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분별" / 강정규 목사

2024-07-14 · 예레미야 26~2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성도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할 때, ‘창세기’ 이야기를 나누면 가장 신나서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담긴 ‘복음서’도 조금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구약의 역사서 부분부터는 인물 중심으로 잘 아는 편입니다. 삼손 이야기, 사무엘 이야기,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 그런데 딱 여기까지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다스렸던 하나의 나라까지는 익숙하게 듣고, 그 이후 분열왕국 시대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생소한 이야기가 됩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책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분열왕국 이후는 평생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 39권 가운데 무려 22권이 분열왕국 시대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22권 가운데 17권이 예언서라고 부르는 책이죠. 예언서라고 하면 벌써 어렵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어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말씀에서 길을 찾고, 성경 66권이 모두 소중하다고 정말 믿는다면 이 부분을 포기할 수 없죠. 구약의 예언서는 한번 맛을

알아버리면 끊기 힘든 소중한 보물 같은 책입니다. 17권의 예언서 중에서도 가장 긴 분량의 예언이 담긴 것이 예레미야입니다. 성경의 처음에는 장과 절이 없었기에 순수 글자 분량이 예레미야가 가장 길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멸망을 허락하셨을 때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승승장구하고 복을 받는 이야기를 관심 있게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더 유심히 봐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담임목회를 7년 반 정도 하면서 정말 크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은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예배에 얼마나 집중하느냐, 특별히 말씀에 얼마나 집중하느냐의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누군가는 앉는 훈련에서 말씀을 새기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말씀이 들리기 시작해야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변화가 나옵니다. 신앙에는 나름의 방법을 찾는 시도가 필요해요. 저도 기도를 목소리로 부르짖어서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글로 씁니다. 오히려 집중이 잘 안되거나 깊이 있게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할 때 도움이 되거든요. 말씀의 시간에 졸음이 오면 허리를 떼시고, 그래도 안 되면 일어서서 들으셔도 됩니다. 저도 청년 시절에 쓰던 성경의 지퍼에 옷핀을 꽂아놨어요. 졸리면

그냥 조는 것이 아니라 손을 찌르면서 들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야 우리가 성장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한 번의 설교에서 다 이해 못 하면, 복습하면서 그 이해를 완성해 갑니다. 감사한 일이죠. 저는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고, 설교에 대해 청중으로서의 열정이 없는 분이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1. 점검 예레미야는 ‘예언자’ 혹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요? 예언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비’는 ‘지명하다’, ‘부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뭐 하라고 불렀을까요? 예언하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오해하곤 합니다. * 흔히 생각하는 예언 = 豫言 미리

예 / 말씀 언 → 미래의 것을 예측하여 말하는 것 * 성경이 뜻하는 예언 = 預言 맡길 예 / 말씀 언 → 하나님이 맡기신 말을 하는 것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지명하여 부르신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 설교자의 사명에 가깝습니다. 구약에서는 음성으로 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이 시대에는 글자로 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죠. 그것이 현재적 메시지이든, 미래적 메시지이든, 과거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것이든, 그것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예언자와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잠시 예레미야의 배경과 전반부 메시지를 정리해보면,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각기 다스리는 2개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분열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중 다윗의 후손이 왕으로 다스리는 곳이 남유다이고,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가 북이스라엘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약 200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19명의 왕 중에서 단 한 명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이 없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백성이죠. 시내산에서 맺은 첫 언약(구약)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분열왕국 시대의 북왕국은 늘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정세, 주변 강대국의 힘에 의존했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태도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예수님에 의해 새 언약(신약)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죠. 새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혹시 내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순간이 있을 때,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죄송함도 느끼고, 스스로의 삶을 더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자의 특징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하면,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그분께 배우고 따라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내가 주인 되어 살지 못하기에 불편해지거든요. 그래서 그전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경우도 많아요. 쉽게 말해서 내 마음에 모시긴 모셨는데,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서 살아가요. 그때 성령님 그런 우리를 보면서 슬퍼하시죠. 이것은 서운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참된 진리를 모르고 옛사람의 삶에 머물러 사는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우신 것이죠. 만약 계속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면 성령은 소멸한

것처럼 우리와 단절됩니다. 깨어지는 것이죠. 북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갑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차이는 북쪽은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온전했던 적이 없었고, 남쪽은 그래도 중간중간 진짜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두 나라는 자신들의 힘으로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로 인해 생존하고 있는 왕조입니다. 북왕국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자 주변 강대국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남왕국은 하나님을 의지한 왕들이 있어서 조금 더 왕권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유다 왕 노래)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시기는 마지막으로 남왕국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던 때였습니다. 요시야 왕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고, 왕이 바로 서니 나라 전체가 종교개혁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요시야 이후부터 4명의 왕은 하나님이 없는 모습이 돌아갑니다. 요시야부터 그 마지막까지의 시기가 예레미야의

활동시기였습니다. 이 시대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뭐였는지 아십니까? 정작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신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늘 이런 마음이었어요. “내가 뭘 하든 하나님은 날 사랑하셔~” 성경에 내가 뭘 하든 사랑하신다는 구절을 한번 찾아보세요. 없을걸요. 내가 뭘 하든 사랑한다는 생각은 ‘자기복음’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하면 사랑하시겠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예배는 이 시간에 와서 잠시 이렇게 있는 시간이 아니에요.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럼 사랑하시죠.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이렇게 모인 것으로 나는 의무를 다했다고 느끼면 예배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유다 백성들도 그런 방식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러면서 삶에서는 우상도 예배했어요. 그 시대의 대표적 우상은 농경사회의 ‘풍요’와 관련된 신이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죠. 돈을 좋아하고 돈을 따라가고 그것이 내

삶을 결정하는 상태에 놓여 있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돈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면 돈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도 회심 이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고, 회심했어도 어느 순간까지는 적지 않은 흔들림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진리 안에 서지 못하고 갈등하며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백성들을 고쳐주고 싶으셨어요. 그래서 예언자들을 보내서 그런 모습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돈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기고. 이것저것 필요하고 도움이 되면 다 붙들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어요. 성경에서 이것을 ‘외도’라고 해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마음은 다른 데 있어요. 그런데 몸은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린 할 것 다 했어’라고 생각하며, 문제없다고 말하며 살아갔습니다. 합리화죠.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아니, 실제로 하나님은 좀 바보 같으세요. 우리는

그런 꼴을 보면 바로 끝장을 낼 텐데, 이분은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시며, 설득하시거든요. 그런데 계속 묵인하시지는 않으세요. 왜냐면 묵인하면 우리가 망가지니까요. 사경회 때 ‘사우나 영성’에 대해서 말했죠. 6일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요. 그런데 하루 와서 하나님 앞에 2시간 정도 머물러요. 6일 동안 자기가 살아온 모습을 스스로 생각해보니 사실상 엉망인데, 나 같은 죄인도 받아주셨다며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여기서 막 찬양해요. 그렇게 사우나로 확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6일을 죄지으러 떠납니다. 일주일 뒤에 또 올 거니까. 마음 편하게 죄짓고 살면서 때를 불려서 오는 것이죠. 이게 신앙생활인가? 이거 신앙생활 아닙니다. 이렇게 신앙이 끝나면 큰일 납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도 겉으로는 구분이 잘 안 됩니다. 오히려 사우나 영성이 더 주일에 보면 은혜를 많이 느끼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이것은 누가 구분해줄 수도 없어요. 스스로 잘 점검해야 해요.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자신에게는 또 지나치게 관대해요.

그런데 이 문제만큼은 스스로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안 속아요. 진짜와 가짜를 아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 다르게 반응하세요. 그런데 거기 잘 보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배란 ‘우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드려져야 진짜 예배입니다. 가인의 제물이 문제가 아니고, 가인의 마음이 문제였기에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이죠. 하나님은 아시거든요.

여러분의 6일을 아세요. 6일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 되어 살다가, 여기 왔을 때만 하나님이 나의 왕이고 주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어요. 분열왕국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괴로워하십니다. 그 위선에 치를 떠십니다. (사 1: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사 1: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사 1: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사 1: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사 1: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하나님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아가고, 우상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형식뿐인 예배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거룩한 집회를 열고, 팔을 벌리고 기도하더라도, 아무리 많이 기도하더라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았으면서 예배에만 와서 그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기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2시간 예배드려주는 것 기뻐하지 않으세요. 그때만 와서 열심히 종교활동 하는 것은 샤머니즘이에요. 신께 내가 지극정성으로 빌어서 신을 달래주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만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고 계세요. 참된 예배자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 모습일까요?

한 주간 말씀을 듣고, 새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힘쓴 여러분을 안아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따르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 수고, 그 눈물을 아시거든요. 그래서 예배는 그분의 품에 안겨 거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고 다시 삶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오랜 임상 끝에 이제 좋아하게 된 단어는 ‘부담’이라는

단어입니다. “목사님, 설교가 저를 너무 힘들게 해요. 부담스럽게 해요.” 물론 여러 의미가 있겠으나, 대체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부담이 설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려고 다짐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담이라면, 그 부담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를 바르게 들으면 내 삶을 바꿔야 할 여러 부분을 발견하거든요. 부담이 있죠. 그러나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가 삶으로 옮기는 과정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삶으로 열매 맺는 것은 성령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니까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말씀대로 내가 그분께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진심으로 요청하고, 그렇게 나에게 오신 그분 앞에 내가 종이 되어 그분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그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점점 변화되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도, 결단도, 노력도

없이 뻔뻔하게 예배로 모든 것을 때우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꾸짖으며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왜 꾸짖고 가르치실까요? 사랑하셔서죠.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바꾸지 않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 돌같이 굳은 마음이 그들의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은 변하지 않고,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예배를 수없이 하면서도요. 그래서 결국 그들은 멸망합니다. 특별히 남왕국이 이런 신앙의 큰 위기 앞에서도 잘 분별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신앙관 때문입니다. 참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성전’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면피 수단이 됩니다. 그들에게 ‘다윗의 후손’들이 왕으로 있다는 것도 그랬어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있고 그곳에 가서 예배하면 “나는 하나님과 괜찮은 관계야” 생각하기 쉬웠거든요. 다윗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야”라고 쉽게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분명 성전도 그들에게 있는 축복이고, 다윗의 왕조도 축복이죠. 그런데 그것이 진실하지

않은 신앙을 포장하는 도구가 되면, 그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유다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예배하는 이 건물에 하나님은 이미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이라고 와서 예배하지만, 그 형식뿐인 예배에 지쳐서 하나님이 이미 이곳을 떠나셨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사니까 괜찮겠지. 나는 이런 사역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사귐의교회 등록 성도니까 괜찮겠지.” 하나님 안에서 교회의 가족이 되고, 사역하고, 목사로 부름을 받고. 다 귀한 일이죠. 그런데 그것 자체가 우리의 신앙은 아닙니다. 울타리이고 도구일 뿐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보세요. 아니 하다못해 우리끼리도 서로 어떤 행동이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티가 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모르겠냐고요. 좋은 신앙인은

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신앙인은 늘 성찰하고 점검해야 해요. 진리 안에 꼭 붙어 있으려면, 하나님의 진리와 내 생각 사이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멀어지지 않았나? 그래서 바울은 늘 자신이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점검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하여 안심하지 않았어요. 복음을 전하면서도 혹시 자기가 진리에서 멀어져서 하나님과 멀어질까 봐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힘썼습니다. 여러분,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점검하십시오.

아모스 선지자는 다림줄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다림줄은 건축에서 벽돌을 수직으로 쌓기 위해 측량하는 도구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의 기준 앞에서 어긋난 부분이 있으면 고치고, 내 뜻보다는 주의 뜻을 좇아가기 위해 힘쓰며 점검하여 내 삶을 하나님 앞에 세워간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 기뻐하시고 찾고 계시기에,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큰 기쁨과 자랑이 될 것입니다. 2. 분별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안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중요한 이슈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후반부의 시작인 26~29장은 이 이슈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이 시기는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의 일입니다. 이들은 지금 바벨론의 공격으로 나라가 넘어갈 위기 앞에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잘 봐주십시오. (렘 28:2)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렸다. (렘

28:3)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 간 주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친히 이 년 안에 이 곳으로 다시 가져 오겠다. (렘 28:4)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바빌로니아로 잡혀 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이 말씀은 유다를 멸망시키는 바빌론에 대한 승리를 선포합니다. 그래서 바빌론이 유다에서 뺏어간 성전 기구도

다시 가져오고, 곧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셔서 모든 포로가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죠. 그런데 이 말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읽은 이 말씀은 예레미야를 반대하던 ‘거짓 선지자’의 ‘거짓 예언’입니다.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반발하며 자신의 예언을 말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위 말씀에 혹시 ‘아멘’ 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어렵죠? 맞아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받고 상징적 행위를 합니다. 일종의 하나님 뜻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멍에를 목에 매고 유다 왕 시드기야 에게 가서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바벨론 왕의 멍에를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일입니다. (렘 27:12) 나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도 이와 똑같은 말을 전하였다. 여러분들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겨서 살아 남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당시의 거짓 예언자들은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있었어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야기가 훨씬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였기에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좋아했어요. 성경에서 나에게 힘이 되는 말씀만 붙들고 나를 괴롭게 하는 말씀은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구인 것처럼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거짓 예언을 붙드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면,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렘 27:14)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예언은 거짓입니다. (렘 27:15)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은 거짓으로 내 이름을 팔아 예언한다. 너희가 그 말을 들으면, 내가 너희를 쫓아낼 것이며, 너희는 그러한 예언자들과 함께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셨습니다. (렘 27:16) 그리고 나는 제사장들과 이 모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주의 성전의 기구들이 이제 곧 바빌로니아에서 되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너희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예언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70년의 시간은 포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 상황에서 유다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항복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읽었던 말씀처럼, 거짓 예언자 하나냐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며 거짓된 예언을 말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더 듣기 좋은 이야기였고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긍정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에 좋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한국에 엄청난 히트한 거짓된 책이 있었죠. <긍정의 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신다는 말도 안 되고 신앙에도 어긋나는 이야기를 엄청 유명한 목사가 했고, 잔뜩 퍼졌고, 성공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열광했죠. 성공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을 부추기고 응원하는 메시지로 도배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하나냐의

예언을 듣고 훨씬 더 기뻐합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들은 왕에게도 인정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습니다. 반면 참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그가 전해야 하는 이야기는 왕과 백성이 모두 싫어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해야 했습니다. 왜요? 그에게 말씀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니까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 사역 때문에 미움도 받고 고초도 당합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보고 가짜라고 말합니다. 억울하죠. 답답하죠. 하나님은 성경에서 시종일관 말씀하시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돌보고 계신다. 인간의 역사도 주관하신다.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도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앗수르 제국은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회초리로 사용하셨다고 말하고, 지금 떠오르고 있는 신흥 강대국 바벨론 제국을 남유다를 향한 심판의 회초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유다에게 다가오는 국가의 멸망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남유다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하나님이 이 일은 해결을 못해주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시나?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에 대한 점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침공이 있을 때면 하나님을 의지해 왔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보호해주셨어요.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 유다가 잘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유다를 깨어진

세상 속에 내버려 두십니다. 그 약육강식의 세상 앞에 내버려 두십니다. 그래서 강대국의 욕심이 그들을 짓밟습니다. 그전까지 예언자들은 백성을 대표해서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제 이 심판에 대해서는 중보기도도 금지합니다. 이 상황만큼은 이제 예레미야가 이 일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제 이들의 모습은 심판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그래야만 돌이킬 수 있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모든 사실을 말씀해주시고, 이 심판의 상황에서 남유다가 해야 할 최선의 모습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깨닫고,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그들을 새출발시키기 위한 과정이며, 이제 이 일은 기도한다고 하여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항복하고 포로기를 거쳐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왕과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당시 남왕국의 분위기는 일단 바벨론보다는 오랫동안 의지했던 애굽에 붙겠다는 정치적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왕과 지도자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었죠. 예레미야는 그런 국가적 입장에서 보자면 매국노 같은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예레미야는 매국노 취급을 받고, 왕과 국민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누구예요?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시종일관 왕과 백성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지지하는 발언으로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줍니다.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시온 신학, 성전 신학을 뒷받침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 시대의 메시지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죄와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가장 근본적인 죄의 모습이 거기 나오죠.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반역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법과 질서 아래 있기보다 선악의 열매를 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그 본성을 부추깁니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죄의 원리는 늘 같습니다. 세상도 우리에게 날마다 말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며, 이 시대에 맞는 생존방식은 스스로

주권을 갖고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요. 에덴에서의 유혹과 우리에게 이 시대가 하는 유혹이 같습니다. 남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고, 자기들의 뜻과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셨습니다. 누군가는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니까 심판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심판합니다. 저는 저의 자녀들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습니다.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엄히 다룹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 있는데도 평안하다면, 그것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딱 하나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거나, 혹은 당신이 영적으로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라서 아직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준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서 심판받고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서 포로로 가게 됩니다. 이 심판은 이스라엘이 자정작용으로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회복으로 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은

끝까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좋아하시는 분이다’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니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고, 오직 우리는 사랑과 축복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죽음을 통과하고 회복되어 맞이할 참된 구원에 대해서 말합니다. 나라의 죽음은 국가의 멸망이죠. 이것은 십자가와도 연결되죠. 십자가는 죄를 봐준 것이 아닙니다. 죄의 대가를 위해 가장 고귀한 생명으로

값을 치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정의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이 말씀들을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힘든 세상에서 살면서 받은 괴로움을 위로해 주길 원해요. 그러나 혹시 혹시 그 위로가 내가 주인 되어 살고 있어도, 내가 내 욕심대로 살고 있어도, 내가 하나님께는 관심도 없이 세상 사람처럼 살고 있어도 당장

나에게 힘이 필요하기에 ‘괜찮다’, ‘안전하다’ 말해주는 그런 위로는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위로가 내게 중요해지면, 사실 그런 위로는 교회보다 세상의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위로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저는 가끔 어떤 설교들을 청중으로 들을 때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의 삶에서 축복하고 잘되라고 빌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워하실 수도 있고, 화도 내십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큰 유혹은 ‘사람들의 인기’ 입니다. 사실 제가 비교적 용감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이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개척한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목회자의 환경 가운데 그래도 조금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시절에는 성경을 가감 없이 전했는데도 선배 목사님이나 성도들에게 부정적 피드백이 쏟아지면,

굉장히 많이 흔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종종 저와 같은 설교자에게도 용기가 필요하죠. 예레미야의 시대는 더욱 그랬고요. 그래서 예레미야도 몇 번이나 예언자 탈퇴 선언을 합니다. 그래도 또다시 돌아와 그 사명을 감당했어요. 여러분, 설교의 홍수 시대입니다.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거짓된 가르침도 난무합니다. 안타깝지만 사람들의 기준에 맞춘 설교들이 너무 많아요. 조회수와 인기에 속지 말아야 할 때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면 은혜롭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참된 설교가 아닙니다. 그런 설교가 ‘진짜 힘’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도들이 잘 되기를, 성공하기를 빌어주는 것이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무엇이 성공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까? 그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일 수 있으나, 그것이 정말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고 응원해야 할 성공입니까? 하는 일이 다 잘돼서 더 바빠져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다가 하나님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는 삶입니다. 포퓰리즘에 빠진 설교, 포퓰리즘에 빠진 목회, 포퓰리즘에 빠진 교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수없이 드려도, 여전히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여기서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하며 주일과 평일을 각기 가치관을 바꿔서 살고 있다면,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한 번쯤은 과감히 끊어야 해요. 그 반복을 끊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도전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 ‘세상의 방식과 태도’나 사람들의 ‘추구와 방법’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미움받을 수 있어요. 사랑은 상처받을 용기를 내는 것이라면, 신앙은 미움을 견뎌낼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진리라면 그렇게 해야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시고, 진리에 거하십시오. 진리를 살아내십시오. 거짓된 것들에 지지 마십시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 29장

말씀의 한 부분입니다. “너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이른바 설교자와 박사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라. 듣기 좋으라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지 마라. 모두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들은 거짓 설교를 일삼는 사기꾼 집단이다. 내가 자기들을 보냈다고 우기다만, 나는 그들을 보낸 적이 없다. 전혀 근거 없는 소리다.” 비진리가 넘쳐나는 그 시대에 예레미야의 외침입니다. 어쩌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지만, 외면하지만 진리를 고요히 외치는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홍수가 나면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이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따라갈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도나도 지혜라고 말하는 이런 주장, 저런 주장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삶을 정말 행복하게 살려면 이것 해야 해, 저것 해야 해. 서점에도 온라인에도 휴대폰만 켜도 아우성입니다. 사람들이 들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소리를 들어서 길을 잃고 있습니다. 진리에 뿌리 박아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진리에 내 시선을 고정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를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계시해 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며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