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생명이 자라가는 교회” / 강정규 목사

2024-07-19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금요기도회) "생명이 자라가는 교회" _ 우리가 꿈꾸는 교회.2 (2024.07.19) _ 강정규 목사 _ 양주 옥정 사귐의교회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 대한 두 번째 설교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나 비전에 대해서 나누는 설교를 ‘교회론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교회론’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해’, ‘이것이 교회야’ 같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모든 교회론이 올바른 교회론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공동체 안에 같은

교회론에 대한 이해와 비전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공동체는 정말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늘 말씀드리지만, 세상의 다른 조직이나 교회로부터 길을 찾는 교회론을 거부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는 성경에서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교회론은 자연스럽게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 성경이 꿈꾸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진짜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으며 정말

그렇게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 그러한 삶과 그러한 공동체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의미에서 교회론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사실 단순한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이 믿음 하나로 개척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붙들고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쉽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어렵지만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삶에는 힘이 있으며, 그러한 태도를 가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하나님께서 지키고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건 그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이봐, 해봤어?’였다고 하죠. 이 말뜻은 ‘안 해보고 멋대로 결정하지 말라’는 의미이죠. 해보고 나서 무리니,

뭐니, 말을 하라는 것이죠. 만약 누군가가 정말 힘을 다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보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 진실한 고민에 대해서는 함께 고민하며, 방법을 어떻게 달리하여 따라갈 것인가 고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의 가르침이 부담되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회피하려는 핑계라면 ‘일단 해보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선은

알아야 꿈을 꾸고, 알아야 도전하니까요. 지난 설교에서는 성경이 꿈꾸는 교회의 모습으로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이야기로 ‘생명이 자라가는 교회’입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배웁니다. 사실 성공의 경험보다 실패의 경험이 우리를 더욱 성장시킬 때가 많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2001년에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했고, 2007년에는 모교회에서 우리로 보면 ‘사역 간사’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부터 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재주’가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곤 하죠. 저의 재주는 무엇이었냐면, ‘사람’을 잘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 하기 전부터 언제나 제가 잘하던 것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사람에 대한 열정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주변에는 사람이 잘 모였습니다. 전도사로서 제가 사역을 했을 때도 그런 저의 장점이 잘 발휘되었습니다. 15~20명 정도 모이는 청소년부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저

빼고 교사는 한 명이 있었습니다. 작은 공동체였지만, 청소년부 아이들을 마음에 품고 열심히 이것저것 하다 보니, 1년이 지날 무렵에는 30명이 넘게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작은 교육관에서 예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늘어나서, 결국 본당으로 옮겨서 청소년부 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 성장이 정체되고 있었던 모교회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죠. 사역하던 저도 신이 났고, 어른들도 신이 났습니다. 담임목사셨던 저희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다가

청소년부가 40명을 돌파하게 되자, 교회에서 저의 주가도 치솟았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변화가 가장 먼저 드러나기에, 외적인 변화가 나타나면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순간에 능력 있는 사역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모교회는 자체적으로 신학생이 제법 많이 배출되고 있었어요. 신학교에 들어가면 보통 모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제가 청소년부 사역을 하는 시점에도 교회 동생 한 명이 신학을 시작하게 되었고, 제 옆에서 청소년부의 간사로

함께 동역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정식 전도사로 임명받게 될 시기가 되었습니다. 어떤 부서에서 전도사 사역을 시작할까 논의하다가, 그래도 계속 함께 해왔던 청소년 사역을 맡기로 했습니다. 저도 나름 그 친구를 위한 배려로 청소년 사역을 제가 마무리하고 다른 사역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죠. 그래서 저는 청소년부 사역 2년 후 청년부를 맡아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역자가 다시 재배치되었고, 새해가 시작되었죠. 그리고 3달이 지나기도 전에 청소년부에서 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서 재미없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전도사님이 다시 해주시면 안 돼요?’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교회에서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되기도 전에 청소년부는 20명도 모이기 어려운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가득 채우던 아이들은 거짓말처럼 반년도 안 되어 싹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어요. 저도 같은 교회 안에 있었지만, 저도

제가 맡은 부서의 사역에 올인하고 있었고, 옆에서 조언과 격려 정도는 했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죠. 결국 그 동생은 심한 자괴감에도 빠지고, 목회자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아예 전도사 사역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사역의 길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던 해까지 저는 모교회에서 사역을 했고, 그다음 해에는 다른 교회로 전도사 사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교회 교육부서의 마지막 전성기였어요. 그래서 제가

가끔 모교회에 방문하면, 모두가 입을 모아서 ‘제가 있을 때가 좋았다, 그때가 전성기였다’ 말을 합니다. 청년부도 제가 있을 때가 활발하게 사역하고 사람도 많았던 때라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교회 분들이 저에 대해서 좋은 평가나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은 우선 그분들이 저를 아들처럼 아껴주셨고, 그 외에도 이런 여러 배경도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상황이 객관적인 요소라면, 이 일에 대한 저의 주관적인

생각을 지금부터 말씀드려 볼 것입니다. 우선 저도 맨 처음에는 제가 사역을 잘했고, 좋은 상황을 만들어서 동생에게 넘겨줬으니, ‘나는 책임을 다했다’, ‘나는 좋은 밭을 물려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제가 사역을 맡으면 대체로 그곳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기에, 저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에 대한 좋은 평가가 있었던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저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터질지 몰랐지만

말입니다. 제가 느끼는 약함이 진짜 문제가 된다고 느끼게 된 일이었어요. 모교회의 사역에서 ‘사람을 모으는 방법’은 이미 그전부터 제가 삶에서 배웠던 노하우와 열정으로 가능했지만,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정말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저는 잘 몰랐습니다. 어느 누구도 잘 가르쳐주지 않았고, 딱 거기까지만 저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사람을 잘 모아서 외적으로 성장하면 그것이 ‘사역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모으고 관리하는 것은 저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오히려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이상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사역자 대부분이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환경이나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숫자’로 많은 것이 평가되곤 했어요. 그 안에서 우리도 어느새 그 기준과 그 가치관에 맞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아남기 위해 힘쓰곤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도사로 사역하는 신학교 동기들끼리는 전도사 사역이

마치 ‘보험회사 직원’인 것 같다며, 뭔가 늘 숫자로 실적을 내야 하는 우리의 포지션과 역할을 비관하면서도, 정작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숫자가 곧 성공이라는 잘못된 가치관 안에 타협하며 사역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사역하면 할수록, 처음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교회 조직의 숫자 관리의 노예가 되어가는 사역자가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제가 힘들지만, 인턴십 과정을 열었던 이유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후배

신학생들이 ‘교회’가 정말 무엇인지를 꿈꿔보지도 못한 채, 잘못된 교회론과 가치관 안에 매몰되어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때때로는 세상보다 못한 교회 속에서 부품처럼 소모되다가 사역을 떠나고, 심지어 신앙까지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 스스로가 가진 혼란과 오해의 시간 때문에, 저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적어도 교회가 그런 것이 아니고 목회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턴십 과정을 열었던 것입니다. 목회를 밥벌이로 할 사람은

여전히 다른 것에 집중하겠지만, 진짜 본질을 찾고 싶은 사람에게 그래도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저의 첫 번째 사역 경험. 그때도 저는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사람이라도 모인 것이겠죠. 사람이 모였으니 사람들은 제가 성공적인 사역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그 동생은 그것을 유지하지도 못했으니 실패했다고 본인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숫자가 늘어가던 그때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그 시절의 저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면,

2년의 시간 동안 2배가 넘도록 수적인 증가를 일어났고, 이제 때가 되어 후배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명분으로 청소년부를 떠났지만, 사실 저는 한편으로는 그 부서를 떠나게 되었을 때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더 이상 그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온갖 개인기와 열정을 다해서 사람은 점점 늘어가는데, 그것이 곧 저의 한계치에 가까워졌고, 그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저에게 그저 부담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분을 위한 사역을 하고 싶은데, 아예 길을 몰랐던 상황이었습니다. 알아야 행할 텐데, 그 이상을 정말 몰랐어요.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그럴 수 있어요. 그래서 점검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저의 사역의 방식은 시작부터 애초에 단추를 잘못 꼈던 것입니다. 제가 추구한 것은 재미있는 교회였는데, 이것을 더 크고 중요한 비전을 위한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은 것처럼 아이들을 이끌었기에, 그곳에

모인 아이들은 정말로 그저 교회가 재미있어서 모여있는 상태, 또 제가 좋아서 모여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늘 그렇듯, 목숨 걸고 열심히 했으니 아이들은 반응하고 모여들었는데, 그 아이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저였죠. 저의 아이들일 뿐이지,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지는 못하고 있었죠. 그 아이들에게 영적인 기초가 약하다는 불안함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막연하게 ‘잘될 거야’ 여겼지만, 제가 보았던 염려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저보다 더 아이들을 다루는 경험조차 적은 초보 사역자가 그 아이들을 맡았을 때, 영적인 기초가 없던 그들은 정말 순식간에 와해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재미로만 따지면 교회 밖이 훨씬 재밌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수적 부흥이 ‘거품’임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습니다. 사상누각.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위기를 만나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 공동체는 힘이 없습니다. 외적인 성장이 도드라질 뿐, 더 잘 점검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성장이라도 일단 해보고 고민하자’며 달려갑니다. 여전히 세상의 평가, 사람들의 시선은 수적 부흥이 ‘능력과 성공’으로 통하고 있기에, 그런 유혹이 목회자들에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첫 사역에서 제가 경험한 것은 적어도 제게는 그 이후 제가 꿈꾸는 목회를 완전히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결국 사람이고, 사람과의 만남을 갖는 것도 중요하죠. 그렇게 보면 절반은 잘했으나, 더 중요한 그 이후의 절반을 채우지 못했을 때 교회는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얻은 깨달음은 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변화시켜 가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크기’가 아니라 ‘변화’가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서비스 업종들은 그저 고객을 잘 모으고 떠나가지 않게 관리하면 됩니다. 그럼 유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빨리 알아차리고 거기에 대응해서 고객만족을 안겨주면

사람들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재미가 있어야 교회에 온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전과 달리 파격적으로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올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대책과 대안이 없이 이것에만 집중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요구는 더 많아지고, 사람들은 늘 그다음 것을 원하는데, 더 이상 그런 부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제 안에 고민이 있었던 것이었죠. 그러므로 그다음 사역지에서 ‘사람의 영적 변화와 성장’을 돕기 위해 시도했던

것이 영적 단계별 훈련이었습니다. 청년부 수련회는 최대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은 시간으로 기획했습니다. 저는 매년 청년 수련회를 두 개씩 기획했는데, 모두가 참석하는 수련회와 ‘말씀 묵상 여행’이라고 해서 수련회를 참석한 후, 조금 더 깊은 하나님 안에서 훈련받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수련회를 한 번 더 갔습니다. 이것은 4박 5일로, 회비도 더 비싸고, 거리도 더 멀리 말입니다. 프로그램도 단순합니다. 4박 5일 동안 함께 밥 해 먹으며 성경 읽고

나누고 배우는 수련회였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제가 늘 강조하듯,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하고,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그때부터 영적 아이와 영적 청년을 따로 훈련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세워가는 일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제가 2014년 쯤 청년부에서 했던 설교원고의 일부분을 그대로 읽어볼게요. “제가 발견한 제자 공동체의 핵심은 ‘변화의 전염’입니다. 목회자가 변하고 그의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는 리더들이

변하고, 그 변화를 보며 함께 변해가는 것입니다. 변화는 더딜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제자가 된 사람들은 빛나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며 서로가 도전받고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경쟁이 아니라 함께 도와가며 끌어주고 밀어주는 것입니다. 변화는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강정규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지도록 돕고 싶고, 재미와 유익을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제자가 되어서 핍박과 고난과 희생이 있다고 해도 즐거이 모일 수 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 한 몸이 되는 제자 공동체를 세우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만약 이 작은 사람이 쓰일 수 있다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사라지도록, 녹슬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도록 사용되고 싶습니다.” 느끼시겠지만, 10년 전 했던 설교와 지금 제가 하는 설교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하나복 사역을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의 방향, 목회의 방향이랑 너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에서 바라보는 목회를 고민하고 그려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만나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스승이 같고, 교과서가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델도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 ‘영혼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가 수적으로 부흥하는 것도 은혜임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혼들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믿고 맡길만한 곳에 더 보내주실 수도 있죠. 그런데 늘 세상의 기준에서 좋은 것이 우리에게 경험될 때는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승진을 잘하고, 소위 잘나가고, 잘 풀리고, 돈도 잘 벌고, 승승장구하고 있으면 그것이 내 신앙에는 사실 가장 큰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그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다른 것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붙드는 것에 마음을 쏟고 있다면 위기가 될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개척과 동시에 일을 하면서 목회를 시작했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이루는 것조차 시작할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일에는 사람들을 돌보며 제가 꿈꾸는 목회의 본질을 늘 기억하고 되새겨야 했습니다. 가끔은 삶이 너무 지치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거든요. 그래도 제가 생각한 목회의 본질은 ‘양’이 아니라 ‘질’이었습니다. 나는 ‘양’을 늘리는 것에 헌신하기보다 ‘질’을 높이는 것에 헌신하겠다. 그것을 위해서

제 삶을 사용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비전의 사람>이라는 책에 나오는 ‘나가노 목사님’ 이야기를 종종 되새겼어요. 그분은 평생 한 명의 성도를 목회했는데, 그 한 사람의 변화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었거든요. 사귐의교회 첫 설교에서도 제가 이분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정말 변화된다면,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저는 믿었어요.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변화된 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안타깝지만, 저도 예전에 그랬고, 그 뒤로도 제가 듣고 보는 한국교회의 모습 가운데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숫자’에 기뻐하고, 그냥 사람들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것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이 무엇인지나 아는지,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고 있어도, 주일에 와서 최소한의 종교적 행위를 하면서 신앙적 양심을 유지만 하고 있어도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꿔야 하는 교회는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가는 교회입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생명이 태어나도록 해야 하고, 그 영혼이 성장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살아가기까지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의 삶에 대한 짧은 구절이죠. 육체적인 성장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두 더욱 깊어졌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망에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듯이 우리가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자랍니다. 자라가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신자의 삶은 늘 생명을 얻은 뒤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교회의 사역에 대해서도 바울이 복음을 심었다면, 아볼로가 섬겨서 더 성장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자라났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는 것,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므로, 성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제는 이 정도 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양육을 받고 목양을 받았으면, 이제 성장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누군가를 도와야 할 텐데, 여전히 젖먹이처럼 자기 자신의 신앙도 혼자서 지켜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책망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자라지 않는

것은 우리의 부모이신 하나님의 근심이고 아픔입니다. 교회의 수적인 성장은 늘 말씀드리다시피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저는 달란트 비유처럼 주인이 그냥 맡겨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수적인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몇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을 따라서 성숙해가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구원 or 심판’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프레임입니다. 구원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하나님에 대한 주되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 안에 있으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 교회 안에 있으면서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쫓아 살아가고 있거나,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주일학교 수준으로 평생을 머물러 있는 신앙인입니다. 주일설교에서도 말했듯 ‘하나님은 날 사랑하셔.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날 사랑하셔.’ 이 마음도 필요하고 중요해요. 그러나 이것은 아기가

부모에 대한 갖는 원초적인 마음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커도 부모가 나를 위해 모진 말도 하는 것도 듣고, 깨우치고, 그러다가 더 장성하면 도리어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드리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라나면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려 드리고, 하나님의 꿈도 이어받아서 이제는 내 아버지의 일에 나도 동참하여 함께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에만 만족합니다. 그러나 평생 아기로 지내는 사람을 어떤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이제 자라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며, 함께 그 뜻을 이루어갈 때,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충만은 무엇입니까? 비어있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채워지는 것이죠. 그럼, 충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국어적으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누군가는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말씀에서 말하는 ‘충만’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것이라면 반대로 나로 충만한 것이 욕망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우선 욕망을 비어내야 하죠. 나의 주인 됨을 내려놔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는 공허한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탄생도 그렇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떠나 살던 우리가 단순히

영적으로 탄생만 하였다면 그것은 비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일생도 성장의 과정이 있는데, 갓난아기로 멈추어 있는 것을 누가 ‘충만’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올 때는 욕망 가운데 올 수 있습니다. 우선 와서 이 예배에 참여하여 진리를 맛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안에 부딪힘도 있겠죠. 내 욕망과 부딪히고 가치관과 부딪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참된 복음 안에서 진리로 붙들고 그 진리에 대해 결단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회심했다고 한순간에 사람이 변하나요? 회심은 이제 다른 것이 아닌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만약 그 결단이 진심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서 살아갈 것이고, 따라 살다 보면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에 구경꾼으로 왔던 사람이 교인이 되고, 교인인 사람이 진짜 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무엇보다 이곳에서 예배하는 여러분의 삶도 지금 변해가고 자라가고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변해가고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따라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함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의 삶은 그런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가는 것.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이 평생을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의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