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고 역대기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라는 종류의 책들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 앞에 신실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입니다. 율법과 언약 앞에 이스라엘이 신실했을 때 그들이 형통했고, 언약을 배반했을 때 저주를 받아 심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왜 실패했는가’ 그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은 다윗이고, 그 후의 분열왕국의 모든
왕 가운데 열왕기서가 가장 다윗과 같았던 왕으로 꼽는 것은 ‘요시야’입니다. 요시야가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입니다. 이것이 열왕기의 평가인 것입니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반면, 역대기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이 책은 ‘어떻게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방법으로 역대기에서는
‘예배’가 가장 중요합니다. 역대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런 관점에서 성전과 제사제도 등이 함께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역대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은 다윗과 솔로몬이고, 그 후의 분열왕국 모든 왕 가운데서 역대기가 가장 그들과 같았던 왕으로 꼽는 것은 ‘히스기야’입니다. 즉, 역대기의 정점은 히스기야 시대입니다. (대하 29:2)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이는 선왕인 아하스가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유다 역사에 손꼽히는 악한 왕이었거든요. 인신제사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우상숭배의 도시로 만들었던 왕이며, 정치적으로도 최악의 선택들을 합니다. 역대기는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등장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합니다. 13대왕 히스기야 25세에 왕이 되어 29년을 통치합니다. 아하스 시대부터 왕자로서 13년간 공동통치를 했다고 하니 모두
합하면 42년의 통치를 했지만, 역대기는 히스기야가 주도적으로 통치한 29년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하 29:1)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야요 스가랴의 딸이더라 히스기야의 어머니 이름이 ‘스가랴의 딸 아비야’라고 나오는데, 학자들 가운데 이 스가랴를 북이스라엘의 왕 스가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의 조부 요담 왕이 북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위해서 예후의
왕조와 정략결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것은 B.C 715년입니다. 이 년도를 보시면서 우리는 구약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이 이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것입니다. B.C 722년이죠. 멸망과 봉신은 좀 다른 개념입니다. 봉신은 남유다의 왕이 통치하면서 조공을 바치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는 것이라면, 멸망은 아예 그 나라를 없애고 그 땅을 앗수르의 주로 편입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그렇게 멸망당한 것입니다. 블레셋도 멸망당했습니다. 남유다와 암몬, 모압, 에돔 정도가 앗수르의 봉신 국가로 그 영향력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본격적으로 단독 통치를 시작한 B.C 715년은 앗수르의 영향력이 조금 약화된 시점입니다. 역대기는 역사적 기록임에도 국제적인 정세 등에 대해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경에 대해 공부하려면 열왕기서와 이사야를 통해 살펴봐야 합니다. 저희가 7월에 <이사야서 배경특강 – 앗수르 제국>을 다뤘는데,
한번 찾아서 들어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역대기는 국제 정세보다도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히 지켰으며, 특별히 성전과 예배와 절기를 다시 회복시켰다는 측면에 집중합니다. 이미 다 지난 세대의 이야기인데 국제정세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앗수르도 이미 다 없어졌고 페르시아 시대인데 말입니다. 그보다는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선왕인 아하스는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이 가득한 남유다에, 앗수르의 신들까지 수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에게 이러한 위기를 물려주고 죽습니다. 히스기야가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그는 이 부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대하 29:3) 그는 왕이 되던 그 첫 해 첫째 달에, 닫혔던 주님의 성전 문들을 다시 열고 수리하였다. 첫해 첫째 달이라는 표현은 그가 왕이 되자마자 이 일에 열심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전 문들을 다시 열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전까지 성전 문들을 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성전 안에 예배를
위해서 수리해야 할 것이 있었음에도 그냥 문을 닫아놓고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하 29:6) 우리의 조상이 죄를 지어,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이켜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를 등지고 말았소. (대하 29:7) 그뿐만 아니라, 성전으로 드나드는 현관 앞 문들을 닫아 걸고, 등불도 끄고, 분향도 하지 않고,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도 않았소. 히스기야는 지금 주변 열강들로부터 남유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역대기의 치트키를 배웠어요. 오늘도 이것은 유효하기 때문에 다시 그 말씀의 표현들을 되새겨 봅시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지금 히스기야의 진단을 보십시오. “악한 일을 했다. 하나님을 버렸다. 얼굴을 돌이켰다. 성소를 등졌다.”
즉,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과 가장 반대의 모습으로 아하스 시대에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복을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하죠. 수술을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제 결단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소.” (메시지, 29:10) 1. 순서를 기억하기 이러면서 히스기야가 2가지 개혁을 합니다. 첫 번째는 우상숭배 하던 산당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왕하 18:4) 그는 산당을 헐어 버렸고,
돌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다. 그는 또한 모세가 만든 구리 뱀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때까지도 느후스단이라고 부르는 그 구리 뱀에게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의 회복을 위한다면 우리를 병들게 만드는 것들을 없애야죠.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회복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여러분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끊어내지 않고 계속 벗하여
살아간다면 그것은 말뿐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정말 여러분이 달라지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본인을 진단해보셔야 해요. 나는 무엇을 끊어내야 하는가? 내가 계속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죠.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참여해서 16일에 걸쳐서 성전을 정화합니다. 그런데 성전 정화를 할 때에도 그 일에 정확한 순서가 있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한 후에 그들이 성전을 정화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제사 방식을 지금 재현할 필요는 없지만, 그 안에 담긴 원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방식을 이해할 필요는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위해서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하는 일이 항상 동반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제사 자체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사가 우리의 죄를 소멸하는 하나님의 성결한 은혜의 시간이라면,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의미로 정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내게 소중한 사람, 내가 존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준비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것을 ‘에티켓’이라고 부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지만, 그러나 약속된 주님과의 만남에 그럼에도 내가 준비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예배에 늦지 않아야 한다고 여러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열심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최선을 다해보세요. 하나님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역대기가 성전을 정화하고 개혁하기 전에 그 일을 담당할 사람들의 성결함이 먼저 강조된다는 점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대의 잘못된 풍토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개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나를 돌아봐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예배, 지금도 예배, 앞으로도 예배, 영원히 예배, 결국 예배. 저의 부친이신 고 강환경 목사님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던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평생 ‘예배’만을 강조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이 무너지는 것은 안 된다고 여기셔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가혹할 만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 또한 이 부분에 이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은 삶에서 실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러한 예배의 위기, 예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예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못 온다고 예배가 막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예배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배는 내가 결단해서 드리고자하는 마음만 있으며, 절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 예배는 언제 멈춰지는가? 내 스스로가 예배자가 되기를 포기할 때 입니다. 예배의 그 시간을 다른 것과 바꿀 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 때문이 아니라 직업의 공적 특성상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분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의료계가 그러하죠. 기독교인들도 그런 분야에서도 활동을 해야 하죠. 누군가를 위해서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런 분들이 주일이 아닐지라도 삶의 정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날은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예배자의
삶을 살도록 힘써 지켜간다면, 그를 향해 누가 예배를 멈췄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우선순위의 문제이죠. 예배는 나의 환경과 상황과 감정에 지배를 받으면 안 됩니다. 예배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무너진 예배를 세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때에도 예배는 답이었고, 지금도 예배는 답이고,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예배가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마주하는 그 날에도 우리는 예배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로서 지음을 받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죠. 예배가 회복되지 않고는 유다가 회복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성전의 환경을 정화하고 나서 ‘속죄제’를 우선적으로 드립니다. 이것은 왕실과 성소와 유다 전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대하 29:24) 제사장들이 잡아 그 피를 속죄제로 삼아 제단에 드려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게 하였음이더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스기야가 이 속죄의 제사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남유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신앙은 분명 1:1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마음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역대기의 치트키도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라와 공동체를 위한 기도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되어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이곳저곳에 빽빽하게 생기면 완성될까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목회자가 아니라, 세상에 흩어져 살아가는 여러분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심고, 여러분이 흩어진 자리,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과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해서
나라로서 멸망했습니다. 그럼에도 형제 된 그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히스기야의 이 행동은 르호보암 때에 나뉘었던 두 나라가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3. 속죄제 – 번제 – 화목제 속죄제를 통해서 죄를 해결한 이후에 그들은 이어서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 또한 속죄의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헌신과 순종을 결단하는 제사입니다. 이제 죄를 깨끗하게 해주신 주님 앞에 순종하며 헌신된 삶을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속죄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번제’로 가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가 ‘벌레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었는데, 고난주간에 ‘벌레 같은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죠. 그런데 벌레 같은 내가 주의 자녀가 되었다가, 다시 벌레가 되었다가, 주의 자녀가 되었다가.. 이것만 반복하는 신앙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안에 거듭났다면 이제 거듭난 자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과 나아감이 있어야 하잖아요. 구원은 우리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제 이후에는 번제의 신앙으로.. 이제 주님께 헌신과 순종을 결단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헌신이라고 하면 뭔가 고되고 짠한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 헌신은 기쁨의 헌신입니다. “주 날 구원했으니 어찌 잠잠하리”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감사함으로 주를 위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역대기에서 가장 이상적인 예배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은 솔로몬이 드렸던 성전 봉헌예배와 히스기야의 예배입니다.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레위인들은 악기를 들고, 제사장은 나팔을 들고 대기합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니 히스기야 왕이 시작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자 제단에서는 번제가 드려지고, 나팔과 다윗의 악기 연주에 맞추어 거룩한 찬양대가 찬양을 부르고 온 회중이 함께 찬양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번제를 드리는 내내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온 회중이 함께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제사를 마치자, 왕과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배합니다. 그들은 시편의 가사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부릅니다. 무릎을 꿇은 채 기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역대기의 기록입니다. 기쁨의 예배, 그들에게 예배는 축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는 예배를 드린 후, 히스기야는 감사의 제물을 성전으로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이제 ‘번제’에서 ‘화목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화목제에는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 등이 있는데 이것은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예배자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즉, 속죄 후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을 갖고 공동체가 함께 그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힘, 우리 회중 예배가 갖는 큰 기쁨이 아닙니까? 제가 설령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피아노 치면서 드럼을 치면서 기타도 칠 수는 없잖아요. 함께하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악기들을 동원하고 목소리를 모으고 마음을 모으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놀라운 일을 송축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명에 따라서 예배에 참여한 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제물을 가져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참 놀라운 데요. 메시지 성경의 표현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회중이 제물과 감사 제물을 가져왔고, 어떤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이 넘쳐흘러 번제물까지 가져왔다.” 이 날 예배에 사람들이 자원하는 기쁨 가운데 드린 짐승이 너무 많아서, 제사를 진행한 제사장 숫자가 부족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레위인들이 거드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목사로서 헌금을 가르쳐야 하고, 헌금이 참 기쁜 것임을 함께 고백했으면 하는데.. 이것이 때론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헌금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고, 그 헌금은 반드시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고, 자원하는 가운데 드리는 기쁨의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헌금은 어떻습니까? 이런 감사와 기쁨이 여러분의 헌금에 담겨 있습니까? 혹시 아까워하거나 인색한 마음으로 드린다면, 죄송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처럼 어떤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이 넘쳐흘렀다고 하는데, 저는 여러분이 그 어떤 사람의 참된 예배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헌금이 누구의 강요도 아니라, 내 안에서 넘쳐흐르는 주님을 향한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요. 남유다에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그곳에 참된 예배가 회복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혹시 지금 마음에 예배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로 돌아오십시오. 예배에 마음을 다 쏟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습니다. 예배로부터 시작하십시오. 4. 유월절의 회복 히스기야는
예배를 회복한 후, 솔로몬 이후 무시되어 왔던 유월절을 다시 지키고자 합니다. (대하 30: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여러분. 유월절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애굽의 10번째 재앙 때,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구원하셨던 그 사건이 유월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남유다에서 추수와 연결된 칠칠절과 초막절은 겨우 지켜왔으나,
유월절은 가장 중요한 명절임에도 히스기야 이전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히스기야가 이 유월절 행사에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북 왕국은 이미 멸망했죠. 북이스라엘 지파들은 앗수르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함께 예배하자는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존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 안에 한 형제라는 마음이 히스기야에게 있었다는
것이죠. 히스기야의 편지에 나온 표현인데요.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을 붙들라.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그분의 성전,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그곳으로 오라. 하나님 너희 하나님을 섬겨라. 너희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니 너희를 냉대하지 않으실 것이다. 돌아오라. 그러면 그분께서 두 팔 벌려 너희를 반겨 주실 것이다.” 마치 역대기에서 선지자의 선포와 같이 북이스라엘의 멸망당한 형제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라. (대하 30:10)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그러나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히스기야의 초청의 편지를 받고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현실적인 반응들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다가서도 복음에 대한 냉대는 어느시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말 것은, 그 중에는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하 30:11)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다수가 아닌 소수, 아마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왔다. 이 표현 익숙하지 않으세요? 역대기의 그 치트키죠. 너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반응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와서 유월절을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 이후에 갈라졌던 남과 북.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북쪽의 성소에서 예배를 하다가, 나라가 망했지만 그들이 내려와서 다시 예루살렘에서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북쪽 사람들이 오랫동안 신앙적 방황을 해서 그런지, 유월절 예식 가운데 ‘성결 규례’를 어기고 양을 먹게 됩니다. 제의적으로 부정해진 순간이죠. 이 모습을 보자, 히스기야가 곧바로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합니다. (대하 30:18b) 히스기야가 그들을 두고 기도하였다. "선하신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하 30:19) 비록 그들이 성소의 성결예식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곧 조상 때부터 섬긴 주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신앙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예배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만나주실 것이고, 이 안에서 서로를 붙잡아 함께 승리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가나안 성도와 같이 방황하다가 주님께 나아온 북 이스라엘의 예배자들을 위해 중보 하죠. 그리고 함께 예배를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와 같은 레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대하 30:22)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 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저도 오늘 예배하는 분들을 위해 중보하며, 함게 예배하는 모든 분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유월절 이후에는 7일의 무교절 행사가 진행됩니다. 모두가 기쁨으로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예배를 경험하며 사람들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은혜가 너무 큰 것입니다. (대하
30:23) 온 회중이 다시 칠 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 일을 즐겁게 지켰더라 7일을 예배했는데도, 더 하고 싶어서 다시 7일을 연장하여 예배합니다. 7일 동안 예배하며 드려진 화목제 음식을 이미 다 먹었죠. 다시 7일이 연장되니까 히스기야부터 자진해서 수송아지 1000마리와 양 7000마리를 회중에게 줍니다. 그리고 신하들도 수송아지 1000마리와 양 10000마리를 회중에게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도 충만하고, 그 안에서 서로를 향하여
아낌없이 나누며,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그러한 예배가 펼쳐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사귐’이라고 생각합니다. with God 하나님과 풍성한 사귐을 누리고, with Neighbor 이웃들과 함께 그 사귐을 더욱 풍성케 공유하고 나누는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대하 30:26)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대하 31:1) 이 모든 일이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묵상자료의 일부분에 나와 있는 표현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교회 안에서의 부흥만이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확산되어야 참 부흥이다. 수적인 부흥이 아니라 세계관적 전환이며, 욕망의 갱신까지 이어져야 한다.’ 예배는
언제나 시작입니다. 예배가 끝이 되면 안 되고, 예배는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의 열기가 뜨거운 경우는 많아요. 그러나 그것이 삶의 예배로 이어지는데 많이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어요. 유월절 예배를 경험한 그들은 각자의 성읍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들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우상을 부수고, 산당을 제거합니다. 아하스 때에 유다의 종교시스템은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았고, 십일조를 내지 않으니 그것으로 삶을 살아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일탈을 하게 됩니다. 성전도 닫혀 있었으니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렸던 것이죠. 히스기야는 먼저 자신의 재산 중 일정한 몫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누군가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늘 이 부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멈췄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일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레위 자손들이 성전 봉사자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역대기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수확한 곡식, 새 포도주, 기름 꿀
등 그해에 재배한 모든 것의 첫 열매를 넉넉하게 가져왔고, 백성들은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쳤다고 나옵니다. 그들은 또 소와 양, 하나님께 드려진 다른 모든 소유의 십일조도 가져왔습니다. 모두가 기쁨으로 헌금에 참여하니 성전에 예물들이 쌓이고 쌓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칭찬했다고 기록 합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이 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관리자를 세우고, 분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정말
냉정하게 말해서 종교시스템은 물질을 기반으로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이 사용하기 원하시는 도구입니다. 물질을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물질의 드림이란 사람들의 헌신된 마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헌신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반으로 합니다. 즉, 헌금은 내 욕망보다 하나님의 통치가 내 위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히 저 또한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십일조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유지됩니다. 반면, 교회에 속한 어느 누구도 헌금을 하지 않는 그런 교회라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 뿐인 예루살렘 성전 자체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예배가 멈춰지면, 은혜를 모르고, 헌금을 하지 않게 됩니다. 레위인과 제사장 제도는 유지되지 않죠. 그들은 성전을 떠나고 성전은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남유다 전체가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악순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순간에도 “교회가 어려우니 헌금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특히 그 어려움이 작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헌금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저는 저희 교회의 생명력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헌금이 무엇인지, 어떠한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지, 본문이 오늘처럼 가르친다면 이것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목사의 책임은 시시때때로 해왔지만, 교회가 아무리 어려워도 헌금을 구걸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저 저는 히스기야처럼,
저와 저희 가정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모습으로 서고자 할 것입니다. 저는 저의 자리에서 저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에서 부디 깨어있고 살아있으십시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희의 지난 시간들과 앞으로의 시간들을 바라봅니다. 어느덧 저희가 창립 3주년이 다 되어 갑니다. 창립 전 준비한 시간까지 따지면 사귐의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한 것이 거의 4년이 되어갑니다. 아직도 온전하게 자립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정말 감사하게도 생존을 걱정하는 수준은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를 어떤 모습으로 가꾸어 가실까?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교인이 10명 정도 되었을 때부터 저는 하나님께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몇 명이 모이던지 주님을 기뻐하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를 10명으로 계속 묶어두셔도 저는 기쁘게, 열심히 저의 자리에서 일하면서 평생 최선을 다해서 목회하겠습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커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본 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이 교회를 통해서 일하는 모든 방식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정말 제가 생각한 것보다 커져서 제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하나님이 나누라고 하시면 나누면 되고요. 그러므로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전은 있습니다. 그 비전은 히스기야가 그러했듯이 북이스라엘 사람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서 멀어져버린 오늘날의 가나안 성도들에게 희망이 되고, 그들을 다시 돌아올 때 품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우리에게 나눌 것이 있으면 희년정신으로 나누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마음껏 하나님의 일을 하시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직 우리교회의 자립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예배하며, 자원함으로 헌신하고, 그것을 주님 뜻대로 나누며, 주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교회가 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예배를, 이 연합을, 이 삶을 부디 기억하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태초부터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창조의 목적을 찾아 바른 길에 서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주님의 공동체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평생을 예배하고 싶습니다. 저는 먼저 제 스스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다짐합니다. 만약 여러분도 다짐하셨다면 우리는 평생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로 주님이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노래하며 증거하며 끝날까지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