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나비의 삶" / 강정규 목사

2023-07-16 · 예레미야 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이제 예레미야를 시작합니다. 예레미야 묵상은 8월까지 계속됩니다. 예레미야는 52장에 이르는 매우 긴 책이므로, 이번에는 1-25장까지를 다룹니다. 후반부는 언제 다시 다루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일정이 없습니다. 25장에 이르는 예레미야 설교이고, 그 사이에 주일이 7번이 있지만, 8월 첫 주와 마지막 주는 ‘흩어지는 예배’와 ‘초청 설교’가 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예레미야를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은 다섯 번이 될 것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을 비롯한

3주간은 제가 설교를 하고, 8월에 있는 두 번의 예레미야 설교는 강성묵 간사와 박예진 간사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다섯 번의 설교로 예레미야를 함께 여행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입니다. 먼저 한가지 테스트를 해봅시다. 여러분이 예레미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옆 사람과 나눠보십시오. 15초 드리겠습니다. [15초] 아마도 15초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여러분이 예레미야서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예언서와 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일설교로 제가 여러분을 도와야 할 부분이 그만큼 많다는 것도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예언서는 몇 가지 도움을 받으면 훨씬 더 깊은 이해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선 먼저 예언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언자 = 나비(히브리어), 아카드어 ‘나부’에서 유래. “지명하다, 부르다” * 흔히 생각하는 예언 = 豫言 미리 예 / 말씀 언 → 미래의 것을 예측하여 말하는 것 * 성경이 뜻하는 예언 = 預言 맡길 예 / 말씀 언 → 하나님이

맡기신 말을 하는 것 즉,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의 것을 말하게 하시면 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단순히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말하고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대언하여 전하는 자입니다. 예언자라고 하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도 예언자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도

그런 의미에서는 예언자로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보면, 예언자의 삶이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의 예언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진리의 말씀을 각자의 삶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마음이 우선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첫 설교는 앞으로의 설교를 위해 우선 역사적 배경부터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렘 1: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렘 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예레미야가 태어난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진 곳으로, 여호수아의 땅 분배 때, 베냐민 지파 성읍 가운데 제사장을 위해 분배된 성읍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러므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주전 650년 무렵입니다. 그가 요시야 왕 13년에 선지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니, 요시야 왕과 당시 그가 속한

남유다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은 주일설교이므로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앞부분부터 설명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들에게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백성들의 지도자를 세우셨는데, 그들을 ‘사사’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는 모두 ‘왕’이 있었는데, 자신들만 눈에 보이는 왕이 없자,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마지막 사사로 활동했던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왕을 세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는 왕이 세워집니다. 사울-다윗-솔로몬까지 120년에 걸쳐서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연합한 나라로서 유지됩니다. 그중에 특별히 다윗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왕이죠. 그 약속이 이것입니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것이 ‘다윗 언약’이라고 부르는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알고 있어야, 후에 발생하는 이스라엘의 신학적 오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루십니다. 그렇게 ‘성막 시대’는 ‘기브온 산당 시대’를 잠시 거친 후, ‘성전 시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성전이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있었고, 성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언약’과 ‘성전’. 이 두 가지 축복은 그들이 받은 엄청난 약속과 은혜이지만, 이것을 오해했을 때 그들의 신앙은 오히려 혼란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오늘날로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과 ‘교회의 소속(직분)’과 유사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중요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예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은 조건부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장면입니다. (왕상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왕상 2: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구원의 확신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의 관계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주되심을 따르면 그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어 완성에 이르게 하십니다. 다윗 언약도, 우리의 구원도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성전도 그것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들 모두와 함께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성전 제사를 싫어하셨습니다. 즉 마음 없는 외적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도 우리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이 시간 예배에 앉아 있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삶인지는 모릅니다.

우리의 중심이 드려져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오늘 우리에게나 동일한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부적이 아닙니다. 신앙은 노하우가 아닙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분열됩니다. 다윗 집안의 통치를 반대한 10개 지파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세웁니다. 그것을 북왕국이라고 부릅니다. 북왕국의 국호는 이스라엘입니다. 대표지파는 에브라임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계속 통치한 곳이 남왕국입니다. 남왕국은 유다라고 부릅니다.

대표지파가 유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북이스라엘/남유다라는 분열왕국 시대를 겪게 됩니다. 통일왕국 시대의 전성기는 다윗-솔로몬 시대라면, 분열왕국 시대의 전성기는 히스기야-요시야 시대입니다. ‘히스기야’의 증손자가 ‘요시야’입니다. 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 저희가 예전에 이사야서의 배경을 ‘웃-요-아-히’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 이 시대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의 선지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암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호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미 1:1)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그러니까 이 네 명의 선지자는 웃-요-아-히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라면, 그다음 세대가 히스기야 이후 므낫세-아몬-요시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습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렘 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 1: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그러니 예레미야의 활동 시대는 요시야로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 이르는 마지막 전성기부터 멸망까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사이의 힘의 균형은 대부분 북쪽이 더 강했습니다.

그러나 남북을 다 합쳐도 강원도보다 조금 큰 정도의 국가가 이스라엘이었으니, 늘 주변 강대국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놀랄 만큼 우리 대한민국과 유사합니다.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도 우리는 이해하기 쉬운 것이고, 주변의 열강들로부터 늘 길목에서 고통받는 것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 주변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있어서 그들의 싸움에 우리가 사이에 껴서 고생했다면, 이스라엘은 남쪽에는 전통적인 아프리카 대륙의 강호 ‘이집트 왕국’이

있습니다. 성경의 지명으로는 ‘애굽’이죠. 그리고 분열왕국 시대의 북쪽에 등장한 첫 번째 제국은 ‘앗수르’였습니다. 주전 8세기,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의 왕좌에 오르며 앗수르를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애국 점령을 목표로 하고 지중해 연안을 손에 넣고 싶어 했습니다. 앗수르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있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우선 가까이 있는 북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를 감당할 수 없기에 조공을

바치며 속국화됩니다. 북이스라엘에 대한 앗수르의 침공은 점점 더 가속화됩니다. (왕하 15:29) 이스라엘의 베가 왕 시대에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이 쳐들어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앗시리아로 사로잡아 갔다. 이 일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은 앗수르를 대항하는 반 앗수르 동맹을 만듭니다. 앗수르를 대항하기 위해 북이스라엘(사마리아,

에브라임)-아람(시리아, 다메섹)이 연합군을 만들게 됩니다. 반 앗수르 동맹이죠. 남유다도 결정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죠. 이 상황에서 남유다의 왕 아하스는 앗수르가 너무 두려워서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쉽게 말해 앗수르 편에 선 것이죠. 그러자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문제는 이때 유다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강력한 지원군인 ‘앗수르’를 붙듭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냅니다. 유다는 현실적인 힘에 의지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가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것이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앗수르는 도구에 불과하고, 앗수르의 침공을 도구 삼아 남유다의 잘못된 부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이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데, 유다는 철저하게 하나님보다는 앗수르입니다. 이사야는 그 잘못을 고발합니다. 이 일은 앗수르에게 너무나도 좋은 빌미와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죠. 앗수르는 반앗수르 동맹의 나라들을 공격해서 멸망시킵니다. 동맹의 대표격이었던 아람(시리아)은 B.C 732년 멸망합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 땅만 남고 다 빼앗겨 버린 사건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10년 뒤에, 북왕국 왕 호세아는 디글랏-빌레셀 3세의 죽음을

틈타, 조공을 끊고 대항하다가, ‘살만에셀 5세’의 공격을 받습니다. 이것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왕하 17:6) 드디어 호세아 제 구년에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 가에 있는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켰다. 결국 호세아 9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합니다. 그렇게 남유다만 남은 상황에서 히스기야가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가 추구한 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반 앗수르,

친 애굽’ 노선입니다. 이때부터 유다는 앗수르에게서 독립하기 위해서 힘씁니다. 근동지역의 국가들이 다시 힘을 합쳐 반 앗수르 연합을 만들게 됩니다. 그 중심에 바벨론이 섭니다. 유다도 동참합니다. 그로 인해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게 되고, 47개 성읍 중 46개가 점령을 당하고 예루살렘만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최후의 공격을 합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가 치셨다고 기록합니다. (사 37: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역사적 기록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이 사건을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라고 기록하고 있고,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서 전염병이라고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앗수르는 국력이 쇠퇴하고, 이제 그 뒤를 이어 ‘바벨론 제국’이 떠오릅니다.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주전 626년은 100년 동안 호령했던 앗수르가 급격하게 기울고, 바벨론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해였습니다. 나보폴라살이 왕위를 잡은 시점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강성할 때 식민지배를 했던 여러 나라들이 하나씩 반란을 일으킵니다. 앗수르와 메디아(메대)가 동맹국이었는데, 메디아가 앗수르를 배신하고 바벨론과 동맹을 맺은 후, 함께 앗수르를 공격합니다. 결국 앗수르는 수도였던 니느웨를 빼앗기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제 명실상부 바벨론이 최강대국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이때 남쪽의 강자 애굽이 움직입니다. 애굽 왕 느고는 앗수르와 동맹관계였고, 앗수르의 잔여 세력들과 힘을 합쳐서 떠오르는 강대국인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갈그미스로 진출해서 바벨론과 한판을 벌일 계획이었습니다. 이 갈그미스 전투가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에 남유다의 요시야가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이전, 남유다에 있었던 일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한 후, 대략 4년째가 되던 주전 622년에

요시야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왕하 22:8) 힐기야 대제사장이 사반 서기관에게,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그 책을 사반에게 넘겨 주었으므로, 사반이 그 책을 읽어 보았다. 성전 수리 중에 오래된 ‘율법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책은 신명기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 책을 읽은 요시야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따라 나라를 개혁합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 유다는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죠. 요시야는

산당과 우상을 제거하고, 이방종교를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회복합니다. 온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였고, 레위 지파 출신이 아닌 제사장들은 쫓겨났습니다. 유월절 예배도 다시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예레미야도 이 요시야 개혁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백성들의 삶의 중심으로 옮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종교개혁과 함께 유다는 앗수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속국의 신세를 면하게 됩니다. 당시 신흥세력 바벨로의 등장으로

앗수르는 남유다가 하는 일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남유다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다시 올곧은 신앙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성경은 요시야를 분열왕국 시대의 가장 뛰어난 왕으로 평가합니다. 그 정도로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주전

609년, 앗수르의 동맹인 이집트가 전쟁을 위해 북쪽으로 진출합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점점 커져가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이에 있는 동맹국 앗수르가 버텨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니느웨를 빼앗기고 하란으로 도망한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에 도우려고 이집트는 진출한 것이죠. 반면, 유다 입장에서는 앗수르의 지배로부터 막 벗어난 이 시기에 이집트가 앗수르를 돕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군대를 일으켜서 올라오는 이집트 군대를

막아섭니다. 므깃도 전투이죠.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느고는 요시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나는 너와 싸울 마음이 없다.” 그는 이 편지에서 3번이나 하나님을 언급하며 이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무시하고 전쟁에 나갑니다. 성경은 이것이 요시야의 잘못으로 지적합니다. 결국 유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이었던 요시야가 이 전쟁에서 죽습니다. 결국 이집트와 바벨론. 이 두 강대국 사이에 남유다만 덩그라니 남게 된 상황. 이것이 예레미야의

주된 배경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나라의 역사 가운데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남한산성>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당시 조선 옆에는 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명나라’가 있었고, 만주족/여진족으로 이루어진 후금(오랑캐라고 부르던)이 후에 ‘청나라’가 됩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은 어디에 붙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었죠. 조선의 왕은 인조였고, 전통대로 명나라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를 ‘척화파’라고 불렀습니다. 대표가

김상헌입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연로한 대신들이 이편에 섰습니다. 반대로 ‘주화파’라고 불리는 무리는 청나라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가 최명길입니다. 이제 청나라에게 패권이 넘어갔으므로 백성들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는 청나라와 화친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느 파의 주장이 이겼을까요? 인조는 고심 끝에 ‘척화파’(친명)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러자 청나라가 침공을 합니다. 병자호란이죠. 남한산성에서 버티지만,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3배 9고두(3번 큰 절, 9번 땅에 머리를 박아 그 소리가 청나라 태종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를 하는 굴욕을 당합니다. 마치 이런 강대국 사이의 줄타기처럼, 애굽과 바벨론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남유다는 위태롭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죠. 므깃도 전투 이후, 유다는 애굽의 통치권으로 들어갔습니다. 요시야가 죽은 후, 백성들은 요시야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살룸)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러나 애굽은 그가 왕이

된 지 3개월 만에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요시야가 자신들을 막아선 것에 대한 분풀이죠. 그리고 조공을 바치도록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예레미야가 증언하고 있는 일입니다. (렘 22:11a)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애굽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왕을 세우는데, 요시야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가 여호야김입니다. 당연히 그는 친애굽 정책을 펼칩니다.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이집트가 일전을 벌입니다. 두 강대국의 격돌이죠.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과 앗수르 잔당을 모두 바벨론이 무찌릅니다. 이때 바벨론의 왕이 느부갓네살입니다. 애굽이 패배하자, 여호야김은 친바벨론으로 태도를 바꿉니다. 하지만, 바벨론이 애굽 정복에 실패하자, 다시 바벨론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친애굽으로 태도를 바꿉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침공합니다. 여호야김은 예루살렘 함락 직전에 죽습니다. 이때 유다의 귀족 가문의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갑니다(1차 포로. 다니엘). 이 일도 예레미야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렘 22:18a)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어서 여호야긴(고니야)이 유다의 왕이 됩니다. 그 역시 친애굽 정책을 택합니다. 그러므로 통치 3개월 만에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2차 포로. 에스겔 포함 1만 명). (렘 22:28) 이 사람 고니야는 깨져서 버려진 항아리인가?

아무도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는 질그릇인가? 어찌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가족과 함께 쫓겨나서, 멀리 끌려가게 되었는가? 그리고 요시야의 아들 중에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세웁니다. 그렇게 세워진 시드기야도 통치 초기에는 바벨론에 우호적이었으나, 결국 친애굽으로 돌아섭니다. 그로 인해 다시 한번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주전 586년입니다. (렘 39:1)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는데, (렘 39:2) 시드기야 제 십일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 (렘 39:7) 그리고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바빌론으로 끌고 가려고, 그를 쇠사슬로 묶었다. (렘 39:8)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왕궁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예루살렘의 성벽들도 허물어 버렸다. 결국 이때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유다가 완전히 망한 것이고, 예레미야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이자 예언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게 당시의 상황이라면, 예레미야가 특별히 힘들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요시야 시대에 선지자는 유다 왕실의 공식 정책과 동일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이후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대체로 유다 왕실과 국민은 친애굽 노선을 주장했습니다. 마치 ‘친명’과 같이 그것이 의리이고 전통적 입장이었습니다. ‘청나라’를 여진족의 후예라고 하여 오랑캐라고 여기며 배척했죠. 이것은 당시의 시대를 잘 읽지

못한 것입니다. 남유다의 멸망은 성경적으로 보자면, 강대국의 침공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하나님 심판의 도구, 즉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다면 유다가 더 이상 말로써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의 기간 동안, 이들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시고, 그 일을 위한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는 마음으로 예레미야에게 선포하게 하시는 말씀은, ‘유다는 멸망한다. 그러니 바벨론에게 차라리 빨리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나마 유다를 향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렘 21:7) 나 주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염병과 전쟁과 기근에서 살아 남은 이 도성의 사람들, 곧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을,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들의 원수들의 손과,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손에, 포로로 넘겨 주겠다. 느부갓네살은 포로를 조금도

가련하게 여기지 않고, 조금도 아끼지 않고, 무자비하게 칼로 쳐죽일 것이다. (렘 21:9) 이 도성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전쟁이나 기근이나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를 에워싸고 있는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나아가서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목숨만은 건질 것이다. 왕이 바벨론의 포위 공격이라는 큰 위기를 이겨 내기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백성들을 설득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외치는 예언은 그와 반대로 유다가

바벨론에게 즉시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와 도움을 무시합니다. 친 애굽 정책을 고수하는 분위기에서 예레미야는 쉽게 말해서 ‘매국노’였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바벨론의 첩자쯤인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언한 대가로 예레미야는 상당한 시간을 옥에 갇힌 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레미야가 이사야처럼 주님이 누구를 보낼까 찾으실 때, ‘나를 보내소서’하고 나섰던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사야는 MBTI가 ‘E’라면, 예레미야는 완전 ‘I’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스스로 예언자로 나서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못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렘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 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렘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슬프도소이다’(히브리어 감탄사 ‘아하’, 겸손한 사양이 아닌 한탄하는 것)라고 반응한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못 하겠다고 하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설득하고 달래서 예언자로 쓰셨던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원래 성향이 다른 선지자들과 다르게 무척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며,

자신이 예언자로서 살아가는 것도 사실 썩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몇 번이나 사역하다가 지쳐서 그 고통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어디서 풀 수는 없으니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그런 그를 매번 달래서 사역해 나가도록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예레미야서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게 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도 어떻게 하나님께 사용되는지 바로 보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른 것은 그가 선지자로 살면서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런 그의 인간적 번뇌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명자로 부르기 위해서라면 그런 내용은 조금 숨겨야 할 것 같지만, 전혀 성경은 그럴 의도가 없습니다. 왜 성경은 이처럼 당당할까요? 예레미야가 경험하는 어려움이 분명,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에게 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예레미야의 선포는 시대를 깨우고, 시대를 강타하는 진리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렘 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렘 7: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렘 7: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설교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다윗 언약과 성전 신학에만 빠져서 진짜 자신들의 신앙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렘 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뽑고

파괴한 후, 건설하고 심게하는 하나님의 일. 시대를 역행하고 깨부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본인도 그렇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미움을 각오해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참되기에, 누군가는 그 안에서 시대와 구별된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고, 무엇보다 선포하는 사람이 먼저 그 예언 앞에 살게 되는 것이 진리의 비밀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부서짐과 세워짐이 먼저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레미야의 마음을 느끼는

멋진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렘 20: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소심했을 수도 있고, 괴로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진리의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앞에서 그가 먼저 부서지고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말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가운데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실 수 있고, 내 삶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살고 증거하기 위한 과정을 우리는 매주 경험합니다.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주어지는 말씀 앞에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내 삶으로 가져가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시하고 살고 싶을 때도 있고, 애써 부인하려고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오늘도 이 시대 안에서 부르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진리로 여러분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가 우리를 위축시키고, 복음을 나누고 전하기 어려운 시대, 삶으로 그것을 따르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으며, 진리를 맡은 자로

여러분의 삶이 드려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