇게 몸을 망가뜨리느냐? 대체 무엇을 그렇게 좇는 것이냐? 그러나 너는 말한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방 신들에 중독되어, 멈출 수가 없습니다.’ 왕, 제후, 제사장, 예언자들과 함께 포로로 붙잡히고 나서야 원통해한다. 그들은 나무에다 대고 ‘나의 아버지!’하고, 돌을 집어 들고서는 ‘나의 어머니!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 한다. 그들은 내게
늘 뒤통수만 보여주었다.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거리낌 없이 달려와서는 ‘손 좀 써주세요!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하고 소리 지른다. 어째서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신들, 네 손으로 만든 그 신들에게 가지 않느냐? 그들을 깨워라. 재앙에서 구해달라고 하여라. 유다야, 너에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있지 않느냐. 너희는 뻔뻔한 얼굴로 말한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어디, 하나님이 신경 쓰시더냐?
그분이 내게 벌을 내리신 적이 있더냐?’ 그러나 보아라, 심판이 오고 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너를 향해 오고 있다. 너는 한 가지 죄를 도모하다 실패하면 아무렇지 않게 또 다른 죄를 도모한다. 그렇지 않느냐? 그러나 기억하여라. 앗시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도 너희를 내팽개치고 말 것이다. 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거기서 나오게 될 것이다. 나 하나님은 네가 의지하는 모든 자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 너는 그 누구에게서든 손톱만큼의 도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예레미야서 2장은 온통 유다의 잘못에 대한 고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부분이죠. 당시 유다 백성이 가장 심취하고 있었던 것은 ‘바알 종교’였습니다. 바알 종교는 가나안의 종교이자 문화였습니다. 풍요와 쾌락으로 대표되는 것이 바알입니다. 세상의 풍요를 원하는 사람들이 바알을 따랐고, 바알 종교는 거룩 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아갔습니다. 저에게 예레미야서를 가르쳐주신 <김필회 교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주해 하였습니다. “오늘날 바알은 없지만 바알과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참 많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지 하나님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가 바라보며 살 때가 많다. 돈으로부터 떠났다고 자만하지 말라. 돈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살기는 어렵다. 늘 싸워야 한다. 돈의 문제를 겉으로는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겉으로도 무겁게 생각하고 무섭게 생각하라.” 만약 예레미야가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 시대를 고발한다면 과연 어떨까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웅덩이를 파고 그것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는 모습, 아무리 경고해도 하나님 외에 세상의 즐거움, 물질적 풍요 등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습들, 이미 중독되어 경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아버지, 어머니’ 하다가도,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께 그때만 찾아와서 ‘손 좀 써주세요’ 하는 모습들, 그런 삶을 살면서도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모습들. <묵상과 설교>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언제든 맘만 먹으면 주께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오려고 해도 돌아올 수 없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죄악을 향해 너무 멀리 갔고 너무 뿌리 깊게 죄가 내 몸과 인격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두 보고 계십니다. 지금 참고 계신다면, 그분은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유다를 향해 예레미야를 통해 이 마음을 전합니다. (렘 3:22) “너희 변절한 자녀들아, 내가 너희의 변절한
마음을 고쳐 줄 터이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우리가 지금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만이 주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렘 3:23) 언덕에서 드리는 이교 제사가 쓸데없고, 산 위에서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주 우리의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렘 4:1)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렘 4:2) 네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나 주를 찬양할 것이고, 나도 그들에게 복을 베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심판하기 전에 돌이킬 기회도 주시거든요.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도 나단을 보낸 순간이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때 다윗이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나단까지 죽였다면 다윗은 끝입니다. 나단을 통해 다윗의 죄를 고발하고 들춘 것이 하나님의 심판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통해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를 얻은 것처럼, 유다를 고발하고 유다의 잘못을 들추는 예레미야를 통해 남유다는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예배 가운데 여러분에게 그런 부담과 아픔이 되는 메시지를 만난다면, 어쩌면 그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당시 이들의 진짜 적은 이들 내부에 뿌리박힌 거짓된 신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신학에 취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렘
4:9) “그 날이 오면, 왕이 용기를 잃고, 지도자들도 낙담하고, 제사장들도 당황하고, 예언자들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4:10) 그 때에 내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 주 나의 하나님, 진실로 주님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 (렘 5:12) 이 백성이 주님을 부인하며 말한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재앙도 우리를 덮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란이나 기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렘 5:13) “그러나 예레미야야, 이러한 예언자들에게는, 내가 아무런 예언도 준 일이 없다. 그들의 말은 허풍일 뿐이다.” (렘 5:31)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무조건적인 ‘위로’, ‘축복’, ‘성공’을 부르짖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도 그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도 ‘그저 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제가 봤을 때, 정말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화를 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멀어져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의분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삐딱하게만 보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직면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늘 말씀에 비추어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양극단에 빠지지는 말아야죠.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항상 불안해하고 고민하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멀어져 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관대하게 해석하며 ‘괜찮다’라고만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것을 대신하여 말해주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습니다. 윌버 리스(Wilbur Rees)가 쓴 '3달러어치의 하나님'이라는 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잘못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주님의 작은 일부만을 사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깨뜨리지 않을 정도만. 수면을 방해받지 않을 만큼만. 내 인생이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따뜻한 우유 한 잔 만큼이면 됩니다. 내 죄책감을 조금 누그러뜨릴 만큼이면.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호주머니에 넣을 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흑인을 사랑하도록 만들 정도라면, 혹은 이민자들과 사탕무를 주으러 다니게 할 정도라면 곤란합니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만. 시간이 날 때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만.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나는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경을 원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태에 머물러 온기를 즐기며 지내기를 원합니다. 나는 영원의 500그램만 사서 종이 봉지에 담아 들고 싶습니다. 그 이상을 사야 한다면, 무르고 돈을 되돌려 받겠습니다.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제발. 그중
일부는 궂은날을 위해 숨겨두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내 안에 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만. 이렇게 제발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살 수는 없을까요? 제발. 신앙은 갖고 싶어요.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하는 것 같고. 교양적이기도 하고, 왠지 여기 있으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 하고 싶은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은 싫은 것입니다. 내 삶은 철저하게 내 것이고, 부수적으로 하나님이 좀 필요한 그런 신앙. 혹시 여러분도 3달러 정도의 신앙을 추구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신앙에 대해서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종교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레미야는 미움을 받았고, 반대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유다의 실상이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괜찮다, 충분하다, 우리는 안전하다.’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참된 예언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보면서 그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사람입니다. 뭔가 잘하고 있어서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우리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시는 분이나,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죠. 제 모습이 많이 부끄러워서... 맞습니다. 우리가 다 잘하고 있는 것만 전한다면, 어쩌면 전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말씀 앞에 서서 씨름하고 애쓰고 고민하며 따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또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맡은 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때,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면서 한탄하시고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그 마음을 아브라함과 나누시죠. 그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악인 때문에 의인까지 함께 심판하시려고 합니까? 의인 50명이 있어도 심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의인 50명이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다. 50, 45, 40, 30, 20, 10.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5장에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렘 5:1)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물론
과장법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남유다가 소돔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소돔과 같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선민이, 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왜 다윗의 후손들이 멸망하고 파괴되어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렘 5:19) “예레미야야, 그들이 '무엇 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모든 일을 하셨는가?' 하고 너에게
물으면,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주어라. '너희가 너희 땅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남의 나라 땅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그 중에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유다에 소망은 없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 굽은 것을 곧게 하며, 심판 속에서도 새로운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 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 때, 나무가 베임을 당하듯 심판당할 것이지만, 그루터기는 남아있어서 그들이 거룩한 씨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두가 바알에게 빠졌다고 한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말할 때, 주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로마의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는 수많은 박해와 버림받음 속에서도 흐르고 흘러 지금 우리에 이르렀습니다. 예레미야 1~5장의 참혹한 상황, 의인이 하나도 없는 듯 느껴지는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렘 5:10) “이스라엘의
대적들아, 너희는 저 언덕으로 올라가서 내 포도원을 망쳐 놓아라. 전멸시키지는 말고, 그 가지만 모두 잘라 버려라. 그것들은 이미 나 주의 것이 아니다.” (렘 5:18) “그러나 그럴 때에도, 내가 너희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가지들은 심판하시지만, 그 나무는 남겨 두십니다. 그 시대가 악하여 그 시대는 버림받아도,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주님의 계획은 중단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받아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계속되기에, 그 안에서 새롭게 주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일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건설하고 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는 말씀을 몰라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뜻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이것이 참인가, 거짓인가 분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글로써 기록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나를 점검하고, 돌이킬 부분을 결단하여 돌이키고,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여 세운다면,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에 심긴 생명의 씨가 되어, 여러분을 말씀의 사람으로 건설하여 갈 것입니다. 요시야가 말씀을 발견한 후, 그 말씀에
맞춰 삶을 결단하였을 때, 그가 최고의 왕이라 칭찬받았던 것처럼, 오늘 예레미야 시대에 주님이 찾지만 없었던 그 의인 한 사람이 우리 각 사람이 되어, 오늘 우리의 예배가 주님 보시기에 충만한 예배로 올려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