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16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 창조 질서와 사명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지난주 설교를 통해 기본적인 신학과 원리를 다뤘으므로 그 요점을 4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에는 질서와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계획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예배이며,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산은 산으로 존재함으로, 태양은 태양으로 존재함으로, 인간은 창조 질서에
맞는 인간 됨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둘째, 모든 피조물은 창조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갈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지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세상을 돌볼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세상을 돌보도록 창조되었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 가운데 하나의 종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매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이러한 상호관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창조의 관계와 그 질서 안에 주어진 자리와 위치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즉,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거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세상 돌보는 사명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또한 창조 세계는 다 연결되어 있기에, 아담의 예배는 다른 자연 만물과 상호작용을 합니다. 아담은 동산을 돌보고,
동산은 아담에게 생명을 위한 양식을 공급합니다. 넷째, 구원은 잃어버린 관계와 사명을 되찾는 것에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원래 주님이 내게 주신 ‘존재와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에 부여한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24시간 흰옷 입고 예배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그 사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저는 풍삶초를 하면서 <풍성한 삶의 4가지 관계>를 배우며, 4번째 부분인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풍삶초를 했을 때도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연보호 정도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세상을 ‘경영’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풍삶기를 하면서 다시 2주에 걸쳐서 그 부분을 배울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세상 경영’으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과의 관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하나님이 맡기신 세상 가운데 정의와 사랑으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그것을 우리가 왜 해야 하는지 조금 더 확실하게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설교하며,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7년, 2019년 하나님
나라 시리즈에 비해, 이번 시리즈는 확장된 부분이 많이 있는데, 특별히 12강 이후의 설교는 완전히 새롭게 준비하여 전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창조 질서에서 어긋난 사람들이 원래의 자리를 찾도록 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경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돌보고 섬기는 일이 우리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오해, ‘세상’ 자체에 대한
오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죄악 된 세상이며, 언젠가 폐기 처분하고 떠나야 할 우리와 무관한 장소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종말에 불에 타 없어질 심판의 대상이며, 우리는 이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가진 ‘천국’에 대한 오해임을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갈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전하는 이유는 여러분에 사후 천국에 대한 소망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른 이해 속에 진짜 소망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대 바벨론과 앗수르 시대의 창조 신화는 성경적 세계관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신의 대리자의 지위를 ‘왕’에게만 부여하며, 그 왕이 다른 나라와 민족을 굴복시키는 것에 대하여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에게 부여합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성경의 첫 독자들의 시대에 여성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매우 놀랄만한 관점입니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에 대해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이죠. 그리고 죄가 시작되기 이전 피조물의 존재가 선하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창조의 질서와 사명에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선함을 증진시키고, 더 나아가 서로의 존재를 기뻐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정복하고 위로 올라서기 위한 ‘피라미드 세계’를
창조의 작품으로 보지 않습니다. 왕정 사회는 대표적인 ‘피라미드 사회’였고, 인류의 역사는 내내 그래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우리의 능력은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서로에게 복이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우리와 나누셨다는 것입니다. ‘이름 짓는 일’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창조의 첫 사흘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이름을 부여하시지만,
넷째 날부터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피조물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이름 짓는 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수행하도록 남겨두십니다. 그렇게 아담은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며, 그것을 향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의 대리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왕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은 인간은 그 역할을 감당하다가 ‘교만’이 싹트고 맙니다. 우리가 흔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이 있죠. 왕의
대리자로서의 사명을 받고 행하다 보니,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본인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바른 질서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데, 그 가장 중요한 기초 질서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권력 남용사건입니다. 태양의 주변을 지구가 도는 것이 창조의 질서라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우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다 보면, 태양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왕 노릇을 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엇나간 태도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된 질서를 거부한 것이 ‘자기중심성’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래 계획과 창조 질서를 벗어난 그 모습을 ‘죄’라고 부릅니다. ‘죄’의 결과는 궤도 이탈이죠. 그전까지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것이 우리의 삶에 찾아옵니다. 그 모든 깨어진 현상이
‘죄의 결과’이고, 그것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깨어짐, 그로 인한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가져온 최후의 결과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람에게 경고하셨죠.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전에 <새신자반>이라는 책에서 다뤘듯, 선악과는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 오히려 세우고 깨달아야 할 바른 관계의 이정표와 같습니다. 에덴동산이라는
세상의 형태에서 우리가 세상을 돌본다는 것은 ‘짐승과 땅을 돌보는 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곧 세상을 돌보고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문화 명령’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분을 돌보고 가꾸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만한 아름다운 문명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혼자 할 수 없기에, 공동체적으로 연합할 때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 깨어진 세상에는 이런
창조 사명과 역행하는 일이 계속 생겨납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나타났다면, 그다음에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창조 질서와 어긋난 관계적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사람이 죽입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이 대표적이죠. 다른 말로 서로에 대한 ‘폭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하게 있어야 할 이해는, 죄가 깨어버린 것이 있고, 죄가 시작되어도 깨어지지 않은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됨’을
없앤 것은 아닙니다. (창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에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전수됩니다. 그래서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을
인지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세상을 돌볼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문명을 연구해보면, 거의 모든 문명에서 인간은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신’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도구를 쓰며 불을 다루며 부족과 마을, 도시를 이룹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매우 구별된 인간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창조 사명을 실천할 수도 있고, 역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창세기가 보여주는 방향은 인류가 번성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열심히 발휘하여 이 세상에는 폭력과 피 흘림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홍수심판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같습니다.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창 9:2)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하지만 이후에도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듯,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사명 안에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 만들기에 몰두합니다. (창 11: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즉,
성경의 나머지 모든 내용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창조의 질서를 이탈하여 살아가는 삶,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깨어진 세상의 실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죠. 그것이 창세기 12장부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죄를 따라 살며, 하나님의 창조적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지 않게 되자, 하나님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회복하시려고 우리의 역사 속에 개입하십니다. 그 계획의 첫 사역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모든 인류를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통로 삼으려는 계획입니다. (창 12: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인류가 창조 본연의 부르심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먼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일하시고, 그의 가족이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드러내는
‘회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회복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회복된 사람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그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해 가십니다. 이렇게 먼저 불러서 회복된 존재를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맺었다고 하여 ‘언약’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그 대표자입니다. 대표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이방인 중에도 회복된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 사명을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거룩한 자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도 교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 회복된 온전함의 본’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가 우리의 세상 안으로 오셔서, 육신의 몸으로 살아가시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임재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결과’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죽음’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부활이죠.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우리는 조금 유추할 수 있을 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구원이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구원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3: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깨어진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의 삶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구원의 삶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 치유하고 회복시켜 가십니다. 우리는 지금 그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일회적 사건으로 보면, 이 회복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회심한 이후부터 구원은 시작된 것이고, 우리는 먼저 회복되고 치유되어 가며, 그 사명 또한 다시 붙잡아 가는 것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과거).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현재). (빌 3: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미래). 우리는 구원이 시작된 이후, 점차 회복되어 하나의 형상대로 그분을 온전히 닮은 곳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엡 4:13).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회복의 결과로 이르게 될 마지막 모습이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계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왕 노릇하다’라는 것은 죄가 있기 전, 우리에게 갖고 계셨던
창조 질서와 사명의 온전한 회복이죠. 언젠가 열방이 구원의 복을 받으면, 구속받은 인류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힘을 그분이 의도하신 대로 땅을 다스리는 데 활용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땅은 당연히 ‘새롭게 된 만물’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은 완전하게 데칼코마니입니다. 성경을 접으면, 처음 모습 그대로 마지막에 회복되는 것이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을 실현하실 때, 우리는 창조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창조의 세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지금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이 결실을 맺는 것을 가로막는 끔찍한 악에 시달려왔지만, 하나님은 자기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시려고 역사 내내 일해오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롬 8: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8: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롬 8: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롬 8: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럼 우리는 구원의 시작 이후, 구원받은 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므로, 또 원래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으므로, 그 궁극적인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면 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내가 먼저 회복되는 것이죠, 둘째로 잃어버린 자들이 회복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요, 셋째는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 안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이 세계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 일을 함께 해나가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곳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연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도 온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를 탐욕으로 망가뜨린 파괴에 대해서 함께 슬퍼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담에게 주셨던 동산을 돌보는 사명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곳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도록 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면, 내가 만나는 삶의 자리에서 깨어진 영혼들이 나를 통해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소망을 얻게 된다면 그 또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날까지 우리의 사명은 보류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시작된 이후로 우리는 회복된 만큼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질서와 목적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전하는 사명과, 이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이 세상 안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한 모범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녀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